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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민조시(民調詩) 개척자/신세훈
1. 언제부터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1941년 경북 의성군 사곡면(새실)에서 태어났지요. 의성중학교에 다닐 때 작문 선생님이 졸업 전에 교지를 펴낸다고 학생들에게 글 한 편씩 제출하라고 숙제를 주셨습니다. 마땅히 쓸 게 없어 자취방 벽에 붙어 있던 박목월 시인의 작품을 베껴 제출했다가 크게 혼난 적이 있어요. 그때 표절은 도둑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문예반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고1 때 문예반에 가입하여 이육사 시집을 처음 읽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호기 때문이었는지 저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치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문예반 지도 교사 박종우(朴鍾禹) 선생님은 시인이었는데, 정말 열성적으로 문예반을 지도했습니다. 항상 고무신을 신고 다녀 별명이 고무신이었습니다. 40대 노총각으로 숙직실에 기거하면서 저녁 늦게까지 문예반원들을 가르쳤습니다. 몇몇 문예반원들은 전국 백일장을 휩쓸고 다녔지요. 저는 아쉽게도 그때까지 문리가 트이지 않아 그 반열에 들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의대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가정 형편상 포기하고 1년을 집에서 쉬었습니다. 길을 내거나 국도를 보수하는 부역에 동원되면서 틈틈이 독서를 했는데, 그때 읽은 책 중의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입니다. 시 이론에 관한 책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연극론이더군요. 아마 그 당시에는 시와 연극이 분리가 되지 않았던가 봅니다. 시와 연극의 조상이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극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되려고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것입니다.
2. 중앙대 연극영화과 2학년 때 아주 일찍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었나요?
당시 연극영화과는 문리대에 속해 있어 국문과 강의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중앙대 국문과 교수진에는 고전문학의 대가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지요. 양주동, 김동욱, 남광우, 양재연 교수 등입니다. 저는 양재연 교수님 강의를 좋아해서 그분 강의를 빠짐없이 들었습니다. 고전문학 공부가 제 시작(詩作)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겠지요.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니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장을 했던 학생들이 다섯 명이나 있더군요. 그중에는 학원문학상을 받은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가 우쭐대는 것에 경쟁심이 생겨 도서관에 틀어박혀 뼈빠지게 문학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그때 정말 독서를 많이 했습니다. 이젠 독서가 평생 습관이 되어 요즘도 하루 평균 3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 ‘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는 1961년 여름방학 때 쓴 산문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산문시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아 운율이 있는 줄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줄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인기 있는 시의 소재가 강, 바람, 해바라기, 너, 나였는데 저는 이 모두를 소재로 택해 영화•연극론에서 배운 몽타주 기법을 적용, 엿가락 꼬듯이 꼬아서 쓴 장시(長詩)입니다. 남북분단 상황을 상징으로 깔아 숨겨두었지요. 연극영화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시입니다.
이 시를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중대신문사 편집국장을 맡고 있던 선배 시인에게 평을 부탁했는데, 그 선배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넨 시보다는 평론에 소질이 있으니, 평론으로 등단하게.”
중대신문에 실렸던 제 소설 평론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한 선배가 쓴 소설을 비판적으로 평했는데, 발끈한 선배가 친구들을 동원해 저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뺨도 여러 대 맞았지요. 반항하다가는 일이 더 커질 것 같아 참았습니다. 편집국장은 그 사건을 인상 깊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직후 저는 오로지 시인 외곬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른 문학 장르에 대한 공부는 접었습니다. 신춘문예에 응모할 그 시를 몇 달 동안 다시 퇴고해서 ‘조선일보’에 응모했는데,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되었지요. 당시 ‘조선일보’ 심사위원이 양주동, 박목월 두 분이었는데, 양주동 씨가 제 시를 뽑고 나서 “새로운 시어를 50개 이상 발굴한 천재 시인이 탄생했다.”고 흥분했다는 이야기를 당시 문화부 차장 최일수 문학평론가로부터 나중에야 전해 들었습니다.
3. 대학 졸업 후 학군단(ROTC) 육군 소위로 임관, 월남에 파병됐는데 그 전쟁 경험이 시작(詩作)에 미친 영향은?
제가 학군단(ROTC) 2기입니다. 교육을 마치고 1964년 8월,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에 있는 27사단(69연대 3대대 10중대 제1소대)에 배속되었지요. 원래 월남 파병은 사관학교 출신 장교 위주로 뽑았는데, 소대장 생활을 열심히 했더니 저를 눈여겨본 연대장이 월남 종군을 권유해서 월남에 가게 되었습니다. 비둘기부대 일원으로 참가하여 공병대를 지원하는 경비소대장 임무를 맡았지요. 비전투부대이기는 하지만 공사를 방해하려는 베트콩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부대는 사이공 서북방 65마일에 있는 디안 지구에 있었는데, 한국에 주둔하다가 월남에 파병된 미 제1기갑사단을 베트콩들로부터 방어하는 길목이었지요. 베트콩이 공격하면 우리가 먼저 당하게 되어 있어 약소국의 설움을 느꼈습니다.
