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강
9-3. 낭독(朗讀)인가 묵독(黙讀)인가.
시 읽기에는 낭독을 하는 것과 묵독을 하는 것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시 읽기에서 낭독이 좋으냐, 묵독이 좋은가는 각자 취향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시가 지닌 리듬과 소리의 맛을 느끼기 위하여는 낭독이 좋겠고 조용히 뜻을 음미하면서 차근차근 읽어보는 묵독도 좋을 것입니다.
시 낭독이라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크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말하지만, 이는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경우이고 대개는 혼자서 나지막한 소리로 읽는 것도 충분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낭독하는 것을 경청(傾聽)하는 것도 좋으며 묵독의 경우는 작품의 상황과 화자들의 어조를 살피면서 그 의미를 감상하고 시 창작에는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렇다면 시 낭독에서는 김흥규 교수의 저서『한국현대시를 찾아서』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제시하고 있는데 참고하면 도움이 됩니다.
① 시를 낭독하는 데에는 작품의 분위기에 맞는 감정과 호흡을 가져야 한다. 읽는 사람 자신이 작품의 분위기에 일치되지 않으면 기계적이고 딱딱한 낭독이 되고 만다. 그러나 감정이 너무 지나쳐서 신파조(新派調)의 과장된 낭독은 좋지 않다.
② 호흡을 알맞게 조절하면서 시행의 구분으로 표시된 작품의 흐름을 살려야 한다. 대개의 경우 한 행이 끝나는 데서는 호흡을 바꾸어 약간의 여유를 두어야 하고, 한 연이 끝나는 데서는 좀더 큰 여유를 둔다. 한 행으로 된 구절은 가능한 한 한 호흡으로 읽되, 행의 길이가 보통 이상으로 긴 겨우는 문장의 흐름을 고려하여 중간의 적절한 곳에서 호흡을 바꾼다.
이처럼 낭독의 중요한 유의점에 비해서 묵독에는 많은 유의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잘 이해할 수 업는 작품을 대하고는 자신이 시에 대해서 무지(無知)하거나 감수성이 둔하다고 결로 내리고 시 읽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은 시를 무슨 엄청난 신비의 말로 존경하면서 감히 그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친근하게 생각하려 해도 역시 어려운 시가 있는데 그런 경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① 시를 억지로 머리로 읽으려 하지 말고 가슴에서부터 읽자.
어떤 내용이며 의미라고 분명하게 분석하여 알기 어렵더라도 ‘어쩐지 마음에 든다’거나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좋은 곳 같다’라고 하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② 어쩐지 좋다는 느낌을 가지면서 차차 지적인 이해가 더해진다면 더 좋은 일이고 가능한 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으나 잘 풀리지 않는 부분의 의미를 너무 따져 들어가기에 애쓰지 말자.
한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도 풀리지 않으면 그대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인생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조금씩 더 알고 더 좋아지게 된다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이겠습니까?
③ 거듬 읽어도 전혀 좋아지지 않거나 도저히 알 수 없는 작품이 있다면 힘들여 읽으려 하지 말고 덮어 두자.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눈에 띄는 것, 친근한 것, 쉽게 마음에 들고 좋아할만한 것부터 사랑하고 차차 알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이 자신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을 통해 시를 느끼고 차차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④ 시를 읽어 나아가면서 때때로 다른 사람이 시를 해설하거나 분석한 것을 눈여겨
보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맛이나 의미를 알도록 하자.
요즘 시집들에는 그 시에 대한 해설이나 서평이 함께 수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해설은 그 시들을 읽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므로 유익한 안내가 됩니다. 그러나 그 해설이나 서평이 진실의 전부라고 믿고 그것에만 매달려 무슨 절대적인 지식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 해설은 그 방면에 상당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비교적 믿을 만한 사람이 썼지만, 그의 생각과 느낌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 읽기에 대한 보편적인 가능성과 예측할 수 있는 인간의 사유를 정리했기 때문에 참고로 하면 훌륭한 시 읽기가 될 것입니다.
9-4. 현대시의 난해성(難解性)
현대시 읽기에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의 난해성입니다. 우선 용어에서 보면 ‘난해한 이론’이라든가. ‘난해한 수리(數理)’라는 말은 있어도 ‘난해한 시’라든가 ‘난해한 그림’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나 그림은 예술적인 제작물로서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위해서 지어지거나 그린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행하여진 예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난해시란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특정한 경우는 그 시를 창작한 시인에게도 그 시를 쓴 의도와 그 시의 주제, 동기, 방법 등이 마지막까지 자각되지 않고 창작되어졌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독자들이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참으로 딱한 일이지만 그 시가 난해하다기보다는 불가해(不可解)한 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현개시가 난해하다는 일부의 목소리는 아마도 그 시가 독자에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시일 것입니다. 하나하나 시구(詩句)의 의미는 알 수 있으되 특별한 은유나 상징이 없어서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그 시가 질서의 어떤 한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한 편의 시 내부에 하나의 세계가 없으면 그 시는 온갖 방향을 향하여 분열하는 증상을 보이게 되고 정신질환자의 불연속적(不連續的)인 회화와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가 있다면 정말 난해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시들은 모두 난해하다기 보다는 ‘나쁜 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난해하다는 시들은 성질을 정리해보면 대체로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의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현대시는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을 중요한 소재로 삼고 있다.
사과 한 알이 떨어졌다. 지구는 부서질만큼 아팠다. 최후, 이미 여하한 정신도 발아하지 않는다.
--이 상의「최후」중에서
이 작품은 이해가 될 듯도 하고 안될 듯도 하지만, 역시 난해합니다. 이 상의 작품「오감도」를 비롯한 시들은 난해한 편에 속하지만, 현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 심층부에까지 상상력을 확대시켰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불가시적인 것을 찾아보는 능력(상상력)이 한 편의 시 속에서 한 열쇠를 발견하게 되면 이 밖의 시구도 새로운 의미를 느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위의 작품에서 ‘사과 한 알이 떨어졌다’는 것은 실제의 사과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 ‘지구가 부서질 만큼 아팠다’는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앞 문장과의 현실적인 대상으로서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여하한 정신도 발아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생각해보면 ‘사과’는 모든 사상이나 생명의 마지막 씨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역시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모래밭에서
수화기
여인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 향의「바다의 층계」중에서
이 작품에서는 실제의 사물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러한 사물과의 관계를 초월해 있고 따라서 일상적인 의미의 전달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일상적 현실로서는 불가능한 이미지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시들을 어떤 사람은 무대상(無對象)의 시, 혹은 무의미시(無意味詩-nonsense poetry)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좀더 나아가서 난해시와 함께 ‘나쁜 시’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기철은 그의 저서 『詩學』에서 ‘나쁜 시’는 시창작 방법이 잘못 적용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작법에 공식이 없는 이상 공식적으로 좋은 시다, 나쁜 시다라고 정의할 수는 매우 어렵지만, 대체로 현대시에서 시작법이 잘못 적용되었거나 나쁘게 적용된 시로서 다음과 같은 경우를 예시(例示)하고 있습니다.
ㅇ 감상이 노출된 시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 감상적인 시. 시인이 다 울어버리면 독자가 눈물을 흘릴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ㅇ 이미지가 장식적으로 사용된 시
ㅇ 관념이나 의도적으로 무엇을 표현한 시
ㅇ 시 자체의 모순이나 충돌이 내포된 시
ㅇ 지나치게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