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상당히 좋아하거나 매우 싫어하는 것은 어쨌든 그 무언가에 대해 잘 알고있음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 미국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볼 때, 우리만큼 미국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미국의 정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대다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도대체 그런 것이 있기나 한가”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렇지만 답은 “있다”이고, 그것이 바로 프래그머티즘이다. 혹시 이 말을 들어본 사람이 있다면,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실용주의로 번역하고, 이에 대해 ‘최종적 이익을 위해 수단을 유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효율성의 주장’쯤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프래그머티즘의 어원인 그리스어 프라그마(pragma)는 ‘실행’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어떤 것을 실제로 해본다는 뜻이고, 이렇게 실제로 해본 것이 쌓일 때 실행은 ‘관행’이 되며, 이 관행은 관습과 관점에 따른 상대적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어 ‘관용’을 가져온다. 따라서 프래그머티즘이란 단순한 실용이 아니라 실행적 관행에 따른 관용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관용의 사상으로서 프래그머티즘이 어떻게 미국의 정신이 되었을까? 2002년 퓰리처상 수상작에 루이스 메넌드가 쓴 『메타피지컬 클럽』이라는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직후인 1872년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올리버 홈스,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등이 주축이 되어 메타피지컬 클럽이라는 토론 모임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이 모임은 고작 9개월 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하나의 사상이 태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프래그머티즘이다.
그들은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 싸운 내란이 끝나자 이를 치유할 사상의 통합을 모색하였으며 그 정신이 프래그머티즘이었다. 이 정신 아래서는 남부의 농업주의도 북부의 산업주의도 실용적 관용의 원리에 의해 융합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융합은 19세기말에 팽배한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변질되어 미국을 패권국가의 길로 몰고가게도 했지만, 대법관 홈스와 기호학자 퍼스와 심리학자 제임스가 학문·언론·종교의 자유와 관용, 문화적 다원주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등을 미국적인 것으로 되게 한 것 역시 사실이다.
더욱이 비슷한 남과 북의 분열과 전쟁을 치르고서도 여전히 분쟁과 반목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친미든 반미든 그 다원주의적 관용의 프래그마티즘 정신만큼은 자기반성과 더불어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에 입각한 철학적 태도를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명칭으로 해석한 사람이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이다. 우리가 미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것만큼 윌리엄 제임스에 대해서도 더 더욱 알지 못하고, 그에 관한 국내의 논문 역시 아주 미미한 숫자에 머물고 있지만, 그는 심리학·종교학·철학 분야에 있어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20세기 최고 수준에 있는 사람이다.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지적인 부친에 의해 일찍부터 유럽 각국을 돌며 여러 문물과 학문을 접하게 되었기에 그의 업적도 다양한 방면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학문적 업적은 크게 심리학 시기와 종교학 시기와 철학 시기 셋에 걸쳐 나타난다.
먼저 심리학 시기란 하버드 대학교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1869년) 하버드 대학교에 미국 최초로 실험심리학 연구소를 개설한 후(1875년) 그의 대표작 『심리학의 원리』를 출간할 때까지(1890년)를 말한다.
그리고 종교학 시기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기포드 강연을 하고(1901년) 이를 토대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출간한 때(1902년)를 전후한 시기를 가리킨다.
또한 철학 시기란 로웰 연구소 강연을 토대로 『프래그머티즘』을 내고(1907년) 옥스퍼드의 히버트 강연을 기초로 『진리의 의미』를 낸 다음, 같은 해(1909년) 『다원적 우주론』를 출판하고 이듬해(1910년) 68세의 나이로 심장 이상 때문에 사망할 때까지의 만년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이년 뒤(1912년) 그의 형이상학적 주장들이 담긴 유고를 모은 책 『근본적 경험론』이 출간되었다.
이제 이런 저술 속에 담긴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을 불교와 관련시켜 보자. 어떤 양 사상을 관련지우는 데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양자 사이에 실제로 맺어진 영향 관계를 추적하여 복원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양자 사이의 중요 개념 내용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해석하는 것이 또 하나이다.
