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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아니면 부정인데 사람들은 부정에 주목한다. 동서고금 거의 모든 철학은 부정의 철학이다. 긍정의 철학은 공자, 맹자, 원효, 율곡 정도다.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노자, 니체, 프랑스 철학은 모두 부정의 철학이다. 서점가 처세술 코너는 그 자체로 부정이다.
독일 관념론 철학은 긍정과 부정이 반반이다. 헤겔의 정반합이 그러하다. 그러나 분열된 독일의 통일과정이 긍정일 뿐 통일 후에는 패권을 추구하면서 부정주의로 변질되었다. 다윈의 생존경쟁 영향이다. 일본식 허무주의가 부정이면 유교의 군자론은 긍정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긍정주의에서 희소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유교의 긍정주의 정사론正邪論이 골수에 사무쳐 있어서 벗어날 수 없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나 중국의 찬쉐는 정사의 판단을 회피한다. 모든 것을 애매하고 모호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부정에 몰입하는 이유는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은 둘 다 필요하지만 아는 사람은 긍정으로 부정까지 통제할 수 있으므로 긍정에 주목한다. 전기차 원페달 드라이빙은 브레이크가 필요없다. 명필은 지우개가 필요없다. 부정은 바보 인증이다.
우주의 근본원리는 부정의 원리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부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러운 처세술은 철학이 아니다. 글라이더가 이륙한 이후로는 나쁜 것을 제거하는 부정만 가능하다. 추가로 동력을 조달하는 긍정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부정적 사고에 매몰되는 이유는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총을 주고 적을 조준하여 쏘게 하면 쏘는 병사는 15퍼센트 이하다. 훈련하면 80퍼센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긍정은 특별히 훈련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아홉살 때 인류가 다 틀렸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다. 30억 대 1의 대결이다. 당시 지구 인구가 30억이었다. 정사론正邪論은 그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굴복하지 않듯이. 남들 눈치 보고 묻어가는 처세술은 부정이다.
정사론은 오로지 정을 추구할 뿐 사는 필요없다. 헤겔의 정반합 물타기 필요없다. 구조론으로 보면 질에서 물꼬를 터주면 입자, 힘, 운동, 량은 에너지 낙차를 따라 자동진행이다. 흐르는 물은 스스를 물꼬를 찾아간다. 긍정만 필요하다. ‘예스’로만 대화해야 한다.
먼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상대방 질문에 대답하는 포지션에 서면 이미 ‘노’가 되어 있다. 부정은 인간이 갑이 아니라 을에 위치한 사태다. 이미 망해 있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눈이 아니면 긍정은 불가능하다. 우주는 에너지고 에너지는 그 자체로 긍정이다.
단 정상에서 눈을 굴리는 때만 그러하다. 기슭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긍정이 불가능하다. 아기는 긍정한다. 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긍정하는 상황은 세력에 포함되었을 때다. 종교가 긍정한다지만 헌금을 강요할 때만 그러하다. 보통은 사탄을 부정한다.
동성애 비난, 이교도 비난, 공산당 비난, 음주흡연 비난, 성생활 비난 거의 비난 밖에 하는게 없다. 왜?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실력이 없고 세력에서 밀려나고 환경이 나쁘면 긍정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철학은 실력자가 세력을 얻고 환경이 좋을때 하는 것이다.
철학이 고픈 배를 채워주지 않는다. 철학에서 돈이 나오지 않는다. 철학은 도구를 가졌을 때, 기운이 있을 때, 무리가 모였을 때, 물이 들어왔을 때 그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간단하다. 1+1=2다. 이게 되는 사람은 진작에 뜨는 주식 샀고, 비트코인도 샀다.
인류의 90퍼센트는 1+1=2가 안 된다. 호르몬 때문이다. 총을 쥐어줘도 쏘지 못한다. 적이 나를 쏘는대도 쏘지 못한다. 윤석열한테 모욕을 당해도 맞대응 못한다. 그냥 당한다.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행하려면 철학이라는 이름의 훈련이 필요하다.
강자는 철학이고 약자는 처세술이다. 약자의 철학은 없고 강자의 처세술도 없다. 약자는 세력을 모아 강해지는 방법으로 철학할 수 있다. 긍정의 철학은 있고 부정의 철학은 없다. 프랑스철학은 처세술이다. 철학은 도구를 가진 사람이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이다.
