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淸泠浦) 가는 길
<청령포 가기위해 건너야 하는 서강의 모습>
강원도 영월하면 단종유배지 청령포와 장릉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비운의 왕 단종의 혼이 배어있는 청령포로 떠나는 발 걸음이 왼지 무겁기만 하다. 조선왕조 6대임금 단종, 역사상 그 보다 더 비극적 삶을 살다간 왕이 있을까?
“천추의 원한을 깊이 품은채 /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는 단종의 어제시(禦製詩)가 듣는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리게 한다.
영월(寧越)은 편안하게 지나간다는 의미지만 그 날 유배 떠나는 노산군(단종)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장릉은 17세의 어린 나이로 사약을 받고(1457.10.24.) 떠난 단종이 묻힌 묘이다. 주변에는 정자각, 비각, 충신각, 단종역사관 등이 있고 단종묘에 얽힌 엄흥도 이야기도 빼놀수 없다. 매년 4월 청명에는 단종을 추모하는 단종문화제가 열린다.
장릉 앞에 있는 정령송(精靈松)은 남양주 사릉(思陵)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인데 단종 내외는 이별후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은지 수백년이 지난 뒤에야 소나무를 통해서 만나게 된 것이다. 또한 영월8경의 하나인 유배지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 싸여 있고 뒤에는 절벽이며 울창한 송림과 백사장이 절경이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는 왕방연 詩
“천만리 머나먼 길에 /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도다/ 울어 밤새 예놋다”
가 사약 받은 그날의 애처러움을 말해주고 있다.
<단종 어소>
- 세상사 인과응보인가?
계유정난때 고명대신 황보인, 김종서를 죽이는 등 수많은 피를 보고 등극한 수양대군 세조와 그 공신들의 그후 삶은 과연 어찌되었는가?
어린 조카를 죽여가면서 까지 권력을 잡았지만 수양대군은 말년에 온 몸에 종기가 돋아 괴로워 하다 재위 14년만에 죽었다.(야사에 의하면 문종 비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저주하면서 수양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고 전해진다. 그일로 세조는 문종비 형수의 무덤을 파헤치게 했다.)“내가 죽으면 빨리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쓰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더욱이 세자였던 도원군(의경세자)은 20세 어린나이에 요절했고 그 며느리 인수대비(의경세자 부인)는 20살에 남편을 잃고 한때 권력의 최상층에 섰으나 손자인 연산군에게 머리 받혀서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김종서를 철퇴로 때려죽인 양정은 말년에 세조에 의해 참수되었고, 왕후였던 한명회의 두 딸은 요절(예종 비 17세, 성종 비 19세)했다. 한명회 자신은 죽은 후 연산군때 폐비 사건으로 부관참시 당했다. 신숙주 아들 역시 요절했다.(큰 아들 ‘신정’은 어보위조 사건으로 참형, 둘째 ‘신면’은 이시애 난 진압중 피살 30세) 하나같이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 비운의 여인- 단종 비 정순왕후 송(宋)씨
왕후에서 하루아침에 노비신분이 된 정순왕후는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 청룡사 근처 초암(풀이나 갈대,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암자)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여인의 한(恨)이 장수(長壽)로 이어져서 문종때부터 7대에 결쳐 조선왕조의 영고성쇠를 생생히 목격하고 중종16년(1521)에 82세를 일기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세 번의 사화(무오, 갑자,기묘), 세조 두 아들 요절, 연산군 폐위, 폐비윤씨 사건, 한명회 두딸 요절, 부관참시 등등... 아마도 죽은 남편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 줬을까? 자신도 조금은 분이 풀렸을까? 현재 남양주시에 있는 사릉(思陵)은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한다는 뜻이라고 하며 능 주변 소나무가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349호 청령포 관음송>
- 죽은 후에 평가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말이 있다. 시체를 관에 넣고 뚜껑을 덮은 후에야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사람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면 어린 조카를 죽인 수양대군 세조의 후세 평가는 어떠한가? 그는 호패법과 직전법의 실시로 경제와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힘썼고 경국대전을 비롯해 다양한 편찬 사업에 착수하는 등 아버지 세종에 이어 조선전기의 르네상스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혈육을 제거한 비정한 왕이라는 오명에 가려져서 그의 치적은 빛이 바랬다.
한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멸문지화 당한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의 후세 평가는 어떠한가? 일신의 영달을 초개같이 버리고 절개를 지킨 사육신의 우국충정 선비 정신은 면면히 우리 역사에서 길이 추앙되고 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38세라는 짧은 삶을 살다간 충절의 표상인 성삼문 선생에 대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느끼는 것은 성삼문이라는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라며 “서양의 세익스피어.햄릿은 못 읽어도 성삼문에 관한 하나는 읽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민족은 정신이다. 정신없는 민족은 민족이 아니다.
- 역사는 왜 배우는가?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과거를 돌아보고 이 시대 교훈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세조는 기억하지 않고, 비운의 단종은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후세의 사람들은 `아무리 정당한 목표라도 옳지 않은 방법, 즉 패륜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단죄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동사강목에서는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반역을 저지른 者는 훗날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예우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 치적이 아무리 많다해도 정권의 정통성은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종의 애달픈 영혼이 깃든 청령포 관음송은 국가에 위난이 닥칠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불그스레한 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여 그 변고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보통의 소나무가 아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말했듯이 정치는 허업(虛業)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도 한줌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 사람들은 목숨까지도 버리다니...
오늘날 정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현대정치는 근본에서 보면 사람들의 투쟁이 아니라 권력의 투쟁이라고 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오늘은 어제의 산물이요, 내일은 오늘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멋대로 재단해서는 절대 않된다.
단종의 비극을 품은 청령포 가는 길, 오늘도 서강(西江)의 강물은 슬픈 사연을 싣고 유유히 흐른다. 초 여름의 후덥지근한 더운 날씨 만큼이나 청령포의 물 소리는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 듯하여 나그네의 마음을 상념에 젖게 한다.
(성범모. 여행전문 리포터 /경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