우이동 북한산 국립공원 백운대탐방지원센터 들머리에 선다.
서울의 허파는 어느새 연둣빛 이파리들이 녹색 신록으로 건너가고 있다. 며칠 사이에 나무이파리가 부쩍 컸다. 열흘 전 백운봉을 오르다가 백운대피소에서 부득이 하산하게 됐다. 탐방지원센터에 얌전하게 차를 주차해 두었으나, 양사방에서 차 빼라는 강력한 항의 전화가 빗발쳐서 산행을 포기하고, 다시 산문에 선 것이다. 오늘 산행은 백운봉 탐방지원센터에서 하루재를 지나 백운대피소를 거쳐 암문(위문)을 끼고 정상에 오른 뒤, 노적봉을 돌아, 용암문을 통하여 도선사道詵寺로 하산하는 코스다.
들머리에 들어 하루재를 향하여 화강암석을 채곡채곡 밟고 간다. 이 북한산은 주말과 휴일이면 수많은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든다. 전 세계에서 산의 단위 면적당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될 정도로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돌계단 좌측에 붉은병꽃나무꽃이 벙글어져 한창이다.
숨이 차오를 쯤 하루재에 이른다. 이곳에서 모든 산객들이 목을 축이고 잠시 숨을 고른다. 그곳엔 노란 금단의 줄이 처져 있었다. 영 못마땅했다. 밀폐된 공간도 아닌 산바람 무시로 넘나드는 저 푸른 공간까지 굳이..., 세계 최하위 백신 접종율의 참사를 빚는 무능한 자들의 바보같은 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금단의 노란 띠를 카메라에 담는데, 앞 쪽 장년의 여산객 한분이 내게 항의를 한다. 허락도 없이 자신들을 촬영한다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첫 눈에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 차림새였다. 격을 저버린 듯한 검은 레깅스에 짙은 화장과 말눈썹 같은 마스카라. 숫제 속이 니글거렸다. 발끈하는 성미를 누르고, "나는 지금 금단의 저 노란 띠를 촬영하는 중인디요." "아, 그런가요" 바로 일단락되었다.
하루재를 지나 산자락을 돌아가면 저기 전설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화강암봉인 인수봉(811m)이 나타난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처럼 솟구친 이 봉우리는 국내 릿지 등반가들의 요람이다. 이 인수봉은 백제의 시조始祖 온조왕이 형 비류와 함께 올라 도읍都邑을 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산 전체의 형상이 어린아이를 업은 듯하다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 불렸다.
하루재 기슭을 완전히 돌아가면 국립산악구조대 사무실이 나오고, 바로 건너편 위쪽에 인수암자 있다. 이곳에서 백운대피소까진 600m, 백운대까지 1.1km의 거리가 남는다.
백운대피소 향하는 깔딱고개다.
이곳이 백운대피소다. 백운봉으로 오르는 길목 인수봉 아래 해발 650m 산기슭에 위치한 산장이다. 백운대와 인수봉 일대에서 등반 사고 시 숱한 생명을 구조하며, 이곳 산악구조대가 발족되기 전인 80년대 초까지 북한산 구조대 민간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이곳 산장의 주인이었던 고 이영구(87) 씨는 나와 구면이다. 비록 체구는 작았으나 다부졌고 얼굴이 자연을 닮아 선했다. 수해 전 텔레비젼에서 만난 산지기 부부의 삶의 애환은 감동이었다. 그후 초여름 어느 날 백운봉 오르던 날, 그 어른을 뵙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니 참 소탈하셨다. 그날 인물 사진을 담아 현상을 하여 보내 드렸더니, 근무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정선생, 나야, 백운대! 사진 고마워서 전화 했다오. 오는 길이면 꼭 들리오." 하셨다. 그러나 그날 바람처럼 스쳤던 그 인연이 어느 날 부음으로 날아왔다. 그 부음도 지면을 통해 알았다. 이제 백운산장은 국가에 귀속되었고, 산장지기마저 세상을 떠난 지금 텅 빈 대피소는 쓸쓸한 표정으로 산객을 맞는다.
