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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2309?aid=302309
우리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⑪ 프로기사 조훈현 - “ 스승 세고에의 고독한 죽음에 통한의 눈물 흘렸다”
조훈현은 세계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한 기록으로 채운 거목이다. 세고에 겐사쿠, 후지사와 슈코 등 두 명의 스승에게 바둑의 예도와 철학, 치열한 승부호흡을 배웠다.
바둑기술보다 ‘사람 됨됨이와 그릇’을 중시하는 선 굵은 스승 세고에 겐사쿠. 그는 조훈현을 세계 최고의 기사로 키워 바둑문화를 전수해준 한국에 보답하고자 했다. 과연, 조훈현은 일세를 풍미한 불세출의 기사로 성장해 스승의 사랑에 보답했다.
6월 11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만난 바둑 황제 조훈현 국수(61)의 낯빛은 좋았다. 피부에 잡티가 없어 희고, 옅은 광채를 발하는 아주 건강한 모습이다.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흔히 보이는 안색이다. 하루 서너 갑씩 줄기차게 뿜어댔던 담배(‘장미’)는 마흔셋 나이에(1996년) 딱 끊어버렸다. 술이야 밀밭에만 가도 취하는 체질이다. 평생 세 번을 취해 장렬하게 쓰러진 적이 있는데, 그때 비로소 ‘지구가 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조 국수 특유의 좀 싱거운 농담이긴 하나 오랜만에 들으니 재미있다.
등산은 오랜 취미이자 건강 유지의 교두보다. 산이 가까운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평생 살 집을 구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바로 북한산자락 발치에 자리 잡은 2층 양옥집이다. 동네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인 형제봉에 자주 오른다고 한다. 전국의 명산은 거의 모두 올랐고, 산에서 맺은 사람과의 인연도 산처럼 쌓였다.
요즘은 많이 한가하다. 옛날엔 하루걸러 피 말리는 대국을 치렀지만, 최근엔 한 달에 한 번이나 될까. 술과 매와 세월엔 장사가 없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작년 대국 수와 승수를 물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실례가 되었다.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하긴 이제 바둑황제를 넘어 신으로 나아가는 길목을 지나고 있으니, 대국 수나 승수를 계산하고 있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 바둑계에 노력하는 천재가 없다”
그가 희대의 바둑천재라는 건 기록이 말한다. 작년 9월 1900승을 달성했다. 개인 통산 1900승은 세계바둑계에서 처음 있는 기록이다. 국내대회 148회, 세계대회 11회 우승을 합친 159회 우승 횟수 역시 세계 기록이다. 한마디로 휘황한 기록의 편력이다. 1989년 제1회 잉창치배 우승 이후 승승장구 ‘최강한국바둑’을 앞장서 이끌었던 것도 그였다.
세 번에 걸친 국내 전(全) 타이틀 석권(1980, 1982, 1983), 국수전 10년 연속 우승(1985), 패왕전 16회 연속 우승(1978∼93), 세계최초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1994). 조훈현으로 대표되었던 휘황했던 과거는 이제 중국의 무서운 추격으로 위태롭다. 이미 추월당한 흔적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 이유를 물으니 ‘중국바둑 기세론’, ‘한국바둑 천재 부재론’으로 설명한다.
“중국 바둑은 이미 흐름을 탔어요. 전국의 인재가 바둑으로 모입니다. 프로기사가 굉장히 좋은 직업으로 대접받고, 그들의 기세가 아주 맹렬하죠. 실력이 엇비슷하다면 기세가 강한 쪽이 이깁니다. 중국 기사와 상대하는 우리 기사의 정신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우리 바둑계를 중심으로 보면, 일단 천재가 나와줘야 하는데, 그런 재목이 보이지 않아요. 이세돌은 천재라기보다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 기사’라고 생각합니다. 천재가 나와주고, 그 천재가 엄청난 노력을 해줘야 돌파구가 열릴 텐데….”
