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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제23대 순조(이공)의 여자들 ㅡ
순원왕후 김씨!
후궁 1, 자녀 1남 5녀
순조!
정조와 수빈 박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리크라테스가 왕들을 평가해보면,
정조가 A+였다면 순조는 Dㅡ 정도였다. 간신히 F를 면했다.
조선왕조가 급격하게 사양길에 접어든다.
순조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 왕이었다.
11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대왕대비마마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
정조 24년의 치적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규장각의 권한을 축소하고 장용영도 폐지하고 사도세자의 신원 회복도 없던 일로 만든다.
천주교 박해도 심하게 하고 노론 중 벽파를 중용하고 실학자 등 남인들을 축출한다.
수렴청정 3년 만에 정조가 한 것을 깡그리 도로아미타불로 만든다.
왜 정순왕후가 그렇게 했을까?
15세에 66세 된 영조와 혼인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죽기 1년 전까지 친정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아~
빨리 간 정조가 한스럽다. ㅠㅠ
모든 유기체는 생노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조선왕조가 드디어 정조를 끝으로 급격하게 병들기 시작한다.
굳이 <세도정치>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시키고 싶지 않다.
하긴 강한 부정은 긍정임을 알 것이다.
세도정치는 우리가 외척정치로 알지만 원뜻은?
'정치의 도리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라는 의미다.
이런 긍정적인 의미의 세도정치가 물구나무를 서서 외척정치가 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가 왜 외척을 그리 단속했는가 이제는 알 것이다.
지금까지 태종을 욕했던 사람들은 반성해야 한다.
뭐 잡고...^^
순조시대부터 철종까지 거의 60년을
외척 안동 김씨가 주연..
풍양 조씨가 조연..
그리고 경주 김씨와 순조의 어머니 반남 박씨가 extra가 되어 조선왕조를 말아 먹었다.
아니, 말아 드셨다.
존댓말을 써야 후환이 없다.^^
순조!
다행히 아들 하나는 잘 두었다.
효명세자(1809~1830) 이다.
그래서 리크라테스가 F학점을 주려다가 한 단계 올려 주었다.
효명세자,
1827년 대리청정 기간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벌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했으나 22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깝다!
효명세자가 죽었을 때,
순조는 '하늘이 아들을 뺏어갔다'고 하면서 '조선이 곧 망할 것'이라고 한탄을 한다.
ㅡ 순조실록 31권 30년(1830년) 7.12
순조는 알았을 것이다.
더 이상 왕권이 신권을 어찌할 수 없음을...
순조가 죽어 왕위는 효명세자 아들, 손자인 헌종에게 양위 된다.
고작 8살 짜리 어린아이에게...
그러니 어찌 왕이 신하들과 외척에게 아니 휘둘리겠는가?
ㅠㅠ
리크라테스가 순조에게 왕의 학점으로 Dㅡ를 준 것은 효명세자 같은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인정점수이다.
순조, 35년 동안 용상에 앉아서 뭘 생각했을까?
한심이가 아니고 두심이다.^^
탑을 쌓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쉽다.
순조에 대한 교훈이다.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
정조 13년(1789) 5월에 안동 김씨 김조순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조순 :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조(正祖)의 깊이 알아줌을 받았다.)
순원왕후 김씨는 삼간택을 앞두고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간택이 늦어져 순조 2년(1802년) 10월에 왕비가 되었다.
이때 김씨는 14세, 순조는 13세였고 자녀는 1남 5녀를 두었다.
워낙 김조순이 유명하기 때문에 그녀 자신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지만, 조선 역사에서 사실상 수렴청정을 2번이나 한 유일한 왕비이기도 하다. 사실상 헌종, 철종 시기의 20여년은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재위 후기로 갈수록 건강이 나빠진 정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고, 자신이 25년간 구상해온 사업에 큰 차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솔직히 정조 시기의 정치는 정조 1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체제였고, 정조가 갑자기 사라질 시에 고작 11살 밖에 되지 않은 세자(순조)가 정국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정조는 세자에게 후견인이 필요함을 느꼈고 자신이 그토록 혐오해 온 세도정치에 손을 대게 되었다. 시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노론 명가 안동 김씨 가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김조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원조이시다.
그 결과물로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는 정조 24년, 그러니까 1800년에 2월 26일 초간택을 통해 궁에 들어왔고 같은 해 윤 4월 9일 재간택되어 순조의 정비로 내정되었다.
이때 이미 정조는 '간택이 굳이 필요 있느냐?'라고 말할 만큼 간택을 요식행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순조와 순원왕후가 혼인하는 것을 보기 전인 6월 28일에 승하했고, 이 문제는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 김씨에게 넘어갔다.
벽파 일각에서는 시파의 입장을 취한 안동 김씨의 딸이 내명부를 관리하게 된다는 것을 몹씨 불안하게 여겼고 이른바 '대혼을 훼방 놓을' 계책을 꾸미게 된다.
* 대혼(大婚) :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
벽파는 사도세자 죽음을 지지했고, 시파는 죽음을 반대했다.
