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이야기 3
삶의 곡선
김재희
기다리던 비였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화학섬유가 닿으면서 튕기는 정전기처럼 파팟거릴 정도로 건조하던 터에 빗방울 소리는 몹시 반가운 손님이었다. 일기예보의 비 소식이 하루 낮을 흐렸다 개었다 하기만 하다가 잠자리에 들쯤에서야 한두 방울씩 투덕거리는 소리로 시작한 것이다. 이불 깃을 끌어 올리며 내일은 촉촉한 땅에 갖가지 씨앗을 뿌리리라는 기대를 품고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순간순간 훤한 빛을 뿜어내는 번개와 천둥에 잠을 깨고 말았다. 이 밤중에 웬 천둥 번개인가. 원래 봄비는 조근조근 오는 비 아니던가. 움트는 새싹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의 배려라고 생각했던 봄비의 연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비였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여러 번, 억세게 쏟아지는 비구나 싶더니 금세 점점 불어나는 개울물 소리가 잠결에 얼핏얼핏 귓전에 울렸다. 괄괄거리더니 콸콸거리고 그러다가 무섭게 흐르는 물소리는 그냥 물소리만은 아니었다. 어느 것도 용납지 않을 듯할 힘을 가지고 있는 무법자의 힘이었다. 농사가 아닌 그저 재미삼아 가꿔 볼까 하고 터를 잡아 뿌려 논 비료와 거름들을 몽땅 다 씻어버리겠구나 하는 염려로 그만 잠이 깨어 버렸다. 이른 새벽에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출입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제는 평평하던 마당에 도랑이 하나 생겨 있었고 집 앞 바로 앞에 만들어 놓은 화단에도 위에서 밀려온 흙에 묻혀 버렸다. 작년에 얻어다 심어 놓은 채송화 씨를 힘들게 받아 뿌려 놓았건만 그만 다 쓸려 나가버렸으니 어쩌면 좋은가. 그만 허망한 마음으로 문밖을 오락가락했다.
그렇게 쏟아지던 비는 아침을 먹은 후부터 서서히 개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쏟아졌다 갤 적마다 불어나는 물은 싯누런 황토를 실어다 여기저기에 퇴적해 놓아서 엉뚱한 모양의 마당을 만들어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처럼 이상한 현상이 생겼나 싶어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뒷산을 향해 올라가니 아직도 개울물은 무서운 기세로 흐르고 있었다. 살짝 휘어져 있던 곳에서는 많은 양의 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옆 밭을 뭉뚝하게 쓸어내 버렸고 애써 심어 놓은 담배 밭은 비닐 속의 흙들만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아직 다른 작물은 그리 많이 심지 않았지만 담배는 거의가 다 모종이 끝난 상태여서 담배 밭 피해가 컸다. 저걸 어쩌나 싶은 마음에 담배 밭을 서성거리다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개울물이 불어나면서 허술한 곳으로 물줄이 터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뚫린 물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들어갔고 밭갈이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져지지 않는 엉성한 흙들이 무한정 쓸려 내려와 쌓였던 것이다.
비가 더 계속되고 또다시 갑자기 물이 불어나면 그 담배 밭은 깡그리 망쳐 버릴 것이다 생각하니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받았던 우산을 놓아 버리고 터진 둔덕을 막기 시작했다. 아무 연장도 없이 작업을 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돌이며 나뭇가지들을 주워다 열심히 메웠다. 금방 쫄딱 젖어 버린 꼴이며 넘어져 흙에 망쳐 버린 옷이며 흙탕물 튀어 배긴 얼굴이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터진 물줄기를 막아내자 흥건한 물속에서 숨쉴 구멍조차 막혀 막막해 하던 것들이 힘겨운 숨을 몰아세우고 난 뒤 평온을 찾아 가는 듯하다. 내 것도 아닌 남의 밭을 위해 뭐 그리 몸살이냐며 웃을지 모를 일이나 그래도 그렇게라도 해 놓으면 담배 모들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으리라는 마음에 누구의 것을 떠나서 그 어린 생명들이 제 몫을 다할 수 있게끔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때때로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참으로 약한 인간임을 실감하곤 한다. 갑자기 당하는 천재지변 앞에서 망연자실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거역할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곡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러는 예비하는 마음으로 그 곡선을 조금 유연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개울가의 둔덕처럼 미리 터지기 전에 손을 보았더라면 하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이미 터져 버린 물줄기를 늦게라도 바로 잡아 그 피해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걸 자신의 이해타산에 결부시키며 산다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니까, 나와 상관없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허술하게 대하는 타인과의 경계선에 허점이 생기고 이겨야 하니까, 부당한 대우를 받기 싫으니까 하며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아집이 생긴다. 그런 것들은 오롯이 다 자신의 삶의 곡선에 X, Y 축이 되리라. 그 축이 어떻게 이어지느냐에 따라 곡선의 모양이 이루어지는 것일진대 보기에 좋은 완만한 곡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선 순간순간 기폭이 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막상 어떤 일에 부딪히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이성들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일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의 판단과 자신의 일이었을 때의 판단이 같지 않음은 왜일까.
알게 모르게 내게도 그런 일들이 많았으리라. 그렇게 해서 흘러 보내고 떨어져나가 버린 흙들이 얼마일까. 그래서 푹푹 파인 자국이 많은 밭이고 굴곡이 많은 곡선은 아닐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남의 가치 기준에서 플러스의 존재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건 턱없는 욕심일까. 그래도 아직 남은 기록지에는 고운 곡선을 그어 보리라는 희망을 갖고 싶다
첫댓글 무주 이야기가 이렇게 곡진하고 아름답네요. 터진 둔덕을 막는 과정 자체가 김재희 수필가를 오롯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랜만에 들어 왔더니 무주 생활 2탄이 올라왔네요
작가의 수필을 쓰는 역량은 무주 생활로 부터 길러진것 같습니다 부러워요 애타심도 그렇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