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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리스도인 시리즈 (5)
배워야 할 것, 피해야 할 것
(참고: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Jesus))
마 6:19~32
I. 서론
오늘은 올 해 마지막 주일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올 한 해는 다른 해보다 많이 다른 해였습니다. 올해 초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땅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우리의 모든 삶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비록 최근에 백신이 나오기는 했지만, 최소한 내년 여름까지는 이런 상황이 계속될 전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한 해를 정리하면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그리고 무엇을 피해야 할까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중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지구촌의 하나됨은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세 시대도 아닌 21세기 첨단 과학시대에 한 가지 바이러스로 인해서 전 세계가 고통 받는 상황을 볼 때,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시작된 질병이 전 세계 모든 나라로 전염되는 것을 볼 때, 지구촌이 정말 하나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그럼 어떤 것을 피해야 할까요? 이것 역시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양극단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한 쪽 극단은 내 건강은 내가 지키겠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를 잊어버리고, 내가 조심하기만 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쪽 극단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우리 자신이 조금도 주의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마스크도 제대로 쓰지 않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극단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배워야 할 것, 피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참고할 책은 존 요더 교수의 <예수의 정치학>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Christianity Today가 뽑은 20세기, 최고 도서 열 권 중 한 권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저자는 재세례파를 대표하는 신학자였습니다. 존 요더 교수는 1927년, 미국의 오하이오 주, 스미스빌(Smithville) 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철저한 재세례파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재세례파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존 요더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이 말 한 마디로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듀크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라는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2001년 Time지에서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존 요더 교수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저서’가 요더의 각주 정도로만 이해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정말 제대로 사용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세례파 신자도 아니고, 감리교 신자가 재세례파 신학자를 향하여 이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존 요더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책은 그냥 건너뛸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존 요더가 탁월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했지만, 그는 자신이 교수라는 직위, 그리고 미국 기독교 윤리학회 회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하여 성추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재세례파 교단이 존 요더 징계 과정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100명에 가까운 여성들이 요더로부터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존 요더 교수의 책은 그냥 건너뛸까? 아니면 그래도 다루어야 하나? 제 결론은 그래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다루는 주제는 존 요더 교수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가 몸 담고 있었던 재세례파의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재세례파 신학으로부터 분명히 배워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재세례파 신학 중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중심으로 배워야 할 것 한 가지, 피해야 할 것 두 가지를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재세례파 신학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II. 본론
1. 배워야 할 것: 예수님 중심의 신앙
<예수의 정치학>에 대한 해설을 쓴 고신대 신대원 원장인 신원하 교수님은 존 요더 교수가 설명한 재세례파 신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평화주의를 취하는 것은 일반 평화주의와는 그 동기와 철학적 근거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톨스토이가 강조하듯 인류애 때문만도 아니요,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가 주장하듯 탁월한 효과 때문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이고, 그 길이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세례파 신학은 철저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신학입니다. 그런데, 재세례파 신학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중에서도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 집중을 합니다. 재세례파가 산상수훈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들의 신학교인 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의 채플실 이름이 산상수훈 채플실(Chapel of the Sermon on the Mount)이라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세례파 신학은 산상수훈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우리가 오늘 이 짧은 시간에 그 모든 내용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태복음 5장과 6장에 대한 재세례파 신학이 가르치는 내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말씀을 몇 구절 읽어 보겠습니다.
