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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달콤한 인생: 인생보다 인생 같은
1. 에릭은 왜 나올까?
이 영화를 보자마자 든 의문이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갈등은 선우(이병헌)와 보스(김영철), 그리고 보스의 애인인 희수(신민아) 사이의 삼각관계다. 선우가 보스의 애인인 희수(신민아)를 사랑하게 되고, 이에 분노한 보스는 선우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땅 속에 묻어버린다. 가까스로 죽을 위기를 넘긴 선우가 보스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하면서 갈등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영화 말미에 선우가 조직을 다 쓸어버리고, 결국 둘만 남는다. 선우는 보스에게 묻는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보스가 대답한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가관이다. 모욕감 하나 때문에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드는 놈이나, 저 따위 대답을 들으려고 목숨 걸고 여기까지 온 놈이나 도찐개찐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어이없다. 영화 내내 어디서 코빼기도 안 비치던 에릭이 나타나 쌍권총 돌리면서 다 죽여버린다. 그리고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이병헌의 그윽한 나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어처구니가 없어 네이버 영화를 찾아봤다. 다른 사람들 의견도 비슷하다. 다들 에릭이 왜 나왔는지 궁금해 한다.
리뷰를 찾아봐도 마땅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영화를 한 번 더 봤다. 에릭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제일 유력한 건 선우의 전임자다. 선우의 동료인 문실장(김뢰하)이 보스의 명령으로 선우를 묻으면서 선우에게 이런 말을 건낸다. “전에 생각나냐? 그 때 네가 이런 말 했었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면서 씨발 손모가지를 똑. 그 때 대단했다.” 만약 에릭이 선우의 전임자라면 에릭의 동기는 명확해진다. 자신의 손목을 부러뜨렸던 선우에 대한 복수를 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손목이 멀쩡하다. 문실장이 손목 이야기를 안 꺼냈던지, 에릭이 손목에 붕대를 감았던지 둘 중에 하나만 했으면 이 영화는 쩌는 반전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아마 ‘막판에 에릭 소오름..’, ‘문실장이 전임자 얘기할 때 그냥 흘려들었는데 그게 에릭이었다니... 알게 모르게 남에게 상처주고 있던 게 없는지 돌아봐야겠네요.’와 같은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감독은 굳이 손목이란 떡밥을 던져 놓고 굳이 회수 하지 않는다. ‘일부러’ 에릭의 정체를 관객들이 맞추지 못하게 만든다.
2. 에릭이 나오면 안 될 이유는 뭘까?
편집증이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편집하는 증상이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기가 미리 생각해둔 결말에 맞춰서 생각하는 일종의 망상 증상이다. 예를 들어 자기 외모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편집증 환자는 길을 가다 어떤 여자가 웃는 걸 봤을 때 그 여자가 자기 외모를 조롱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편집증이 병인 건 이 세상은 편집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내가 못 생겼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굴러간다. 거리에서 마주친 여자가 웃는 건 내 얼굴이 웃겨서일 수도 있지만 그냥 예전에 웃긴 일이 생각나서 일수도 있다. 심지어 아무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세상에 필연적인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녀가 내 얼굴을 보고 웃었다는 10가지 증거를 제시해도 그녀가 아니라면 아닌 거다.
그런데 영화 속 세상은 편집되어 있다. 2시간짜리 영화 속에 표현된 시간은 일반적으로 2시간이 넘는다. 2시간이 넘는 현실을 2시간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팩트의 취사선택이 이루어진다. 그 취사선택이 이루어지는 기준이 주인공이다. 영화에선 세상 모든 일이 주인공을 위해 흘러간다. [슈팅 코리아]라는 만화책이 있다. 한국인 오필승과 한민국이 독일 2부 리그 팀을 유럽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려놓는다는 이야기다. 이 만화책에서는 16강, 8강, 4강의 모든 경기가 원정 다득점으로 끝난다. 5:0으로 일찌감치 승리를 확정짓거나 지루한 공방전을 주고받다가 0:0으로 끝나는 경기는 하나도 없다. 축구에선 원정 다득점이 가장 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3:0으로 발리고 있어도 별로 긴장이 안 된다. 후반전에 3골을 넣을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기의 내용은 오필승과 한민국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2시간 동안 한 사람의 시선을 롱 테이크로만 따라가는 극사실주의 영화가 있다고 해도 그 영화가 정말 사실이라고 말할 순 없다. 영화는 한 순간에 한 사람의 시선 밖에는 보여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모든 순간에 모든 시점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는 불가능하다.
