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탐대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양순
서예학원에 다녀 온 딸아이가 “엄마, 이것 좀 보세요.”하면서 화선지를 건네주었다. 받아서 펴보니‘소탐대실'이라 크게 쓴 글자가 제법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겨울방학동안 서예기초만이라도 배워 보라고 집 근처 서예학원에 보냈더니 딸아이는 즐겁게 다니고 있다. “배운지 한 달밖에 안됐는데 어떻게 이걸 써왔니?” 하고 물었더니“엄마께서 우리집 현관문에‘소탐대실'을 써 붙여야겠다고 하셨잖아요? 오늘 서예학원에서 글씨를 쓰다가 생각나서 써보았어요.” 딸아이의 말을 듣고는, 그 생각이 기특하기도 하고 며칠 전에 있었던 현관문 열쇠 사건이 다시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1월 셋째 주 일요일(2010년 1월 17일)이었다. 교회에서 낮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중등부 예배를 마치고 먼저 돌아온 딸아이가,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현관문이 안 열려서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가끔 오작동을 일으키던 디지털열쇠가 기어이 큰 사고를 낸 것이다. 카드를 대보아도 소용없고, 비밀번호를 눌러보니 버튼 한 개가 마비되어 있었다. 지난 가을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열쇠 기술자를 불러 열쇠를 부수고 집안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9만 원을 들여 새 열쇠를 달았는데 왜 또 고장이 난걸까? 날씨도 추운데 한 시간이나 밖에 서 있었을 딸아이를 생각하니 화가 치미는 것을 참고, 경기도에 있는 열쇠제작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기술자를 곧 보내겠다고 하더니 한 시간쯤 후에 기술자가 왔다. 지난 가을에 왔던 그 기술자였다. 그 기술자 얘기로는 우리 아파트 단지 1,250여 세대 중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열쇠를 부수고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생겼다. 우리집 열쇠와 똑같은 모델은 벌써 구식이 돼버려서, 지금은 회사에서 만들지 않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만약 똑같은 것을 구해서 부숴버린 부품만 새로 달게 되면 9만 원이 드는데, 신제품으로 열쇠 전체를 바꾸게 되면 25만 원이 든다고 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우선 보조열쇠를 달아 사용하고, 디지털열쇠는 우리열쇠랑 같은 모델이 구해지면 다시 달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몇 만 원이라도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디지털열쇠 없이 보조열쇠만 잠그고 지내는 것이 상당히 불안했다. 특히 집을 비우고 외출할 때면 흠집이 난 디지털열쇠를 보고 도둑이 기웃거릴 것만 같아서 사흘 뒤에 그 기술자를 다시 불렀다. 다행히 우리열쇠와 같은 것을 구해가지고 왔다. 열쇠를 달던 그 기술자가, 고장이 잦은 원인을 찾아보겠다며 현관문 안쪽에 부착된 기판을 뜯었다. 그런데 그동안 나를 애먹였던 열쇠고장의 원인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디지털열쇠에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건전지가 녹아 흘러들어가, 기판 여기저기에 눌러 붙어있는 게 아닌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문 바깥쪽 기계와 안쪽 기판사이에 신호를 전달하는 가느다란 선이 끊어져 있었다. 건전지 액이 묻어서 부식된 것으로 보였다. 그 순간 작년 여름에 건전지를 바꾸다가 건전지 하나가 녹아 있는 것을 보고, 보이는 부분만 닦아냈던 것이 생각났다. 이제 할 수 없이 열쇠 안팎을 신제품으로 다 바꾸어야만 했다. 열쇠 기술자가 “25만 원인데 23만 원만 주십시오.”라고 했다. 사흘 전 보조열쇠 값 7만 원까지 합해보니 30만 원이 든 셈이다. 거기다 지난가을에 들어간 9만 원까지 더하면 39만 원이나 된다. 너무나 큰돈이 현관문 열쇠에 들어간 것이 아깝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너무 속상해, 이 불경기에 열쇠 하나에 이렇게 큰돈을 쓰다니.” 내가 계속 투덜거리자 열쇠 기술자는 2만 원을 더 깎아주었다. 열쇠 기술자를 보내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건전지 회사들은 물건을 그렇게 허술하게 만들어서 소비자들을 이렇게 골탕을 먹일까? 천천히 기억들을 짚어보다가 ‘아하, 바로 그거였구나, 이런 경우가 바로 소탐대실이었네.’