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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앰 댓 상권 36. 죽임은 죽이는 사람에게 해가 되지, 죽임을 당하는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아니한다.
문: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죽었다가 새 몸을 받아 태어나면 왜 전생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그리고 만약 기억하면 기억된 내용이 의식화될 수 있습니까?
M: 같은 사람이 새 육신 속에 태어났다는 걸 선생이 어떻게 알아요? 새 육신은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어요.
문: 크림이 한 그릇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릇이 깨어지면 크림은 여전히 남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집니다. 옛날 그릇에도 크림향이 있고 새 그릇에도 크림향이 있습니다. 크림의 향기를 이 그릇 저 그릇으로 옮겨 줍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동일시도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아갑니다.
M: 그건 상관없어요. 육신이 있을 때는 육신의 특성이 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겠지만 육신이 없으면 "내가 있음"이라는 의미의 순수한 존재를 지니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선생이 새 육신으로 태어났을 때 먼저 경험한 세계는 어디 있나요?
문: 누구나가 지금의 육신이 지나온 과거에 지녔던 모든 육신의 세계를 체험하잖아요.
M: 주어진 육신 안에 과거의 육신이라니. 이건 그냥 생각입니까? 아니면 기억입니까?
문: 물론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체험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뇌가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M: 스스로 답을 했군요. 왜 생각을 가지고 놉니까?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세요. 그리고 선생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가 있음"입니다. 그것과 함께 머무르고 나머지 모든 것을 물리치세요. 그게 바로 요가입니다.
문: 저는 말로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저 공식대로 욀 뿐이죠. "이건 내가 아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다. 난 이 모든 것 너머에 있다."
M: 그럼 됐어요. 처음에는 말로, 그 다음엔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그 다음엔 행동으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선생의 내면에 있는 실재에 관심을 주세요. 그러면 그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건 크림을 저어서 버터를 만드는 거나 같아요. 바르게, 그리고 꾸준히 하면 결과는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문: 어떻게 절대적인 것이 과정의 결과가 될 수 있습니까?
M: 선생의 말이 맞아요.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귀착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의 장애가 될 수는 있어요. 마치 크림을 저어주지 않으면 버터가 분리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충동을 일으키는 것은 본성입니다. 내면이 외부를 자극하면 외면은 흥미와 노력으로 반응해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내면도 외면도 없어요. 의식의 빛은 창조자이며 동시에 피조물입니다. 체험자이며 동시에 체험이요. 육신이고 또 육신에 의해 드러난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을 투사하는 힘을 잘 보세요. 그럼 문제가 없어질 겁니다.
문: 투사하는 힘은 어느 것입니까?
M: 욕망에 의해 촉발된 상상력입니다.
문: 그렇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통제력은 없습니다.
M: 그건 또 하나의 환상입니다. 결과를 갈망하기 때문에 생겨난 거지요.
문: 목적을 지향하는 무엇이 잘못입니까?
M: 지금 말하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목적이나 행동이 거론될 때가 아니에요. 선생이 필요한 건 듣고 기억하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이건 음식물을 섭취하는 거나 비슷해요.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씹고 삼키는 거예요. 나머지 모든 일은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행해지는 거지요. 듣고 기억하고 이해하세요. 마음은 배움이며 동시에 무대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이지만 선생의 참모습은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이 태어났다가는 죽고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지, 선생이 죽고 살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세계를 창조하고 또 세계의 온갖 다양함을 창조하는 거예요. 훌륭한 연극 속에 여러 가지 등장인물과 상황이 등장하듯이 선생도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이 조금씩 필요한 겁니다.
문: 연극 속에서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없습니다.
M: 자신과 등장인물을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선생 자신을 동일시하지 마세요. 그러면 고통을 겪지 않을 거예요.
문: 타인들은 고통을 겪을 게 아닙니까?
M: 먼저 선생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드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입니다. 만약 선생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과 함께 일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하나님이 되세요. 세계를 하나의 유희로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력을 다해서 거기서 일을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둘 다 하든가.
문: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죽을 때 거기에 무슨 일이 생깁니까? 다른 몸으로 계속된다는 생각에 동의하세요?
M: 계속되지만 계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것은 기억일 뿐이에요. 모든 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요. 결국 동일성이라는 게 뭐겠어요? 기억이 계속되는 게 아닌가요? 기억이 없다면 동일성을 운운할 수 있겠어요?
문: 예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모르더라도 유전적 특성들은 여전히 남지 않습니까?