[달콤한 인생]에서 관객은 선우의 시선을 따라간다. 관객과 선우는 함께 땅 속에 파묻히고 함께 조직을 쓸어버린다. 그리고 보스에게 질문한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런데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온다. 겨우 그거라니. 선우와 관객은 열 받아서 보스를 쏴버린다. 이제 다 끝났나 싶은데 어디서 갑자기 에릭이 툭 튀어나와 선우를 죽여버린다. 1시간 55분 동안 “나한테 왜 그랬어요?”하다가 그 질문과 아무 상관도 없는 놈한테 죽는다. 그래서 관객은 어이가 없다.
그런데 이게 정말 어이없는 일인가? 죽음은 분명 개인이 삶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사건이다. (어쩌면 [삶에서] 겪을 수 있는 사건은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죽음에 그에 걸맞는 기승전결이 있는 건 아니다. 왕의 목을 베어 망국의 한을 풀려다 왕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를 미끼로 한 왕의 계략에 걸려들어 수백 명 자객에게 화살을 맞아 고슴도치처럼 되어 죽는 드라마틱한 인생도 있지만 그냥 빗길에 버스가 미끄러져서 수십 명이 한꺼번에 죽는 인생도 있다. 효도르나 최홍만도 죽창이면 한 방이다. 선우가 에릭에게 죽는 건 영화치곤 어이없는 일이지만 현실치곤 어이없는 일이 아니다.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2-1. 쉐도우 복싱
이 영화에서는 선우가 유리창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보통 영화에서 자기를 응시할 때 쓰는 오브제는 거울이다. 늘어가는 주름살을 보며 지나간 세월에 회한을 느끼기도 하고, 자기 내면을 성찰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선 거울이 아니라 유리창으로 본다.
유리창과 거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유리창으로 보면 얼굴이 더 잘생겨 보인다. 피부 트러블이 보정되고, 눈빛도 더 촉촉해 보이며 얼굴에 굴곡도 더 살아난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음.. 오늘 괜찮은데?”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누구나 한번 쯤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선우는 유리창을 보면서 쉐도우 복싱을 한다. 쉐도우 복싱은 상대방이 없는 복싱이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를 잘 생겨보이게 해주는 유리창을 보며 자기만의 쉐도우 복싱을 한다. 그렇게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굴러가는 줄 알고 있다가 듣도 보도 못한 에릭한테 죽는다. 꿩은 자기 눈만 가리면 정말 자기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는데 인간도 별반 다를 게 없지 싶다.
2-2. 권총조립
처음 사귄 여자 친구와 처음으로 손을 잡았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손이 너무 거칠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손은 더 작고 부드럽고 따스할 줄 알았는데 내 손이랑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그게 퍽이나 중요했다. 함께 있으면 몇 시간이고 훅 지나가버릴 만큼 성격이 잘 맞았지만 그냥 손이 거칠다는 이유만으로 헤어졌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으면 종이 울린다고 했는데 종이 치지 않으니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연애할 수 없으니 헤어져야 한다는 삼단논법에 의한 것이었다.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는 보스에게 복수를 하려고 권총을 사러 간다. 그런데 권총 조립하는 법을 배우던 중 무기 상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무기 상인은 선우의 정체를 알게 된다. 정체를 들킨 선우와 무기상인은 서로를 쏘려고 하는데 이미 총이 분해되어 있어 쏠 수가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섬주섬 부품들을 주워 총을 조립한다. 탄창이 잘 안 끼워져 허둥대는 사이 선우가 무기 상인을 쏴 죽인다. 극히 현실적이다. 보통의 영화에서라면 무기 상인이 선우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너... 이 자식...”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선우는 마치 통화 내용 다 들었다는 듯이 여유 있게 웃으면서 “빵!”하고 쏴 죽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영화처럼 풀리질 않는다. 현실처럼 자질구레하다.
