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
남편과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공원에서 전동차를 타고 오던 아저씨가 전동차 밖으로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가까이 다가가 ‘도와드릴까요?’하고 물었다. 많아도 오십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남자는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다며 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두어 발자국 떨어져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길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뛰어오더니 애쓰고 있는 남자를 부축해 전동차에 앉게 했다. 서둘러 뛰어오고 지체하지 않고 부축하는 것으로 보아 남자와 아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아주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횡단보도 앞에서 초록 신호를 기다렸다. 남편과 나는 마주 보고 열없게 웃고 말았다.
십 분이나 걸었을까 철심을 박은 내 왼쪽 발목에 콕콕 찌르는 통증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굵게 튀어나온 발등의 혈관들이 쉬어가자고 떼를 쓰고 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바빠도 별 재간이 없다. 어디든 앉을자리가 있는지 두리번거리게 된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 나무 벤치에 앉으며 남편이 내 발을 보다가 괜찮은지 눈으로 묻는다.
내 삶의 질을 바꾸어 놓은 사고는 십 년 전 눈부신 오월에 일어났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바닷가에 별장 지을 땅을 샀다며 가보자고 했다. 가뜩이나 아파트 화단에서 라일락 꽃이 진한 향기를 풍기며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는 계절이었다. 우리는 각자 냉장고에서 간식거리를 가져가기로 했다. 냉동실 깊숙한 곳에서 반 건조된 오징어를 꺼내 가스 불에 구워 비닐에 넣었다. 나는 옷장을 열고 그중 야한 연두색 점퍼와 바지를 꺼내 입고 검정 선글라스까지 썼다. 약속 장소인 아파트 정문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이 비행기 타러 가느냐고 놀려대며 깔깔거렸다.
땅은 바다와 가까운 시골 마을 초입인데도 지대가 높았다. 길 아래 낮은 곳에는 모내기를 앞두고 써레질해놓은 논들이 펼쳐져 있고 반대편 언덕 위에는 멋진 통나무 카페가 보였다. 저녁에 가면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서 남자 주인장이 색소폰을 연주한다고 알려주는 친구에게 야유를 보내며 일탈을 즐겼다.
오랜만에 나와 들떠 있던 마음을 주체 못 하고 있던 순간 발을 헛디뎠나 싶었는데 순식간에 논두렁 아래로 굴렀다. 정신을 잃고 얼마나 지났을까,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이상하게 통증은 느껴지지 않고 잠시 세상이 멈춘 것처럼 멍했다.
적막한 시골 마을에 119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생경하게 울려 퍼졌다. 구급대원들이 각목과 들것을 가지고 논두렁 아래로 내려왔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왼쪽 발목에 어마어마한 통증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구급대원들이 들것에 나를 눕히고 힘겹게 올라가던 논둑 비탈에는 돌미나리가 수북수북 돋아있었다.
가까운 시화 연합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연두색 바지를 사정없이 가위로 자르고 양동이로 소독약을 부었다. 발목은 점점 부어올라 종아리보다 더 굵어지고 진통제로도 통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면이 콘크리트로 마감된 벽들이 음산해 보이던 그곳은 긴급치료를 하는 외상 치료 센터였다. 간단한 수술로 처치할 수 없는 큰 부상이라며 임시로 소독만 하고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지독한 통증으로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발목에 박혀있는 철심과 볼트가 보였다. 내 몸에 차가운 쇳덩어리가 박혔다는 충격에 이어 어이없게도 백화점에서 사서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빨간 구두가 어른거렸다. 수술 후 3개월 동안의 지루한 재활 치료과정을 거치고 퇴원했지만 1년 가까이 휠체어를 의지해 살았다. 철심이 박힌 발목은 흡사 나무토막 같았다.
1년 정도 지나면서 발목을 움직일 때마다 ‘악’ 소리가 나던 통증은 차츰 둔해졌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절룩거리는 걸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한동안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려 아파트 안에 갇혀 살았다. 가까운 마트에 갈 때도 남편이나 아들이 없으면 나서지 못했다. 불편한 다리보다 마음의 병이 살아가는데 더 큰 장애가 되었다.
종일 거실 소파를 벗어나지 못하고 누워 지내는 날이 일상이 된 어느 날 커다란 택배가 도착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큰집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여러 겹의 포장지를 풀고 안에 들어있는 쌀, 콩, 참깨 등을 들춰보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두 분 모두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불편한 몸으로 농사지어 거둔 곡식들이었다.
해마다 받았으면서도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해본 기억이 없었다. 값을 어림해 좀 넉넉히 돈을 부쳐드리는 것으로 끝이었다. 보통사람들도 힘겨워하는 농사일이 어렵다고 불평하지 않았던 두 분은 속으로 얼마나 많이 참고 견디느라 안간힘을 썼을까? 발목 부상 정도로 세상이 끝났다는 듯이 엄살을 부렸던 내가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소파에서 벗어나 발목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만하라고 아우성치는 발목의 통증을 외면하고 한동안 스트레칭을 하고 일어나니 불편한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형님이 보내준 쌀과 콩을 넣어 밥을 하고 참깨를 씻어 볶았다. 퇴근해 돌아오던 남편과 아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더니 고소한 냄새가 현관 밖에까지 퍼졌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장애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걸음걸이가 좋아졌다. 걷기 전 발목 스트레칭은 일상이 되었고 일행 중 가장 나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걷는다. 나는 젊어서부터 내내 멋진 원피스와 예쁜 구두를 즐겨 입고 신었다. 원피스는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옷장을 차지하고 있으나 신발장에는 예쁜 구두들 틈바구니로 투박한 기능성 신발이 늘어났다.
사고가 난 2년 후 초여름이었다. 중학교 단짝 친구에게 딸의 결혼식에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옷장에서 제일 예쁜 원피스를 꺼내 입고 신발장 위 칸에 모셔놓은 빨간 구두를 바라보다가 기능성 신발을 신고 예식장에 도착했다.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식장 로비에서 친구들의 시선이 내 신발에 쏠리는 것을 느꼈으나 늘 있는 일이어서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예식이 끝나고 모두 횟집으로 이동해 소주잔을 기울이며 학창 시절 추억을 회상했다. 며칠 후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향에 살면서 자주 만나는 동창 모임에서 원피스 차림에 투박한 신을 신고 온 내가 화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며 내 발목 부상에 대해 알려주고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며 전화를 끊었다. 친구들에게 서운한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전 같으면 아마 나도 그랬을 것이다. 평생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오만하게 살아왔다는 반성을 하게 한 사건이었다.
발목의 통증을 늘 달고 살면서도 누가 물으면 괜찮다고 말한다. 부상이 아니라도 어디든 한 두 곳 일상생활이 불편한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결혼식에서 만났던 친구들도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할 것이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왔던 친구들도 지금은 무릎이 아파 낮은 구두를 신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멋진 구두를 신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한참 서서 바라볼 정도로 부럽다.
휠체어에서 넘어졌던 남자는 어떤 상태일지 마음이 쓰인다. 수술 후 1년 동안 휠체어에서 지냈던 나처럼 재활 치료 중이기를 기도해본다. 아직은 온전치 않지만, 나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반듯하게 걸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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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럼요, 반듯하게 보행할 그런 날이 기대됩니다. 수상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