백운대피소에서 직진하면 백운봉으로 들고, 우측 협곡을 따라 오르면 구멍바위 지나서 숨은벽 능선을 타고 효자동 밤골터에 떨어진다.
이곳이 백운봉암문이다. 북한산성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1711년 조선조 숙종 37년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 암문暗門 중 하나다. 암문은 비상시 식량이나 무기를 반입하는 비상 통로다. 한강 북쪽엔 북한산성이, 남쪽엔 남한산성이 자리하는데, 남함산성엔 이런 암문이 6개가 있다.
백운봉암문에서 마음을 다잡고 나면, 백운대 836m 고지로 향하는 거대한 화강암 군집이 눈앞에서 수직으로 상승한다.
오름 길 뒤돌아보면,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이 모여 만 가지 풍광을 자랑한다는 만경대萬景臺가 손에 잡힐 듯하다. 저 만경대 뒤편으로 이어지는 북한산의 산능선이 푸른 파도처럼 출렁인다. 문수봉 나한봉 승가봉 비봉 향로봉 족두리봉이 녹색 파도처럼 굽이친다.
이 삼각산三角山은 신화처럼 전설처럼 거대한 삼각뿔의 화강암봉이 솟아올랐다. 온 몸으로 가파른 백운대와 부딪치면서 암벽을 오르다 보면 사람들은 거대 암벽에 압도 되고 감탄한다. 더러는 이 거대한 화강암이 내뿜는 강력한 지기地氣에 감전되면서 한두 번 쯤 정신을 잃고, 때때로 나타나 감싸는 운해에 모든 산객들은 황홀감을 느낀다.
백운봉 정산에 삼백예순날 테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정상엔 3.1운동 암각문이 세겨져 있다. 이 백운봉이 삼각산三角山의 주봉이고 서울의 진산이다. 삼각산은 백운대(836m) 인수봉(810m) 만경대(800m) 세 봉우리를 칭하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볼 때 이 세봉우리가 세 개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삼각산이라 전해온다.
인수봉 암벽엔 릿지 등반가들이 개미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인수봉 너머 상장능선이 흐르고, 그 뒤로 도봉산의 주봉과 선인봉을 비롯한 오봉이 불꽃같은 성정을 피워낸다.
억겁의 세월 고이 잠들어 있던 석룡石龍이 깨어났는가. 모진 비바람에 깎여 절박하게 솟은 벼랑들로 이어진 북한산 숨은벽은 능선은 서늘하고 차가운 긴장을 피어 올린다. 숱한 벼랑을 좌우로 흘린 능선들의 아찔한 전개. 저 아득한 벼랑 끝에 서면 인간의 목숨도 한낱 바람결에 지는 한 잎 꽃잎과 다를 게 없으리라. 산벼랑에 설 때면 가끔 이런 아득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상의 너른 암반이다. 서울의 북단인 도봉구와 노원구가 한 눈에 든다. 어느덧 배가 출출하여 젊은이들 속에 섞여 김밥 한 줄과 조그만한 캔의 번데기로 간단히 요기한다. 앞쪽의 두 아가씨들은 술을 제법하는 듯 김밥과 함께 막걸리를 홀짝거린다. 숨 막히는 이곳까지 와서 술을..., 신기하다.
정상에서 되돌아 백운봉암문에 다시 선다. 만경대를 정상을 오르리라 맘 먹었으나, 국립공원 지킴이가 안전장비 갖추고 2인상 동행 시 산행이 가능하고 한다. 다시 암문을 통과하여 만경대의 허리를 끼고 노적봉으로 향한다. 이 산길이 한산하다.
북한산 노적봉 역시 산행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엔 감시요원이 없어서 도발을 강행한다. 이때 아니면 언제 또 무모한 짓을 하랴. 만약 발각되면 여지없이 벌금을 물어야할 터. 그래도 겁이 없다. 나의 이런 간 큰 도발은 나이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저멀리 북한산성이 능선 따라 실타래처럼 풀어진다. 저 실타래를 따라가면 북한산성 12성문을 지나, 북악산(청와대)까지 이어진다.