M: 그것들을 "내 것이오"라고 말하는 게 누굽니까? 등록하고 비교하는 기억을 가진 자가 아닌가요? 기억이 선생의 정신적 생활의 외피라는 걸 모르겠어요? 그리고 동일성이라는 건 시공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한 패턴일 뿐입니다. 그 패턴을 바꾸어 보세요. 그러면 사람이 바뀌게 됩니다.
문: 그 패턴은 의미 있고 중요합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자수를 해놓은 걸 보고 그냥 채색된 실이라고 말한다면 가장 중요한 걸 놓치게 됩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책을 보고 먹물이 찍힌 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의미의 부분을 놓치는 셈이 됩니다. 동일성(identity)이라는 건 중요합니다. 그게 개성의 기초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개성이 우리를 독특하게, 대체할 수 없게 만듭니다. "내가 있음"이라는 것은 독특함을 직관하는 것입니다.
M: 맞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동일성, 개성, 독특함 등등은 마음에 있어서는 모두 가치로운 측면들이지만 역시 마음의 일일 뿐이지요. "난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도 역시 가치있는 체험입니다. 또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들은 이름 없는 것을 안팎에서 본 두 측면이지요. 불행하게도 말은 언급할 수 있을 뿐이고 실제의 변형을 낳지는 못해요. 말을 넘어갈 수 있도록 해 보세요.
문: 죽음과 함께 죽는 것은 무엇입니까?
M: "나는 이 몸이다."라는 생각이 죽는 겁니다. 목격자는 죽지 않아요.
문: 자이나교도들은 끝없이 갈라지고 여러 개의 주시자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M: 그건 몇몇 위인들의 체험에 기초한 그들의 전통입니다. 하나의 주시자가 무수한 몸속으로 "내가 있음"으로써 자신을 반영시킵니다. 아무리 미묘한 것이라 해도 그런 육신들이 남아있는 한 "내가 있음"은 많은 것으로 나타나지요. 육신 너머에는 오직, 유일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문: 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M: 신이라는 것은 세상을 육신으로 삼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름 없는 이 존재는 모든 신들의 너머에 있어요.
문: 라마나 마하르쉬 선생은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이 그 분에게 어떤 차이를 낳았습니까?
M: 아무런 차이도 없어요. 죽기 전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실재일 뿐입니다.
문: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차이를 낳습니다.
M: 죽기 전에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던 것이 그대로 지속될 뿐입니다.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한 이미지는 그대로 남는 거지요.
문: 전날에 각자가 명상 등에 동물의 가죽을 쓰는 문제에 대해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전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관습과 전통을 핑계 삼아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잔인할 수도 있는 전통은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설명은 해줄 수 있지만 합리화하지는 못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M: 내 말은 깨달았다고 해서 무질서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은 아주 법을 잘 지킵니다. 그러나 그의 법은 자신의 본성에 따른 법이에요. 사회의 법은 아니지요. 사회의 법은 환경과 필요에 따라 준수하기도 하고 어기기도 하지만 결코 비현실적이거나 무질서하지는 않아요.
문: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관습과 습관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M: 우리들의 견해차에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선생은 육신과 마음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고, 나의 관점은 관조자의 관점입니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요.
문: 그래도 몹쓸 짓은 여전히 몹쓸 짓입니다.
M: 선생보고 잔인해지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어요.
문: 타인의 잔인함을 이용하는 것은 대리인을 이용한 잔인함입니다.
M: 살아가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디서나 잔인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기 때문이죠. 이건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런 사실 때문에 살아 있다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선생이 삶을 시작한 것도 어머니에게 끝없는 고통을 줌으로써 시작된 것이고. 삶의 마지막 날까지 육신에 의존하여 의식주를 구하기 위해 경쟁하지요. 불안과 죽음의 세계에서 육신의 필요를 위해 싸우고, 육신이 안전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동물의 관점에서 보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최악의 죽음은 아닙니다. 확실히 병이 들거나 노쇠해서 죽는 것보단 나아요. 잔인함은 동기에 있는 것이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살생은 살생하는 사람을 해치는 것이지 살생 당하는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 그렇다면 사냥꾼이나 백정들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서는 안 됩니까?
M: 누가 선생더러 그런 걸 받아들이라고 했나요?
문: 선생님께서 받고 계십니다.
M: 그건 선생이 날 보는 눈 때문입니다. 어째 그리 급하게 나를 재판대 위에 세워 놓고 비난하며 선생님 식으로 판단하고 집행을 합니까? 왜 선생 자신에게서 시작하지 않고 내게서 시작해요?
