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목이 많이 쉬웠습니다. 감기라기도 하고 알레르기라도 하고 해서 약을 먹고 있는데도 많이 좀 쉬어서 오늘은 평상시보다도 더 낮은 목소리로 말씀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신명기를 가지고 새벽에 우리가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제 마음의 마음을 이렇게 고민케 하는 게 있었어요. 신명기를 이렇게 볼 때마다 실제로는 하나가 아니라 대개 많았지만 그동안 제가 별로 고민해 보지 않았던 한 영역이 있었습니다. 그게 십일조입니다. 보통 십일조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성도들이 이제 마음을 닫고 귀를 닫아요.
여러분이 결론을 보면 아시겠지만 십일조에 대한 설교가 아니라서 그냥 편하게 잘 들으시면 돼요. 제가 깨달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과정에 인용할 뿐인 것이지 결말은 그거 갖고는 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귀 닫지 마시고 말씀 잘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성경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와 민수기와 신명기의 십일조에 관한 말씀을 보면 좀 차이가 나요. 성경을 좀 이렇게 집중해서 읽으신 분이라면 이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우리는 보통 수입의 10분의 1, 소출의 10분의 1을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모세의 5경에 보면 이 십일조에 대한 규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십일조에 대한 언급돼 있는 성경마다 좀 내용이 좀 다르게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십일조에 대한 말씀인데 똑같은 십일조에 대한 말씀인데 왜 차이가 날까요? 그것은 지불제의 종류가 여러 가지기 때문이에요. 제가 작년에 참고한 자료는 우리 교단에서 발간한 십일조가 알고 싶다는 책에서 제가 거의 가져온 내용이라 이 십일조에 관한 내용은 우리 교단에 차이가 없는 교단의 신학관이나 교리와도 괴리감이 없는 일치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걸 제가 말하는 게 아니라 정통적인 걸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편하게 말씀을 들으시면 됩니다.
모세 5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십일조는 세 종류가 있었어요. 먼저는 제1회 십일조가 있습니다. 제1회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주는 십일조입니다. 그리고 레위인들도 십일조를 드렸는데 레위인의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주어서 제사장들이 먹고 살도록 했어요. 레웨인을 위한 십일조가 제1 첫 번째 십일조입니다.
두 번째 십일조 제2의 십일조는 절기의 십일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반드시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라는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이때 축제의 절기 음식을 위해서 드린 것이 십일조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게 아마 친교의 십일조라고 될 거예요. 좀 더 좋게 표현하면 거룩한 교제를 위한 십일조 이게 두 번째 십일조입니다.
세 번째 십일조. 제3의 십일조는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에 있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드린 제3년마다 드린 십일조가 있는데 이것이 제3의 십일조 그리고 9조의 십일조인 거예요.
가끔 성도들 중에 유튜브에서 이상한 걸 듣고 왜 십일조를 구조를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그분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가 말씀을 비교하면 그분은 제3의 십일조를 보신 거예요. 그걸 보고 왜 십일조가 전액이 구제를 위해 지지 않습니까라고 말을 하는 거니까 그런 유튜버의 말들이나 잘못된 사상들은 접하지 않는 것이 여러분 아주 좋습니다.
제3의 십일조를 구제 십일조 그리고 돌봄의 십일조, 자손의 십일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각 지파별로 이때는 지파별로 십일조를 드렸어요. 그러니까 중앙에 십일조를 하는 게 아니라 각 지파에 십일조를 드리고 레위인도 아마 그 당시에 레위인이 가난했던 것 같아요.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이 세 번째 십일조를 썼습니다.
여기서 또 의문이 들었어요. 어떤 의문이냐 하면 십일조가 세 종류라면 당연히 지금 우리가 드리는 10분의 1이 아니게 되는 거예요. 통상적으로 우리는 10분의 1을 십일조로 드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엔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도 이 책에서 잘 계산을 해놨습니다. 레위의 십일조,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절기의 십일조 그리고 자산의 십일조를 합하면 총액이 30% 정도가 됩니다.
저도 이 사실 때문에 한때는 30%의 십일조를 하기 위해서 노력한 적이 있어요. 솔직히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은 하지 않아요. 그래도 하려고 제 기억에 아마 군목 시절까지는 이걸 제가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내가 말씀을 한번 지켜보자 이렇게 해서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그다음에는 제가 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럼 하지 않은 저는 잘못된 결정을 한 걸까요? 그 결과는 마지막에 나옵니다. 물론 지금도 10에 3조를 드리지는 않지만 그만한 액수가 교회 사역하는 데 또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지기는 합니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들어요. 어떤 의문이냐 하면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액수를 가난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을까 이게 또 이해가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돈이 필요하시면 이해가 되겠는데 과연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 113조를 내라고 했을까요?