칼이 있어야 무사의 철학이 있고 펜이 있어야 작가의 철학이 있다. 개나 고양이는 당연히 철학이 없다.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긍정의 철학
전쟁에 지면 긍정적인 철학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누가 졌지? 프랑스가 진 거지 어떤 프랑스인이 진 것은 아니다. 축구를 져도 한국이 졌지 내가 진 것은 아니다. 전쟁에 지니까 부정적인 호르몬이 나와서 부정적인 철학이 먹히는 거지 전쟁에 졌다고 내가 부정적인 철학을 가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보통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보다 집단의 방향을 말하는 것인데 전쟁에 지고 긍정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을 내가 본 적이 없다. 일본과 독일은 전쟁에 지고 경제동물로 변신했는데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철학적으로 망해서 여전히 서구 눈치를 보고 있다. 2류국가, 전범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사죄만 하다가 EU를 주도하지 못한다. 괜히 탈핵했다가 러시아에 털리는 중이고 독일의 탈핵은 이차대전 사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죄를 지었으니 착한 일을 해서 갚자는 소박한 생각이다. 일본도 정치적으로는 2류국가로 되어 위안부 사죄도 안 하고 실용주의로 요령을 부리다가 뒷방 늙은이 신세 되었다.
한때 일본이 인기가 있었지만 들여다보면 깡패인줄 알았더니 착하네. 예의도 바르고. 과잉 복종. 일본은 아직도 이차대전 패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겉으로는 정상국가를 외치지만 그런 구호를 외친다는 사실 자체가 비정상국가라는 뜻이다. 위안부 문제와 독도문제를 정리하지 못하면 정상국가화는 안 된다.
푸코의 헛소리는 그냥 헛소리니까 논할 가치가 없다. 완전한 시스템은 우주의 팽창이나 생태계의 진화나 문명의 진보처럼 계속 전진한다. 물고기는 꼬리의 힘으로 전진하고 집단은 민중의 힘으로 전진한다. 완벽한 시스템은 대중이 뭉치게 해서 에너지를 끌어낸다. 구조주의 하는 푸코 말이 맞다면 구조론은 필요가 없다.
푸코 부류의 빡대가리는 세상에 널려 있다. 그냥 자기가 빡대가리라고 고백하는 거. 기독교인들의 긍정적 마인드는 동물의 세력본능에 의지하는 것이다. 쪽수가 많으면 인간이 자신감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겉으로 긍정을 팔아먹을 뿐 실제로 하는 행동은 모두 부정적 행동이다. 종교는 긍정이 불능이다.
종교인의 긍정은 목사를 긍정하고 돈을 바치고, 스님을 긍정하고 돈을 바치고, 무당을 긍정하고 돈을 바치라는 말이다. 돈 뜯어내는 기술에 불과하다. 종교의 긍정은 개인적 긍정이며 개인의 행복과 평안을 긍정하는 것이고 인류문명의 진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은 내세긍정 현세부정, 천국긍정 인류부정이다.
긍정을 가장한 부정이다. 너는 나를 긍정해라 우리는 인류를 부정한다. 이게 기독교다. 나는 나쁜 짓을 할테니 너는 나의 나쁜 짓을 긍정해라. 이 얼마나 사악한가? 아이들이 부모를 믿는 것은 좋은 것이다. 긍정은 집단의 세력본능이다. 아이들이 너무 일찍 부모에게서 독립하면 비뚤어진다. 세상을 적이라고 규정한다.
남을 제압하고 이겨먹어야 한다고 믿는다. 윤석열과 김건희다. 일반인처럼 복잡한 문제는 없는 셈 치고 살려면 이 사이트에 왜 왔지? 내 한 몸이나 챙기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소인배는 이 사이트에 오면 안 된다. 그건 번짓수를 잘못 찾아온 경우다. 소박한 개인의 긍정을 추구하면 안 되고 집단의 미래를 긍정해야 한다.
구조론은 집단의 리더가 되어 집단의 방향을 제시하며 미래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외부에서 물이 들어와야 하며 인터넷, 스마트폰, 인공지능과 같은 신기술에 편승해야 한다. 그게 없이 그냥 막연히 긍정하자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디오피아.. 긍정하고 개방해서 멸망. 튀르키예.. 긍정하고 개방해서 멸망
필리핀.. 긍정과 개방으로 멸망. 인도.. 긍정과 개방으로 멸망. 긍정하고 개방하다가 망한 나라가 200개국쯤 된다. 긍정 곧 멸망이다. 긍정해서 망하지 않은 나라는 대영제국과 신대륙을 차지한 미국 정도다. 사우디도 석유가 터졌으니 긍정할만 하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로 진출해볼만 한데 저런다. 하긴 혁명도 긍정이지.
실력이 없는데 긍정하라는 말은 개소리다. 구조론 자체가 부정이론이다. 구조론=마이너스=부정. 늘 하는 말이지만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은 무조건 부정이다. 사귈래요? = NO. 이게 맞다. 긍정하려면? 내가 먼저 질문해야 한다. 상대가 먼저 질문했다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귀자고 하면 부정이 맞다.
그래도 사귀고 싶으면? 조건을 걸어야 한다. 사귈래요? 서울대 합격하고 벤틀리 몰고 와서 그 말 다시 해보세요. 이게 정답이다. 긍정하라는 말은 먼저 질문하라는 말이다. 원래 우주의 법칙은 부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를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긍정해야 한다. 긍정하려면 도구를 장악해야 한다. 구조론이 도구다.
