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고 맑은, 연두가 제 빛을 잃고 초록 대열에 합류하려는 오묘한 시점. 그 아리까리한 색을 눈으로 보며 산책하다가 문득 우리의 주체성은 어디로 흘러가고 어쩌다 뭉꿍그려지는 정체성이 전부인양 중심없는 나랏님의 무지로소이다가 안타까워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돌아와 늦은 오후에 컴을 열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발견했다. 내맘이 저 마음인고로 함께 나눈다.
■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름의 정체성/ 강미숙
현행 선거법에서는 공식 선거운동 기간 이전에 선거운동할 수 있는 자는 후보자와 후보자의 배우자, 직계가족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들은 법적으로 허용하는 선거운동원 숫자에서도 자유롭다. 후보자들 사이에서 부모가 오래 살거나 배우자가 여럿이거나 자식을 많이 두어야 유리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오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보자의 부인이나 아들딸의 호감을 주는 언행이나 외모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기에 선거캠프에서는 의도적으로 팬덤 현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도 없다. 어여쁘고 상냥한 딸이든 멀끔하게 생긴 듬직한 아들이든, 아니면 장애를 가진 자녀든 그들이 정치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매번 통통 튀는 가족을 표몰이에 동원하는 세태는 못내 씁쓸함을 남긴다.
광역단체장, 총선, 대선과 같은 대형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배우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정치인은 아마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배우자 강난희 씨와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씨가 아닐까 싶다. 남편 또는 아내가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배우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것을 강요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라면 폭력이다. 강난희 씨는 남편의 첫 서울시장 선거 때부터 3선을 하는 내내 소극적이었고 유권자들도 그의 소신이라고 이해했지만, 유권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무책임하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그러나 개별성과 고유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 권리가 있으니 적극성이 모자라다고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ㅡ‘국정 파트너’로 바뀌어 버린 ‘조용한 내조’
문제는 김건희 씨다. 그녀는 선거 때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고 당선된다 해도 제 2부속실을 없애고 조용한 내조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선거 전과 후의 행보가 대조적인 데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서는 모습이 헌법에 위배되는 게 아니냐 되묻고 싶을 지경이다. ‘한반도’라는 영화에 대통령 부인의 직업은 수학교사이고 남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어도 그 정체성을 유지하며 사는 것으로 나온다. 코바나 컨텐츠 대표인 김건희 씨도 그런 길을 가려나보다 싶었다. 하지만 제 2부속실을 두지 않겠다고 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둘러싼 잡음은 일관적이다.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며 공적 업무에 사적 관계자들을 포진시키는 등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 남편이 할 일에 몰개념적으로 끼어들거나 점점 영역을 넓혀나간다는 것 말이다.
급기야 대통령의 입에서 김건희 씨를 일러 국정파트너라는 말까지 나왔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 유고시 그 역할은 국무총리에게 주어진다. 굳이 국정파트너를 말한다면 그것은 집권여당이고 야당이며 국무위원들이 되어야 마땅한데 배우자를 국정파트너라 칭하다니, 뭐 이런 경우 없는 일이 다 있단 말인가. 대통령 부부가 제 2부속실을 두지 않으려 했던 진짜 의도는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던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임이 드러난 것이다.
대통령이 김건희 씨를 국정 파트너라 이른 것은 농담으로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임기 1년이 되도록 야당 대표와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대통령이 아내를 국정파트너라고 말하는 것만큼 심각한 국기문란이 또 있겠는가. ‘VIP2’라는 듣도 보도 못한 호칭이나 대통령실이 제공하는 김건희 씨의 화보사진은 더 이상 거론하는 것조차 민망하고 꼴사납다. 청소년들도 낄끼빠빠를 말하는데 대통령 배우자가 낄 자리 빠질 자리 가리지 않는 것이나 광폭행보라는 말로 미화하는 언론이나 정상이 아니긴 매한가지다.