그러면서 조훈현의 사형(師兄)이라 할 수 있는 현대 바둑의 기성(棋聖) 우칭위안(吳淸源·1914∼)의 사례를 들었다. 우칭위안은 천재이면서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어린 시절 바둑책을 한 손에 들고 어찌나 많이 보았는지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다고 한다.
한번은 그의 스승 세고에가 우칭위안을 머리 좀 식히라며 야구장에 보냈다. 그런데 우칭위안은 야구장에서 야구는 보지 않고, 고개를 젖혀 하늘만 보더 라고 했다.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공부를 했던 것이다. 우칭위안은 올해 100세. 아직도 검토실에 종종 나와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고 한다.
조 국수는 남들에게는 있는 세 가지가 없다. 휴대전화, 운전면허증, 신용카드다. 그나마 카드는 몇 년 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프로 승부사에게 흔히 있기 마련인 무슨 징크스 같은 것도 굳이 만들지 않는다. 큰 대국을 앞두고 미리 상대의 기보를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도 조훈현의 특징이다. 상대의 바둑을 치밀하게 연구하는 중국 기사들과 다른 점이다. 상대가 엉뚱한 포석이라도 들고 나오면 되레 혼란스러우니, 현장에서 부딪히는 대로 두자는 주의다.
그저 ‘무심(無心)’이 최고라고 하니, 역시 천재다운 습성이다. 잠이 안 오면 무협지나 보며 시간을 때운다. 한동안 진돗개, 아프간하운드, 삽살개 등을 키웠지만, 이젠 그것마저도 그만뒀다. 그놈들이 수명을 다 할 때마다 헤어져야 하는 게 너무 가슴 아파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관이 되니 좋은 것도 있다. 골프(90타 수준) 배울 시간이 난다. 스승에 대해, 치열했던 수업시대에 대해 물으며 말꼬를 틀었다.
“두 분의 ‘엄청난 스승’ 세고에 겐사쿠 선생님, 후지사와 슈코 선생님이 제 인생과 바둑을 형성했죠. 세고에 선생은 제 인격을 다듬으셨고, 후지사와 선생님은 제게 바둑기술을 가르치셨죠. 후지사와 선생은 참으로 기인이었는데, 1985년 그분 환갑연 때 가보니 좌우에 부인이 두 분이나 있었어요. 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거의 날마다 경마, 경륜, 마작에 빠졌었는데, 알고 보니 여인도 많았다더군요. 세고에 선생의 너른 인격, 후지사와 선생의 통 큰 ‘배짱의 바둑’을 제 바둑인생의 밑거름으로 여깁니다.” 조훈현은 세고에 문하에서 총 9년간 수련했다.
부친 조규상의 대담한 도박
조훈현의 정식 스승은 일본의 세고에 겐사쿠(1889∼1972). 그는 나이 일흔넷(1963년)에 조훈현을 내제자로 받아들였다. 평생 세 명의 제자만을 두었다.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1907∼1994), 중국의 우칭위안, 한국의 조훈현이다. 조 국수의 표현에 따르면 그 나이에 제자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다고 한다. 조훈현의 기재에 반한 측면도 있겠지만 더 깊은 뜻도 있었다.
“세고에는 한중일의 바둑천재 딱 한 명씩만 데려다 키웠어요. 나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바둑은 원래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우칭위안을 키워 중국에 보답했으니, 조훈현을 잘 키우면 한국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선생은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획을 그을 재목이 되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바둑기술보다는 ‘사람 됨됨이와 그릇’을 중시하는 선생의 가르침은 정말 깊고 무거웠죠.”
살아 있는 기성 우칭위안이 조 국수의 사형이란 의미는 이런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는 지난 6월 12일 만 100세를 맞았다. 중국 푸저우 명문가에서 출생하여 14세 때 일본의 세고에 겐사쿠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기타니 미노루와의 흉내대국과 본인방 슈사이와의 특별대국을 통해서 우칭위안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하지만 진정한 우칭위안의 위상은 10번기 대결에서 완성된다.