당연히 부정하는게 정상이지만 당연히 부정하는 넘은 실력이 없는 넘이다. 어떤 사람이 부정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실력이 없다. 노자는 부정했다. 실력이 없다. 예수는 긍정했다. 나와 같이 사람을 낚아보지 않으련? 적어도 사람 꼬시는 재주는 있다. 공자는 긍정했다. 실력이 있다. 긍정하는 사람은 대부분 실력이 있다.
일론 머스크가 요즘 부정에 빠져서 자식과 인연 끊고 개지랄 하고 있는데 아! 이넘이 이제 밑천이 바닥이 났구나 하고 알아채면 되는 거다. 조중동도 과거 80년대까지 이 정도로 부정적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조선일보가 좌파언론이었다. 이넘들이 돈 많은 방씨에게 신문사가 팔려가면서 부정적이 된 거다.
왜? 방응모가 금광에서 번 돈을 한 없이 꼴아박으니까. 조선일보에 가산을 털어넣었다. 얼마 벌었나? 못 벌었다. 자선사업 한 거. 부정적 사고를 할 수 밖에. 신문사 안 하고 땅사놨으면? 이승만 토지개혁으로 날아갔지. 방씨는 금광을 해서 정점을 찍었고 그때부터 내리막길. 회사를 운영했다면? 당연히 말아먹었다.
회사 해도 멸망. 땅을 사도 멸망. 신문사나 할 밖에. 어차피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실력이 없으면 부정이 맞다. 노인들이 부정하는 것은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그렇다. 질문이.. 나같이 실력도 없는 넘이 긍정은 해서 뭐하냐? 실속이나 챙기자. 이런 말이라면? 그런 퇴행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곳에 오면 안 된다.
축구모임에 와서.. 내가 축구 해봤자 국가대표가 될 것도 아닌데. 야구모임에 와서.. 내가 야구한다고 오타니 되냐? 택도 없지. 틀린 말은 아닌데 아무도 이런 사람과 친구 먹지 않는다. 허풍이라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답을 찾다보면 백명 중에 한 명이 확률로 성공하고 그 한 명이 나머지 백 명을 먹여살리는 거다.
실력이 있는 사람이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고 외부 환경과 연결하는 라인을 많이 만들면 확률적으로 성공한다. 실력 없는 사람은 긍정하든 부정하든 망한다. 종교는 개인에게 긍정하라고 하고 집단으로는 부정한다. 실력이 뒷받침된 긍정이 진짜 긍정이다. 개인이 아닌 집단의 방향전환을 긍정하는 것이 진짜 긍정이다.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고 문을 열고 개방하여 확률을 높이는 긍정이 진짜다. 막연히 기도만 하는 종교의 긍정은 사기다. 긍정은 세력본능이다. 본능이 그러하므로 긍정하는게 일단 맞다. 그러나 사귀자는 사람마다 긍정하면? 곤란해진다. 아기는 엄마를 긍정해야 한다. 아기가 엄마를 부정하면 죽는다. 선긍정 후부정이다.
1. 긍정은 사건을 새로 개설하는 것이다.
2. 사건 내부에 갇히면 부정만 가능하고 긍정은 불가능하다.
3. 게임을 개설하는 것은 긍정이지만 게임 안에서 틀린 길을 계속 부정하면 남는 길이 긍정이다.
4. 긍정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정을 부정하다보면 긍정이 남는다.
5. 글라이더가 동력을 획득하는 과정은 긍정이지만 활공과정에는 어긋난 길을 부정하는 결정만 가능하다. 나쁜 길을 막을 수는 있는데 올바른 길로 틀 수는 없다. 하강만 가능하며 재상승은 불가능하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우주가 부정에 의해 작동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빅뱅은 긍정이다. 만남은 긍정이며 만남 다음부터 부정하게 된다. 긍정한다는 것은 문을 열고 외부인을 만난다는 것이다. 만남과 탄생은 긍정이며 부정은 초등학교 입학할때부터 시작된다. 어리광은 끝. 내던져진 신세. 이후 별 꼴을 다 보게 된다.
프랑스 철학은 사기다
독일은 전범국, 영국은 제국주의 원죄국, 미국은 야만국, 소련은 공산국이다. 누가 전후 서구 지식인 사회를 주도하겠는가? 프랑스는 패전국이다. 얄궂은 일이다. 항복한 주제에 언성을 높이다니. 그들은 알제리에서 그리고 베트남에서 연거푸 소동을 일으켰다.
왜? 쪽팔려서. 프랑스는 20세기 최후의 반지성국이다. 남들은 식민지를 반성하고 정신 차렸는데 프랑스는 독일에 냉큼 항복해 놓고 혼자 열폭해서 사고 쳤다. 프랑스의 각종 기행은 마지막까지 노예를 부려먹은 남북전쟁 시기 미국 남부와 같은 문화 지체현상이다.
