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롸 노인의 삶
이정식
사람은 세상 만물 가운데 유일하게 문자를 읽고, 생각을 글로 남기며 문화를 이루어 온 존재다. 총명한 두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지혜를 모아 문명을 꽃피웠다. 그래서 눈은 삶을 밝혀 주는 등불이요, 세상을 향한 가장 소중한 창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 데 큰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한가 보다. 어느 날부터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글씨는 보일 듯 말 듯 아른거렸고, 눈은 쉽게 피로해졌다. 답답함과 안타까움 끝에 안경점을 찾아가 처음으로 돋보기를 맞추었다.
그날 이후 돋보기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책을 읽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신문을 펼칠 때도 언제나 먼저 돋보기를 찾는다. 외출할 때면 허리춤에 챙겨 두는 습관도 생겼다. 이제 돋보기는 단순한 안경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해 주는 또 하나의 창이며 오래된 벗이 되었다.
처음에는 시력이 떨어지는 것이 단지 나이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텔레비전과 컴퓨터, 스마트폰을 오래 바라보는 생활도 한몫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젊은이들도 두꺼운 안경을 쓰고 생활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 시대가 달라질수록 눈은 더욱 바빠지고, 그만큼 쉽게 지쳐 간다.
나이가 들수록 눈만 늙는 것이 아니었다. 귀도 예전 같지 않고, 다리도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몸의 모든 기관이 조금씩 세월을 닮아 간다. 문득 젊은 날을 떠올리면 아쉬움이 밀려오지만, 그것 또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돋보기를 쓰다 보면 어린 시절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바느질을 하실 때마다 나를 불러 바늘귀에 실을 꿰어 달라고 하셨다. 어린 나는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은 마음에 그 일이 귀찮기도 했고, 할머니가 부르시면 또 바늘귀를 꿰어야 하나 싶어 슬며시 겁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수없이 바늘귀에 실을 꿰어 드리던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그 할머니의 나이가 되었다. 예전에는 내 눈이 할머니의 손이 되어 드렸지만, 지금은 돋보기가 내 눈이 되어 준다. 세월은 참으로 신기하다. 내가 베풀던 도움을 이제는 작은 돋보기에게 받고 있으니 말이다.
눈이 침침해질수록 앞을 보지 못하는 분들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캄캄한 세상 속에서 손끝과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가는 그분들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울까. 그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비록 돋보기를 써야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 또한 하늘이 내게 허락한 감사한 축복이다.
아침이면 신문이 배달된다. 나는 돋보기를 찾아 쓰고 조심스레 신문을 펼친다. 그런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제목들이다. 정치 싸움, 교통사고, 화재와 재난 같은 사건들이 굵은 글씨로 지면을 가득 메운다.
반면에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한 사람, 홀로 사는 어르신을 묵묵히 돌본 사람, 늙은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효자의 이야기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 속에 숨어 있다. 침침한 눈으로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 읽기가 쉽지 않다.
나는 신문이 조금은 달라졌으면 좋겠다. 세상을 밝히는 선행과 따뜻한 마음, 서로를 위로하는 미담이 더 큰 글씨로 실려 돋보기 없이도 잘 보였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가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끝내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비록 침침한 눈이지만 앞을 볼 수 있고, 돋보기를 쓰면 책도 읽고 글도 쓸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돋보기를 쓰는 순간마다 늙어 가는 서글픔보다 아직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감사가 더 크게 다가온다.
돋보기는 단지 작은 안경이 아니다. 세월을 받아들이게 하는 지혜이며, 삶의 소중함을 다시 읽게 하는 또 하나의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