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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송배 시 단평
안개꽃 시대. 7
--순수 괴리상태에서의 본질성은
윤강로(시인)
김송배의 시는 위의 시와 대조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김송배의 「안개꽃 시대 .7」(『동서문학』 4월호)은 극히 제약된 공간성과 시간성을 전제로 한다. ‘나‘ ’서울의 밤‘이 그 전부이다. 그의 시는 정물적이다. 정물화된 삶의 내면세계에 그리는 방향상실, 방황 등의 부유가 패배적 탄식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마지막 연 ’별을 위해 잠들지 못하는 이 밤 / 밤새도록 퍼내는 우리의 눈물로 / 끝없이 되풀이 하는 인자들의 아, 그 풀무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자들의 아, 풀무질‘은 패배적 탄식을 간단히 의욕적 삶의 생동감으로 전환시킨다.
이 시의 ‘밤’과 ‘안개’는 이런 것들을 있게 하는 1차적 배경으로서 분위기를 갖춘다. 그러나 상투적 배경설정이라는 인상을 벗어날 수 없다. 몇 개의 진부한 시어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구축하는 주제의식이 찬찬한 사유의 결정(結晶)임을 간파하게 하는 것은 사변적 관습의 기미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일관된 소재와 주제의식으로 이끌어가는 시적 단계를 마무리짓게 될 때 시어의 분위기 설정의 선도(鮮度)를 되찾아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밤’과 ‘안개’의 설정에 주력하기보다는 ‘밤’과 ‘안개’에서 끌어내야 할 것은 보는 심안을 닦는 데 주력하는 시적 접근에 주목하게 된다.(『예술계』 1989년 5월호)
조의홍
(시인.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나와 너의 장법(章法) . 1
내가 너에게 너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중하게 질문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행위에 너는 불신의 언어로 반격하는 도저(到底)한 너의 표정과 언로(言路)는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어쩌면 너는 나를 닮은 듯도 하지만, 나의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을 항상 정밀하게 감시하면서 참견하려는 그 고약한 심사는 누구를 위한 충언(忠言)인가. 명확하게 응답하지 않으면 여하한 소통(疏通)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나와 너를 위한 통섭(通涉)을 위해서 성실한 자세와 화자(話者)의 위치를 명징(明澄)하게 밝혀야 한다.
내가 던지는 말 한 마디, 내가 갈기는 글 한 줄에 대해서도 일일이 대꾸하는 너의 참견이나 간섭은 내 의식의 흐름에서 자각(自覺)된 성찰인가 기원인가 아니면 그 좌절과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서 절규하는 기도인가. 너는 나를 오늘도 미행하면서도 정도(正道)를 안내하려는 영원한 반려자인가. 생사고락을 함께 할 동반자인가. 이제는 우리 서로 밝혀두고 동행하면 어떠한가. 아니라면 나는 너의 정체를 기필코 구명(究明)하고 말지니라.(『시와 표현』 2013. 3월호)
김송배 시인은 서정성이 짙은 작품 세계를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를 순수 서정을 바탕으로 한 현실과 삶의 고뇌 및 갈등을 투영, 인간 내면의 가치관에 승화시키는 기법을 쓴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 재직한 적도 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으로 문학 행정의 일선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 발표된 작품은 과거 그의 작품 세계와는 거리감이 있어, 서정성이 짙었던 그의 작품 일부를 소개해 본다.
멀리서 쓰러진다 / 누군가 마른 풀씨만 씹다가 / 썩지 않는 마음 한 조각 남겨 놓고 / 한 생애의 막을 내리는가 / 흔들리는 저 엄저리 / 시린 시야 밖으로 / 돌아가 눕는 새떼 / 바람만 / 빛깔 고운 무늬로 아른거린다. /
(「바람」일부)
발표된 「나와 너의 장법(章法) . 1」은 산문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제목 자체가 긴장감을 조성한다. 화자 자신의 자아에 대한 통한적 심려와 함께 삶의 자세에 대한 청학적 인식이 넘치고 있다. ‘장법’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전정과 법도로 풀이되고 있다. 전장이란 제도와 문물, 거듭하면 법칙, 규칙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 사이에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상황에 대한 토로의 의미로 수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은 형식상 2연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몇 조각으로 나누어 감상해 봄이 이해를 좀더 쉽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선 ‘너’와 ‘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인칭상 이원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동일 대상이다. 화자가 진행하는 화자 자신의 자아 즉 ‘나’의 다른 하나인 ‘나’를 ‘너’로 인칭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일상적 삶을 결정하는 자아는 항상 또 다른 자신의 자아와 찬선과 부정을 끊임없이 지속시키면서 삶을 영위한다. 그리하여 본 작품은 화자의 자아가 또 다른 자신의 자아에게 던지는 대화이다.