하고 혼자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온 것은 2006년 12월이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라서 깨끗하고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많아서 다 좋았는데, 현관문 디지털열쇠가 마음에 안 들었다. 원래 기계치인 나는, 디지털 제품에 대하여 못 마땅해 했었다. 기계 다루기도 까다롭고 내 생각에는 쓸 데 없다고 여겨지는 기능들이 많이 있는 것도 맘에 안 들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파트 현관문 디지털열쇠 역시, 문 여닫을 때마다 “열렸습니다. 닫혔습니다.”라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도 거슬리고, 문을 재빨리 여닫지 않으면 뭐라고 까탈을 부릴 것처럼 느껴져서 못마땅했다. 마치 지나치게 세련되고 똑똑해서 대하기 불편한 깍쟁이 같은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특히 싫었던 점은 3~4개월마다 건전지를 바꾸어 주는 일이었다. 8개나 되는 건전지를 교환하는 일도 익숙하지 않아 어려울 뿐더러 건전지 값이 만만치가 않았다. 한 번 교환할 때마다 6천 원 이상 들었다. 그때마다‘왜 이렇게 불편한 열쇠를 달아놓아 사람 힘들고, 쓸데없는 지출을 하게 할까?’하고 불평했었다. 어느 날 급하게 외출하려고 현관문을 여는데 “건전지를 교환해 주십시오.” 문 닫을 때 또다시 “건전지를 교환해 주십시오.”라는 소리가 그날은 유난히 거슬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건전지를 사러 대형마트에 갔더니 마침 세일가격에 파는 것이 있기에 여러 개를 사왔었다. 그리고 그 건전지를 여러 달 동안 사용했던 사실이 생각났다. 결국‘문제의 원인제공은 내가 했구나’하는 결론과 함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단돈 몇 천 원을 아끼려고 싸구려 건전지를 사용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여러 달 동안 열쇠 때문에 애를 태우고, 이번에 수십만 원을 날려버린 꼴이 되었으니 어이가 없었다. 괜히 열쇠제작회사를 탓하고, 문 닫을 때 “닫혔습니다.”라고 하거나 띠익띠익 소리가 나면 잔소리쟁이 열쇠, 망령난 열쇠라고 애꿎은 열쇠를 나무란 게 미안하게 되어 버렸다. 예민한 열쇠부품에 독한 건전지 액이 달라붙으니 제 딴에는 괴로워서 질러대는 비명소리였을 텐데 나는 전혀 짐작조차 못했으니 말이다.
빠듯한 가계부 사정에 맞추어 살림살이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들을 먼저 챙기게 되는 때가 많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소탐대실의 실수를 범한 경우는, 이런 종류의 일 외에도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앙생활에서, 또 나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모든 문제들 속에서 나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것들을 살피느라 크고 중요한 것들을 많이 놓치고 살아왔을 것이다. 이번 열쇠사건을 계기로 내 마음 그릇을 좀 키워가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딸아이가 정성껏 써준 ‘소탐대실’이라는 글자를 현관문에 붙여두고 볼 때마다 이번 일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긴다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소탐대실의 실수를 조금씩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현관문 디지털열쇠와의 신경전은 끝났다. 처음에는 내가 열쇠에게 불친절했고 이번에는 열쇠가 나를 제대로 한 방 먹여서 비긴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 나는 소탐대실의 의미를 깨닫는 좋은 교훈을 얻었고, 열쇠는 앞으로 최고급 건전지를 공급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이것 역시 피장파장이다. 이번에 새로 바꾼 신제품 열쇠는 건전지 수명을 훨씬 길게 하도록 개선되었다고 한다. 작년 이맘 때 회사에서 건전지 절약형 부속품을 달아줬는데, 그것보다도 기능이 더 좋아진 제품이라고 한다. 이제부터는 우리집을 지키느라 애쓰는 디지털열쇠를 소중히 여기고 최고급 건전지만을 대접(?)할 생각이다. 디지털열쇠도 얼떨결에 생긴 친구 보조열쇠와 함께 우리집을 잘 지키는 똑똑한 지킴이가 되어 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번에 열쇠가 꿀꺽 삼켜버린 금쪽같은 내 비상금은, 어느 일류 강사에게 특별수업을 받고 조금 비싸게 지불한 수강료쯤으로 여기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