문명은 발전하는데 혼자 구석기로 퇴행이다. 탈근대 운운하는 프랑스 철학의 모든 페이지에 패전국 콤플렉스가 깊은 상처 자국을 남기고 있다. 프랑스 철학은 한마디로 패자의 변명이다. 항복한 반역자의 생존술이다. 힘이 없는 나라는 상대를 약화시켜야 한다.
중국의 이이제이 전술을 모방한다. 우리가 강해질 수 없으므로 상대를 해체시켜라. 구조주의를 표방하지만 결합의 구조는 없고 해체의 구조만 있다. 연결의 구조는 없고 단절의 구조만 있다. 왜? 그들은 대중이 미디어를 고리로 뭉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왜? 쪽수로 독일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절부터 인구감소국이었다. 독일 애들과 폴란드 애들이 무진장 낳아제낀다던데. 한국인들이 중국의 13억 인구에 쫄아서 은근히 스트레스받는 것과 같다. 프랑스 철학은 한마디로 신경증 그 자체다.
상식적으로 보면 전후 질서는 미국이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양키라는 물건은 원래 뇌가 없는 걸로 되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유명 피아니스트는 자신이 러시아계라고 속여야 연주회를 열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음악을 배웠다고? 웃기고 있네.
미국인들 스스로 미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촘스키 외에 유명한 학자 이름이 없다. 얘네들은 유럽에 열등감이 있어서 안 된다. 어쩌다가 항복한 프랑스가 서구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비겁한 항복자의 변명철학을 신주단지로 모시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게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주술의 언어인 점이다. 귀신, 영혼, 내세, 천국, 전생, 환생 따위는 종교어다. 종교어를 사용하는 사람과는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동물적인 종교본능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자와 무슨 대화를 해?
종교를 믿는 이유는 종교가 루틴을 제공하기 때문이고 인간이 루틴에 집착하는 이유는 환경과의 관계설정에서 자신이 갑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종교를 믿지 않으면 주변을 세심하게 살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항상 신경 써야 하지만 종교인은 자유롭다.
종교행동의 본질은 동물의 세력본능이다. 프랑스 철학은 철저히 권력적 기동이다. 내가 못 먹는 포도는 반드시 신포도여야 한다는 우격다짐이다. 긍정과 부정 중에는 부정을, 공격과 방어 중에는 방어를, 통합과 해체 중에는 해체를 찍어야 프랑스 철학 정답이다.
무엇인가? 그것은 주술사의 금기와 터부다. 원시 부족민의 터부와 금기를 랑그니 빠롤이니, 기표니 기의니, 가로지르기니 하며 근사한 냄새를 뿌려서 광을 내면 철학이 되는 것이다. 이것들 단체로 미쳤다. 전쟁에 지면 뇌가 파괴되어, 이렇게 정신줄 놓는 것이다.
전쟁에 이겨야 한다. 지면 프랑스 된다. 프랑스 철학은 한마디로 지식권력으로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것이며 정치인의 조종을 받는 대중이 미디어를 고리로 뭉치지 못하게 차단하라는 지령이다.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철저하게 권력적 기동인 것이다.
종교가 세력본능의 안정감이듯이 프랑스 철학이라는 주술도 원시 부족민의 금기와 터부를 현대어로 포장했지만 권력서열 행동이다. 그들은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고 강자로 규정된 정치권력, 미디어권력, 대중권력에 맞짱 뜨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게 철학이냐?
종교어, 주술어를 쓰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 우리가 가스라이팅 당하지 말아야 한다. 과학어를 써야 진지한 대화가 가능하다. 사회를 설명하려면 먼저 인간을 설명해야 한다. 인간 행동은 흥분, 호르몬, 긴장, 이완, 강박, 스트레스 같은 뇌과학 언어로 설명된다.
성찰, 진정성, 생태 같은 감성팔이 주술어는 원시 부족민의 금기와 터부를 현대화한 것이다. 쟤와 놀지 마라. 부정 탄다. 이런 말이다. 부정 타는 게 뭐지? 영역본능이다. 동물의 호르몬을 끌어내는 것이다. 성찰 진정성 같은 말 하면 안 되고 너 흥분했어. 이게 맞다.
인간이 사고 치는 이유는 흥분하기 때문이다. 호르몬 나왔다. 감성팔이로 인간을 격동시키려 하면 안 되고 우리는 흥분한 인간을 진정시켜야 한다. 게시판을 봐도 남의 일에 참견하며 밤 놔라 배 놔라 부화뇌동하는 언어만 넘치고 사람을 진정시키는 언어는 없다.
근대는 대중이 미디어를 고리로 뭉친 것이며 전체주의라는 이름의 폭주를 낳았지만, 폭주는 프랑스혁명이 먼저 시범 보인 것이다. 지들이 먼저 폭주했잖아. 물론 폭주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산업의 혁신이 일어나면 대중은 언제나 자기 자리를 찾아가려고 한다.