순조 1년 권유가 소를 올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순원왕후와 순조의 혼인에 딴지를 걸었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선왕 정조가 사실상 확정지은 일에 대놓고 반대하긴 어려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진 못하였다.
이 때 정순왕후 김씨는 순원왕후를 들일 것을 확정지었고 김조순을 불러 "대혼이 완전히 결정되었으니 종사의 억만년 경사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오. 경사스럽고 다행스럽소.
경신년 재간택 때 선왕이 기뻐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니 감회를 진정시킬 수 없소." 라고 했다.
(나중에 어처구니가 없어지지만...)
그리고
김조순을 사실상 국구(임금의 장인)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겨우 30대 중반인 김조순을 장용영 대장, 병조판서 등에 제수하면서 우대했고 이런 대비의 모습에 벽파는 대혼에 더 이상 반대를 하기 어려워졌고 순원왕후는 1802년 10월 왕비가 되었다.
순원왕후는 순조가 병이 들자 효명세자와 정사를 논의하는 등 정치적 감각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친정 아버지 김조순과 친정 오빠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순원왕후가 다시 역사에 중요한 자리에 서게 된 것은 1834년 11월 순조가 죽고, 고작 8살인 세손 헌종이 즉위해 수렴청정을 맡게 되면서였다.
세손의 친모인 신정왕후도 있었지만 왕실의 큰어른이 수렴첨정을 하는 것이 관례이고 신정왕후는 이 당시엔 명목상 왕비가 아닌 '세자빈'이었으므로 당연히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았다.
순원왕후는 김유근 등 친정 안동 김씨 가문의 오라비들을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 정국 운영에 나섰다. 안동 김씨 가문을 우리 가문, 왕가를 내 가문으로 표현한 것이 순원왕후 어찰의 특징이다.
헌종이 이후 친정을 할 때 친위군을 강화하고 안동 김씨를 내치자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며 헌종과 갈등 관계가 심했다. 순원왕후 언문 어찰에서는 그가 헌종이 죽기 며칠 전엔 손자를 폐위하기를(!) 바랐고, 그가 죽자 '거릴 낄 것이 없어서 속 시원하다'(!!)고 여겼다는 대목도 있다. (이런 우라질 할매가 있나?)
184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헌종이 승하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그녀는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철종)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고 순조의 아들, 즉 양자로 삼았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확립시킨 장본인이지만, 본인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민생을 걱정하며 친정의 지나친 권세를 꺼리는 모습도 보였다고 하는데 글쎄...
그러나...
그녀의 친정이 바로 세도 정치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될 수 없었다.
예컨대 철종의 왕비를 간택할 때도 그녀는 친정에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말고 간택을 하면 어떨까'하고 편지를 보냈고 "우리 가문에서 이번엔 왕비를 내지 말자"는 의견을 냈지만 김좌근의 싸바싸바로 의견을 굽혀야 했고 결국 왕비로 간택된 것은 안동 김씨인 철인왕후였다.
지속적으로 탐관오리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염려하고 지속적으로 '너희들 부패하면 안된다, 내가 다 보고 있다!'라고 경고하면서 국가의 기강을 잡으려고 노력은 열심히 했는데 효과는 미미했다.
여러모로 한 나라의 (임시긴 해도) 국가원수로서의 명분상이든 실제로든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여인이었으나 일가 친척들의 농단에 넘어가는 모습 등을 보면 너무 순진했고,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서 조선왕조를 그르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라면 친손자이자 국왕이었던 헌종까지도 경계했던 일은 진정으로 지나친 모습이었다.
자긍심과 절제력은 있었으나, 좁은 안목으로 조선 최악의 민생혼란을 야기한 대비였다. 그래서 1811년 홍경래의 난도 일어난다.
그녀는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고, 수렴청정을 끝난지 5년 뒤인 1857년 69세로 창덕궁에서 사망하였다.
순원왕후 김씨!
안동 김씨의..
안동 김씨에 의한..
안동 김씨를 위한 여자였다.^^
지금까지 쭉 읽어오면서 짜증이 일어났을 것이다. 순조와 순원왕후를 정리하는 리크라테스도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절제된 마음으로 정리를 했다.
원래 망하기 직전에는 그 모양새가 다 비슷하다.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 생각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한 마디로 잘나가는 집안은 화목하고 넉넉하고 걱정이 없는 등 모두 비슷하지만, 잘 안되는 집구석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아 천차만별이란 현상을 담은 법칙이다.
UC~~
리크라테스 배.
흥망성쇠興亡盛衰!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다.
영어 표현이 재미있다.
Ups & Downs!
"위로 아래로"
이제 내리막을 타고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마지막 왕인 순종까지...
리크라테스,
신명나게 글을 써야 하는데 도통 기분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자제력을 발휘해 왕비열전을 이어간다.
쓰라린 가슴을 안고...
읽는 밴친들도 글을 읽으면서 흥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나?
마무리는 해야지.
기쁜 역사도 우리 역사요,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다.
그러니 우리가 안고 가야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