이제부터가 제가 새벽에 깨달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왜 십일조를 요구하셨을까 10의 3조를 요구하셨을까? 첫 번째로는 복 주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14장 29절 하반절에 보면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너에게 복을 주시리라.
29절은 자선의 구조 십일조에 대한 부분인데 자선의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다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과 규례와 율법을 지키려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을 복 주시려고 그들을 축복하시려고 이것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하거나 물질이 필요하고 하늘 창고가 비어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모하고 지키는 백성들에게 복 주시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신명기 26장 15절도 자선의 십일조에 대한 부분인데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신명기 26장 15절. 시작.
원하건데 주의 거룩한 초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누리소서 할지니라.
자산의 십일조와 축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두 구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십일조뿐만 아니라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 말씀을 지키는 것은 축복과 연관되어 있어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축복은 물질적인 축복을 제한된 것만은 아니에요. 어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축복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신명기 11장 26절 27절입니다. 이것도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하나님은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시고 반대로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셨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축복과 저주가 있다는 거예요. 근데 왜 하나님이 이쪽에 저주를 두셨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받기를 원하셔서 저주를 둔 것이 아니라 이 저주를 보고 축복의 삶을 선택하라고 저주를 에발산에서 선포하신 거예요. 성경에 쓰여 있는 모든 좋지 않은 기사들, 또 아주 안 좋은 저주들은 하나님 우리가 저주받기를 원하셔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보고 축복의 메시지를 향해 나오라는 거예요. 축복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거예요. 이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서 저주를 기록해 놓은 것이지 저주가 임하기를 바라셔서 저주를 기록해 놓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받기를 원하는 분이시지 저주받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도 이 마음을 알아서 그런지 복 받기를 되게 좋아합니다.
여러분 제가 복을 갈구하는 게 잘못된 성경 사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계명과 율법은 복과 연관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건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단 잘못될 때는 언제냐 하면 내가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잘못된 삶을 구하면서 축복을 구하는 건 그건 틀린 거예요. 그렇지만 내가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고 기도하려고 하고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복을 구하는 건 얼마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가 형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과 저주를 함께해 주셨어요. 이 저주를 보고 저주의 길을 따르지 말고 축복의 삶을 살아라.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동일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축복의 삶을 살기를 원하셔요. 하나님께는 얼마나 많은 것이 있고 얼마나 풍요로운 것이 있어요.
그럼 왜 이것이 내 것이 되지 못할까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인 거예요. 모든 부를 그렇게 연결시켜 설교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 나에게 은혜 베푸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앞에서 말씀드렸던 이 축복은 반드시 물질과 연관되지는 않을 수 있어요.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도 하나님이 복이 임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직장에 선교사에게 자녀들만 모아놓은 직장이 있어요. 이 아이들이 언어를 잘하고 해외 경험이 많으니까 해외 영업을 하기 되게 유리한 아이들이잖아요. 다들 선교사 자녀들이에요. 그런데 정말 특출하고 정말 뛰어나요. 비록 선교사들은 물질을 보고 못 누리죠. 자동차도 30년 40년 된 걸 끌고 다니시더라고요. 물론 뭐 좋은 차를 끌고 다닌 분이 있지만 제가 아는 분은 30년 가까이 된 차를 끌고 다녀서 거의 매일 차 수리하는 게 일과일 정도로 그런 차를 끌고 다녀요.
왜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선교지로 간 거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그 선교사님에게 물질의 복은 부어주지 않지만 또 자녀의 복은 부어주셨어요. 그래서 이 자녀들이 잘 돼서 그런 직장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복 신앙이라고 하잖아. 이 기복 신앙은 하나님께 순종함 없이 복을 구하는 게 기복신앙이에요. 원래 기독교인들은 크리스타인들은 복을 구하는 게 잘못된 신앙이 아니에요. 이것도 유튜브에서도 엄청나게 이야기하죠. 순종하지 않고 구하는 게 그게 기복 신앙이에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하는 게 그게 기복 신앙이지 내가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닌 거예요. 여러분이 무엇을 다 구하셔도 되는 거예요.
두 번째로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0의 3조를 30%를 무려 십일조로 드리게 하셨을까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렇게 과정을 거쳐왔어요. 소유 이상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소유 이상의 삶 한번 따라 하겠습니다.
