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으로 예수님을 표현할 때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느님이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예수님은 지상 생활 동안 분명히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으며, 우리처럼 일생생활의 삶들을 영위하셨고, 매 순간 무엇이 아름다운 삶인지 물으며 끊임없이 영적으로 집중하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 다 이루었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거룩하고 숭고한 삶을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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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는 우리가 모두 걸어야 하는 삶의 여정과 그 종착지인 죽음의 문제를 ‘침묵’이라는 소설로 그려냈습니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소설은 초기 예수회 신부님들의 선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회 사제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9 년 가고시마 현에 도착을 합니다. 서양 문물에 관심을 보인 일부 지배계층의 도움으로 예수회 신부님들은 성공적으로 일본에 선교를 했습니다. 하비에르 신부님은 일본을 떠날 때 일본이 동양의 그리스도교 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1582 년 일본인 가운데 15만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597 년 필리핀에서 온 한 스페인 선박의 선장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스페인 제국이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먼저 첩자로 보냈다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정책을 바꿔 가톨릭 신자를 십자가에 처형시킵니다. 이 배후에는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개신교 국가였던 영국과 네덜란드의 일본 선점을 위한 갈등과 음모가 숨어 있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어 숨어 지내면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서 천주교 신자들은 줄어들어 갔습니다.
1603 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을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국가 통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예수회 신부님들과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1614 년 이에야스는 모든 천주교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일본인들은 모두 불교인으로 등록하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때 칙령을 따르지 않은 6,000 명은 고문을 당하거나 순교를 합니다. 에도 시대 막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후미에’라는 목조나 금속제로 된 판을 만들었고 그 판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천주교인으로 의심되는 이들은 이것을 밟고 지나가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처형당했습니다. |
이 소설에 세바스찬 로드리게스는 일본에 잠입해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박해 상황에서 자신의 스승인 크리스토바오 페레이라 신부님이 배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막부는 페레이라를 배교 시키기 위해 그를 직접 고문하지 않고 천주교 신자들이 고문 받는 것을 보게 합니다.
로드리게스를 일본에 잠입시킨 일본인 키차지로는 유다처럼 로드리게스 신부님을 막부에 팔아 넘깁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님은 동료들이 순교하는 것을 보면서 무기력하게 이를 보고 있는 자신에게 실망을 합니다. 막부는 일본 가톨릭 신자들을 해변에 묶어 놓고 파도가 이들을 서서히 죽도록 방치합니다. 자신을 따라 천주교인이 된 일본인들이 시커먼 파도에 익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합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려 일본에 왔지만, 정작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괴로워합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님은 체포당하고 자신의 스승이었던 페레이라 신부님과 대면을 합니다. 페레이라는 이제 그의 심문관이 됐습니다. 페레이라는 로드리게스 신부님에게 ‘후미에’를 밟도록 종용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시간이 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이 나라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늪지야. 네가 이 늪지에 어린 묘목을 심을 때마다 그 뿌리는 썩기 시작하고 잎은 마를 거야. 우리는 이 늪지에 그리스도교라는 묘목을 심고 있어’.
로드리게스는 자신이 배교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딜레마에 빠져 하느님께 외칩니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로드리게스는 ‘후미에’ 를 바라본다. 그때 하느님이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넨다.
‘밟아라. 밟아라. 나는 누구보다도 너의 발이 겪을 고통에 대해 알고 있다 밟아라.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인 사람들을 위해 너는 밟는 것이다. 너의 행위는 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더는 행위다’.
로드리게스는 이 침묵의 미세한 소리를 듣고 후미에를 밟는다. 그리고 감금되었던 일본 가톨릭 교인들은 풀려난다. |
숭고함
예수님은 사막에서 40 일간의 단식과 묵상을 통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당신이 가야 할 길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온전히 발견하는 행위는 숭고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숭고한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이 숭고한 길은 그 누구도 가본 적이 없기에 불안하고 두려운 여행이지만 숭고하기 때문에 갈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길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1756 년『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구분해 빛과 어둠을 통해 설명을 합니다.
아름다움은 빛을 통해 보고자 하는 대상을 인식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둠속에 있으면 그것이 아름다운지 추한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 그 자체는 그 강력한 정도에 따라 대상을 보려는 사람과 대상 자체를 모두 없애 버리는 신비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숭고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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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해변의 수도승’이라는 그림에서 이 숭고함을 경험하는 순간을 담아냅니다.
한 수도승이 거대한 바닷가에 서 있습니다. 새벽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림의 하단에는 수도승이 서 있는 좁은 모래사장의 경계만이 희미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수도승은 검은 망토를 입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상징하는 거대한 우주 앞에서 숭고함에 압도된 수도승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짙은 회색 하늘과 방대하고 흉흉한 바다는 수도승의 깊은 내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이 거대한 자연과 우주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로 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우리가 어떤 일에 몰입하면 나 자신이 사라지고 내가 몰입한 대상이 나 자신이 되어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당신이 누구신지, 당신과 하나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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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침으로써 하느님이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고 바로 우리 곁에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힘없는 약자들, 노동자들, 외국인들, 과부들, 미혼모들,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저버리고 계시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시면서 하느님의 신비와 숭고함이 인간들 안에 남아 있고 사람들에게 숭고함의 불씨를 지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하느님 또는 신은 인간 역사의 섭리를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분이시기에 높은 곳에만 계시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며,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이단이나 신흥 종교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갑니다. ‘골고다’ 는 ‘돌아올 수 없는 장소’, 즉 죽음만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괴로워하는 예수님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지만 예수님은 거절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누이고 예수님을 그 십자가 위에 포갠 뒤 양손과 발에 못을 박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단단하게 못 박힌 십자가를 서서히 들어 올립니다. 십자가를 직각으로 세우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절한 고통에도 로마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이 빨리 죽기만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래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9 시, 여섯 시간이 넘도록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의 심연으로 고통스럽게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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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이 구절은 시편 22 편의 구절입니다.
시편 22 편은 엘리 엘리 라마 아짜브싸니 אֵלִי אֵלִי לָמָה עֲזַבְתָנִי 아짜브싸니 라마엘리 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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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밑에 서 있는 사람들이 ‘엘로이’라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두고 봅시다.’ 라고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숨을 거둡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각자 살 길을 찾아 예루살렘과 도처에 숨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불리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세 번씩이나 부인하여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근본주의자들과 로마제국의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프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아픔으로 느끼고 그것을 해방하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고, 그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되신 곳에는 로마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네 명의 군인이 처형을 지켜보도록 되어 있는데, 그날 예수님과 함께 처형된 죄인이 두 명 더 있었기에 로마 군인만 열두 명이 현장에 있었고,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처형되었기에 로마 군인 100 명을 관리하는 백인대장이 있었습니다.
이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체포와 재판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묵묵히 지켜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거룩하고 숭고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는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증언합니다. 마르코 15 장 39 절.
예수님이 들려주시고 가르치신 아프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과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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