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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장 성령의 열매 – 양선(1)
마태복음 5:44-48, 요한일서 3:18-19 / 찬송 457장
마 5:44-48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미덕이 되겠느냐(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47)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 48) 그러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양선(良善, Goodness)은 문자적으로 보면,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선을 베푼다’는 뜻이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선함’, 공동번역에서는 ‘선행’, 현대어에서는 ‘선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결국 다섯 번째 열매인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구제나 봉사와 같이 생활 속에서 선을 베푸는 행위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양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 6:1-4 / 칭찬을 받으려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베푸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무런 상도 받을 수 없다. 2)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의 자선행위를 드러내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분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3) 그러니 네가 어떤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때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4) 모든 비밀을 아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선행을 가리킵니다. 자비는 ‘선한 마음의 표현’이며, 양선은 ‘선의 행동적 표현’을 말합니다. 양선은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마 19:17). 양선도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선(善)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1. 양선의 의미
<양선>은 국어사전에서 ‘선량’을 보니 ‘착하고 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양선과 자비는 어떻게 다릅니까? 라이트푸트와 존 스토트는 “자비는 마음과 감정의 측면이고, 양선은 행동과 행위를 나타내는 면에서 구별할 수 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말하자면 마음에 자비가 있어야 행동으로 나타나는 양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양선의 영적인 의미는 단지 어질고 착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착하다고 하는 판단 기준을 양심에 둠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며 ‘저 사람은 착하다 또는 나쁘다’ 판단하게 되고 자신도 스스로 양심에 찔리지 않으면 착하고 선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심이라는 것도 보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과 저 사람이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이 다르니 착하다고 하는 판단 기준도 다르게 됩니다. 그래도 이러한 양심이 있기 때문에 비록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나름대로 판단해서 선한 쪽을 선택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에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마음인 양심이 있듯이, 주 안에서는 성령으로 영을 낳아 진리의 마음이 되어 선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바로 이 마음을 ‘양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영의 사람이 되어 마음이 진리로만 채워지면 그 때는 오직 선만을 좇기 때문에 양선의 마음이 곧 선 자체가 되므로 그 때는 굳이 양선이라 말할 필요 없이 그냥 선이라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성경원어는 ‘아가도수네(agathosune)’입니다. 이 말은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는 단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이 사용하던 헬라어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고, 단지 성경에만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알아보기 위해 이 단어의 반대되는 단어를 먼저 살펴보면 이 단어의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1. 아가도수네(agathosune) vs 디카이오수네(dikaiosune)
<양선>은 정의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정의> 즉 디카이오수네(dikaiosune)는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이 한 그대로 상을 주든지 벌을 주든지 가감없이 에누리 없이 정확하게 주는 것입니다. 그 반대인 <양선> 아가도수네(agathosune)는 자격 없는 사람에게 관대히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의(正義)>를 이야기할 때는 그 안에는 동정도 자비도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정의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양선> 즉 아가도수네(agathosune)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풍성히 베풀어주고, 용서할 가치가 없는 자라도 용서하고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우주의 통치자 심판자로서 정의(디카이오수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양선> 아가도수네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인 <양선> 아가도수네가 필요함을 아시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생활을 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선한 품성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같은 권능으로 놀라운 은총을 풍성하게 내려 주시기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정욕과 부패에서 해방되어 그분의 품성을 나누어 받게 된 것입니다(벧후 1:3-4).
우리는 공적인 자리에서 공직자나 판사와 같은 자리에 있다면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개인적으로는 선하고 좋은 <양선>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 20:35 /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언제나 여러분에게 본보기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 11:24-28 / 인색하지 않고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잘 살겠지만, 조그만 것이라도 남 주기 아까워하면 쪽박 차기 십상이다. 25) 덕이 있어야 복을 받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해야 배고플 일이 없다. 26) 양식을 내지 않고 저 혼자 차지하려 들면 받을 것은 저주밖에 없고 그것을 내다 팔면 잘한다고 다들 박수치리라. 27) 옳은 일만 하려고 온 힘을 기울여 애쓰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나, 못된 짓만 일삼으면 스스로 덫에 걸리고 만다. 28) 재산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거꾸러지나, 올바로 사는 사람은 새파랗게 물오르는 나뭇잎처럼 앞길이 활짝 열리리라.
부유한 사람이 되고 난 뒤에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지 말고, 주님 말씀대로 남에게 베푸는 삶을 실천함으로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봅시다!