소유 이상의 삶
할렐루야 하나님은 소유 이상의 삶을 살길 바르셔서 10분의 3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리게 했던 거예요. 사람들은 다 소유에 매여 삽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 매여 살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부여에 매어 살아갑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없다고 해서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게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없어서 난 소유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게 거짓말이에요.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 매이고요. 부한 사람은 부에 매이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가난이 우리를 또 소유에 집착하게 만들고요.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부유해도 더 많아 그 부위에 집착하게 만든 거예요. 믿음이 있느냐가 없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하게 됩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도 소유에 매여 살아가고, 부자도 소유에 매여 살아가고 그러면 중산층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어떨까요? 그들도 여전히 소유에 매여 살아가요. 우리는 소유와 우리 자신을 분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이 십일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소유에 매여 살지 않기를 바라셨어요. 왜요? 소유에 매여 사는 사람이 얼마나 최악인 걸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이 소유에 매일 때 소유에 매 사람의 명령과 규례와 법들을 어길 것을 하나님이 아셨어요. 소유에 매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걸 아셨어요. 그래서 소유에 매이지 않도록 하나님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유 이상의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가나안 땅은 정말 풍요로운 땅입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면 가나의 풍요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누릴 수 있었어요.
근데 어떻게 말씀에 순종해요? 16절을 통해서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소유에 매지 않아야 말씀에 순종할 수 있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에 매이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던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여러분과 제가 소유에 매이지 않으면 이 땅을 풍요롭게 살 수 있어요. 왜 우리가 늘 가난에 허덕이고 부자는 부자대로 범죄하고 돈이 중산층은 중산층대로 악한 행위를 하며 살아갈까요? 우리는 그가 소유에 매였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 매이고, 돈이 적당히 있는 사람은 적당한 돈에 매이고,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 돈에 매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리길 원하는 이 땅의 풍요와 믿음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못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5월 셋째 주에 김광석 씨라고 우리 다니엘 기도회에서 간증도 하시고 섹소폰 연주자예요. 정말 잘 아세요? 이루마 다음으로 이 앨범이 많이 나간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정말 소유를 떠나 100% 다 떠난 건 아니지만 사는 모습이 얼마나 외로운지 이번에 제가 청소년 연합 캠프 때서 깨 때에 제가 절실히 깨달아서 정말 저 사람이 소유에 매여 살지 않는구나 5월달 좀 기대하셔도 돼요. 제가 그런 분들을 지금 계속 섭외하고 있어요. 올달은 제 설교를 많이 들었지만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성도들이 듣기를 바라셔서 제가 계속 지금 섭외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유에 매여 살다가 가나의 풍요를 못 누릴까 봐 걱정이 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가난에 들어가서 적과 불이 흐르는 이 가나안 땅에 풍요를 누리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셔서 결단을 지은 것이 바로 십일조였던 겁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저 사람이 돈에 매이지 않을 수 있겠구나 십일조 드리면 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 땅에 들어가서 그 소유에 매이지 않고 살 수 있겠구나 생각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이 십일조 제도를 만드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소유를 누리는 것과 소유에 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예요. 많은 성도들이 소유를 못 누려요. 오히려 소유에 매여 사는 거죠. 물질이 작은 사람은 작은 물질에 매이고요. 물질이 많은 사람은 물질이 많은 곳에 매여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의 풍요에 묻혀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지 않기를 바라셨어요. 그래서 십일조로 그들의 마음을 묶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소유 이상의 삶일까요? 첫 번째로 소유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것,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사용하는 것이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 삶입니다. 십일조는 소유를 자신의 뜻에 따라 사용하느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느냐를 좌우하는 기준이 십일조인 거예요.
어떤 목회자는 십일조를 가장 무서운 액수라 그래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또 공포스러워하고 가장 결정하기 어려운 금액이 십일조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만 드릴 수만 있으면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소유에 매이지 않고 이 소유를 기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소유 이상의 삶 이 삶을 먼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내게 주신 사명을 따라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가난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면서 다른 계명도 다 순종할 수 있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십일조에 의한 거예요.
여러분 돈이 가장 무섭잖아요. 우리 친척들과 싸우는 중심에 뭐가 있어요? 돈이 있어요 친구와 원수가 되는 중심에 뭐가 있어요? 돈이 있어요. 가족 간의 원수가 되는 것이 돈이 있어요. 여러분 명절이 되면 아들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가 형제를 죽인 일들이 꼭 기사에 오르잖아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이 소유에 매어 살아가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이 이 땅을 산 우리 잠시 사는 세상 소유에 매이지 않으며 살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그래서 11절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왜요? 이것만 잘 할 수 있으면 소유에 매여서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인 거예요. 이것만 잘 할 수 있으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를 따라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소유에 얽매여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십일조의 문턱을 꼭 넘어서야 됩니다. 사명 앞에 주저앉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의 물질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의 삶에도 물질에 문제가 있고요.
