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수) -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기 위한 성숙함]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2:5)
주님은 우리가 산 돌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임재를 모신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기를 바라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건축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선한지에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은 오직 건축에만 집중하신다. 집을 짓는 사람이 관심하는 것은 개별적인 건축 자재가 아니라 어떤 재료든지 이 건축물에 맞도록 잘려야 한다면 그는 그것을 자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물에 적합하도록 잘리기보다는 온전한 개인으로 남아 있기를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자이신 하나님은 오직 그 건축물만 관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건축물에 맞도록 하나님께 '잘려야' 한다. 포도 열매를 얻기 위해 필요없는 가지치기는 필수과정이다.
이천 년 전에 주님은 속히 오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지만(계22:20),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신령한 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 세계에 어디를 가든지 거의 모든 도시에 그리스도인들을 찾을 수 있다. 어디에서나 거듭난 산 돌들이 무더기를 쌓여 있지만, 신령한 집으로 지어진 곳을 보기 어렵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굴러다니고 있다. 그들은 어떤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그곳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다른 곳으로 간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모든 것을 못 마땅히 여기며 비평한다. 그들 자신 외에는 모든 것이 틀렸다고 말한다. 옳은 사람은 그들 자신뿐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대체 누구와 함께 건축되어 있는가? 그들은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도 함께 건축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모두 혼자일 뿐이다.그리스도와 함께 옛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음의 주인이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건축물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긍휼을 앙망하며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 예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건축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단지 영적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건축물 안에 들어가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위에 한 돌이 있고, 우리 아래에 또 다른 돌이 있으며, 우리 앞뒤와 좌우에도 돌들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건축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너무 길다면, 주님, 건축에 적합하도록 우리를 잘라 주십시오. 우리가 너무 짧다면, 주님께서 더해 주셔야 합니다. 오! 주 예수님, 우리로 주님의 임재가 있는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게 하여주옵소서!"
이렇게 되려면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아는가? 베드로는 우리가 갓난아기들처럼 순전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한다고 말한다(밷전 2:2).
여기서 구원은 "믿음의 결국 곧 혼(souls)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그러므로 이 구원은 지옥 불에서 구원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구원은 우리의 괴팍함에서 구원받고, 우리의 개성에서 구원받으며, 우리의 성질에서 구원받고, 우리의 습관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건축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괴팍한 습관, 이상한 행동, 타고난 성질, 타고난 가계의 저주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건축에 맞도록 준비될 것이다. 아멘!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 와서 다른 사람들, 특히 인도하는 이들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세균들을 퍼뜨리는 것이며, 이 세균들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 이러한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이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된 영성은 반드시 건축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것이 분열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를 건축하는 것인가? 건축은 우리의 영성이 참된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자인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천국에 가도록 자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한다고 말했다. 자람의 결과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괴팍한 본성에서, 우리의 자아에서, 우리의 험담하는 혀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건축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구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순전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건축에서 고립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괴팍함과 타고난 자아와 태도 때문에 고립되어 있다. 우리에게 얼마나 구원이 필요한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구원이 아니라 내적인 구원이다. 이 구원은 순전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그 생명의 성품으로 자라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 예수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교회가 옳든 그르든 그것은 저의 일이 아닙니다. 형제들이 옳든 그러든 그것은 저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 다만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가 기꺼이 이렇게 기도한다면, 우리는 폭로되고 빛 안으로 이끌릴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가르침으로 감히 다른 사람들을 유죄 판결하고 있지만, 그들의 모든 면을 비추는 등불인 더 확실한 말씀은 갖고 있지 않다.(벧후1:19)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주님을 부르고, 살아 있는 말씀을 기도로 먹고 배우고 있는가? 그리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등불이 되어 우리 안을 비추고 우리를 폭로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주 예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이 일에서도 틀렸고, 저 일에서도 틀렸습니다. 주 예수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살아 있는 말씀의 빛 비춤에서 비롯된 이러한 기도로 날이 밝아지고, 샛별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를 것이다. 그때 예수님의 모든 어떠하심이 우리 안에서 비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타고난 생명, 우리의 괴팍함, 우리의 자아, 우리의 모든 습관을 죽이실 것이다. 아니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임을 알게 되고 결국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지나간 옛사람의 허물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옛사람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죽은 후에는 새 피조물임을 안다. 할렐루야, 이전 것은 다 지나갔다! 우리는 이제는 내 의견이 없다. 우리는 다만 건축물에 적합한 살아 있는 성장하는 산 돌들이 되어야 한다.
모든 우리의 옛사람은 패하여 졌고, 지금은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전 것들은 어떤 것에도 쓸모가 없고, 새 사람으로 오직 건축에만 적합하게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계시가 맑아지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철저히 폭로하셔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시기를 바란다.
그럴 때라야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성장하게 하셔서 우리 안에서 참된 건축이 있게 하신다.
우리는 건축되어야 한다. 생명의 성장이 없이는 건축이 있을 수 없다. 생명의 성장은 예수님을 우리 안으로 더욱더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할 때, 그분은 옛것을 제거하시고 새것으로 대치하심으로 우리에게 그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살아있는 돌들이 되어야 한다. 아멘! 내 안에 살아 계신 이는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