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 사절의 심문을 받음
심문 장소가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로 지정되었으므로 루터는 도보로 그 곳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두려운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중에서 그를 체포하여 살해하리라는 풍문까지 돌았으므로 그의 친구들은 이와 같은 위험한 모험을 하지 못하도록 그에게 간청하였다. 그들은 그로 하여금 잠시 동안 비텐베르크를 떠나서 그를 기꺼이 영접하여 보호해 줄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피하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그 자리에서 떠나가고자 하지 않았다. 어떠한 폭풍이 그에게 불어올지라도 그는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충성해야 했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예레미야 같이 투쟁과 싸움의 사람이다. 그들의 협박이 더하면 더할수록 나의 기쁨도 증가될 것이다. 그들은 이미 나의 명예와 명망을 꺾어 버렸다. 한 가지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가련한 나의 육체뿐이다. 이것마저 빼앗아 간다 해도 두렵지 않다. 그들은 내 생명을 불과 몇 시간으로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영혼만은 그들이 빼앗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이든지 죽음을 각오하여야 한다”(D’Aubigne, b.4, ch.4).
루터가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은 법왕의 사절을 매우 기쁘게 하였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패역무도한 이단자가 이제 로마의 권세 아래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므로 법왕의 사절은 그를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개혁자는 통행권을 가지지 않고 왔다. 그의 친구들은 그것이 없이 법왕의 사절 앞에 나타나지 말도록 간청하는 한편 그들 자신이 황제로부터 그것을 얻고자 교섭하였다. 법왕의 사절은 루터로 하여금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게 하든지, 그것이 안 되면 그를 로마로 보내어 후스와 제롬이 당한 것과 똑같은 운명에 빠뜨리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부하들을 시켜서 루터로 하여금 자기의 자비를 믿고 통행권 없이 출두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개혁자는 그렇게 하는 일을 단연코 거절하였다. 그는 황제가 보호를 약속하는 문서를 주기까지 법왕의 사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법왕 측에서는 루터를 설복시키기 위한 하나의 술책으로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고자 작정하였다. 법왕의 사절은 그와 회견하면서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루터에게 무조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고 어떤 점에서든지 이론과 의문을 제기하지 말고 굴복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자기가 취급하고 있는 사람의 성격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교회에 대한 자기의 관심과 진리에 대한 욕망과 자기의 가르침에 대하여 제기하는 온갖 반대에 즐거이 답변할 마음과 어떤 특별한 대학에서 자기의 교리를 검토하겠다면 쾌히 응할 의사가 있다는 것 등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류에 대한 판명이 나기도 전에 신앙의 취소만을 요구하는 법왕의 사절의 태도에는 반대하였다.
법왕 측의 반응은 오로지 “취소하라, 취소하라”는 말뿐이었다. 루터는 자기의 주장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므로 진리를 부인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언명하였다. 루터의 이론에 대답할 수 없게 된 법왕의 사절은 비난과 욕설과 책망을 쏟아 놓음으로 위압하고, 교부(敎父)들의 말과 전설을 여기저기서 인용하여 늘어놓음으로써 루터에게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주지 아니하였다. 그런 상태로 회의를 계속하면 결국 헛수고만 하게 될 것을 안 루터는 드디어 그의 답변을 문서로써 제출하라는, 마지못한 허락을 받아냈다.
루터의 당당한 논조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그렇게 하므로 압박을 받는 자는 이중의 이익을 얻는다. 첫째는 그 기록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판단에 호소할 수 있고, 둘째는 자기의 교만한 말로 지나치게 위압적인 태도로 방자하게 함부로 말하는 폭군에게, 그 양심에는 호소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공포감을 갖게 하는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Martyn, The Life and Tines of Luther, pp.271, 272).
그리고 둘째 번의 회견에서, 루터는 성경에서 인용한 많은 구절들로 이루어진 명료하고 간결하고 힘 있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설명문을 제출하였다. 그는 그것을 큰소리로 낭독한 후에 추기경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다만 쓸데없는 말을 기록한 불경하기 짝이 없는 인용구(引用句)의 수집에 불과한 것이라고 외치면서 멸시하는 태도로 내어던져 버렸다. 이에 루터는 담대히 일어나서 횡포 무례한 법왕 사절의 논법을 이용(利用)하여 전설과 교회의 구전(口傳)과 가르침을 여지없이 전복시켰다.