1939년 우칭위안은 기타니와의 10번기를 시작으로 후지사와 호사이와의 세 차례에 걸친 10번기 등 1956년까지 계속해서 두었다. 당시 유일의 승부바둑이었던 10번기를 통해 당대 일본의 일류 고수들을 모조리 물리쳤으니, 일본에서는 1939년부터 1956년까지를 ‘우칭위안 시대’로 부른다.
두 분의 일본인 스승 이전, 조훈현 바둑 인생의 출발은 그의 부친 조규상으로부터 시작됐다. 부친은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막내아들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자신의 생애를 던져 당대의 바둑황제를 만들어낸 킹메이커다. 고향을 등지게 된 것도 100% 막내의 바둑 공부를 위함이었다고 한다. 적빈(赤貧)은 아버지의 열정을 가로막지 못했다. 무조건 짐을 싸서 서울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아들의 재능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1950년대 중반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우리 바둑계의 현실에 비춰보면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결정이었다. 조훈현이 겨우 다섯 살이 되던 해다.
서울 신설동에서 돈암동으로 가다 보면 좌우로 야트막한 산맥이 늘어서 있다. 성북구의 비탈진 그 동네가 1960년대엔 다 달동네 판자촌이었다. 무작정 상경한 조규상 일가가 둥지를 튼 곳은 보문동. 탑골 승방 보문사 뒷골목의 우물터를 돌아 층층계단을 오르면 경동고등학교 담장 아래 닥지닥지 붙어있는 마을이 있었다. 번지에 산(山) 자가 붙는 곳으로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중의 하나다. 조규상은 신혼의 장녀 조복심 집에 임시로 기거했다. 보문시장에 좌판을 깔고 야채장사를 시작하면서 어렵사리 집을 마련했고, 당시 목포에 살았던 식구들을 전부 끌어 올렸다.
모든 생활의 초점은 막내 조훈현의 바둑공부에 맞춰져 있었다. 조규상은 매일 막내를 데리고 명동의 송항기원(松恒기원)으로 출근했다. 시장일 때문에 바쁘면 누나들과 매형 김석곤이 교대로 ‘마부’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한국기원이 생기기 전 명동의 송항기원은 한국바둑의 중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바로 현대바둑의 아버지로 통하는 조남철 선생이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남철 선생은 국내 최고수였는데, 그분이 9점을 깔아보라 하는데 처음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어요. 서울 오기 전엔 아무리 강한 상대에게도 서너 점밖에 깔지 않았거든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첫 판을 지고 제가 울었다고 해요. 제 바둑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한 판을 더 지도해주셨죠.”
당대 최고수 조남철 선생을 만나다
소년의 바둑이 예사롭지 않았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조남철 국수와 바둑을 두는 소년을 보고 많은 관전객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당대 최고수의 연속 두 판 지도대국 자체가 소년의 재능을 짐작케 했다. 뚝딱뚝딱 속기로 일관하면서도 아마도 행마의 틀이 제법이었을 것이다.
한국기원 원생시절에는 도움을 줬던 선배 기사가 많았다. 동향의 선배 김인 국수가 각별한 애정을 주었고, 원생들의 사범을 자처했던 정창현이 많은 판수를 상대해주곤 했다. 본바닥에서 강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조훈현의 바둑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당시 아마
추어 정상으로 군림하던 신면식(申勉植) 씨가 소년 조훈현을 혼내주겠다고 벼르며 나섰다가 중반에 대마를 잡히고 두 손을 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노인이 찬탄을 금치 못하며 후원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족 의친왕의 사위였던 이학진(李鶴鎭) 선생이다.