재질서화 된다. 대중은 물과 같으며 환경변화에 적응하며 대중을 적대시하는 것은 지식인의 마음속에 각인된 공포 때문이며 그 공포는 대중을 상대하여 이길 수 없다는 열패감 때문이며 열패감의 근원은 현장경험의 부족이다. 밑바닥을 겪어봐야 지성인 된다.
과거 스페인 인민전선 시기의 지성인들은 밑바닥을 알았다. 왕과 장군과 장교와 부사관과 졸병을 경험했기에 겁이 없다. 현대 지식인은 장교로 육성되었기 때문에 졸병들이 뭉쳐서 들고 일어날까 봐 두려워한다. 그들에게는 리더의 본능이 없다. 호르몬이 막혔다.
소쉬르니 라캉이나 하며 구조주의 언어학자가 떠드는 것은 2500년 전에 석가가 했고 노자가 했던 말 재탕이다. 긍정과 부정이 있는데 부정어법으로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계 내부 밸런스를 보지 못했다. 구조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다.
구조를 모르면서 구조를 떠들다니 구조의 달인 필자자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긍정과 부정, 연결과 단절, 빛과 어둠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만 강조한다면 핸들을 쥐어보지 못한 증거다. 엑셀레이트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을 둘 다 다룰 수 있어야 참 지식인이다.
열기는 있어도 냉기는 없다. 우리가 느끼는 냉기는 몸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즉 하나의 열기가 들어올 때와 나갈 때 다른 느낌인 것이지 열기 말고 냉기가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근본을 아는 사람은 하나로 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원본을 장악한 사람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다. 복제본을 가진 사람은 방어만 할 수 있다. 복제본은 닳고 낡는다. 아끼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다. 프랑스 철학이 보여주는 것은 원본을 갖지 못한 사람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아끼기 신공 행동에 불과하다.
원본은 무한복제되므로 아끼지 않는다. 우리가 프랑스 철학의 해체지향적 사고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이 많지만, 본질은 전쟁에 져서 쪽팔린다는 거다. 내가 졌으니까 너도 져라는 말이다. 패배자의 변명에 넘어가지 말자. 부끄러운 줄 알아야 사람이지.
패배자와 패배자를 부러워하는 지갑 주운 자의 덤앤더머 코미디가 아는 사람을 눈물짓게 만든다. 정신 차리자. 우리는 가속과 감속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방어만 하고, 해체만 하고, 기죽이는 말만 하는 자는 지식인이 아니다. 대중을 두려워하는 자는 비인간이다.
프랑스의 악행
이차대전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튀르키예와 이디오피아가 한국전쟁에서는 선두에서 가장 열심히 싸웠다. 왜?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남들이 열심히 싸울 때 짱박혀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쪽팔려서 면피하려고. 한심한 놈들!
한국도 별로 한 것이 없다. 뒤늦게 반일에 목숨 걸었다. 웃기셔! 면피하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뭐. 프랑스는 이차대전 승전국인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서 동료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식민지들과 좋게 끝나서 영연방이 있다.
프연방은? 프랑스는 모든 식민지와 최악의 뒤끝이혼을 했다. 침 뱉고 눈 흘겼다. 그들은 패전국이면서도 승전국 행세를 했다. 승전국이 아니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나치에 동조한 지식인들을 학살한 것도 좋게만 볼 수는 없다.
프랑스 철학은 독일 철학을 깐다. 독일 하면 철학이다. 철학 하면 독일 관념론 철학이다. 전후에 독일 철학은 사라졌다. 어디에서도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전쟁의 책임이 독일인 특유의 대중 동원력에 있고 동원력은 독일 철학에서 나왔다.
프랑스 철학이 점잖은 척하지만, 독일에 대한 뒷담화에 불과하다. 소인배의 험담에 불과하다. 철학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본질은 대중 동원이다. 철학의 용도는 사람을 동원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철학은 반철학이다.
하긴 예술도 반예술이 인기가 있다. 피아노를 때려 부수고 기타 줄을 잘라버리면 예술가 반열에 오른다. 백남준 단번에 떴잖아. 반예술은 예술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고 반철학은 철학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정 없이 반으로 합이 되는가?
프랑스 혁명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한마디로 촌놈의 재발견이라 하겠다. 전쟁은 원래 귀족과 용병이나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무라이도 아니고 농민이 무슨 전쟁을 해? 이차대전 때 미군 병사는 총을 쏘지 못했다.
맞은 편에 보이는 적군을 향해 조준사격을 명령하자 명령대로 총을 쏘는 병사는 15~20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다수의 병사는 총알을 아낀다는 둥 엉뚱한 소리를 하며 사격을 거부하거나 눈감고 허공에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잘 안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고문관 업햄은 행정병인데 총을 쏘지 못한다. 마지막에 깐죽거리는 독일 병사를 죽였다. 발암 캐릭터다. 그 장면에 화내는 관객이 많은데 고증이 잘 된 것이다. 미국은 열심히 훈련해서 80퍼센트로 높였다.