작품 전체는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는 나와 너의 장법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는 현실에 대한 사유를 밯ㄱ히고 있으며 후반부는 이러한 대화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체적 상황들을 하나씩 열거해 나가고 있다.
전반부의 시작은 ‘내가 너에게 너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중하게 질문한다’의 서두를 밝힌다. 그런 후 ‘지금까지 ~ 지나친게 아닌가’를 내세워 또 다른 자신의 자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어쩌면~그 고약한 심사는 누구를 위한 충언인가’도 앞과 같은 불만의 토로이다. 이러한 불만으 lxh로는 또 다른 자아가 가지는 우월성 혹은 부족성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자아에 대한 불만은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침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현실을 헤쳐 나가면서 선택을 하여야 할 경우는 영속된다. 이 선택에 대한 불안과의 후회들이 항상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면 본 작품에서 화자의 물음은 삶의 진정된 자세일 있을 것이다. 그 아래 ‘명확하게~밝혀야 한다’는 화자의 여려가 다소 늘어져 있는 듯하다.
후반부는 내가 질문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 현실을 밝히고 있다. 화자는 ‘말 한마디’ ‘글 한 줄’에 대해서도 일일이 대꾸하는 간섭을 의시긩 흐름에서 자각된 성찰, 기원, 좌절, 절망의 골목에서 절규하는 기도인지를 나의 다른 자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화자가 묻고 있는 내용 전체는 이미 내가 다른 나의 자아에서의 해답보다 먼저 알고 있을 수 있다. 이것은 화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명징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자기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현실의 삶은 자칫 자아의 진정된 진실성이 없으면 모호한 현실의 소용돌이에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다. 화자는 이러한 염려를 보다 확고하게 배제하려는 의지이다.
화자는 다른 나의 자아에게 ‘반려자’인가 ‘동반자’인가를 묻는다. 이것 역시 전자와 같이 화자가 이미 숙지하고 있는 해답일 수 있다. 한 번 더 화자가 자신의 진중되고 진실된 삶을 확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시 화자는 ‘이제 우리 서로가 밝혀두고 동행하면 어떠한가’의 제의를 한다. 화자의 또 다른 자아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독립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면서 작품의 말미레 ‘너의 정체를 기필코 규명하고 말지니라’로 맺음한다. 대치하고 있는 화자의 또 다른 자아에 대한 확고한 인식으로 생각된다.
김송배 시인은 작품의 화자를 통하여 근작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지각 혹은 인식을 확립시키면서 명징성이 부여된 혀닐의 충만된 삶을 만끽하고자 시도하는 것 같다. (2013년 3월호『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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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시공(時空)현상을 어떻게 의식할까’
허형만
나와 너의 장법(章法) . 2
언젠가 나는 「사랑법-그림자」라는 시를 쓴 일이 있다. 거기에서 ‘나는 나를 미행하는 한 물체를 섬뜩하게 어느 날 보았다. 내 몰골을 빼닮은 유령이듯 밤낮 없이 그는 내 곁에서 나를 감시하는 충복이었다.-중략-어느 날 나를 닮은 또 하나의 내가 어눌하게 서 있었다’라고 나의 그림자가 나와 함께 유숙(留宿)하며 ‘만약 네 한몸 바로 추스르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영원히 소멸되리라’는 경고로 나의 행동을 조정한다는 어조(語調)에서 문득 나는 너의 정체를 유추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네가 나에 대한 강한 집념탓인지 나의 언행을 예사롭지 않게 관찰하고 있는 거 같아서 별로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나의 잠자리에서나 그 꿈속에서 까지 나를 챙기는 너의 심사는 과연 누구의 사주(使嗾)인가. 네가 나와 일심동체(一心同體)를 염원하는 황홀한 이 세상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까운 현실적 의문만 남아있네. (『월간문학』 2013. 5월호)
그림자는 원시인들 사이에, 아니 현대인들에게도 때로 또 하나의 자아, 혹은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이승훈에 의하면 태양이 정신의 빛을 상징한다면 그림자는 육체의 부정적 이중성, 혹은 육체가 표상하는 악과 비열한 측면을 상징한다.