법왕의 사절은 루터의 변론에 도무지 대답할 수 없음을 알자, 자제력(自制力)을 잃고 맹렬한 불과같이 노하였다. “취소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로마로 보내겠다. 거기서 너는 너의 소송 사건을 담당한 재판관들 앞에 서야 한다. 나는 너와 너희 일당을 파문한다. 또 어떠한 경우에든지 너를 돕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에서 내어 쫓겠다”고 그는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교활하고 분노한 음조로 “취소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말라”(D’Aubigne, London ed., b.4, ch.8)고 단언하였다.
루터는 지체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즉시 그 곳에서 퇴장함으로 취소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그것은 법왕의 사절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이었다. 그는 위협으로 루터에게 공포감을 줌으로 그를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었었다. 그는 이제 자기의 지지자들과만 남게 되었으므로 둘러앉은 사람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자기의 계책이 뜻밖에 실패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였다.
이때의 루터의 활약은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그 곳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비교해 보고, 그들이 나타낸 정신들을 스스로 판단해 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시한 이론의 설득력과 진실성을 비교해 보고 판단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들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개혁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순하고, 겸손하고, 굳센 태도로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법왕의 사절은 으스대며, 거만하고, 횡포하고, 비합리적인 태도로 한 구절의 성경 말씀도 인용하지 않은 채 화를 내면서 “취소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로마에 보내어 처벌하겠다”고 부르짖을 뿐이었다.
루터의 후원자 프리드리히 후(侯)
루터가 통행권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법왕당들은 그를 체포하여 투옥시킬 음모를 꾸몄다. 루터의 친구들은 그가 더 이상 체류하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알고 그에게 즉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과 그 계획에 대하여 비밀을 철저히 지키므로 남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지방 장관이 보내준 한 사람의 안내자를 따라 새벽에 말을 타고 아우크스부르크를 떠났다. 앞길에 가로놓인 여러 가지 어려움을 예상하면서, 고요하고 어두운 시가지를 몰래 빠져나왔다. 잔인한 원수들은 방심하지 않고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를 잡으려고 펴 놓은 함정을 그가 피해나갈 수 있을까? 진실로 이 때야말로 매우 염려되는 때요, 열렬한 기도가 필요한 때이었다. 그 도시의 성벽(城壁)에 있는 작은 문에 당도하였다. 문은 그에게 열리어지고, 그는 아무런 장애 없이 안내자와 함께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일단 문밖으로 무사히 빠져 나오자 그들은 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법왕의 사절이 그의 탈출을 알기 전에 박해자의 손이 미치지 못할 곳까지 가버렸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은 패배하였다. 그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줄로 생각했던 그 사람은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새 사냥꾼의 그물을 벗어나듯이 그들의 수중에서 벗어났다. 루터가 도망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법왕의 사절은 매우 놀라고 분개하였다. 그는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를 처단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지혜와 단호한 결단력을 나타내므로 큰 명예를 얻을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이제 그 희망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작센(Saxony)의 선후(選侯) 프리드리히(Frederick)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타냈다. 그는 그 편지에서 루터를 신랄히 비난하고 프리드리히로 하여금 그를 로마로 보내든가 작센에서 추방하든가 해주기를 요구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면서 법왕이나 법왕의 사절에게 성경상으로 자기의 오류(誤謬)를 지적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준다면 단연히 자기의 주장을 취소하겠노라고 가장 엄숙한 태도로 맹세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이처럼 거룩한 사업을 위하여 고난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헤아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 당시 선후(選侯)는 아직 개혁설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루터의 공정하고, 분명하고, 힘 있는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개혁자의 오류가 입증되지 않는 한, 프리드리히는 그의 옹호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법왕의 사절에게 보내는 회답에서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귀하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마틴 박사와 회견하였으므로 만족하였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귀하가 그의 오류를 확신시켜 주지 않고 신앙을 취소하게 하고자 노력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마틴 박사의 교리가 불경하고, 비그리스도인적이며, 이단적이라고 말해 주는 이 나라의 학자들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선후는 루터를 로마로 보내거나 자기 나라에서 추방하기를 거절하였다”(D’Aubigne, b.4, ch.10). 선후(選侯)는 사회의 도덕적 억제력이 전체적으로 무너져 있는 것을 알았다. 위대한 개혁 사업이 필요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와 계발된 양심의 명령을 인정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범죄를 억제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그는 루터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음을 알고, 그 사업이 교회 안에 좋은 감화를 끼치고 있는 것을 은근히 기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