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박경훈
한나 아렌트(1906 - 1975년)
저자인 한나 아렌트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사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독일을 떠나 파리로 이주하였으나 나치의 점령으로 수용소에 감금, 극적으로 탈출,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 지식인이다. 저서로 『전체주의 기원(1951년)』, 『인간의 조건(1958년)』을 남겼다.
아이히만의 진술
아이히만은 살인죄의 기소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그 일은 그냥 일어났던 일이다.” 변호인은 무죄의 이유로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제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행위” 임으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변호인 세르바티우스는 독일인이며 변호사 비용은 이스라엘 정부에서 주었다. 그가 변호를 맡은 배경 중에는 아이히만의 진술서를 출판하여 돈을 벌 생각이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그 진술서는 비공개되었다.)
재판에 대한 견해
아렌트에 의하면 재판은 히브리어로 진행되었으나 피고와 변호사를 위한 독일어 통역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법정에 출두한 피고의 모습이 홀로코스트의 전범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 유대인 위원회가 나치에게 협력했다는 불편한 진실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유대인 위원회가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 다수를 버렸다는 점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심했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이스라엘 대법원은 모 사건에서 간접적으로 유대인 위원회의 무죄를 판시했다.)
관할법원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지적한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박해는 시기별로 차별기(나치 정권 장악∼뉘른베르크법 시행), 추방기(강제이주), 대량학살기(아우슈비치츠 가스실로)로 구분해서 범죄를 심리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희생자가 유대인인 한에서는 유대인의 법정에서 재판하는 것이 옳고도 적절하나 그 범죄가 인류에 대한 범죄인 한, 그 범죄를 심판하는 데는 국제재판소가 필요했다고 한다. 칼 야스퍼스의 말을 인용하여 이 논리의 타당성에 무게를 실으려 한 것 같다.
에필로그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자신의 판결문을 제시한다. “피고가 자신의 무죄를 불운이나, 우연으로 치부할지라도 대량학살의 정책을 실행한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누구도 지구상에서 피고와의 공생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피고가 교수형에 처 해져야 하는 이유이다.”
이 재판 이전에는 사형제도가 없었다는 이스라엘. 아렌트는 논리의 과정이야 어쨌든 유대인의 민족 감정에 부응하는 정서를 담은 판결문을 제시했다.
역자 서문 요약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 존재와 시간』에 담긴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1963년 2월 잡지 뉴요커에 5차례 연재된 글이며 학술적인 논쟁과 논점을 불러일으켰다.
논쟁 1/ 아렌트와 유대인의 관계(or 아렌트와 시온주의와의 관계)
- 시온주의자, 숄렘: 아렌트는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에 대한 사랑이 결여
- 마이클 샌델: 아렌트는 보편주의 입장이라고 비판
- 아렌트: 사랑은 개인의 문제이지 집단의 문제가 아니다.
- 김선욱, 번역: 아렌트는 샌델의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에 근접
아이히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자.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banality를 진부성이나, 일상성이 아닌 평범성으로 번역한 이유는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고 보아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평범성으로 번역하였다.
아이히만는 이상주의자이다. 그가 말하는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다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을 의미했다. 스스로가 시온주의자의 이상주의자와 동일시했다.
아렌트는『인간의 조건』에서 긍정적 의미의 인간성이 드러나는 예인 ‘양심‘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다. 양심에 바탕을 둔 시민 불복종의 경우에도 양심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증될 수 있는 정도의 보편성을 지닌다는 믿음에는 회의적이다.
아렌트가 지적한 아이히만의 세 가지 무능성은 ①말하기의 무능함, ②생각의 무능함, ③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무능함(판단의 무능성. inability to judge)이다. 판단능력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이다.
말의 능력이란 말 자체가 행위이다. 나치스는 최종 해결책을 추진하면서 언어규칙을 만들었다. 우회적 표현법. 말은 우리를 현실과 연결하여, 감각을 마비시킨다. 즉, 상투어(cliche)나 관용어 등은 늘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현실-말-사유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하고, 언어가 고정되어버림으로써 사유와 판단이 현실과 유리되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아렌트는 자신의 글에 제기된 논란에 대하여
개정판에서 첨부형식으로 설명의 글을 보태었다.
1)이스라엘 검찰 측이 제기한 문제. 유대인이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는가. 또는 보호했어야 하는가. 타인에 의해 아렌트의 입장이 왜곡 묘사 - 유대인이 스스로를 살해했다. 자기증오로 - 되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유대인 위원회’ 전반에 대해 무죄선고를 간접적으로 내렸다.(비른 블라트 재판)
2)책의 저술은 아이히만의 양심의 문제, 그를 둘러싼 상황의 문제는 전쟁 및 최종 해결책의 시기만 연관되어있다. 그런데 이 책과 관련 없는 주제, 독일 레지스탕스 운동에 대한 논쟁이 그렇다.
이 책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심각한 재난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전체주의에 대한 설명이나 제3제국 시절의 독일의 국민 역사를 다루는 것도 아니며, 끝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이 책은 악의 본질에대한 이론적 연구도 아니다.
3)나는 이 재판이 오직 정의에 대한 관심에 따라 이루어져야 했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 보다 도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훈이지 현상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그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4)이 보고서는 예루살렘 법정이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 했는가 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다루고 있지 않다.
감상
인간의 이중성(겉과 속이 다른)은 논란을 일으키는 주제인 것 같다. 평범하지만 출세를 위해 친위대에 들어간 아이히만. 곤궁할 때 유대인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 즉, 무명시절 히틀러가 비엔나에서 유대인으로부터 생계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그런 그가 대량학살의 정책을 집행하고 지지한 자신의 행동이 무죄라고 법정에서 흔들림 없이 궤변을 늘어놓는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운운하면서. 아연실색할 뿐이다. 인간의 양심이 실종된 모습이다. 여느 전범의 수뇌들처럼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자신 외의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리는, 윗사람 혹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전가한다. 전형적인 관료주의의 폐습마저 보여준다. 물론 그가 자신의 방패막이로 사용한 유대인의 협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그렇다 해도 그것이 그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시켜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렌트는 정리한다. 아이히만은 그저 일개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보편적 법칙에 대한 그릇된 사고를 - 히틀러의 명령을 칸트식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인 - 한 것이다. 그는 옳고 그름을 사유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해결’, ‘특별취급’ 과 같은 나치의 언어조작이 그의 도덕적 두려움을 무력화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한 번 일어난 범죄의 재발 가능성이 높다고 본 저자는 전체주의의 재발을 경고한다. 그는 깊고 끊임없는 사유와 사상적 모색을 통해서 인간의 조건으로 노동, 작업, 행위의 개념을 제시하고 (정치적)행위를 통한 참여 민주주의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 감사합니다.
※참고도서: 한나 아렌트 지음·김선욱 옮김/한길사/2006년.
※참고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 아이히만 쇼.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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