2. 아가도수네(agathosune) vs 포네로스(poneros)
포네로스(poneros)는 악입니다. 악한 사람, 악한 물건, 악한 것들을 모두 <포네로스>하다고 합니다. 이 악한 것(포네로스)의 반대가 <아가도수네>입니다.
1) 악인과 선인
마 5:45 /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하나님께서 포네로스에게나 아가도스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주신다는 내용에 상반된 두 단어가 같이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양선>은 하나님 앞에 선한 자입니다. <악인> 포네로스는 하나님 앞에 악한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악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한 자로 서 있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어떤 아버지가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나무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어린 딸은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아서는 털을 물고는 날아갔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그렇습니다.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 저 사람 상처를 주는가 하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좌절하고 낙심하여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붙들어가며 부축해 가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하) <표준새번역에서는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내가 선하므로 <아가도스>하므로, 네가 악하게 <포네로스>하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가도스는 ‘후하다’, ‘관대하다’, ‘넉넉하게 베풀다’는 뜻이 되고, 포네로스는 ‘거슬리다,’ ‘시기하다’, ‘인색하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적용해 본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 중에 <양선>이라는 열매가 있어서 남에게 후하고 관대하고 항상 넉넉하게 베풀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양선의 마음으로 인해 나와지는 모습
그러면 구체적으로 양선의 마음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와지는 것일까요?
마 12:19-20 / 그는 다투지도 않고 잘난 체하지도 않으며 길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가 없으리라. 20) 그는 약한 자를 짓누르지 않으며 가장 작은 자의 희망도 억누르지 않으리라. 그는 모든 싸움을 마지막 승리로 끌어가리니
예수님의 모습에서 양선을 알 수 있도록 표현하셨으니, 이를 네 분야로 나눠 설명합니다.
1. 양선의 마음은 다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온갖 악한 말을 지어내고 궤계를 꾸미는 사람들과 결코 맞서거나 다투고 변론하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선한 마음으로 일깨워 주셨고, 선의 지혜로서 대하셨으며, 피해야 할 자리는 피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행하면 다툼이 생기지 않을 텐데 막상 그러한 상황에 처하면 예수님처럼 그렇지 못한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구를 권면할 때도 선한 마음으로 깨우쳐 주기보다는 상대의 티만 보고 지적하므로 다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들보를 빼내어야 밝히 볼 수 있어야 하되 설령 상대의 티가 보인다 해도 그것을 드러내어 지적하기보다는 덮어주어야 하고, 권면을 해도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의 영혼을 위해 해 주어야 합니다. 이때는 상대도 그 말에 담긴 사랑의 마음을 느끼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니 다툼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의 말에 변론을 하거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가 받지 않으려 할 때 계속 주려고 하면 이 또한 다툼을 일으키게 됩니다. 변론은 계속해서 변론을 낳으니 예수님처럼 상대가 시비를 걸어올 때 선의 지혜로서 더 이상 변론하지 못하도록 차단할 수 있는 경우(마 22:21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가 아니라면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상대가 받지 않을 때는 주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진리의 말씀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으로 시시비비하려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진주를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 7:6)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먼저 선의 마음으로 상대를 품어 주고 또 선의 지혜를 좇아 행한다면 언제나 다툼을 피하고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2. 양선의 마음은 들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요 아버지의 능력을 그대로 가지신 분이었지만, 그 위엄과 권세를 내세우지 않으셨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셨고,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으로 항상 함께 하는 증거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보여 주셨습니다.
마 21:1-5 / 예수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감람산 위에 있는 벳바게 동네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예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2) 말씀하셨다. “너희가 저 동네로 들어가면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같이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하고 말하라. 그러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4) 이 일은 옛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5) “너 시온성아, 기뻐 뛰어라! 너희 예루살렘 시민들아, 환호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왕께서 네게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의로우시고 노련한 해방자이시다. 그런데도 겸비하여 나귀를 타고 오신다. 잡종도 아니고 전투용도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기 원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나기도 하고 남을 시기 질투하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험담하는 등 어떻게든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 남을 누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설령 이렇게 해서 아무리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 준다 해도 막상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에 하나님의 종인 바울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후 10:8 / 주께서 내게 권위를 주신 것은 여러분을 도우라고 주신 것이지 상처를 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소 이 권위를 자랑하고 내세운다 해도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3. 양선의 마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무나 화초를 키우면서 상한 잎사귀를 보면 아름다움에 흠이 되기 때문에 그 잎사귀를 잘라 버립니다. 그러나 양선의 마음은 그것까지도 꺾지 않고 살리려고 합니다.
