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불철주야로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하던 선생은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의 증인 소환장을 받고 출두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조선 독립의 기초를 형성해 가던 조선어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즉 일제는 침략전쟁에 우리 민족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아울러 식민지 동화정책의 최후단계인 민족말살정책의 완성을 위해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허울좋은 식민지 지배 정책을 내세웠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사전 편찬 작업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일제는 어떠한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 경찰은 1942년 10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였다. 즉 홍원경찰서에서는 10월 1일 이극로, 정인승, 이윤재, 한징, 이중화, 김윤경, 최현배, 이희승, 장지영, 권승욱, 이석린 등 11명을 체포하고, 이어 이우식, 이강래, 이병기, 김법린, 이인, 안재홍 등 모두 33명을 체포하여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 편찬 후원 회원들 전원을 검거하였다. 그리고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자료 카드를 압수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중단시키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선생 또한 홍원경찰서에서 1년여 동안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한 뒤, 1945년 1월 1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