“이학진 선생이야말로 저의 순수한 후원자로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매니저랄까요. 많은 바둑책과 옛 기보를 모아주셨고, 체계적인 행마법을 가르쳐주었는가 하면 제게 도움이 될 법한 여러 사람에게 저를 소개하고 다니셨죠.”
1962년 4월 조훈현은 제16회 프로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목포에서 상경한 지 4년만이었고, 입단대회에 도전한 지 세 번째 만에 얻은 결실이었다. 아홉 살 프로기사의 탄생은 일본을 포함하여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당시 언론의 요란한 조명을 받으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입단대회를 통과한 기사는 단 두 명. 김수영과 조훈현이었다. 명색이 프로였지만 그 당시에 프로들은 거의 수입이 없었다. 하지만 조훈현은 프로로서의 혜택을 나름대로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바둑으로 용돈을 얻어 좋아하는 만화책과 군것질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 프로기사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정계의 거물들이 관심을 보였다. 야당의 중진 정해영(鄭海永) 의원은 조훈현과 김수영을 자택에 기거시키고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옛날 우리바둑의 노국수들을 여유 있는 권세가들이 사랑방에 들여놓고 후원했던 형태와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당시 최고의 실세 박종규(朴鍾圭) 청와대 경호실장도 조훈현을 자신의 집에 기거시키며 그를 후원했다. 그런 인연으로 조훈현은 무수한 정관계 및 재계, 예술계의 인사들과 교분의 끈을 갖게 된다.
1968년 관철동에 5층짜리 한 국기원 건물을 지으며 총재로 등장한 이후락 씨도 조훈현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명절 때면 한 수 지도를 요청해오는 애제자가 되었다. 피스톨 박으로 유명한 박종규 실장은 4~5급 실력이었다. 아홉 살 조훈현과 둘 때도 무조건 내기바둑이었다. 한 판에 1원씩을 걸었는데 30판을 지면 조금 깎아서 20원쯤 주었다는 것이 조 국수의 기억이다. 프로 초년병 시절 조훈현이란 빛나는 원석(原石)을 가장 공을 들여 닦아준 기사는 김인과 정창현이다.
세고에와의 만남은 예견할 수 없던 운명
일본 기타니 도장에서 수업을 받고 귀국해 조남철의 아성을 넘보던 김인 9단(당시 4단)은 틈날 때마다 조훈현을 바둑판 앞에 앉혀놓고 복기를 해주었다. 김인은 태생적으로 입이 무거워 곰살맞은 애정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바둑이 끝나면 딱 한두 마디 할 뿐이다. “이 수가 좋지 않았다, 잇고 버텼어야 했다.”
정창현은 당시 한국기원 원생들의 사감역을 자임하며 호랑이선생으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면도날’이라는 별명처럼 날카로운 기풍에 입담도 거침이 없었다. 얼마나 조훈현을 좋아했던지 심지어 이름에 같은 ‘현’자가 들어간다는 것에도 만족스러워 했다. 훗날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조훈현을 ‘사위’로 칭하며 끔찍이 아꼈다.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조훈현의 정신적 후원자로 오래 그 옆에 머물렀을 것이다.
조훈현은 1963년 10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겨우 만 10세의 소년이다.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호기심, 바둑 선진국에서 높은 차원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계획에 한껏 가슴이 부풀었다. 소년과 동행한 사람은 재일교포 박순조 씨. 그 무렵 한국의 기사들이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되면 거의 무조건 기타니 미노루 9단의 문하로 들어가는 게 관례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기타니 9단도 당연히 조훈현도 관례에 따라 자신의 도장에 들어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어느 날 기타니 9단과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세고에 9단의 자택에 인사차 들르게 되었습니다. 박순조 씨 아들의 친구인 유학생 김희운이 소개했기 때문인데, 그는 바둑은 몰랐지만 일본 물정에 밝아 세고에 선생의 위상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하시모토, 우칭위안 두 사람밖에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 두 제자의 질량이 너무 커서 일본바둑계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세고에 선생은 연배로 보나 관록으로 보나 기타니 9단보다 격(格)이 높은 존재였어요. 일본 문화계, 정·재계에 영향력이 굉장했죠.”