상한 갈대란 영적으로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하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오직 선만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악을 품고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라도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진리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거나, 조금이라도 주님을 영접할 만한 마음이 있으면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닌 이상은 끝까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드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눅 10:30 /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돈을 빼앗고는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길에다 버려두고 달아났다.”
눅 10:31-32 / 마침 한 유대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피해서 다른 길로 지나갔다. 32) 또 한 레위 사람 역시 지나가다가 그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도 피해서 그대로 가버렸다.
두 사람이 만일 강도만난 사람을 부축하여 살 수만 있었다면 살려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나쳐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살아날 가망성이 1%라도 보였다면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눅 10:33-37 / 그러나 유대 사람에게 멸시를 받는 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34) 그 곁에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가서 밤을 새워 그를 간호하여 주었다. 35) 다음날이 되자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잘 돌보아주시오.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소.”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 율법학자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다. 너도 이제 가서 그와 같이 실천하라.”
▣ 이해를 돕고자 몇 가지 예화를 적어봅니다.
■ 용서를 하라고 하시니 / 2차전 당시에 그녀는 화란에 있는 자기 집에 유대인을 감추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만 나치에 의해서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거기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언니도 죽었습니다. 코리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녀는 주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뒤에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조국 화란뿐만 아니고 미국, 영국을 순회하면서 전쟁으로 인해 지친 심령들에게 위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전한 복음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당했던 고통을 생각하면서 늘 이러한 마음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독일에는 가지 않을거야! 그 사람들은 더 고통을 당해야 돼! 더 괴로움을 당해야 돼! 독일은 망해야 돼!” 그러나 그러한 코리의 마음속에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독일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독일에 갔습니다. 그녀는 독일 사람들에게도 화해와 용서의 복음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날도 교회에서 화해와 용서의 복음을 독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난 뒤 관례에 따라서 그는 그곳에 참석한 교인들과 함께 일일이 악수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갇혔던 포로수용소의 악명높은 감독이었던 것입니다. 코리는 그 사람 때문에 말로는 못할 고통을 당했습니다. 언니도 그 사람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코리는 속으로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만큼은 제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을 제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코리야! 나는 지금 너에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 용서할 수 있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그를 사랑해라. 용서해라.” 코리는 다시금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가운데 그 남자가 자기 앞에 섰습니다. 그는 물론 코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코리는 그를 마주하기가 싫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란 사람인 당신이 이곳에 오셔서 용서의 복음을 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독일 사람들이 전쟁 중에 저질렀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과거의 제 잘못을 용서함 받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 이렇게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코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너무나도 기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는 그 때의 체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순간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누리에 충만하게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 속에 그토록 짓누르고 있던 고통 속에서 나는 완전한 자유함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 무명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 18세기 독일에서 훌륭한 목회를 했던 진 프레드릭 오버린 목사님이 오랜만에 겨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도중 심한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얼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마차를 타고 가던 어떤 사람이 오버린 목사님을 발견하고, 목사님을 구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차에 태워 인근 마을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호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눈보라에서 어렵게 구조된 오버린 목사님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따뜻한 여관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버린 목사는 무척 고마워하면서 그 사람에게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이름이라도 알고 싶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기 이름을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목사님이시죠?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시겠네요. 저는 목사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실 때까지 제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 맥도날드 목사님은 자신이 쓴 글에서, 세상 사람을 일컬어 ‘뱀의 눈빛 아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는 간단한 실화 하나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빌라스라는 수도사가 인도의 시골에 있는 좁은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연의 모든 소리와 동작이 멎어 버린 듯한 이상한 정적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는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얼마쯤 떨어진 곳에 코브라가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흔들거리면서 무언가를 뚫어지게 쏘아 보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옆에 있는 나무 가지 제일 아래 부분에는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는 뱀의 눈빛에 최면이 걸려 꼼짝 못하고 가만히 앉아 뱀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수도사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조금 있으면 잡아먹히게 되는데 … 저 불쌍한 놈. 자기 힘으로 지금 날아가지도 못하는구나. 어떻게 살릴 수 없을까? 만약 내가 저 새를 살리려고 무슨 행동이라도 하면 저 코브라가 나를 보고 달려올지도 모를 텐데. 어떻게 하면 좋지?’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놈아!”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두르면서 뱀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뱀이 한번 쳐다보더니 그 다음에는 고개를 숙이고 유유히 사라지고, 정신을 차린 새는 창공을 향해 다시 푸드득거리며 날라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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