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 허목(許穆)의 미전체(眉篆體)와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 미수(眉叟) 허목(許穆)
허목(許穆, 1596~ 1682)은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낸 조선시대 후기의 유명한 문신이며 유학자, 역사가이다. 그는 또한 교육자이자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기도 했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 호(號)는 미수(眉叟)이다. 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다. 별호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미수 허목은 명필로도 유명한데, 그의 글씨는 '미전체(眉篆體)'라는 특유의 전서(篆書)로 호평을 받았으며, 현대의 서예 평론가들도 조선적인 자주적 전서체를 선보였다고 평가한다. 일찍이 이계(耳溪) 홍양호(洪養浩, 1724-1802)는「척주동해비」의 전서 글씨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지금 동해비를 보니 그 문사(文辭)의 크기가 큰 바다와 같고, 그 소리가 노도와 같아, 만약 바다에 신령이 있다면 그 글씨에 황홀해질 것이니, 허목이 아니면 누가 다시 이 글과 글씨를 쓰겠는가?”
-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의 전설 - '파도를 막는 신묘한 힘'
척주동해비는 삼척시 정상동(정라진 앞 만리도)에 조선시대에 삼척부사로 있던 허목(許穆, 1595~1682)이 현종2년(1661)에 직접 글을 써서 세운 비석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삼척지역에는 홍수와 해일이 빈번했고, 한번 발생하면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손쓸 방법이 없을 때가 많았다. 조선 현종 1년(1660년) 허목(許穆, 1595~1682)이 삼척 부사로 부임했는데, 이듬해(1661년) 7월 큰비가 내려 물난리가 나면서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됐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삼척부사는 간성군(지금 고성군 간성읍)에서 곡식 2천 섬을 급히 실어와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그런데 이듬해(1662년) 7월 또다시 거대한 폭풍우에 해일(海溢)이 덥치면서 논밭은 물론 마을까지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
자연재해를 막을 방법을 고민하던 허목 부사는 단기간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해, 염(念)과 결(訣)로 바다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고자 삼척 포구 언덕에 동해바다를 예찬하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세웠다. 그 후로 물이 십 리 밖으로 물러나면서 과연 해일이 잦아들었고, 사람들은 이 비석이 흉흉한 파도를 물리쳤다 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 불렀다.
그후 얼마가 지나서 어떤 사람이 '퇴조비'의 힘을 믿는 것은 미신이요 유교(儒敎) 법도에 어긋난다며 비석을 부숴버렸는데, 그때 마침 마을에 홍수가 다시 발생하자 사람들은 점점 더 비석의 신묘한 힘을 믿게 되었다.
심지어 1898년에는 동해 연안 마을에 ‘척주동해비’가 사라졌다는 헛소문이 퍼지면서 홍수나 해일이 일어날 징조라 생각한 사람들이 보따리를 꾸려 산이나 높은 언덕으로 대피하는 소동을 벌였고, 인근 고을 수령들이 사람을 보내 삼척의 척주비가 무사한지 확인할 정도였다고 한다.
척주비는 조선 조정에서 인정해 준, 단 하나의 신통력 있는 글이라 한다. 비문 내용 중에도 '성난 바다와 물·불·바람을 다스린다'는 주술적인 내용이 있어, 이 글을 소장하면 재앙을 물리치고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이 있다. ‘척주동해비’의 신통력을 믿고, 조선시대에도 많은 선비들이 이를 모사해 지니거나 탁본하여 집에 간직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서첩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금도 유명인사나 기업가, 일반인들까지 탁본이나 인쇄본을 액자로 소장하고 있다(현재는 손상을 우려해 탁본이 금지되었음.)
[그 후 세월이 지난 뒤에 비(碑)가 파손되고 나서 다시 조수의 피해가 있게 되자, 숙종 35년(1709) 다시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비석 원문에는 허목이 다시 써 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김구용의 <척주지>(1848)에는 “1708년 비석이 부서져, 당시의 부사 홍만기가 사방으로 비문을 찾다가 문하생 한숙의 처소에서 원문을 구하여 모사 개각한 것을, 1709년 2월 부사 박내정이 죽관도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고 되어 있다.
현재 척주동해비는 속초의 정상리 육향산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정라진 앞 만리도에 세워 놓았던 것을 비가 파손되자, 숙종 36년(1710) 이곳으로 옮겨왔다.]
- <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
<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는 임금의 은총과 허목 부사의 치적을 기린 글로, 척주동해비와 조금 떨어져 있으며 동해비와 같은 의미로 세운 것이다.
허목이 중국 형산(衡山)에 있는 하나라 우(禹)임금이 쓴 전자비(篆字碑, 일명 하우비夏禹碑) 77자 가운데 48자를 모사(집자)하여,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이 글을 목판에 새겼다. 이것을 오랜 기간 읍사(邑司)에 보관해 왔는데, 고종 광무 8년(1904) 왕의 명에 의해 칙사 강홍대, 삼척군수 정운석 등이 죽관도에 석각하여 돌에 그대로 새겨 넣은 것이다.
비(碑)의 전면에는 해서체(楷書體)로 ‘대한평수토찬비’라 새기고, 측면에는 고종 41년(1904) 비석을 옮겨 세운다는 기록이 있으며 뒤에는 전서(篆書)로 된 48자의 비문(碑文)이 있다.