김송배의 시에서 그림자는 ‘나를 미행하는 한 물체’이고 ‘나를 감시하는 충복’이며 ‘나와 함께 유숙(留宿)하며 나의 행동을 조정’하는 정체이다. ‘나’와 그림자는 서로 대비되거나 분리되는 것이 아닌 한 몸이고 한 정신이며, 한 영혼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그림자는 ‘나’와의 이중적 부정성이 아닌 ‘일심동체(一心同體)를 염원하는’ 정신적 본능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김송배가 생각하는 그림자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나의 잠자리에서나 그 꿈속에서까지 나를 챙기는 너의 심사는 과연 누구의 사주(使嗾)인가’ 하며 고뇌하듯 공간 속에서처럼 시간 속에서도 현실적 삶을 넘어서는 절대적 존재이다. 이처럼 절대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림자가 일심동체 되는 ‘황홀한 이 세상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안타가운 현실적 의문만 매섭게 남’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한 삶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본래의 온전한 ‘나’의 정신과 영혼을 지키고자하는 진정성 때문이지 않을까.(『월간문학』 2013. 6월호. 시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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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배의 <여백시 64>
이 혜 선(시인. 한국여성문인협회 회장)
바람의 집을 짓는다
가슴 황량한 한켠에
떠돌던 그림자로 기둥을 세운다
다시 구름으로 하얀 벽을 바르고
별들만 가득 방안을 채운다
―어디서 살면 어때
―어떻게 살면 어때
잠시 머물다가
바람의 집을 허문다
그림자 지워지고
구름 흩어지고
별들 제자리로 돌아간다
모두 떠나버린 빈집
허공에 세운 바람의 집.
-「餘白詩․64」전문
김송배 시인은 모든 것을 다 비우고 삶을 말간 물처럼 응시하는 관조의 시세계를 보여준다. 뜨거운 가슴으로 서늘하게 식히고 번뇌로 들끓던 정신도 말갛게 가라앉히면 가슴은 의외로 넓어져서 이웃의 아픔은 물론이고 온 우주라도 다 품어 안을 수 있는 여백으로 가득 찬다.
그리하여 그 여백에 우주의 일부분인 ‘바람’도 ‘구름’도 ‘별들’도 ‘떠돌던 그림자’도 모두 들여놓고 함께 머물 수 있는 우주의 집을 지을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어느 禪師도 부럽지 않은 초탈의 경지에 이른 것 같은데, 문제는 둘째 연의 ‘-어디서 살면 어때 / -어떻게 살면 어때’이다. 이런 물음, 이런 생각을 갖는다는 자체가 아직도 지상의 세속적 삶에서 초월하지 못한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겉으로는 초연한 듯 자신을 달래면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만족과 안주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을 달래면서 애써서 지은 집인데도 거기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잠시 머물다가’ 집을 허문다. 그림자는 지워지고 구름도 흩어지고 별들도 제자리로 돌아가 모두 떠나버린 ‘빈집’이 된다. 그런데 그 빈집마저도 허공에 세운 ‘바람의 집’이어서 집이랄 것도 없는 형태 없는 집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尋牛의 과정에서는 ‘자기 마음’의 형상인 소를 애써 찾아서 여러 가지 어려운 수행과정을 거쳐 길을 들이면 마지막엔 삼라만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시냇물은 노래하고 풀빛은 푸르고 들꽃도 그대로 피어있는데 자신은 자기 마음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있는 그대로를 깨달을 수 있는 返本還源의 경지가 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 시의 화자는 마음속에 잠시 집을 지었다가 모두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마지막엔 형태초차 남지 않는 바람의 집에서의 초탈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가시적인 존재에 연연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시인의 삶의 내면에 대한 투시와 관조가 잘 드러난 시이다.
(2006년 7월호『월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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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의 시집읽기-28
시심으로 저무는 한 해 되소서
한 해가 또 저뭅니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습니다
국내외적으로 격동했었지요. 2017년을 보내며 평화를 기구합니다.
