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투피스 선생님"
남두현 / 약학부
한참 철없이 뛰어다니던 코흘리개 중학교 1학년 가을학기 첫 전교 조회 시간. 학교에 처음으로 두 분의 여 선생님께서 새로 임용되셨다고 소개하였다. 한 분은 샛노란 투피스를 입으셨고, 또 한 분은 진한 감청색의 투피스를 입고 계셨다. 노란 투피스 선생님은 미술 선생님이셨고 청색 투피스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셨다. 나는 노란 선생님이 갓 태어난 병아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한 학기가 지나고 2학년이 되자 노란 선생님께서 우리 반(2학년 3반) 담임 선생님이 되셨고, 청색 선생님은 옆 반(2학년 4반) 담임 선생님이 되셨다. 나는 반에서 성적이 좋은 편이라 노란 이영자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는 일이 많았고, 따라서 선생님의 여러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서울 출생이시며, 정확하지 않지만 홍익대학교 미술학과를 갓 졸업하셨고 국전 서양화 부문에 입선하신 바도 있으시다고 하셨다. 어떻게 경주까지 오셨느냐고 여쭤보니 역사 도시 경주의 풍경을 그리고 싶어 오셨다고 하셨다. 나는 음악이나 미술에 원체 소질이 없어서 그 분야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선생님께서는 날 늘 이쁘게 봐주셨다.
나의 집안 가세는 날로 기울어 우리 6남매는 하루 삼시세끼도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쌀이 모자라 보리밥과 수제비로 매끼를 때웠으며, 도시락에는 삶은 고구마를 넣어 다녔다.
그런데 중학교 때 부산동창회 장학생으로 다녔던 나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해 장학생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모친이 내 손을 잡고 중학교 3학년 담임 정진용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울고불고하며 읍소하였지만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모친이 빚을 내 등록금을 마련하여 고등학교에 겨우 진학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도 다음 학기 총동창회 장학금을 받게 되어 무난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교복을 사 입을 돈이 없어 국방색 군복을 먹물로 물들인 하의를 입고 다녔고, 상의는 중학교 때 입던 짤막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1학년까지 키가 15cm밖에 자라지 않아 그런대로 입고 다닐 만했다.
같은 교정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었으므로 미술 선생님께서는 나를 먼발치에서 지켜보셨나 보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 흑석동 본가를 다녀오신 미술 선생님께서는 남동생이 입던 것이라며 커다란 옷 보따리 하나를 갖다주셨다. 거기에는 까만 교복도 있었다. 그 이후에도 방학 때 서울 다녀오실 때마다 옷을 갖고 오셨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매년 10cm 이상 커지는 체구로 인해 작은 옷을 입을 수 없게 된 나에게는 미술 선생님의 옷 보따리가 매우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리고 가끔 참고서를 구해 주시기도 하셨고, 무거운 짐이 있으면 나를 불러 하숙집까지 들어달라고 하시며 심부름 값을 주시곤 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감포 전촌국민학교를 빌려 전교생이 합숙 수업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합숙비를 마련하지 못해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담임이신 이종룡 선생님께서 합숙비가 해결되었다고 전촌으로 가자고 하셨다. 나는 그 합숙비를 담임 선생님께서 대납하셨는지 아니면 면제를 받게 해 주셨는지 아직 모른다.
그해 가을 어느 날 미술 선생님께서 하숙집에 짐을 들어달라고 하셨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원불교 법당 문간방에 기거하셨는데, 왠 남성이 그곳에 자리잡고 계셨다. 그분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고 하시며, 수학 문제 하나를 출제하고 풀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문제를 거뜬히 풀어냈고, 그분께로부터 잘 풀었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미술 선생님께서는 결혼하시고 남편 따라 미국으로 떠나신다고 하셨다.
서울대 입시에서 실패한 나는 영남대 입시에서 천마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는 영남대를 선택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과학원(카이스트 전신)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키스트)에 근무하다가 영남대 교수로 취업하였다.
대학 때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재직할 때까지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셨던 정진용 선생님과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셨던 이종룡 선생님께 명절이면 가끔 인사드리러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진용 선생님께서 전해 주시길, 미술 선생님이 남편과 함께 고등학교를 방문하셨는데 남편분이 연세대에 재직하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와 같이 공동 연구를 한 바 있던 식품공학과 오두환 교수님께 말씀드려, 부인께서 젊은 시절 경주에서 미술 교사를 하셨던 교수님을 아시면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던 중 1992년 오 교수님께서 내가 찾는 분을 알아내었다며, 아마도 지구환경학과 민경덕 교수님의 부인인 것 같다고 연락을 주셨다. 그래서 민 교수님 댁으로 전화를 드리고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뵈었다. 20년 만의 해후였다. 미술 선생님께서는 내가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셨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시냐고 여쭈니까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작품 활동을 거의 못 하셨다고 하셨다.
그 이후 가끔 연락을 드리다가 1997년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학회가 개최되었을 때 미술 선생님 내외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민경덕 교수께서는 이과대학장을 역임하고 계셨다. 선생님께서 “예전에 수학 문제를 내고 풀어보라고 하셨던 서울대생이 바로 민 교수야”라고 알려주셨고, 민 교수님은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으셨다.
2002년 고등학교 졸업 30주년 행사에 노란 미술 선생님과 감청색 영어 선생님을 모셨다. 이 두 분은 젊은 시절에 헤어지신 후 35년 만에 만나 서로 궁금하셨다며 매우 반가와 하셨다. 지금도 두 분은 연락을 주고받으신다고 하신다.
나는 명절 때마다 미술 선생님께 조그마한 선물을 보내드리며 전화로 서로 안부를 여쭈고 있다. 2019년 나는 정년 퇴임 후 미술 선생님을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며 그동안 고마움을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수고 많이 하였다고 격려를 해 주셨다. 젊은 시절 짧은 시간 교직에 계셨지만 아직도 연락을 주는 몇몇 제자가 있다고 하시며 보람있는 삶이었다고 회고하셨다. 그중 한 분으로 KBS 프로듀서 출신이며 경주 예술의 전당 관장을 역임한 엄기백 PD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이제 내가 존경하던 정진용 선생님과 이종룡 선생님께서는 타계하셨고, 연세대 민경덕 교수님도 2021년 코로나 시국에 운명하셨다. 따라서 중 고등학교 은사님 중 연락을 드릴 수 있는 분은 여든이 넘으신 미술 선생님뿐인 것 같다. 조만간 연락을 드리고 식사 대접을 해야겠다.
첫댓글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가을 저녁이라 그런지...... 전혀 수식어가 없이 차분히 시간을 밟아간 교수님의 글이 풋풋한 어린 소년이 평생을 품어온 따뜻한 정을 고스란히 전합니다. 더불어 선생님들이 얼마나 제자를 자랑스러워했는지도 수식어 없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은사님들께 드리는 정성이 고맙습니다. 이 글에 맞는 글 색깔을 골라보고 싶었는데, 선택 범위가 넓지 못했습니다. '노란 투피스 선생님'과 식사하시고, 사진 한장 찍어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