세고에는 워낙 연로한 탓에 당시 도장을 운영하고 있진 않았다. 다시 말해 내제자를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처음에 김희운 씨가 세고에 9단에게 조훈현의 입문을 청하자 선생은 고령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눈빛이 총명해 보이는 조훈현을 보자마자 세고에 선생은 대뜸 바둑판을 내와 기량을 측정해보고 싶어했다. 시험기(試驗棋)의 칫수는 석 점. 석 점을 깔고 흑을 쥔 소년은 시작부터 백말을 협공하고 코너로 몰아붙여 단숨에 승기를 포착해나갔다.
“허어, 판이 짜지질 않는군!” 세고에 9단은 선선히 패배를 인정하고 바둑돌을 쓸어 담았다. “두 점으로 해볼까?” 옆에서 지켜보던 관계자들은 세고에 9단의 말에 깜짝 놀랐다. 세고에 선생은 엄격하기로 소문난 분으로 지도기는 1년에 한 판 둘까 말까 할 만큼 대국에 인색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시 두어진 제2국. 한 점 덜 놓았다고 해서 소년의 바둑이 기죽을 리 만무했다. 훈현은 특유의 속기로 노인의 얼을 빼 놓았다. 역시 소년의 승리였고, 세고에는 소년을 내제자로 삼기로 했다. 주변사람들에게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가 죽는 날까지 데리고 있겠다”는 결심을 밝혔다고 한다.
“세고에 선생의 제자로 들어간 시기는 겨울이었어요. 첫해 겨울 엄청난 눈이 왔던 기억이 납니다. 아침 일과는 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치우는 일, 바둑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상이 준비되어 있었지요. 넓은 저택에 가족은 단 세 사람뿐입니다. 고령(高齡)의 노스승과 수발을 드는 며느리, 그리고 유일한 내제자인 저 밖에 없었죠. 스승은 무서워서 감히 범접하기가 어려웠고, 세 끼 챙겨주고 깊은 모성으로 돌봐주셨던 선생님의 며느리를 저는 ‘마마짱’으로 부르며 의지했어요. 그야말로 ‘마당쇠 시절’이라고나 할까요. 하는 일이라곤 마당 쓰는 일과 심부름 밖에 없었으니까요.”
반면 세고에 선생은 슬하에 훈현을 거느리고 뿌듯한 노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바둑계의 대부로 추앙받고 있었고, 제자 우칭위안과 하시모토가 좌우의 날개로 버티며 한껏 그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었다. 절친한 친구인 노벨상수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와 바둑과 문학에 관한 담소를 즐겼다. 학(鶴)처럼 고고한 기품으로 황혼을 맞고 있었던 시절이랄까. 그에게 조훈현은 마지막 재산이자 희망이었다.
“기량은 언제 연마해도 늦지 않습니다”
“열한 살 꼬마가 견디기는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스승은 바둑을 둬주지도 않았고…. 서울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왕자처럼 자랐는데, 제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스승에 대한 복종뿐이었습니다. 스승이 마냥 엄격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일부러 강아지 ‘벵케이’를 데려올 정도로 세심하게 배려해주기도 했어요. 요컨대 스승은 바둑 이전에 뭔가 정신적으로 더 깊고 본질적인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텐데, 어린 제가 그분의 뜻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겠죠.”
같은 시기 기타니 도장에는 여덟 살짜리 꼬마 조치훈이 입문해 수련을 쌓고 있었다. 1956년생으로 조훈현보다 세 살 아래인 조치훈은 알려진 대로 조남철 국수의 외손자이자 기사 조상연의 동생이다. 일찍부터 촌음의 지체도 없이 바둑사관학교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시다, 오오다케, 고바야시, 가토, 다케미야 같은 엘리트들이 우글거렸는데, 조치훈은 막내뻘로 그 호랑이 굴에서 정글의 법칙을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함께 건너온 김인, 하찬석, 조상연 등이 있어 아주 외롭지는 않았다.