시인이 시를 쓸 때처럼 경건해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바래봅니다. 2018년은 부디 좋은 해이기를..... -유자효
“시는 한겨울에도 살아 있습니다”
숲의 언어
김송배
태초에 내린 이슬들이
계곡 바위틈에서 이끼를 보듬었다
푸르게 푸르게 흐드러진
적요(寂寥)가 하늘 치솟는 기원은
나무로 풀로 자라나서
숲속 이끼로 안식처를 삼았다.
청산(靑山)과 녹수(綠水)가 한 무리된
이 세상에는
너와 내가 호흡하며 살아가는 낙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한 자락 사랑의 언어가 울려퍼지고
다시 계절의 향기 눈부시면
모든 생명들이 조용한 선율로
어우러져 노래하고 춤추었네
오, 신선한 한 줄기 햇살이
만물에게 스며드는 대자연의 조화
태초에 내린 환희를 보전하고 있었다
(책만드는집 간행 <나와 너의 장법(章法)>)
⦁
김송배 시인의 시적 성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3013년 6월 문학의 집 소식지에 권두시로 실린 작품인 듯한데, 숲이 보여주는 생명력을 잘 구현해 내었습니다. 이번 시집은 산문시 ‘나와 너의 장법’ 65편을 1, 2, 3부로 배치하였습니다.
시로 쓴 김 시인의 인생론이자 시론으로 읽혔습니다.
그러나 저는 4부의 몇 편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적 긴장감이 잘 살아나 있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은사인 안장현 시인으로부터 김 시인의 애길 들었습니다. 어언 반세기 전의 얘기지요.
그러다가 시단 행사때 처음 뵙고 무척 반가왔습니다. 저는 마치 구면인 듯 했었거든요. 가끔 뵌 시인은 소탈하고 담백한 인상이었습니다. 이제 시에 대해 더욱 전념하시겠다는 결의가 행간 곳곳에서 읽혔습니다. 시는 인생을 걸만한 것임이 분명하지요.
(<see시詩>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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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포커스]
나와 너의 장법(章法)17
(글-청사, 기청 시인)
입춘 우수 경칩 모두 떠나보낸 뒤 창문 열고 앞산에서
펼쳐지는 생기를 응시한다 갑자기 봄비가 내리고 잠들었던
겨울나무들이 일제히 웅성인다 만유의 새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는 활기 넘치는 계절의 향훈이 나의 내면 깊숙이
번진다 봄 햇살 한 아름 안고 응시하는 대지의 싱그러운
향연에 심호흡을 하고 아아, 신비로운 생명이여, 나는
계절의 섭리에 순응할 것인가, 역행할 것인가, 칠십년을
지나온 주름살을 헤아리고 있다.
너는 또 감상에 흠뻑 젖어 시간을 원망하지만 저기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신록의 왕성한 생명들 풍광에 넋을
잃었구나 그렇다 나의 뇌리에 깊게 스며든 인생론 몇 줄의
문자가 어디론가 두둥실 구름으로 떠가고 있다.
-<나와 너의 장법 17>
출전; 김송배 시집 <나와 너의 장법> 2017. ‘책만드는집’ 간
연락; 계간 시원 (010-3797-8188 이메일 siwon16@daum.net
김송배 시집, 출판기념회 열려
지난 10. 11 저녁 서울 양재동 한 주점에서 소박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그 흔한 꽃다발이나 플래시 세례도 없고 신문사 문화부
기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정순영 임병호 정성수 손해일 강정화 이영하 정태호 강명숙 기청 등
낯익은 시인 10여명이 전부, 그래도 분위기는 여느 거창한 출판기념회
못지않게 차분하고 뜻 깊은 자리였다 모두들 마음에서 우러나는
축하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 * * * *
시는 무엇인가? 영혼을 홀리는 그 무엇이, 그를 칠순이 넘도록
훨훨 날아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가?
아직 그 독한 주술(呪術)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머리에 성성 흰서리가
내리도록 외길을 외로이 걸어가게 하는가?
때로 칠흑 같은 심해(深海)를 유영하는 잠수부로, 광부로 연금술사로
혹은 낯선 행성의 아직 불기운이 남아있는 용암을 발끝으로 느끼면서,
무엇을 찾아 저리 헤매는 숙명의 우주인으로, 무엇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낯과 밤을 저리도 골몰하고 헤매는 것인가?