여러분 소유를 따라 살잖아요. 그러면 사명을 잃게 돼요. 목사인 제가 소유를 따라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명을 잃어버리더라고요. 이 땅에 많은 목회자들이 소유를 따라 살아요. 그래서 영혼 구원이라는 이 위대한 사명을 교회가 놓치도록 만들고 있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주셨어요? 죽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분 영혼 구원이 있어야 예배도 있을 수 있지 않나요? 영혼 구원이 있어야 천국의 삶도 있고 영혼 구원이 있어야 사명도 감당하고 영혼 구원이 있어야 믿음의 가정도 세우고 영혼 구원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도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지상 최대의 사명이 영혼 구원인 거예요. 목회자가 소유를 따라 살면 이 영혼 구현의 삶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제가 목회자들을 이제 면접해서 뽑겠다. 면접 뽑다가 보면 대부는 물질에 문제가 있는 걸 봐요. 제 생각에 이분은 아파트 사역을 주일 평일날은 이제 직장에다가 돈을 버니까 파트 사역을 하면서 그 나머지 부분을 채우는 거예요. 그러면 저보다 월급이 훨씬 많아지더라고요. 수요일 못 오고 못 오는 거예요. 토요일날도 직장 가니까 못 오고 주일 오전에 와서 예배드리고 가겠다 하는 거예요.
결국 제가 오지 않을 줄 알고 선택하게 만들었어요. 목사님 기도해 보고 오십시오. 당연히 안 오죠. 왜요? 이미 소유의 소유 때문에 사명을 망각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소유에 메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명을 잃어버린 위대한 교회의 사명. 만약에 교회가 소유에 메이잖아요. 그러면 사명을 잃어버려요. 소유에 메인 성도들이 많아지면 교회가 사명을 잃어버려요.
여러분 우리가 소유로 천국에서 평가를 받을까요? 사명으로 평가를 받을까요? 사명으로 평가를 받죠. 이 땅에 부자로 살았다고 천국에서 야 너 잘 살았다 하신 하나님이실까요? 그런 하나님이라면 이 십일조라는 제도를 안 만들었죠. 하나님은 우리가 소유가 아니라 사명을 따라 살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두 번째 소유 이상의 삶은 말씀과 함께하는 사람 삶입니다. 소유의 주장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에 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소유에 메이면 말씀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요? 소유 때문에 말씀을 계속 불순종하다 보니까 말씀이 안 보이는 거예요. 소유에 메이면 돈이 없는 것이 크게 보이고 가난한 것이 크게 보입니다.
여러분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소유 안 먹일까요? 아니요. 소유에 메여요. 자기의 가난이 너무 커 보여요. 그래서 맨날 내가 가난한 곳에만 꽂혀 살아가는 거예요.
부자들은 또 어떨까요? 부에 메여요. 그래서 자기가 맨날 부인 거예요. 꽂혀 살아가요. 이분은 어떤 차를 샀다 집을 어디로 옮길까?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에 한 번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생각은 하지 않고 거기에 꽂혀서 평생 나는 가난한데 여기에 꽂혀 살아갑니다.
소유의 면이면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사를 돈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돈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여러분과 제가 물질의 노예로 살기는 원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작은 교회는 돈이 없다고 돈이 없는 것에 매이고, 돈이 많은 교회는 돈이 많다는 것에 메예요. 가난한 성도는 가난에 메이고, 부자인 성도는 부에 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물질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살기를 하나님이 바라셨어요. 그래서 십일조를 요구한 거예요. 가나안 땅은 물질이 견디게 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지탱하게 하는 땅이 가나안인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지키고 지탱해낼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지키고 지탱하는 것도 물질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돈 없이 살아보니까 힘이 들더라고요. 대출로 살아보니까 사는 게 어려워요. 동생들에게 돈 빌려달라고 하는 것도 되게 부끄럽습니다. 그랬더니 마이너스 통장이 2개가 있어요. 그래서 감사한 게 솔직히 목사들은 마이너스 통장 천만 원도 못 만들어요. 근데 감사하게 저를 잘 보신 분들이 어떻게 잘 보는지 잘 모르겠어요. 외형이 이렇게 넉넉해서 돈이 많다고 본 건지 아니면 이제 성품을 본 건지 목회를 본 건지 잘 모르지만 그분들이 그냥 정말 그냥 해 주셨어요.
제가 부끄럽게 하나 더 만들어 주시면 안 돼요 했더니 목사님 걱정하지 마시고 오세요. 걱정하지 마시고 오세요. 그래서 제가 만들었습니다. 집을 사기 위해서 대출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돈이 없는 거예요.