마 5:38~45,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교수님의 대표적인 책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을 인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인용하는 이유는 풀러신학교 총장을 지낸 리처드 마우 교수님이 이 책을 재세례파 신학을 드러내는 유력한 책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책 내용을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규정해 주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당신의 뺨을 때릴 때 다른 뺨까지 내미는 행동이 그 사람 속에 있는 최선의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예수님은 당연히 윤리적으로 순진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상 설교의 윤리에서 기초가 되는 것은 어떤 유익이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방식입니다. 뺨을 돌려대는 일이 옹호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느냐의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포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도 친절하십니다. 산상 설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전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화해하려는 이유는 그로 인해 우리가 훨씬 기분이 좋아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화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설명이 재세례파 신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방식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도 친절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재세례파 신학으로부터 반드시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그 다음 마태복음 6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마 6:19~3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존 요더 교수의 다른 책, <급진적 제자도 (Radical Christian Discipleship)>를 인용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의 정치학>보다 그의 책 <급진적 제자도>를 더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정치학>은 존 요더 교수가 누가복음을 해설한 책입니다. 그런데, 재세례파 신학의 핵심은 마태복음 5~7장에 있는 산상수훈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포함된 <급진적 제자도>가 조금 더 재세례파 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존 요더 교수가 심각한 스캔들이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신학자들로부터 탁월한 신학자라고 인용되는지 그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다가, 존 요더 교수가 천재라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존 요더 교수의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속성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가르친 대목은 산상 설교에 나옵니다. 이 설교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 6:19)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세속성의 문제라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항이 분명히 말해 줍니다. 하나는 이 대목의 중간에 나오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마 6:24)이라는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은 그런 것을 구하지만, 그분의 추종자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결론적인 진술입니다.(마 6:32) 세속성은 특별한 악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취하는 정상적인 행위입니다. 일차적인 관심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두지 않는 모든 생각이나 행위를 말합니다. 부의 축적을 인생의 최대 관심사로 삼는 이들은 종종 구두쇠도 아니고 사치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노년을 위해서나 자녀들을 위하여 신중하게 준비하는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 6:25)고 말씀하시는 것은 극단적 형태의 탐욕이 아니라 바로 이런 종류의 선견을 비판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중요한 것은 (신뢰 내지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분은 “내일은 또 그런대로 굴러가겠지”라는 것을 모토로 삼는 태평스러운 존재 방식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충만한 아버지를 믿으라고 요청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훨씬 많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는 훨씬 많이 입히시지 않겠느냐?”(마 6:30)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곧 자신을 하나님의 보살핌에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에서 신앙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신앙의 반대말은 염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산상 수훈 본문에 대한 존 요더 교수의 해설입니다.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염려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자신을 하나님의 보살핌에 맡기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정말 신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염려를 더 많이 하고 있습니까? 염려는 더 많이 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훨씬 많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는 훨씬 많이 입히시지 않겠느냐?”(마 6: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을 믿읍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의 보살핌에 우리의 남은 인생을 맡기십시다. 그리하여 주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렇다면, 재세례파로부터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2. 피해야 할 것 (1): 성경 해석의 문제
재세례파는 영어로 “Anabaptism”이라고 합니다. “Baptism”은 우리가 잘 알듯이, “세례”라는 의미입니다. “Ana”라는 말은 헬라어로 “다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Anabaptism”이라는 말은 “다시 세례를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재세례파”인 것입니다. 우리가 “재세례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세례파”의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Southern Baptist 신학교 교수로 있는 디모데 존스(Timothy Jones) 교수님의 책, <Christian History Made Easy>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한국어로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역사>로 번역된 책입니다.
스위스 종교개혁가 중에, 쯔빙글리(Ulrich Zwingli) 라는 분이 있습니다. 쯔빙글리는 스위스에서, 루터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조금 달랐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교회에서 오르간을 사용 문제였습니다. 쯔빙글리는 자신이 사역하던 취리히 교회에서 오르간을 치워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성경에 오르간을 사용하라”는 명령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루터는 교회 내에서 모든 악기의 사용을 권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성경에 악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구절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말 장난 같지만, 이런 조그만 차이가 앞으로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쯔빙글리는 성경에서 “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신앙관은 그대로 그의 제자에게 전수되었습니다. 쯔빙글리의 제자 중에서 펠릭스 만츠(Felix Manz)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이 모임은 “스위스 형제단”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하던 중, 예상치 못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그와 그의 친구들은 유아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아 세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아일 때,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재세례파에 들어오고자 할 때, 반드시 다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세운 교단을 재세례파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스위스 취리히 시의회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재세례파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펠릭스는 순교하게 되었고, 네덜란드에서 그의 신학 사상을 따르는 사람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메노 시몬스 (Menno Simons)입니다. 이 사람은 두 가지 신념을 굳게 지켰습니다. 첫째, 교회는 오직 믿는 자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유아 세례 반대) 둘째, 어떤 정부도 종교적 신념을 강요할 수 없다.(정치와 종교의 분리 주장) 그래서 평화주의를 종교 신념으로 삼는 재세례파는 군대를 가지 않습니다. 강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메노 시몬스가 재세례파에 끼친 영향을 지대했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라 재세례파 사람들을 “Mennonite”라고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유아 세례에 대한 찬반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유아 세례를 주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건전한 교회 가운데서도 유아 세례를 주는 교회가 있고, 유아 세례 대신 Dedication 이라고 봉헌식을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봉헌식은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자신의 자녀를 다시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겠다고 서약하는 예식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아 세례 유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관점으로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재세례파의 문제는 인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입니다. 재세례파는 인간의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재세례파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즉, 그 사람의 신앙 고백을 보고 세례를 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 중심이긴 하지만 이 자체로는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 보면, 이것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례의 출발점도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례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고,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 가운데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은 인간의 신앙 고백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언약을 더 우선 시 했습니다. 그래서 유아 세례를 줘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을 한 구절 읽어 보겠습니다.