전자의 방식을 취할 경우 불교에 대한 제임스의 직접적인 언급이나 평가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나타난다. 그 대목은 이렇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중도’를 지적하면서, 단순한 욕망과 쾌락만큼이나 비실제적이고 무가치한 극단주의의 지나친 금욕을 절제하도록 말했다. 그는 완벽한 삶이란 오직 내적 지혜가 담긴 삶이라고 한다. 이런 삶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집착하지 않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런 삶은 우리를 휴식과 평화 그리고 열반으로 이끈다.” 여기서 제임스는 붓다의 중도적 삶의 지혜를 거론하면서, 불교처럼 지·정·의가 조화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삶을 이어나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양 사상의 중요 개념 내용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방식을 동원할 경우, 이보다 훨씬 더한 사상적 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미국의 대표적 불교학자인 데이비드 칼루파하나는 그의 책 『불교심리학의 원리』에서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심리학적 가르침에 관한 한 윌리엄 제임스를 ‘현대의 붓다’라고까지 찬양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세 시기에 나온 저술들이 세 분야 모두에서 20세기의 고전이 되었지만, 윌리엄 제임스에게 세계적인 석학의 명성을 최초로 안겨줌과 동시에 그의 전 사상의 기초가 되어준 것은 『심리학의 원리』이다. 이 책의 기본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명제로 압축할 수 있다. “두뇌에서 심리상태가 유래한다.” “그러나 심리상태가 물리상태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 또한 그 심리상태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첫 번째 명제는 의식이라는 심리적 상태가 두뇌라는 신체의 물리적 상태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 상태가 있는 곳을 표현할 때 자기 머리를 가리키는 것을 보면, 이는 매우 당연한 말인 것 같다. 더욱이 하버드 대학 시절을 화학 공부로 시작했고 의학부에서 생리학을 공부했으며 모교에 생리심리학 관련 강좌를 개설한 제임스로서는 두뇌의 생리 화학적 구조가 심리상태를 일으킨다는 주장이 전혀 이상할 리 없었다.
이렇게 생리학이 심리학의 기초가 됨으로써 마음에 관한 탐구가 기존의 영혼에 대한 논쟁을 넘어 비로소 과학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신체의 물리상태가 심리상태의 발생 조건이 된다는 것은 불교에서도 인정된다. 색(色, 물질)·수(受, 감각)·상(想, 표상)·행(行, 의지)·식(識, 의식)의 다섯 가지 기능(五蘊)이 인연화합하여 인간을 이룬다는 초기불교의 오온설에 의하면, 색이라는 신체물리적 기능이 수상행식 등의 심리정신적 기능을 상호 발생시키는 조건이 된다.
그렇지만 첫 번째 명제처럼 물리상태가 심리상태를 발생 변화시킬 뿐 그 반대의 경우가 불가능하다면, 이것은 명백한 물리주의 혹은 유물론일 따름이다. 이는 제임스나 불교의 본의가 아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명제가 있다. 즉 심리상태가 물리상태에 영향을 주고, 마음이 물질을 바꾼다. 이는 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의 두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다. 심리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제임스는 의지라는 심리상태가 인간의 행위를 거쳐 물리세계의 변화에 영향을 초래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계에는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의 12연기 중 “의지를 조건으로 하여 의식이 일어나고(行緣識) 그 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정신물리적 대상 세계 일체가 일어난다(識緣名色)”는 설명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두뇌라는 선행구조가 심리상태를 발생시키지만, 그 심리상태의 변화에 따라 두뇌의 물리상태도 재구조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최초의 직립보행 이후 생존을 위해 사고가 활성화될수록 대뇌 용적량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왔다는 데서도 입증된다.
그런데 이런 심리상태 자체도 끝없이 변화한다. 이것이 세 번째 명제이다. 제임스에게 있어 사고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다. 사고나 의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상과 대상에 대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지향되는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이며 매우 능동적인 경험의 연속이다. ‘사고의 흐름’(stream of thoughts)이라는 이 관점은 20세기에 의식을 이해하는 기본 관점이 되었으며, 그 후 문학 작품 등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수없이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과 사고를 일종의 흐름으로 보는 것은 초기불교에선 ‘의식의 흐름’(識流, vinnanasota)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불교에선 무시이래의 업력이 개인에게 투영되어 드러난 성향(行)에 따라 의식의 흐름이 생겨나고, 이 흐름에 맞춰 생명 ‘형성의 흐름’(有流, bhavasota)이 성립되어 생노병사가 이어져 간다고 본다. 후대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선 이런 흐름을 알라야식(alayavijnana, 阿賴耶識)이라는 말로 정립했다. 알라야식이란 누적된 경험 내용(種子)들의 저장소(alaya, 藏)로서, 항상 변화하며 흘러가면서도 나름대로의 고유성을 지니는 폭류(瀑流)와도 같은 것이다. 이렇듯 마음을 변화의 흐름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제임스와 불교는 명백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양자가 일치하는 대목은 자아에 대한 관점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제임스가 사고를 연속적 흐름이라고 할 때, 그 연속은 마치 기차(train)와 같은 것이 아니라 강(river)과 같은 것이었다.
한 량 두 량 개개의 독립된 칸들을 인위적 연결장치로 묶어 놓은 것이 기차라면, 강이란 애당초 끊어지지 않는 일관된 흐름이다. 마음이 기차가 아니라면, 인위적 연결장치로서 통일적 자아는 불필요하다. 그래서 제임스는 칸트의 선험적 자아를 터무니없는 가정물이라 했고, 붓다는 오온무아(五蘊無我)라 했다.
오온이라는 경험 현상 배후에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자아란 허구라는 것이다. 이처럼 양자의 사상은 여러 지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미국의 정신적 지주인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을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심장부를 불교화하는 첫걸음이 된다고 하겠다
/ 김종욱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