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여래신앙 요체를 담아내다
약사신앙 4~5세기 남인도서 출현
〈약사경〉 토대해…한국서도 성행
돈황에는 ‘약사경 변상’ 제일 많아
110여점 존재, 만당·오대서 절정
돈황 막고굴 제417굴 굴천정 후방에 그려진 약사정토변상도. 수나라 시기에 그려졌다.
대승불교가 사상적으로 성숙해가고 있던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의 사이에 수많은 대승경전이 나타났다. 이러한 불교경전의 출현은 새로운 신앙운동에 발맞춰 형식화된 전통불교를 붓다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불교혁신 운동으로 전대의 상좌부불교(소승불교)의 모순을 극복했다. 특히 공(空)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불교해석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기본 교리로서 중생제도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대중을 지향하는 불교임을 표방하였다. 이 대승불교가 석가모니의 존재를 초역사화·초인격화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 다른 ‘여래(如來)’, ‘붓다’로 바꿔 놓았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여러 성격과 정신을 실체화 혹은 형상화함으로서 약사·비로자나·아미타 등 여러 붓다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불교는 종교적 색채와 성격을 가진 종교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윤리적 불교가 종교적인 불교로 변화하는 과정 중에는 불상의 출현은 아주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불교를 말할 때는 필히 불상이 있는 불교를 연상하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의 불교와 붓다 전교 시대의 불교와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교리는 변하지 않고 있다.
불교와 다른 종교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불교는 붓다와 중생이 평등하며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사람이 된 것이며, 신이 아니며, 조물주나 만물의 주재자도 아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불상의 성립 배경과 불교사상의 변천은 곧 ‘윤리적’으로부터 ‘종교적’으로의 변화이며 초인격의 붓다를 숭배하는 대승불교 사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형성된 불교미술(변상도)이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우리의 탐구과제이다.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사랑받고 숭배돼 온 불상을 중심으로 본 연재를 이어 가고자 하며, 그 첫 번째로 현세이익을 추구하는 붓다인 약사여래 변상도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약사여래신앙의 연원
약사불의 전체 이름은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이며 또는 약사여래, 대의왕불, 의왕선서(醫王善逝), 12원왕(願王), 동방유리세계교주로도 알려져 있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과거 전광여래(電光如來) 재세 시, 어떤 한 브라만이 발보리심을 내어 중생을 구제하고 중증 환자에게 복리를 가져다줬다. 전광여래를 ‘의왕(醫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의왕은 각고의 수행을 통하여 홍법을 전파했으며 마침내 동방유리광여래가 됐다. 그의 두 아들 일조(日照)와 월조(月照)는 약사여래 신변의 양대 보살이 됐는데, 일광편조보살·월광편조보살 또는 일요보살과 월정보살이라고도 한다.
약사신앙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퍼졌으며, 많은 사찰의 대웅전에는 삼세불을 모시고 있는데, 중앙에 석가모니불,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는 약사여래를 안치하고 있는 것이 통상적이다. 단독의 약사전을 두고 있는 사찰도 흔한 예이다.
인도 초기 고고학 발굴에서도 약사불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인도 후기 불교 이미지와 전적에서 아주 희소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서역 구법 고승들도 인도의 약사불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인도에서 약사 신앙이 그렇게 주요시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내외 학자들이 오랫동안 약사 신앙의 기원에 대해 논의해 왔으나 여러 쟁점이 있다.
중국에서 〈약사경〉의 초기 출현을 인도 불교사상에 기반을 두고 중국 도교 및 무의(巫醫) 관념이 결합돼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가장 초기의 〈약사경〉과 약사신앙은 4, 5세기에 남인도에 나타나 6, 7세기 인도 북부와 카슈미르로 퍼졌거나 카슈미르에서 나타난 다음 중국에 소개됐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약사경〉의 기원에 대한 학계의 합의된 정설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약사경〉은 비교적 늦게 출현한 대승경전으로 경문은 대략 5000자로 구성돼 있다. 석가모니 붓다가 비사리국(毘舍離國) 음수(音樹)에 머무르고 계실 때 문수보살의 청에 의해 여러 보살·비구·천인·호법 등에 설한 내용이다. 약사여래가 동방세계에 불국토를 건설하여 유리광국이라 하고 그 세계의 교주가 된다. 그리고 12가지 큰 서원을 세워 일체중생의 질병을 치료하며, 다시 무명의 고질적인 병까지도 치료하겠다고 서원한다. 12대원은 일상생활의 매우 현실적인 소망을 담고 있어서 약사신앙은 일반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신앙체계로 자리잡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돈황 막고굴 제220굴 북벽에 그려진 약사정토변상도. 초당 시기에 조성됐다.