훈련을 해도 20퍼센트는 업햄된다. 625 때 학도병이 30분 훈련받고 총을 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때 전투 경험이 없는 조선군이 갑자기 일본군과 맞서서 전투를 치를 수 있을까? 그거 원래 안 되는 것이다. 다섯에 하나는 끝까지 못 쏜다.
가끔은 기적이 일어난다. 잔다르크가 보여줬다. 종교라는 울타리에 가둬버리면 총을 쏜다. 종교에 가둬서 전쟁한 사람은 무함마드다. 알라의 이름으로 총 쏜다. 현대전은 참호에 가둔다. 참호가 인기 있는 이유는 병사를 가두기 때문이다.
지휘관은 참호를 좋아한다. 구덩이에 가둬놓으면 지까짓게 어쩌겠는가? 구덩이에서 총을 쏘지 않고 배겨? 결국 쏘게 만드는 기술이다. 프랑스 혁명의 의미는 총을 쏘지 못하는 농민들도 총을 주니까 쏘더라는 것이다. 용병보다 낫네.
총을 못 쏘는 병사들에게 총을 쏘게 만드는 지휘관이 가끔 있다. 그런데 얘들이 한 번 쏘기 시작하면 꽤 잘 쏜다. 사무라이보다 낫다. 왜? 흥분하기 때문이다. 잔다르크는 종교를 이용하여 집단적 열광을 끌어냈다. 고문관도 총을 쏘더라.
총은 촌놈이 잘 쏜다. 도시넘들은 까져서 안 된다. 촌놈은 시골이라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도시넘은 전장을 이탈하여 집에 간다. 촌놈은 길을 모른다. 적지에서 병사들이 잘 싸우는 것과 같다. 자기 땅에서 싸우면 집에 간다.
러시아군이 유독 잘 싸우는 이유는? 멀리 유럽에 와 있는데 도망을 쳐도 고향 시베리아가 너무 멀어서 못 가니까. 러시아군은 부대가 와해되어도 흩어지지 않고 다른 고지에 재집결하는 특징이 있다. 촌놈 중에 촌놈은 러시아 촌놈이다.
1. 프랑스 혁명은 심리적 감옥에 가둬져 있는 촌놈이 참호에 가둬진 병사처럼 용맹하게 잘 싸운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배수진과 같다.
2. 촌놈 하면 독일이고 프랑스인은 그새 까져서 도시놈으로 변질되었다. 보불전쟁에서 망신을 당한 이유다.
3. 독일이 어디서 명함 내미냐? 진짜 촌놈은 러시아 촌놈이다. 이놈들은 집에 가라고 해도 집이 멀어서 못 간다.
러시아군이 전투를 할수록 강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독일과 가까운 벨로루시 애들, 우크라이나 애들은 바로 항복하고 집에 갔지만 시베리아 애들은 길을 몰라서 못 간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버릴 때 인간은 갑자기 막강해진다.
일본군은? 섬인데 대륙에서 열도까지 헤엄쳐 가겠나? 반자이 어택이 러시아 우라돌격 뺨치게 강하다. 중국군은 슬금슬금 사라지는데 일본군은 있다. 중국군 중에도 모택동군이 촌놈이다. 애들은 전투에 져도 어딘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프랑스 철학은 한마디로 촌놈혐오, 독일혐오, 대중 동원력 혐오다. 이들은 되도록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송두율의 내재적 관점이 그렇다. 북한은 북한대로 북한 논리가 있고 북한의 논리로는 북한이 나름 성공한 제도다. 어? 말 되네.
이게 북한을 아프리카 부족 취급하는 것이다. 그거 구조주의 인류학자들이 지어낸 말이다.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라고 만들어낸 게 부족들은 나름대로 질서가 있다는 개소리다. 조선에 초가집 좋잖아. 구수한 쇠똥냄새 시 쓰기 좋고.
멀쩡한 초가집은 왜 헐고 난리냐? 조선은 조선대로 조선의 논리를 따라 조선의 이상에 도달하면 되는 것이야. 상투 들고 초가집 대청마루에 앉아서 곰방대 물고 에헴 하면 시상이 막 떠올라. 좋잖아. 개소리하고 있다. 그러다가 전쟁 진다.
지면 프랑스 된다. 인류는 어쩌다가 패잔병 헛소리에 가스라이팅 되어버렸다. 진 놈은 닥쳐야 한다. 이긴 놈이 할 말 있다. 구조는 결합과 해체의 양면이 있는데 왜 해체만 강조하냐? 대중에 대한 공포와 환멸이다. 방어하려는 도피심리다.