저는 그래도 결코 돈의 지배를 받고 싶지 않아요.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결코 돈의 지배를 받고 싶지 않아요.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가 돈에 지배받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인생이길 바라시는 거예요. 그래서 십일조를 내라고 하시는 거예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의 삶이 이 땅을 지탱하게 만들고, 말씀의 삶이 이 땅의 삶을 승리하게 만들기 때문에 말씀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규정과 규례와 율법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지탱하게 하는 것도 말씀이에요. 소유가 여러분의 인생을 지탱하게 할까요? 아닙니다. 관계가 여러분의 인생을 지탱하게 할까요? 아닙니다.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 인생을 지탱하게 하는 건 말씀이에요. 어려운 삶을 견디게 하는 것도 말씀이고,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도 말씀이고, 여러분의 삶을 승리하게 하는 것도 말씀이에요.
말씀으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가나안 땅의 풍요를 이스라엘이 누릴 수 있어요. 여러분과 제가 말씀으로 자라야 이 땅의 삶을 누릴 수 있어요. 아니면 맨날 괴롭기만 해요. 여러분 괴롭죠. 저도 직장 다녀봐서 괴로운 거 알아요. 물론 여러분처럼 그런 직장을 20년 30년 다닌 건 아니지만 저도 1년 2년씩 다 직장을 다녀봐서 정규직은 아니고 알바이긴 하지만 길게 다녀봐서 거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물론 여러분하고 형편은 다르죠. 그건 1년 2년 있다 나오면 되지만 여러분은 3 40년 거기 계셔야 되니까 다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제가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성도는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을 지탱하게 만들 거예요. 말씀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요? 내 생각과 느낌과 판단이 아니라 말씀의 인도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말씀 듣다가 말씀을 읽다가 울어본 적 있습니까? 울어본 적 있어야 말씀으로 사는 인생인 거예요. 여러분 말씀 읽다가 무릎 꿇어본 적이 있으세요?
말씀 듣다가 한번 그 자리에 주저앉아 본 적이 있으세요? 그래야 말씀으로 사는 인생이에요. 말씀에 순종하다가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생각과 의견을 다 포기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을 떠난 나의 결정을, 말씀을 떠난 나의 삶을 한번 내려놓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가치관과 말씀이 충돌할 때 여러분의 가치관을 내려놓은 적이 있으십니까?
소유 이상의 삶, 환경 이상의 삶을 살려면 말씀과 동행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교회를 우리 인생을 지탱하게 하는 건 말씀이에요. 여러분 힘든 건 말씀이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매일 퇴근할 때 죽고 싶은 생각하는 것, 말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집안의 어려움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운 건 괴로움의 무게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이리 짜증 나고 힘든 것도 말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좋은 건 하나도 안 보이고, 나쁜 것만 보이는 것도 말씀이 없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들리게 했을까? 소유 이상의 삶을 살라는 거예요. 환경 이상의 삶을 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구하셨어요.
말씀과 동행할 때 소유 이상의 삶을 살게 되고, 말씀과 동행할 때 환경 이상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여러분과 제 앞에 북과 저주를 함께 두셨고요. 북과 사망과 화를 함께 두셨고요. 생명과 사망과, 축복과 저주를 함께 두셨어요.
우리가 복과 생명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말씀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말씀을 떠나면 소유에 집착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벗어나면 소유에 집착하게 됩니다. 성령을 거역하면 소유 이상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는 게 힘드시지만 니가 환경 이상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유 이상의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가 소유에 매여 사는 교회가 아니라 사명에 매여 사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주 예배에 오실 때 여러분 매여 있는 걸 좀 벗어버리고 예배당에 오실래요? 예배가 달라지는 여러분 매고 있는 칭칭 동이인 것을 벗어버리오시면 예배가 달라질 거예요. 그리고 필요한 말씀도 듣게 될 것이고, 예배 중에 위로가 한없이 내려지는 것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예배 드리다가 사명도 깨달돼 하나님이 이 직장에 다니게 한 건 우리 사장님을 전도하기 위한 것이구나. 하나님이 이 남편과 결혼하게 한 건 내 남편을 전도하기 위한 사명이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여러분 성도는 목회자는 사명이 되어야 목사처럼 성도처럼 살 수 있어요. 제가 사명을 쫓아가거든 좀 힘들어도 여러분 저를 칭찬하셔야 돼요. 제가 돈에 안 먹이고 사명에 매인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전부도 마찬가지죠. 돈에 매이지 않고 사명에 메이면 정말 멋진 성도입니다.
목장교회가 돈이 아니라 사명에 매어 사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