소대장을 하면서 여러 번 생사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1965년 4월에 있었던 베트콩 1차 기습공격 때는 우리 소대가 집중 공격 대상이 되어 천막 막사와 침대가 박격포탄에 다 날아가 버리는 피해를 입었지요. 다행히 소대원 모두 재빨리 개인호로 대피하여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귀국할 때까지 베트콩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전령 1명이 전사하는 일도 있었고, 소대원 6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그래도 인명피해가 적은 소대에 속합니다. 전투 전과로 저에게 배정될 훈장은 군 생활을 오래 할 직업군인들에게 양보했지요.
파병 장교의 임기는 1년이었는데, 같은 부대 장교 중 연장 지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사명감이 컸습니다. 새로 부임하는 장교들에게 이 지역 방어 전술을 인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1년 연장을 신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부대 부관부에 근무하는 안 중사가 달려와서 말렸습니다.
“소대장님, 연장 근무하면 위험하니 취소하세요.”
“한꺼번에 지휘관이 다 귀국해 버리면 지형, 지물과 베트콩 전술은 누가 다음 지휘관에게 인계하겠나? 베트콩 밥이 될 텐데.”
그 결과 6개월만 더 연장 근무하는 것으로 안 중사가 혼자 서류를 만들어 올렸습니다. 그 기간 중 제 소대는 전투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시키는 바람에 소대원들이 정말 죽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전쟁터는 어찌 보면 무궁한 시상(詩想)의 원천이지요. 월남에 있을 때 틈틈이 쓴 시를 모아 제 고교 시절 은사인 박종우 선생님이 ‘비에뜨남 엽서’를 출판했습니다. 처음에는 전국 순회 시화전을 한다고 작품을 제출하라고 했는데, 제 동의도 없이 시집을 출판했지요. 그래도 당시 사회가 월남전에 관심이 많을 때라 초판 2천 부가 매진되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1965년도 그때는 시집 초판 기껏 2~3백 부씩 찍을 때입니다.
4. 군 제대 후 어떤 일을 하셨는지? 직장인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1967년에 제대하고 서울시 기관지인 ‘새서울 신문’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69년 8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한국일보’로 옮겼습니다. 주간부에 근무했는데, 첫 기사로 가수 이미자 아버지를 찾아내어 인터뷰한 것이 톱기사로 실려 기억에 남습니다. 그 후 광주대단지(현 성남시) 폭동사건을 취재한 기사를 톱기사로 썼다가 당국의 압력에 의해 나도 몰래 휴직을 당하고, 1971년 신문사를 떠났습니다.
그 뒤 한국현대시인협회 2대 회장 모윤숙 시인을 도와 초대 사무국장을 맡기도 하고, ‘月刊文學’ 편집 기자, 가족계획연구원 연구원, 국제 펜 한국본부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지요. 다행히 글쓰기와 관련있는 직장을 전전한 셈이라 시인으로서의 활동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1977년 국제 펜 한국본부 사무국장 시절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제가 국제PEN대회 참석차 출국해야 하는데 여권이 나오지 않아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한국일보’에 <고속버스를 타고 가며>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이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딸을 잃은 작은 마을이 / 저녁 연기를 피워 올린다. // … 무덤 속 할아버지들이 나와 앉아 / 자손들 얘기에 한숨을 쉰다. // … 그 아래 작은 마을에서는 / 빈 접시 소리 울리어 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코미디 같은 이야기이지요. 그때 박 대통령 둘째 딸이 가출했을 때라서 제 시가 혹시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백화양조 홍보과장을 맡아 ‘베리나인 골드’ ‘알렉산더 보드카’ 카피라이팅을 한 적도 있고, 인쇄소를 운영하다가 사기를 당한 적도 있습니다. 40대 이후에는 주로 문림(文林)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1987년 한국자유문인협회를 창립했고, 초대 회장을 맡아 ‘自由文學’을 출간하기로 약속하고, 1991년부터 지금까지 계간으로 발간하고 있습니다.
5. 2001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2번 역임하셨는데, 재임 기간 중 기억날 만한 치적을 말씀하신다면?
6•15 남북문학인대회 남측 공동대표(고은, 申世薰, 염무웅, 임헌영 등)로 평양을 방문하고 남북 공동으로 ‘통일문학’을 발간한 것입니다. 아쉽게도 문학지는 2차 발행하고 중단되었습니다. 한국문인협회는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와는 상호경쟁 관계에 있으나 남북한 문제에 협력하며 큰일을 성사시킨 것에 만족합니다.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맡았던 염무웅 문학평론가(현 국립 한국문학관 관장)와는 개인적 친분이 두텁지요.
한국문인협회는 워낙 방대한 조직이라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고소 사건도 여러 번 있었지요. 그 스트레스로 인해 갑상선 암이 왔습니다. 제가 평소 한방 공부를 한 적이 있어 상황버섯, 인진쑥, 개똥쑥 등을 찜통에 넣고 달인 물을 3개월 정도 매일 마셨습니다. 그 후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더니, 암세포가 다 녹아내렸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집사람이 저를 ‘돌팔이 한의사’라고 부릅니다.
