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諱)는 태현(泰鉉) 자(字)는 여칠(汝七) 호(號)는 죽헌(竹軒)이시고 문헌공(汝昌-여창)후 몽천공(光漢-광한)의 8세손인 감역공(在行-재행)의 아들이시다.
공은 1858년(철종 9년. 戊午) 1월 5일에 태어나셨다.
공은 용모와 거동이 단정하고 빼어났으며 모든 행동이 남달리 뛰어나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집에서 부리는 노복들에게도 법도 있게 처신하셨다.
공은 일곱 살때 어머님의 애상을 당하였는데 그때 곡을 하는 예절이 어른 같아서 사람들이 다들 기특하게 여겼으며, 또 자라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여 책을 읽을 때는 옛 성현들의 큰 진리를 말씀해놓은 대목에 이르면 반드시 무릎을 치며 그 뜻을 가슴에 새겨두고 잊지 않았다.
공은 스무살 때부터 서울에 가서 지냈는데 그때 이름 있는 벼슬아치들이나 큰 재상들이 공을 보고 좋아하여 도와주었다. 1883년(고종 20년. 癸未)에 여러 재상들이 공의 내능을 임금님에게 직접 아뢰어 천거하니 임금님께서 특별히 공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 하셨다. 1886년(고종 23년. 丙戌)에는 상의원(尙衣院)의 주부(主簿)로 승진하셨다가 한성부(漢城府)의 주부로 옮겼으며 또 전환국(典圜局)위원을 지내셨다.
공은 큰아버지(在行-재행. 生父는 在範-재범)앞으로 양자를 가셨기 때문에 양가에 부모님들 상(喪)을 당할 때마다 복을 입어야 되어서 몸이 몹시 상하였는데 거기다 또 부인까지 병환을 얻어 돌아가시니 더욱더 슬픔이 크고 고생스러웠다. 그런데 그때 나라 안에서는 세계열강들이 밀려 들어와 날로 정세가 급변하였다. 그래서 세상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 자연을 즐기시며 시도 읊으시고 지내셨는데 그때 전답 4백석지기를 떼어 일가간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고을에 고질병이 번지니 걷어 부치고 일일이 그 사람들을 구제하고 해마다 설에는 소를 잡아 노인들에게 세찬을 보내는 등 많은 덕을 베풀었다. 그래서 도(道)에서 공의 덕망을 칭송하여 조정에 천거하니 암행어사로 하여금 공의 공적을 조사케 하여 포상으로 정 3품 통정대부에 승차시켰다.
1896년(고종 33년. 丙申)에 명성왕후(민비)의 국장이 치러지기 전에 그의 새 능을 관리하는 정 3품 당하관 산릉낭청(山陵郎廳)에 임명되셨으며 다음해에는 조선의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 등의 어진(御眞)을 모신 궁전(璿源殿-선원전)의 별감(眞殿別監-진전별감)을 지내시고 1897년(고종 34년. 丁酉)에는 중추원(中樞院)의 의관(議官)에 제수되셨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사양 상소를 폐하고 다음해에 비서원(秘書院)의 승(丞)에 제수 하였다. 그러나 또 사양소를 올렸다.