약사도상과 약사경변
돈황 막고굴은 약사여래 도상 즉, 이미지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독존상, 군상, 약사설법도, 약사경변 등이 있다. 경변화는 경전에 의거해 그려진 회화작품으로 주제가 뚜렷하고 내용이 선명해 스토리의 흐름이 없는 독존상이나 설법도와는 구별된다. 돈황에는 ‘약사경 변화’가 110점이 있는데, 수대 4점, 초당 2점, 성당 3점, 중당 23점, 만당 32점, 오대 32점, 송대 9점, 서하 10점이다. 약사신앙은 만당에서 오대에 절정을 이뤘고, 송과 서하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돈황 막고굴의 수대와 초당시기의 약사경변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수대 ‘약사경 변상’
수대의 ‘약사경 변상’은 막고굴 제394·417· 433·436굴 4곳에 분포돼 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약사경 변도’로 혜간본(慧簡本) 〈관정장구발출과제새사열반경(灌頂章句發出過罪生死涅槃經)〉을 근거로 그려진 것이다. 수대 약사경변상의 내용은 간단하며 아직 초보적 발전 단계이다. 설법도의 구성은 중앙에 약사불, 양측에 일광·월광보살 또는 8대보살을 배치하고 있다. 약사경변상의 주요 특징은 12약차(藥叉)대장이 약사 속명의 등륜이나 긴 채색 번을 들고 있다. 약사불은 지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직 출현하지 않은 약사정토를 묘사하고 있다. 그려진 위치는 일반적으로 굴의 천정이나 문에 있으며 주요한 위치는 차지하지 않고 있다. 대응하거나 상관된 위치에는 ‘아미타변상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수대의 ‘약사경변’ 신앙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그림①)
막고굴 제417굴 약사불은 중앙에 결가부좌로 앉아있으며, 수인은 약기인을 하고 있다. 양측에는 4존의 보살이 연화대에 서있는데, 이들은 망자를 맞이하는 약사 8대 접인보살로 관음·대세지·문수·미륵·약왕·약상·무진의·보담화이다. 세인이 임종할 때 약사불을 명호하면 8대보살이 바로 망자를 받아들인다.
8대보살의 출현은 당시 약사정토 신앙과 서방정토 신앙의 밀접한 연관성을 반영하며, 8대보살이 망자를 서방정토나 동방약사정토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성당시대 이후로는 8대보살이 ‘약사경변도’에서 더 이상 눈에 띄게 묘사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 당시 약사신앙에 대한이 관념이 변화하고 신심이 옅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약사불 앞에는 등(燈)이 있는데, 이는 위험을 해소하고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일곱 겹의 등이다. 등의 양측에는 여섯 명의 약차장군이 있는데, 보관을 쓰고 천의를 입었으며 무릎을 꿇고 등을 밝히고 있다. 신번(神幡), 연등(燃燈)은 ‘약사경변’의 중요한 특징으로 수대의 ‘약사경변’에 자주 등장하며 그 후에도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는데, 표현의 형태는 점차 진화해 더욱 웅장·화려해지고 다채로워졌다. 이 ‘약사경변도’ 앞에는 흑, 백, 홍의 3색으로 구성된 높은 누대(플랫폼)가 있으며 그 앞 중간에는 다채로운 급류가 앞쪽으로 흐르고 양측에는 많은 연꽃이 둥둥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당 시기 약사정토변상도
막고굴 제220굴 약사정토변상도은 가장 아름다운 약사경변이다. 이 굴은 초당 시기 적통(翟通)이 건조한 가족 동굴이다. 구성이 웅장하며 전경식(全景式, 파노라마) 동방약사정토를 대규모의 변상도로 그려졌는데, 성당 시기 약사경변도의 토대가 되는 작품이다. 이 시기는 대당(大唐)의 성세가 시작되는 시기로 정치적 안정, 경제 발전, 국태민안으로 예술과 종교가 개방적이고 자유로워 이런 걸작을 창출할 수 있는 좋은 시대적 환경이 마련돼 있었다.
경변의 하단에 있는 발문에 따르면, 이 벽화는 당대 정관16년(貞觀, 642)에 대운사(大雲寺) 율사(律師) 홍우(弘于)에 의해 제작되었다. 당시 유행한 〈약사경〉은 남조 유송(劉宋)의 혜간본(慧簡本)과 수대 달마급다본(達磨纘多本)중 후자에서만 약사칠불을 언급하고 있다. 이로 미뤄보아 이 벽화는 기본적으로 수대의 번역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그림②)
막고굴 제220굴 ‘약사정토변상도’ 중앙 연못에는 두 가지 색의 유리 보석궁이 있고, 약사칠불이 복련 좌대 위에 평행하게 일자(一字)로 줄지어 시립하고 있다. 칠불은 각각 수인을 취하거나 보물이나 염주 혹은 발우 등 지물을 들고 있다. 약사칠불은 동방 7불국의 각각의 부처님이다. 혹자는 약사불의 약함은 경전에 의거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약사불 발우형상은 수대에서 부터 비롯하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제220굴 약사정토변은 발우를 들고 있는데,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중원에서 온 것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약사불은 지물을 들지 않고 설법인을 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비교적 경전에 가깝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