행 2:37~39,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과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후, 그들의 마음이 찔려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영어로, “What shall we do?”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른 말로, 은혜 언약입니다. 베드로의 설명이 여기서 끝났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이 약속은, 즉 하나님의 이 은혜 언약은 지금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너희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너희 자녀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모든 자들에게 주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은혜 언약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신자의 회중’ 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교회가 신자만 포함하지 그들의 자녀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개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칼빈주의의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유아 세례 주제에 대한 칼빈주의의 가르침은 정반대입니다. 함께 모이는 신자는 유아 세례를 줌으로써 후손과 연결되어 있는 자연적 유대를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유대를 성별하며 세례로써 자녀를 교회의 교제에 연합시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나이가 차서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 되거나 불신에 의하여 교회로부터 나뉠 때까지 이 교회 교제 안에 유지됩니다. 이것이 칼빈주의의 가장 중요한 언약 교의입니다.” 그러니까, 유아 세례는 유아 세례를 받은 아이는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유아 세례는 성도들의 자녀들이 나이가 차서,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청지기로서, 그들을 양육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설명에서 보다 명확해 집니다. 퓨리탄 리폼드 신학교(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총장으로 있는 조엘 비키(Joel Beeke) 교수님의 설명입니다. “유아 세례에서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들을 대신하여 언약의 책임을 떠맡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 관하여 하나님을 대신하는 청지기입니다. 청교도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태어날 때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모든 자녀들이 타락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에게는 손자 손녀들이 없으며, 각 세대들 모두가, 각각 회심을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과 신실함은 은혜 언약이 자녀들에게서 나타나고 모든 언약이 완전히 실현되도록 자녀들을 교육하고 훈육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신학은 단순히 유아 세례가 성경에 없다고 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재세례파 신학과는 차원이 다른 신학입니다. 그래서, 듀크대학의 신약학 교수인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신앙을 고백하는 믿는 자들의 세례는 세례의 중요성에 대한 신약의 해설을 가장 신실하게 반영해 주는 의식이라고 확신했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으로서 세례를 주해한 칼뱅이 재세례파 신학자들에게서 발견한 그 어떠한 것보다 유아 세례를 이해하기 위한 심오한 신학적 기틀을 제공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지금 설명 드리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유아 세례의 유무가 아닙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을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각 부분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성경을 전체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것은 그 다음 피해야 할 것에서, 보다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이 부분만 설명해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3. 피해야 할 것 (2): 세상과 분리된 삶
제가 세 교수님의 설명을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신원하 교수님의 설명입니다. “요더는 기존 사회를 변혁해 나가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열정과 관심보다는 교회와 같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들을 많이 만들어 기존 사회에 대한 대안 사회로 제시하여 그 영향력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재세례파는 세상을 회피하려는 노력으로 수도원적 출발점을 굳게 하여 그것을 모든 신자에 대한 규칙으로 삼았습니다.” 조엘 비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인이 이 죄악된 세상의 삶의 구조와 방식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방금 인용해 드린 부분에서 드러난 재세례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대안 사회로서의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수도원적 출발점, 그들만의 공동체. 모두 세상과 분리된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세례파에서는 왜 이렇게 세상과 분리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바로, 그들의 신학 때문입니다. 리처드 마우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재세례파는 세상은 절대적으로 (absolute) 부패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죄로 완전히 물든 세상 문화와 명확하게 분리되는 대안적인 공동체를 만들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하이오 주와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아미쉬 공동체일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세상과 동떨어져 자신만의 공동체를 형성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제 설교를 듣고 계시는 분 중에 이들의 삶을 동경하거나 부러워하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분이 계시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세상과 분리된 재세례파 교인들의 삶이 그들이 그토록 닮고자 하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일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어떠한 삶을 사셨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사셨습니까? 제자들을 모아서 광야 수도원에 들어가서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성만 관리하고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 였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항상,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비난받고 멸시받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곳은 세상과 동떨어진 광야나 수도원이 아닙니다. 세상과 분리된 대안 공동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가서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재세례파 신학이 강조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은 참 좋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학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한 쪽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산상 수훈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재세례파 신학을 따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성도님들은 세상으로부터 악한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세상 사람들의 문화와 단절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마치, 수도원에 들어가서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위에는 온통 믿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정반대 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다짐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떤 분은 정치계에, 어떤 분은 경제계에, 어떤 분은 교육계에, 어떤 분은 예술계에, 어떤 분은 솔리비타 단지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어렵지만, 코로나가 끝나면, 평소에 잘 만나지 않는 사람과도 골프를 치시고, 믿지 않는 분들과도 자주 만나서 식사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사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