문: 선생님 같은 분은 본보기를 보이셔야 합니다.
M: 선생은 내 본보기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나요? 난 세계에 대해선 죽은 몸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심지어는 살기조차 바라지 않아요. 내가 존재하듯이 존재하고 내가 행하듯이 행해 보세요. 선생은 내 옷과 음식으로써 나를 판단하고 있지만, 난 단지 선생의 동기만 볼 뿐입니다. 만약 선생이 자신을 육신이라 하고, 마음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을 한다면 가장 큰 죄를 짓는 셈이 되는 겁니다.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아주 큰 죄지요. 그러니 거기에 비한다면 선생이 말하는 여타의 잔인함이란 그것에는 비교도 되지 않아요.
문: 선생님께서는 자신은 몸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회피하십니다. 그러나 몸을 다스리는 건 선생님이시니까 몸이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것도 선생님입니다. 몸에 대해서 완전한 자율성을 허용한다는 것은 멍청이 같은 미친 소리입니다.
M: 진정해요. 나도 고기나 털을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데에 반대해요. 하지만 그것을 우선시하지는 않아요. 채식주의라는 것도 가치있는 대의명분이지만 가장 긴박한 문제는 아닙니다. 모든 대의라는 것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간 사람에 의해 가장 잘 성취되는 것입니다.
문: 제가 라마나 아쉬람에 있을 때에는 바그완(Bhagwan)께서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걸 지각하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M: 필요한 믿음이 있었군요. 진정으로 그를 믿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그를 봅니다. 모든 것이 선생의 믿음에 따라 발생하는 데 선생의 믿음이란 건 욕망의 모습이에요.
문: 선생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지니고 있는 믿음 역시 욕망의 한 형태가 아닙니까?
M: 내가 "내가 있다."라고 말할 때에는 몸을 중심 삼는 독립된 실체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존재의 전체의식의 바다, 존재하고 아는 것의 전 우주를 의미해요. 난 영원히 완전하기 때문에 욕망이 전혀 없어요.
문: 타인들의 내적인 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신가요?
M: 내가 바로 그들입니다.
문: 제가 말하는 건 본질의 동일성이나 외형의 유사함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타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개인적 체험에 참여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와 함께 고통과 기쁨을 느낄 수가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관찰과 유추에 의해, 제가 느끼는 것을 우롱 하시는거냐 이겁니다.
M: 모든 존재들이 내 속에 속해 있어요. 그러나 다른 뇌 속에 든 내용을 나의 뇌 속에 옮겨놓는 것은 특별한 훈련이 필요해요. 훈련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문: 전 선생님의 투영도 아니고 선생님도 제가 투사한 것이 아닙니다. 전 선생님이 만든 게 아니고 제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상상과 투영에 관한 이런 조잡한 철학은 제게는 호소력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서 모든 실재성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의 이미지입니까? 선생님께서 제 이미지입니까? 아니면 제가 선생님의 이미지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제가 제 자신의 이미지 속의 한 이미지입니까? 아니지요. 어디선가 뭔가가 잘못되었습니다.
M: 말은 스스로 공허함을 나타낼 뿐입니다. 실재는 묘사될 수 없고 체험될 수밖에 없어요. 이것보다 더 나은 적당한 표현이 없어요. 내가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 말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최상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매한 말로 얼버무리더라도 모든 건 하나예요. 그리고 모든 일이 행해지는 건 "하나의 근원"을, 즉 모든 욕망의 목적이며 우리가 "내가 있음"으로 알고 있는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문: 욕망의 뿌리가 있는 것은 고통입니다. 근본적인 충동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M: 고통의 뿌리가 뭘까요?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욕망의 뿌리는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는 충동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고 거기에 되돌아가기 전까지는 쉬지 않을 겁니다.
문: 언제 돌아갑니까?
M: 선생이 바랄 때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어요.
문: 그러면 세계는요?
M: 선생이 그것을 함께 가지고 갈 수 있어요.
문: 제가 완성에 이를 때까지 세계를 도우면서 기다려야 합니까?
M: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세계를 도우세요.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그 노력이 선생을 성장시킬 겁니다. 세계를 도우려 하는 데에는 잘못이 없어요. 선생이 뜻한 바대로 하세요.
문: 분명히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세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M: 세계가 도움을 받을 때가 오면 몇몇 사람들에게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의지와 지혜와 힘이 주어집니다.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