비록 불완전하고 권위적인 민주주의였지만 1대 대통령 이래 이런 대통령 배우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1년 간 김건희 씨의 행보를 보면 구한말 권력을 쥐고 흔든 명성황후나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거의 대등한 권력을 행사했던 테오도라 황후를 떠올리게 된다. 명성황후는 뮤지컬과 같은 문화콘덴츠로 지나치게 미화된 인물이니 훗날 김건희 씨도 그렇게 미화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김건희 씨는 여러모로 부부가 함께 황제 대관식을 치른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라 황후를 떠올리게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재통합을 위해 법률을 정비한 로마법대전과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을 건축한 황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ㅡ명성황후 넘어 테오도라 황후 연상케하는 김건희 씨
테오도라 황후는 외설적 연기로 인기를 구가하던 무희 출신 창녀였다는 점, 황제의 조카였던 유스티니아누스의 눈에 들어 귀족이 하층민 여성이나 유흥가 여성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을 폐지하며 결혼했다는 점, 제위를 계승하는 대관식에서 황제와 나란히 왕관을 받았다는 점 등으로 널리 회자되곤 하는 여성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를 자신과 대등한 제국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신하들에게 두 사람의 이름으로 충성서약하게 했으니 공동황제인 셈이었다.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에드워드 기번은 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 제국 비사>를 인용하며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의 지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신의 선물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프로코피우스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등 과거 서로마 영토 정복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벨리사리우스의 비서였으며 황실 사관이자 그 자신이 원로원 회원이었다. 말 그대로 정사에 남기기 어려운 제국의 이면을 기록한 비사인 만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남편과 의견이 다르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철시키려 했다니 테오도라 황후의 권력행사는 실로 대단했던 것 같다.
실제 황제 재위 중 제정된 법령에는 거의 대부분 황후의 이름이 있으며 외국 사절단을 접견하고 이웃 통치자들과 서신을 왕래하는 등 황제와 대등한 정치적 종교적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그녀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니카반란 진압사건이다. 서로마 고토 수복 원정으로 인한 과도한 세금에 지친 시민들이 전차경주가 열리는 히포드롬에서 법무장관과 재무장관 파면, 나아가 황제 폐위를 주장하자 겁에 질려 도망가려는 황제를 따끔하게 훈계하여 돌려세우고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한 것이다. 그녀는 권력의 본질과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여성이었던 모양이다.
ㅡ전제정 시대에 가능했던 일, 민주정 시대에도 가능할까
테오도라 황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잔인하게 고문·처형하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은 반면 창녀들의 갱생을 지원하고 이혼법을 개정하여 여성의 재산권을 확대하는 등 제국 내 여성의 권리신장에 기여했다고 말이다. 김건희 씨는 대통령 부인으로서 어쩌면 테오도라 황후를 롤 모델로 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직업이 무엇이었든 어떤 일을 했든 황제와 대등한 제국의 통치자로 역할하는 것은 전제정 시대에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민주정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유00 의원의 경우처럼 딸이 아무리 예쁘고 사랑스럽다 한들 딸에게 권력을 나눠줘도 된다고 생각하고 투표한 유권자는 없지 않았겠나.
대통령 선거 때 김건희 씨에게 많은 이들이 의문부호를 던진 것은 주가조작과 같은 악질적인 경제범죄 혐의가 있는데다 대한민국 퍼스트 레이디로서 품위를 갖춘 인물인가 하는 것이었지, 국정파트너 따위는 상상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베트남 주석을 만나 비자문제를 언급하고 개식용을 임기 내 종식하도록 하겠다거나 방미 중 넷플릭스 관련해 보고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은 국정을 사유화하는 것으로 엄연한 국정개입이다. 취임이후 단계적으로 정치적 메시지 수위를 올리고 누가 대통령인지 헷갈릴 정도로 심각한 월권행위를 일삼는 대통령 부인은 처음 겪어보는 일인 만큼 제어할 수단도 마땅찮아 보인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국가안보와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도 문제거니와 영부인 놀이로도 부족해 대통령 흉내내는 놀이에 심취한 여성을 대통령 배우자로 둔 국민들만 속이 썩어문드러진다. 김건희 씨 행보에 대한 뉴스가 대통령과 맞먹거나 그 이상인,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나 같은 평범한 시민도 어설프게나마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늘 아래 처음 있는 일은 없다는 것, 세월이 흐르고 아무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다 해도 인간의 본성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때로는 위안을, 때로는 경각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크게 절망할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피를 흘리지 않고 저절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천운 따위는 없다는 것도 말이다.
ㅡ제국이 망할 수도 있다는 걸 배우는 역사공부
황제의 조카로서 돈으로 원로원의 마음을 사며 영향력을 키워간 유스티니아누스와 스트립쇼 배우에서 일약 제국의 황후가 된 테오도라 두 사람은 강력한 전제정치로 서로마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복원함으로써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다. 하지만 과도한 재정지출로 시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며 동로마를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시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광대한 제국도 쇠퇴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화려한 성 소피아 성당의 이면이며 역사가 주는 값진 교훈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상세하게 규정하는 배우자법이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줘서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애써 위안을 삼자니 점점 신포도를 바라보는 여우가 된 것마냥 깊은 자괴감이 든다.
(강미숙/ 시민소셜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