조훈현은 일본으로 건너간지 3년 만에 일본기원 프로에 입단하게 된다. 기타니 문하로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입단 시점이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그 시기 그가 바둑돌을 멀리한 건 아니었지만 스승 세고에의 지도방법이 유유자적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기타니 도장에서 맹훈련을 받고 있는 한국기사들의 소식을 들으며 서울의 가족들은 훈현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세고에 선생이 훈현을 너무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다 못한 부친 조규상은 사위 김석곤과 머리를 맞대고 아주 정중한 항의의 뜻을 담은 글월을 작성해 일본으로 보냈다. 제발 훈현이를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켜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세고에 선생의 답장이 날아왔다. 역시 정중하면서도 간결한 대답이었다.
바둑은 예(藝)이면서 도(道)입니다./ 기량은 언제 연마해도 늦지 않습니다./ 큰 바둑을 담기 위해서는 먼저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도야가 우선이지요./ 훈현이의 기재는 우칭위안에 버금갑니다./ 아니 우칭위안을 능가하는 기사가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 세고에를 믿고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그 답장을 받아든 가족들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공연히 안달이 나 냄비근성을 보인 것 같아 아들의 스승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주 먼 훗날, 문제의 항의편지를 썼던 부친과 매형은 세고에 선생의 통찰력과 교수법이 백 번 옳고 마땅했다고 입을 모았다. 세고에 문하로 들어가 절제의 미덕을 배우면서 성격의 첨예한 모서리가 절차탁마(切磋琢磨)됐다는 것이다.
세고에 문하 파문의 위기 내기바둑 사건
“세고에 도장에서 9년 동안 수련을 쌓은 동안 스승에게 직접 지도받은 바둑은 열 판이 채 넘지 않았습니다. 1년에 겨우 한 판 정도 가르침을 받은 셈이죠. 그나마도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 의례적으로 사제가 판을 짜고 어느 시점에 봉수(封手)하고 접은 적이 많았습니다. 스승은 시시콜콜 이런 수 저런 수를 가르치기보다는 프로기사로서의 품위와 바둑의 시야를 넓혀준 정신의 지도자로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위기도 있었다. 아베 요시테루 6단이라는 프로기사와 내기바둑을 뒀다가 세고에 문하로부터 파문당한 일이다. 당시 2단이었던 조훈현은 6단 선배에게 무려 6번을 내리 이겨 600엔을 땄다. 그 소식은 금새 일본바둑계에 널리 알려졌다.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아베 요시테루였다. 그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바둑 담당기자들에게 조훈현을 자랑하고 다녔다.
“세고에 선생의 내제자 조훈현이에게 내기바둑을 둬서 여섯 판을 깨졌다. 정말 무서운 놈이다.” 물론 그의 의도는 동생처럼 아끼는 훈현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싶은 선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식이 세고에 선생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만다.
당시 바둑을 배우러 다녔던 후지사와 슈코 9단의 허락 하에, 그것도 거의 강요에 의해 마지 못해 둔 내기바둑이었지만 스승 세고에는 용납하지 않았다. 당장 보따리를 싸서 일본을 떠나란 엄명이 내려졌다. 스승의 집을 나와 2주일간 방황 끝에 간신히 용서를 받았지만 조훈현 바둑 인생은 그때 위기를 맞을 뻔했다. 세고에 스승은 그 정도로 엄격한 바둑의 도를 추구했다.