이순에 들어 삶에 웃을 일이 그리 많지 않음을 이제사 안다. 사는 날이 깊어갈수록 근심도 우물처럼 깊어가기 때문일까. 모처럼 아무도 없는 산정에서 혼자서 환하게 웃는다.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풍경, 생의 빛나는 모습이 어쩌면 환하게 웃는 모습일도 모른다.
도발을 강행한 노적봉을 내려와 용암문으로 향한다. 사월의 신록은 푸른 생명으로 가득한데, 산길은 한적함을 너머 고적하다. 그 길을 걸으면서 나는 묵언默言한다.
묵언하는 그 길에 노객을 조우한다. 향년 82세. 도봉구 창동에 사신다는 노객은 그 거친 암봉의 산길을 펄펄 날았다. 자신의 친구들 중 유일하다는 그분은 "10년 전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깊은 우울증이 왔으나. 이젠 마음 비우고, 긍정적인 생각만하며 사노라, 했다. 문득, 세월이 흘러 내 나이 저 노객에 이르러, 이 산길에 나타날 수 있을까 싶었다. 아니, 내가 이 지상에 생명을 부지할까 싶은 생각이 겹친다.
저 용암문을 통과하여 도선사로 향한다. 이 성벽의 산길 따라가면 북한산성 12성문을 거쳐 북악산으로 이어진다.
장미와 양귀비 칸나 사루비아는 정염으로 불타오르는 정열적인 뜨거운 꽃들이다. 그러나 산철죽의 다소곳한 분홍빛 자태는 혼기를 앞 둔 과년한 처녀 같고, 때 묻지 않는 새신부 같은 자태의 빛깔이다.
도선사 뒷편에 김상궁 바위와 그 터가 있다. 음각된 석문에 "同治癸酉十月日立(동치계유십월일입)"라고 되어 있다. "법명이 정광화 인 김상궁의 사리탑을 1873년 10월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김상궁은 궁중의 상궁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서 암자를 짖고 부처를 받들다가 사리를 남긴 터라고 한다.
도선국사가 손으로 거대한 바위를 갈라 부조되었는 마애불입상이다. 대웅전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가 있고 얼굴은 넓적한 사각형이다. 나는 이곳에서 도선道詵의 선풍禪風에 이끌려 니른한 육신을 읍조려 108배를 올린다.
108배(拜)
석등 정용표
속세俗世의 분진粉塵을 씻으려
흰 구름 휩싸인 백운대 돌아오는 길
도선道詵의 선풍禪風에 이끌린다.
천 년 비찰에 들어서니
4월 신록의 푸른 경전經典
법의法衣에 드리우고
삶의 고뇌가 뼈를 녹여
층층이 구층 석탑을 쌓았다.
나그네는 삶의 번뇌를
백팔염주로 알알이 꿰어
입상마애불에 108배百八拜를 올린다.
천 년 세월은 말없이 돌아서도
부처를 가슴에 안고
제석除夕의 종鐘을 치는 나날들
촛불은 제 설움에 타고
온 몸으로 마음 풀어내는
삶의 이파리, 삶의 화엄경華嚴經
거룩한 염원念願이려니,
속세의 새벽을 열고 가는
처연한 산 나그네
이승의 몸부림 산을 안고 넘어간다.
<108배 전문>
도선사 입구에 도착한다. 산은 냉혹하다. 모든 산은 냉혹하다. 그 냉혹한 산을 나는 오늘도 오른다. 산을 오르는 일은 산을 거스르는 일일 터. 이는 극심한 현기증과 죽을 지경의 거친 호흡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도 그 산을 미련하게 꾸역꾸역 오른다. 왜 오르는지 그 의미도 곰곰이 짚어보지도 않은 채 오르기만 한다. 아마도 내가 산을 오른 이유는, 산이 그곳에 있음이니, 내 삶의 번뇌와 고뇌의 하중을 산을 통해 가벼이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북한산 백운대 산길에서, 2021. 4월 석등.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