* * * * *
아쉬움이 남아 가까운 정순영 시인 서재로 자리를 옮겨 소맥(?)으로
훈훈해지자 돌아가며 한마디씩 자유로운 발언시간도 가졌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작은 위안을 느끼며, 21세기 지구별의 한
모퉁이 변방에서, 그나마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위안을 느끼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솟구치는 슬픔을 누르고 누르며---
깊어가는 가을 도심의 밤거리, 가로수 낙엽이 시 한 소절의 아픔으로
부르르 바람에 펄럭이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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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딤돌과 걸림돌의 사유방식
이동희 (시인. 문학평론가)
마알간 호수에 얼굴을 비춰 본다 /파아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지나가다가 / 물 위에 내려앉아 쉬고 있다 / 고운 그의 손을 잡으려다가 / 풍덩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 여기가 낙원인가//—이보세요, 거기서 뭐하세요?
-김송배「이보세요, 거기서 뭐하세요?」전문 (계간『시원』2019.겨울호)
때때로 우리는 자아의 좌표를 확인해야 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이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존재인가? 시시때때로 묻고 살펴봐야 한다. 자아를 망각하는 순간, 나는 삶의 방향을 잃은 채 허무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만다. 이 작품에서 그리고자 하는 것은 자아 각성의 그림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자아와 세계 사이에 ‘호수’가 있다. 이 호수가 자아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발걸음에 데딤돌이 될 수 있다면 그 역시 여여(如如)한 존재로 승화될 가능성이 있다. 즉 각성한 현자가 될 수 있다. 온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간 적도 없는 여래(如來)처럼 원래 없었던 존재가 왔다 하고 우너래 온 적 없는 존재가 갔다 하니 무엇이 왔으며 무엇이 갔다는 것인가? 석존(釋尊)께서는 그래서 영한 분이다. 온 적도 업t고 간 적도 없는 분이다. 각성한 현자이시며 그래서 부처이시다,
우리 또한 여기에서 멀리 있지 않다. ‘호수’에 ‘구름’이 비치고 있다 인생살이를 행운유수(行雲流水)라 했다. 물 위에 뜬 구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물이나 구름이나 난(生)지도 모르게 생겼다가 사라진(滅) 적도 없게 자취를 감추는 것들이다. 그래서 물과 구름이 여래한 것처럼, 인생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구름(물) 위에서 잠시 쉬어가는 게 인생살이이다. 자아의 세계화의 실상이다. 물고 ㅏ구름이 실상을 여여한 존재로 돌아가는 디딤돌임을 망각한 순간, 또는 물과 구름이 영속하는 현실의 실체로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풍덩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낙원인가’ 착각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여여한 편에 서기를 좋아하는 시적자아는 독자에게 묻듯이 자신에게 묻곤 한다. ‘이 보세요. 거기서 뭐하세요?’라고. ‘이것 보세여, 거기(물과 구름)에서 뭐하세요?’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행운유수 인생살이를 낙원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거 보세여! 착가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이 작품에서는 자아와 세계 사이에 물과 호수라는 징검다리를 두고 있다. 이 징검다리를 슬기롭게 건너는 사유의 주인은 여래한 삶의 실상을 놓치지 않는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음으로써 물과 구름이 존재의 실상으로 가는 디딤돌이 된다. 그러나 잠시 떴다 사라지는 물과 구름을 ‘낙원’으로 착각하며 영원을 꿈꾸는 자들은 결국 그 물고ㅓ 구름이 걸림돌이 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잠시 머무는 지상의 삶을 착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시란 무엇인가? 세계의 실산을 내면화하여 여래한 존재의 실상을 깨닫기 위한 디딤돌이다. 이 디딤돌이 존재의 실상을 깨닫게 하는 징검다리가 될 때 우리는 시문학의 진실에 다가서게 될 것이다. 이와는 전제가 들지만, 생사의 갈림길을 세계의 내면화하는 디딤돌로 삼는 경우도 있다. 단음 시에서 그런 시심이 매우 간결하지만 설득력 있게 진술되어 있다.
(2019. 겨울. 014 [시원])계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