조훈현의 실전 스승은 내기바둑을 두라고 했던 ‘괴물 슈코’, 그 유명한 후지사와 슈코(1925∼2009)였다. 그는 ‘오는 사람 누구나 받아준다’며 후지사와연구회를 열고 있었다. 그곳에는 오다케, 린하이펑(林海峰), 고토 노리오 등 당대 최고의 신예, 몇 년 후 일본 바둑계의 정상에 오를 강호 고수들이 즐비했다. 조훈현은 그곳에서 후지사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후지사와는 조훈현보다 스물여덟이나 위. 하지만 후지사와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유분방하고 시원시원했다.
후지사와는 어린 조훈현만 보면 “덤벼라, 쿤켄(훈현)!” 하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제일의 속기파이자 싸움바둑. 조훈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순식간에 뚝딱뚝딱 한 판씩을 해치웠다. 후지사와는 이후 세계 현대바둑 역사상 손꼽히는 걸물로 성장하게 된다.
“사실 세고에 선생님으로부터는 바둑을 별로 배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바둑의 도(道)’랄까, ‘사람의 도리’랄까, 그런 정신적인 것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짜 피와 살이 튀는 실전바둑은 후지사와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 1977년쯤인가. 그분이 저를 보고 싶다고 한국에 오셨어요. 뒷주머니에 달랑 마시다 남은 위스키 한 병만 넣어 오셨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외국 나들인데 하다못해 가방은커녕 치약·칫솔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세관원들도 굉장히 어이없어 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렇게 술을 좋아했어요. 알코올중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한국에 계시는 3박4일 동안에도 호텔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저하고 얘기하고 바둑을 두거나, 찾아온 한국 바둑인들과 술만 마셨지요. 일본에서 저하고 바둑 둘 때도 아침부터 술이 얼큰히 취해서…. 그 와중에 수읽기를 어떻게 하는지 신기했죠.”
후지사와는 위스키를 박스째 사다 놓고 마셨다. 정량은 하루 1∼2병. 그는 늘 “난 1년에 딱 4판만 이기면 된다”는 말로 유명했다. 그것은 최다상금인 기성 타이틀전(요미우리 신문 주최, 7전4승제)에서 이기면 된다는 뜻이다. 신통한 것은 큰 타이틀전을 앞두고는 두 달 전부터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대국 당일 손이 떨려서 바둑돌을 제대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녹차에 위스키를 타서 마시면서 바둑을 두었다. 대국 중 음주는 금지였기 때문에 편법을 쓴 것이다. 그러나 상금을 타면 그 즉시 다시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역시 그는 괴물이었다.
이후락도 해결 못한 조훈현의 병역문제
1972년 3월 조훈현은 병역문제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8월 공군에 입대했다. 스승 세고에는 하늘이 무너진 듯 낙심천만했다. 한국 병무청에 직접 병역연기 탄원서를 내는 등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둑계와 인연이 깊은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손을 써도 되지 않았다.
당시 병역기피자가 경찰에 총을 쏜 사건이 터졌는데,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어떠한 고관의 자제라도 병역회피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제자가 떠난 한 달 뒤(4월) 그의 오랜 벗이었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가 가스를 마시고 자살했다. 세고에의 나이 여든셋.
그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7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가족에게 “노구로 더 이상 신세 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자 한다”는 내용. 또 한 통은 친구, 후배들에게 “조훈현을 꼭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는 간절한 부탁.
“스승의 부음을 듣고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대들보에 목을 매단 게 아니라 앉아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졸라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스스로 손을 놓아버린다’는 것이죠. 그만큼 스승은 죽음의 순간에도 무시무시한 의지력을 보이신 분입니다. 친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아마도 저의 귀국이 90%쯤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상심하셨거든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더구나 그 몇 달 뒤에 강아지 때부터 제가 키웠던 아키다견 벵케이가 밥을 안 먹고 비실거리다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길 듣고 저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흘렀어요. 벵케이의 죽음으로 선생님의 죽음까지 아주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온 거죠. 그러니 제가 스승 세고에 선생님과, 그에게 가르침받았던 그 귀중한 세월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