몰락한 양반의 대중에 대한 증오. 그것이 프랑스 철학이다. 이차대전에 지고 정신승리를 시전한다. 대중을 동원하는데 특화된 독일 관념론 철학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야지. 그게 철학 탓이 아니고 촌놈 지정학 탓인데 그걸 알 리가 있나.
독일 관념론 철학도 잘 들어보면 그게 프랑스 욕하는 거다. 이거 눈치채지 못하면 아이큐가 떨어지는 거다. 나폴레옹 시절 독일은 후진국이었고 물질에서 밀리니까 정신력을 드높인다는 건데 그게 조선 양반 콧대와 비슷한 논리구조다.
이걸 수입해서 일본 버전으로 비틀어놓은 게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다. 물질경쟁으로는 미국에 밀리고 정신력으로 양키놈들 혼쭐내주고 전쟁 이긴다는 개소리다. 하여간 촌놈들 열등의식은 답이 없다. 깨져봐야 정신 차린다. 그래서 깨졌다.
독일철학의 허실
철학은 대중을 동원하는 기술이다. 원래는 종교가 그 일을 했다. 잔다르크는 종교의 힘으로 영국을 꺾었고 무함마드는 종교의 힘으로 아랍을 석권했다. 참호전을 하는 이유는 병사를 가둬놓기 좋기 때문이다. 한신의 배수진과 같다. 한신은 보이는 끈으로 묶고 종교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는다. 사람을 조지는건 같다.
철학은 종교를 표절한다. 프랑스 혁명은 이념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음을 보였다. 독일 관념론 철학은 종교의 언어를 적당히 다른 언어로 바꿔놓은 것이다. 성공했다. 독일은 30년 전쟁에 박살이 나고 40개국으로 쪼개져 있었는데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총대 매고 바랍잡이 역할을 한 사람이 칸트와 헤겔이다.
종교는 유통기한 지났고 촌놈들에게는 이념이 먹힌다. 프랑스 혁명이 증명했다. 농부가 용병보다 잘 싸운다. 그런데 촌놈 하면 독일의 한스와 러시아의 이반이잖아. 촌놈은 태생적으로 묶인 존재다. 독일이 40개국을 통일했다면 일본은 300 명의 다이묘가 하나의 덴노 밑으로 들어갔다. 통일 이거 재미지다. 폭주한다.
독일을 통일하고 국경에서 멈추어야 했는데 그게 되나? 내침 김에 프랑스 먹고 폴란드 먹고 유럽 다 먹자. 일본 열도 통일한 김에 홋카이도 먹고, 오키나와 먹고, 조선 먹고, 만주 먹고, 중국 먹고, 태평양 먹고 다 먹자. 이것들이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촌놈이 뭉치면 무섭다는건 프랑스도 지들이 먼저 해봐서 잘 안다.
독일 관념론 철학 정신주의 – 독일 통일하자. 내친 김에 세계 통일하자.
프랑스 구조주의 해체주의 – 독일의 세계정복을 막자. 뭐든 찢어놓자.
철학자들이 말을 그럴듯하게 하지만 내막을 들어보면 종교의 변형이다. 내가 다 먹자는 독일사상과 내 밥그릇에 손대지 마라는 프랑스 사상이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 더하기 아니면 빼기다. 철학 좋아하네. 그냥 욕심을 내는 독일놈과 그걸 근심하는 프랑스놈과 그걸 베끼는 일본놈과 그걸 구경하는 양키놈이 있는거다.
중요한 것은 공통적으로 약자의 사상이라는 점이다. 강자의 사상은 없다. 독일은 30년 전쟁에 박살나고 인구가 실종사태다. 약자가 강해지는 방법은? 당시 영프가 선진국이고 세계를 식민지 삼는데 독일은 앉아서 손가락 빨았다. 물질로는 영프를 이길 수 없으니 우리 독일 촌놈들은 정신력으로 이겨야 해. 정신주의다.
이게 뭔가? 조선양반 에헴하는 소리다. 우리 양반은 소나기가 와도 종종걸음은 아니잖아. 에헴! 정신력 하면 조선 양반과 일본 사무라이 쵝오. 근대는 민족주의다. 민족주의는 우월주의다. 정신주의는 양반우월주의다. 이게 다윈의 진화론과 여불때기로 결합한 교묘한 인종차별주의다. 왜 먹히지? 촌놈들의 열등의식이다.
너도 양반이 될 수 있어. 박지원 양반전 읽어봐. 양반은 팔자걸음으로 걸어야 해. 양반은 아무리 더워도 웃통 까면 안돼. 이딴거다. 독일철학은 엘리트 중심으로 뭉치라는 말이며 엘리트는 프로이센 융커다. 지금으로 치면 동독 애들이다. 그쪽 애들이 지금도 보수꼴통이다. 답은 구조다. 사회 안에 구조를 만드는 거다.