2-3. 보스의 죽음
선우는 무기 상인에게 산 총을 들고 조직으로 돌아가 쑥대밭을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보스와 재회한다. 보스는 선우의 질문에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라고 답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선우는 보스를 쏴 버린다. 보스는 총을 맞자마자 픽 쓰러진다. “그래... 7년 전 널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넌 아무 것도 모르던 풋내기였지. 그렇지만 난 네 눈빛을 알아봤어. 네 야수의 눈빛...”하며 주절거리지도 않고, 지갑 속에 숨겨져 있던 희수의 사진을 꺼내보지도 않는다. 그냥 픽 쓰러진다. 심지어 테이블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보스 치고는 너무 허무하게 죽는다. 그렇지만 이 죽음의 허무함은 곧 잊힌다. 더 허무한 선우의 죽음에 묻혀버린다.
3. 왜 에릭이 나오는 걸 어색하다고 생각했을까?
3-1. 페이스북에서 필화 사건을 겪은 적이 있었다. 한 친구가 링크를 건 글에 대해 댓글로 의견을 달았는데 그 친구가 나에게 필요 이상의 면박을 줬다.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신공격성 발언이었다. 그렇지만 그냥 참았다.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던 마음 반, 키배를 뜨면 질 것 같으니 적당히 끝내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그런데 그 밑에 다른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00아, 내가 했던 말 명심해.” 내가 했던 말이란 게 무엇이었을까. 아마 “세상엔 네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병신이 있게 마련이다.”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지만 별 말 아니었을 수도 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하며 내 편을 드는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점심 뭐 먹지?” 따위의 의미 없는 말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선 왠지 날 욕했을 것 같다. 확인해볼 수도 없다. 모로 가도 내가 손해다. 만약 내 욕을 했다고 하면 나는 상처받을 것이고, 별 얘기 안 했다고 하면 나만 소심한 찐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 욕을 했으면서 안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그냥 내가 면박을 당했다는 상황맥락에 근거하여 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밖에 없다.
3-2. 친구와 다툰 적이 있었다. 작은 오해로 사이가 틀어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몇 달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억울한 점이 있었지만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이 너무 쿨했다. “어, 그거? 아냐 뭐. 별 일 아닌 걸 가지고.”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정이 싹 달아나 버렸다. 친구는 마음에도 두지 않았던 일 가지고 나는 몇 달 동안 골머리를 썩었다는 게 억울했고, 심지어 그 사실을 친구 앞에서 드러내보였다는 게 자존심 상했다.
3-3. 여자 사람 친구와 술을 마셨다. 여자 사람 친구가 예전에 자길 좋아했다던 남자 이야기를 꺼냈다. 군대에서 전화하고, 편지 보내고, 전화로 노래도 불러줬단다. 심지어 그 편지를 나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웃겼다. 그런데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나도 그런 거 다 해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나 혼자만의 낭만에 빠져 했던 그런 행동들을 그녀는 낭만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다른 남자 사람 친구 앞에서 술안줏감으로 내 얘기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짝사랑이 슬픈 건 단순히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녀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지새운 나의 수많은 밤들이 그녀에겐 그저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 심지어는 개그소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달콤한 인생]을 본 관객들은 에릭의 정체를 궁금해 한다. 주인공일 죽인 인물은 그만한 중요성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을 해도 에릭에게서 선우를 죽일 만한 동기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게 바로 인생이다. 이유 없이 태어나서 이유 없이 죽는다. 선우가 에릭에게 죽는 결말은 전혀 어이없지 않다. 오히려 에릭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는 우리의 모습이 더 어이없다.
그런데 영화를 볼 때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는 현실도 영화처럼 해석한다. 우리 각자의 시선에서 세상은 나를 주인공으로 한 한 편의 영화다. 편집증은 병이면서 병이 아니다.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점에서 병이지만 모두가 다 그런다는 점에서는 병이 아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지만 나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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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 달콤한 인생이 상당히 불가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씀하신 걸 들어보니 불교와 연결고리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았네요..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 영화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