그 뒤 1901년(고종 38년. 辛丑)에는 특별히 충청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임금님에게 사양하는 소를 올리니 “그만하면 되었다”하시고 윤허하시지 않으셔서 할 수 없이 입궐하여 칙명과 교지를 받았는데, 칙명에 「지금 충청북도가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그대가 아니면 다스리기가 어려우므로 특별히 이 칙교를 주노니 잘 다스리도록 하라」하셔서 공은 황제의 칙교를 받고 황제에게 아뢰기를 “성교(聖敎)를 들으니 측은한 마음은 간절하오나 소신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니 옆에 있던 민충정공(민영환)이 공을 찬양하여 말씀하시기를 “지금 이 시기에 공과 같이 국사를 잘 해결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느냐며 우리 서로 마음을 터놓고 말하자면서 배에 물이 새어 들어오는 것과 같이 국가의 장래가 어렵고 위태로운데 우리들까지 힘을 잃으면 안되니까 사나이답게 지금 곧 부임하여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하시오.” 하여 어전을 물러나와 다시 조정에 돌아오니 동료들이 다들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래서 부임하여 백성을 잘 다스려 보려고 힘쓰는데 관하에 수령들이 구습을 고치지 않고 지방 텃세를 믿고 날뛰는 아전들과 같이 합세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바르게 하려고 하는 사람을 헐뜯고 파괴하니 전임자들이 그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무사안일 하였기 때문에 본도(本道)는 계속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공이 조정에 청하여 “역을 모아놓은 정부미 몇 천석을 좀 나누어주면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추수하여 갚도록 하겠다”고 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여 주심으로 공은 그 양곡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등 정성을 다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고 돌보았다. 이렇게 되니 공의 선정을 칭송하는 소리가 크게 떨쳤는데 한쪽에서는 공의 ud성을 시기하는 권세를 가진 간신배들이 있어 공을 중상 모략하므로 공이 소를 올려 사직하고 돌아가려고 하니, 민충정공이 공에게 말씀하시기를 “공을 해치려고 하는 놈들은 상식이 없고 의로움에 어두운 자들이니 공은 염려하지 말라”시며 “어찌 어진 공과 악한 간신배들을 비교할 수 있겠소”하시면서 위로하셨다. 그리고 임금님께서 “짐이 정직한 사람은 버리지 않을 것이며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내쫓을 것이라”고 하셨다. 민충정공이 옆에서 말씀하시기를 “한 고을을 나누어 먹이다 보면 제대로 나누어주지 못한 곳도 있을 수 있는데 일부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불평을 한 것이니 염려말고 나를 믿고 있으면 임금님께서 공의 정직함을 알고 계시니까 디시 살펴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황제께서 치적이 나쁜 원들은 다 파직시켜 버리시고 좌우를 둘러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충북관찰사의 정직함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 또 민충정공이 말씀하시기를 “어떠한 일이든지 꺼려함이 없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용감하게 바로 나아가는 사람은 충백(忠伯)밖에 없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또 공은 그 고을의 잘못된 민속(民俗)을 바로 잡고자하여, “여씨의 향약(김안국 지음)과 율곡선생이 말씀하신 향약을 지키는 사람이 우리 고을에 몇이나 되겠는가” 하시고, 고을의 백성들에게 미풍양속을 교화하여, 고을 백성들이 다 잘살게 되고, 그 미풍양속을 잘 지키게 되니 고을 백성들이 공의 생사당(生祠堂)을 지을려고 의논하였는데 그것을 칙령으로 엄금하고 있음을 알고 모두들 애석해하며 돌아갔다. 그때 상께서는 공을 특별히 총애하셨으므로, 공을 모함하는 자들도 있고해서 마침내는 내직인 중추원(中樞院)의 의관(議官)으로 옮겨 제수 하셨으나 공은 사양하는 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고을 백성들이 만류하였으므로 다시 만류를 피하여 지름길로 가려고 했는데 그것을 알고 백성들이 공이 탄 가마를 메고 부(府)마당으로 들어와 부득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집무를 하니 백성들이 다 안심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틀 후에 백성들의 만류를 피하여 새벽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또 1905년에는 하동정씨 세적실록을 최초로 편집. 간행하셨으며 그해(1905년 고종 42년. 乙巳)에 특별히 종 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차하셨다.
공은 사회도덕이 무너져가는 것을 걱정하여 일찍이 도숭산(道崇山)아래에다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숭양정(崇陽亭)이라 하시고 여러 학자들의 책을 구해서 보관해 놓고 유생들을 모아 계를 조직해 향교를 보수하고 성현들을 받드는데도 정성을 다하셨다.
1919년(己未) 9월 15일 향년 62세로 별세하시니 고을 선비들이 향교에 모여 장례절차를 의논해 사림(士林)에서 주관하여 장례를 거행하였는데 이때 원근에서 공을 아는 친지들과 공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장례를 받들었으며 참판(參判) 김영덕(金永悳)공이 묘갈명을 찬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