영국은 애가 말을 안 들으면 징벌방에 가둬놓는다. 프랑스는 애가 말을 안 들으면 귀싸대기를 날린다. 독일은 애들이 말을 안 들으면 세시간 동안 설득한다. 차라리 한대 맞고 말지. 세시간 동안 성찰과 반성과 진정성과 품성의 시간을 가지라굽쇼? 환장하는 거다. 사람을 말로 조지는게 더 악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국군 전열보병은 병사가 말을 안 들으면 1200대를 때렸다. 허다한 병사가 매질에 죽었다. 독일군은? 될때까지 대대 전체가 다시 한다. 병사 한명 때문에 대대병력이 개고생을 하는 거다. 그 까임은 어쩔거냐? 독일 관념론 철학이라는게 말은 그럴듯하지만 300명이 고문관 한 명을 갈구도록 교묘하게 밑밥 까는 거다.
어쨌든 독일 관념론 철학은 성과를 냈다. 폭주를 해서 문제지. 독일 통일은 성공했다. 독일은 강해졌다. 보불전쟁에 이겼다. 절반의 성공은 인정해야 한다. 조선왕조 양반정치도 600년간 평화를 유지했다. 일본은 독일철학을 베껴서 이차대전에 승승장구했다. 망하기 전까지는 성공한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물론 프랑스 철학도 할말은 있다. 탈근대라는 것은 탈독일이며 탈단결이며 뭉치지 말자는 것이며 어차피 프랑스는 뭉쳐도 독일을 못이기니까 차라리 상대를 해체시키자는 사상이다. 송태조 조광윤이 군벌 30명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 결과 송나라는 문약해져서 금나라와 몽골에 털렸다. 어쨌든 그래도 잠시 성공했다.
정리하자. 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속일 수 없다. 지정학적 구조는 명확하다. 흥망은 정해져 있다. 석유 터지면 흥하고 항구 없으면 망한다. 심리적 지정학도 있다. 사람 사이에 누가 항구 역할을 해야 한다. 누가? 엘리트가 한다. 엘리트 우월주의다. 집단 내부에 구조를 만든다. 엘리트 중심으로 뭉치자는게 독일철학이다.
자신이 뭉칠 수 없으므로 상대방을 흩어놓자는게 프랑스의 탈근대다. 그게 탈독일이다. 구조는 연결과 단절, 통합과 해체,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다. 그런데 연결과 통합과 긍정만 주장하면? 독일이다. 단절과 부정과 해체만 주장하면? 프랑스다. 둘다 자잘한 계산 깔고 있다. 엘리트는 대중을 이길 수 없다. 좌절한다.
프랑스는 독일을 쪽수로 이길 수 없다. 좌절한다. 우리가 왜 패전국 프랑스의 좌절철학을 배워야 할까? 정의당은 민주당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엘리트가 독일 촌놈을 못이기고 정의당 엘리트가 민주당 촌놈을 이기지 못한다. 이기지 못하므로 상대를 찢어놓는다. 촌놈들이 김어준 방송에 몰리지 못하게 막아라.
비겁하다. 지식인이 정치적 협잡에 끼어들면 안 된다. 진실을 말하자. 빛과 어둠, 긍정과 부정, 통합과 해체, 연결과 단절은 동전의 양면이다. 엑셀레이터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을 둘 다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고수는 원페달 드라이빙을 할줄 한다. 페달 한 개로 가속과 감속을 동시에 해낸다. 테슬라 안 타봤나? 좋잖아.
독일이 긍정만 강조하거나 프랑스가 부정만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멍청해서다. 구조론은 원페달 드라이빙이다. 긍정하면 부정은 자연히 따른다. 연결하면 단절은 자동으로 쫓아온다. 빛을 통제하면 어둠은 자연히 해결이 된다. 양쪽으로 품을 들일 이유가 없다. 동전은 양면인데 한쪽만 보겠다는 자는 저의를 숨기고 있다.
철학이라며 떠들지만 아전인수다. 독일.. 쪽수가 많은 내가 먹겠다. 프랑스.. 니들 쪽수를 찢어놔야겠다. 구조주의 어쩌고 하지만 구조가 없다. 정답은 구조다. 구조는 필요한 때 통합하고 해체하고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선통합 후해체다. 선 민주당 후 정의당이다. 민주당이 먹고 정의당이 량을 조절한다.
근대 독일철학 - 엘리트는 정신력이 있다. 엘리트 중심으로 뭉쳐라.
탈근대 프랑스철학 - 엘리트는 답을 알고 있다. 엘리트 믿고 흩어져라.
둘 다 엘리트 우월주의다. 이들은 절대 현장에 가지 않는다. 답은 현장에 있고 현장에는 도구가 있다. 지정학은 도구다. 사람도 도구다. 도구는 교육과 미디어다. 로마는 10분의 1형이 도구다. 영국은 곤장 1200대가 도구다. 독일은 될까지 처음부터 다시. 일본은 할복, 한국은 뒷담화. 진짜 도구는 산업의 혁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