이 비문도 역시 ‘액운이 없어지고 평안해지고 신통하다’고 하여 영업하는 집 등에 걸려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의 비문 내용
척주는 옛날 실직씨 땅이요, 예라는 나라의 터에 있는데 州古悉直氏之地 在獩墟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700리를 가서 동쪽의 큰 바다에 임해 있다. 南去京都七百里 東臨大海
도호부사 공암 허목이 쓰다. 都護府使 孔岩許穆 書
(*悉直氏: 신라 때 삼척을 다스린 토호/ 獩; 옛날 우리 동북방의 나라)
큰 바다 끝없이 넓게 출렁이고 온갖 냇물이 모여드니
그 크기가 끝이 없구나. 瀛海漭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瀛海; 큰 바다)
동북쪽은 모래바다라 밀물 썰물이 없으므로
큰 못이라고도 이름하네.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沙海; 동해 해변은 바닥이 모래임/ 大澤; 동해를 말함)
쌓인 물이 하늘에 다다르고, 솟고 출렁댐이 넓고 깊으나
바다의 움직임에 음산함이 있네. 積水稽天 浡遹汪濊 海動有曀 (*浡遹; 물이 콸콸 솟는 모습)
밝고 밝은 해가 떠오르는 곳 태양의 문이기에
희백이 손님을 맞이하고 明明暘谷 太陽之門 羲伯司賓 (*暘谷; 해 뜨는 골짜기/ 羲伯; 요순 때 천지, 사시를 다스린 관리)
석목의 별자리요 빈우의 궁전으로
해는 본래 동쪽이 없다네. 析木之次 牝牛之宮 日本無東
(*析木; 십이차 중 하나. 28수 중 동방 尾箕斗 수의 세 별/ 牝牛; 기미수의 두 별)
교인의 보배와 함께 바다는 온갖 것들 받아들여서
크고도 넓게 흐르는구나. 鮫人之珍 涵海百産 汗汗漫漫
(*鮫人; 상체만 인간인 물고기로, 울면 눈물이 구슬로 변함./ 汗汗; 물이 크고 넓음/ 漫漫; 물이 넓게 흐름)
기이한 물건이 서로 어울리고 상서롭게 너울거리며
덕을 일으켜 나타낸다. 奇物譎詭 宛宛之祥 興德而章 (*譎詭; 기이한 물체/ 宛宛; 굽히고 펴짐)
조개는 진주를 잉태하여 해와 함께 성하고 쇠하며
대기 따라 기운을 올리거나 날리고 蚌之胎珠 與日盛衰 旁氣昇䬠
머리가 아홉인 천오와 한 발 달린 괴이한 기는
폭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 天吳九首 怪夔一股 颷回且雨
(*天吳; 범의 머리, 인간의 몸을 가진 바다신水伯/ 夔기; 流山에 산다는 동물)
아침 해가 떠올라 달리며 도는 모양이 황홀하나
자주빛 붉은빛이 싸늘하고 出日朝暾 轇軋炫煌 紫赤滄滄
(*朝暾; 아침에 떠오르는 해/ 轇軋; 轇輵(달리며 도는 모양)의 오자 / 炫煌;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함/滄滄; 하늘이 넓고 푸른 모양)
보름날 가득 찬 달이 물 거울에 둥글고 신령스러이 비쳐서
뭇별들의 빛을 가리네. 三五月盈 水鏡圓靈 列宿韜光 (*三五; 보름날 밤)
부상의 사화와 흑치의 마라와
촬계의 보가며 扶桑沙華 黑齒麻羅 撮髻莆家 (*搏桑; 扶桑(동해의 신목. 그 아래서 해가 돋는다)의 오자/ 沙華; 동해에 있는 나라/
黑齒; 이가 검은 남쪽 종족 麻羅; 남쪽의 나라/ 撮髻; 종족 이름/ 莆家; 부족)
단만의 굴, 조와의 원숭이와
불제의 소들은 蜑蠻之蠔 爪蛙之猴 佛齊之牛 (*蜑蠻, 爪蛙, 佛齊; 모두 종족들 이름)
바다 밖의 잡다한 종류로 무리가 다르고 풍속도 틀리지만
자리를 같이하며 함께 자라네. 海外雜種 絶黨殊俗 同囿咸育
옛 성인의 덕이 멀리 미치고 온갖 나라에 거듭 번역되어
먼 곳까지 복종하지 않음이 없네. 古聖遠德 百蠻重譯 無遠不服 (*百蠻; 모든 나라. 오랑캐는 지나에서 남들을 야만시한 말)
크고도 빛나도다. 큰 다스림이 드넓고도 크니 (*重譯; 거듭 통역 /廣博; 드넓음)
교화가 오래도록 드리우리라. 皇哉凞哉 大治廣博 遺風邈哉
(이하의 글은 후대에 첨가한 것)
현종 2년에 허목 선생이 이 지방 태수로 와서 동해비를 전서체로 짓고 정라도에 세웠으나 풍랑에 부딪쳐 물에 잠기니, 허목 선생이 이를 듣고 다시 써 주었다. 이제 새것과 옛날 것 두 가지 본을 참고하여 큰 글자는 옛날 본을 사용하고 작은 글자는 새로운 본을 사용하여 새겨서 죽관도에 세운다.
顯宗二年 先生來守是邦撰篆東海碑 立於汀羅島 爲風浪激沈 先生聞而改書. 今參考兩本 大字用舊本 小字用新本 刻竪于竹串島.
때는 숙종 35년(을축년) 봄 3월. 時 上之三五年 乙丑春三月也
글; 무 애(한국선도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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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미수 선생은 역학 등 동양철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글과 글씨는 예사롭지 않고,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글씨를 보면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