6. 민조시(民調詩)라는 일종의 정형시 분야를 개척, 보급하셨는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현재 민조시는 어느 정도 보급되고 있는지?
중앙대 재학 시절부터 고전문학이나 전통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향가, 탈춤, 판소리, 풍물놀이에 나오는 우리말 장단가락과 춤사위는 모두 3•4•5•6조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민조시를 구상했지요.
일본은 하이쿠를 비롯해 정형시가 5종이나 됩니다. 중국도 오언율시, 칠언율시 등 몇 종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시조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서양 여러 나라들도 두세 종의 정형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제PEN대회에 가보면 의외로 자유시보다 정형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나라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정형시 종류를 늘려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들었지요.
우리말 소리와 장단은 3수리가 기본입니다. ‘천부경’(天符經)에 나오는 천(天:○)•인(人:△)•지(地:□) 사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3을 첫 바탕으로 3•4•5•6 모두 18자(하이쿠는 17자)를 기본으로 정형시를 쓰는 것입니다. 거듭장단(추임새)을 허용해 자유시 감각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1990년부터 ‘민조시’(民調詩)라고 이름을 붙이고 강의를 통해 보급해 왔습니다. ‘自由文學’ 창간호부터 민조시 신인상을 모집해 현재 ‘月刊文學’과 함께 등림(登林)한 시인만 1백여 명이 넘습니다.
제가 쓴 민조시 한 편 소개할까요? 제목은 ‘여여’(如如)입니다.
‘풀머리(3)/깨어있는(4)/동녘산자락(5) 청시울가에,(5)/홀로/나/잠드네.(2+1+3=6)// 달머리(3)/잠빛 밝은(4)/서녘강허리(5) 금물목샅에(5)/나 홀로/눈뜨네.(3+3=6)
7. 1991년부터 계간 《自由文學》을 발행하고 있는데 1956년 발간했다가 1963년 폐간한 과거의 ‘자유문학’을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나요?
그게 좀 아쉬운 부분입니다. 당시 ‘자유문학’에 관여했던 모윤숙, 김광섭 선배와 가깝게 지냈는데, 판권을 받아두지 못했네요. 그때는 월간이었고, 지금은 계간이니 이어간다는 의미도 어색하겠지요.
아시다시피 문학지를 지속적으로 발간하려면 많은 희생이 뒤따라야 합니다. 저도 강의료, 원고료, 출연료 등 수입의 대부분을 잡지 발간에 쏟아부었습니다. 30년 동안 한 번의 결호도 없이 발간했다는 사실에 저 자신도 놀랄 정도입니다. 오래전 발행인 자리는 딸(신새별, 아동문학가)에게 양도했고, 편집권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대표 겸 편집인 자리는 아직도 지키고 있습니다.
8. 문림(文林)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기고 많은 상도 받았는데,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는 상은?
아무래도 청마문학상과 시문학상(시문학사 제정)이겠지요. 청마문학상은 청마문학회와 통영시에서 공동으로 주는 상인데, 상금액도 큽니다. 청마 유치환 선생과는 개인적 인연도 있습니다.
제가 중앙대 2학년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고교 시절 문예반 지도 교사였던 박종우 선생이 명동의 ‘갈채 다방’에서 저를 청마에게 인사시켜준 적 있었어요. 저는 내심 청마로부터 칭찬과 격려 말씀을 기대했지만, 아무 말 없이 엄숙한 표정만 짓고 있는 겁니다. 실망이 컸으나 나중엔 원래 과묵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는 오해를 풀었습니다.
그분 일화가 있습니다. 술좌석에서 어떤 시인이 언쟁을 벌이다 술잔을 청마 이마에다 던졌습니다. 술잔에 이마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데, 청마는 피를 닦지도 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술잔을 계속 기울였다고 합니다. 기가 질린 시인이 엎드려 사과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옵니다. 한 마디로 청마는 대인(大人)이었지요.
9. 문림(文林) 원로의 한 분으로서 후배 문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시를 쓰는 데 무슨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교보다 혼이 중요하지요. 그저 열심히 성실하게 쓰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혼을 가꾸려면 많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도 매일 대중교통으로 사무실에 출퇴근하면서도 하루 3권 이상 독서를 합니다. 사무실에 출근해서는 종일 ‘국악방송’을 틀어놓고 듣습니다. 하루 8시간 ‘국악방송’을 들으면, 책 한 권 이상 읽는 효과가 있습니다. 특히 민조시를 쓰는 데는 국악 장단 전통 가락과 판소리가 많은 도움을 주지요.
저는 건강을 위해 세 가지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자가용을 타지 않습니다. 걷는 게 보약이지요. 목욕탕에 가지 않습니다. 피부병 감염이 두려워서지요. 또 이발소에 안 가고 미장원으로 갑니다. 미장원이 더 위생적일 것 같아서입니다.
[출처] [인터뷰] 민조시(民調詩) 개척자/ 신세훈|작성자 munhaksoo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