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박금희
얼마나 간절하면
물 밑에 생을 안고
허공을 밀고 당겨
꽃망울 차오르면
한 숨결
멎은 자리에
소신공양 올릴까.
달맞이꽃/ 박금희
노을 진 산머리에
별 총총 돋아나면
샛노란 소반 위에
수줍음 심지 열어
온종일
건너온 시간
저고리 벗는 소리.
나팔꽃/ 박금희
탱자나무 울타리에
찔린 상처 감싸 쥐고
어쩌지 못한 한 생각
파란 하늘 춤사위로
눈부신
아침 햇살에
너를 향한 마음 하나.
****
개망초 길을 열다/ 조민희
9남매 드나들던 문지방은 더께 입고
하늘빛 버거워서 주저앉은 헛간 자리
개망초 하 흐드러져 물안개 젖는 하오.
어질어질 머리 앓는 풀무치 툭툭 튄다,
댓잎 허밍코러스, 풍경(風磬)은 흔들리고
무논 속
산 그림자 지우는
비늘구름 떠간다.
미루나무
걸쳐 있는
햇무리
품에 안고
시부모 뒷바라지
손등 터진 며느리꽃
오늘이
오늘만 아닌
연치자색 꽃길 연다.
해당화 벙그는-백수 해안도로에서/ 조민희
바람에 머리 감는 해당화 꽃망울이여
버짐 핀 자작나무 껍질 같은 마른손에
꽃분홍 농익은 빛깔, 스멀스멀 젖는다.
비늘구름 파도 타듯 삘기도 나울치는
갯냄새 자꾸 뱉는 놀빛 든 사구에서
배시시 입술과 입술, 주고받는 귀엣말.
12월 별자리/ 조민희
종소리 붉게 운다
굽은 등 감싸면서
멀리 뵈던
그 별자리
언 땅에 내려앉고
댕그랑!
시린 가슴에 베이스로 감겨든다.
***
자필 서명/ 서연정
집이 있을까싶은 오솔길을 따라서
외따로 외따로이 외딴 집이 다섯 채*
외로움 콕콕 찍어 쓴 자필 문패 달았다
새야 돌의 미소야 토르소야 미로야*
저마다 시린 이름 핏빛의 자필 서명
서툴고 슬픈 필체가 오목조목 닮았다
* 외딴 집이 다섯 채 : 등단 이후부터 2011년까지 발간한 다섯 권 시집.
* ‘새’, ‘돌의 미소’, ‘토르소’, ‘미로’ : 필자가 쓴 시의 제목들.
물구나무꽃/ 서연정
사과나무에 사과꽃 살구나무에 살구꽃
복숭아나무에 복숭아꽃 배나무에 배꽃
꽃자(字)만 톡 떼어내면 사과 살구 복숭아 배
두 발처럼 두 손을 땅바닥에 버티고
힘껏 서고 싶지만 와르르 무너진다
한 번도 내딛지 못하는 허수아비의 척추
내가 선 물구나무 무슨 꽃을 피우나
물구나무를 서다가 고꾸라지는 헛생각
꽃 없어 물구나무는 열매를 달지 못하나
전나무 갈참나무 팽나무 쥐똥나무
나무자(字) 분지르는데 날아드는 열매들
다시 선 물구나무에 웃음꽃 팡팡 핀다
사족(蛇足)의 변천사/ 서연정
그릴에서 가든으로 레스토랑에서 카페로
웰빙에서 힐링으로 혀를 빙빙 돌릴 때
그 빛깔, 삶의 포장지
현란한 사족이다
길거리의 간판이 이름을 바꾸는 사이
열다섯 소녀에서 쉰네 살 여인으로
아직도 멀고 먼 찰나,
그 거리,
사족이다
* grill, garden, restaurant, cafe 등은 음식점 간판에 쓰였거나 쓰이는 이름이고, 한때 너나없이 삶의 본질이 wellbeing에 있다고 떠들어대더니 지금은 healing을 쓰는 게 유행이다.
***
고독/ 이명희
어쩌다
바람이
낮은 데로
지나가면
어둠이
만들어논
창살에 갇힌 생각
부서져
더 자유로워진
가난처럼 오랜 우울.
굴렁쇠의 삶/ 이명희
멈추고 싶은
흔들림
덜컹이며 굴러간다
울퉁불퉁 자갈길
달리기 힘들어도
그 길을
달려야 살기에
멈출 수가 없어라.
낙서/ 이명희
불나비 불꽃에 죽는
하룻밤의 넋두리
미완성
교향곡이
피아노 건반에서
반복된
도돌이표에
현기증을
앓는다.
***
가을, 우체국/ 이보영
허리 굽은 할머니가 가을을 끌고 와서
우체국 창구에서 소포를 접수하자
물소리 깻단 터는 소리 우체국이 환해진다.
중년의 우체국은 빙그레 웃으시고
옹이진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신다
참기름 고춧가루와 깨소금 그리고 또…….
늦가을 햇살처럼 가난한 웃음 지으시며
가랑잎 같은 손으로 상자만 어루신다
어르신 그냥 어머니 마음 이렇게 적을까요.
간월암/ 이보영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연꽃 한 송이
얼마나 그리우면 하루에도 몇 번씩
속마음 열었다 닫았다 달을 향해 기울다가.
갯내음 싣고 달려오는 천수만 파도소리
섬 아닌 섬을 향해 저물도록 부서지다
지는 해 노을 빛 타고 날아가는 철새 몇 마리.
가을 여정/ 이보영
가을이 타고 있는
국립공원 내장산
가파른 언덕 아래
산등성이 바라보며
저물녘
황혼 바람에
손 흔드는 아기단풍
누구의 예정된 삶이
저토록 아름다운가
가던 길 돌아서서
취해보는 가을 여정
따뜻한
찻잔을 들고
누군가가 오고 있다.
***
악어/ 이송희
늪 속에 웅크린 채 누 떼를 기다렸다
아마존 깊은 곳에 복병처럼 숨어서
늪 속에 발을 헛디딘
작고 여린 놈들을
진흙에 발이 빠진 슬픔을 어루만지며
아가리를 벌려서
신음까지 삼킨다
위장을 가득 채우는
침묵이 번지는 소리
입 안 가득 박혀 있는
언어의 찌꺼기들
벌어진 이빨 사이에 악어새가 둥지 틀고
살점 낀 시의 행간들, 햇살에 말린다
쉬잇, 또 한 마리 새끼 누가 다가온다
매복을 알면서도 다가오는 넌 누구냐?
아가리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늪
노을의 귀가/ 이송희
사립대학 등록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치통 같은 노
을이 번져가는 저녁이면 매일 밤 이빨 악물고 알바를
뛰었다
몇 장의 이력서 간신히 밀어 넣고 터벅터벅 걷는
골목, 내 안의 어디에서 안 잠긴 수도꼭지처럼 그렁그
렁 물이 샌다
원룸촌 추운 바람이 나를 자꾸 밀어낸다 좁고 빈
방 안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저마다 몸 웅크리며 새우
잠을 자고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는 오지 않고 학교로 가는 길
도 보이지 않은 하루, 어둠의 거대한 식욕이 골목길을
삼킨다.
동행/ 이송희
불현듯 하늘로 간 남편의 빈자리
뻥 뚫린 천정에서 빗물이 흘러든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빗소리를 다 듣는 밤
귓속 달팽이관에
흘러가는 목소리
달각달각 밥그릇을 긁고 있는 빗방울
바람에 뒤섞인 소리
베갯맡을 적시던.
온종일 양파 밭에서 빗소리 벗겨내며
일찍 온 추위에
여러 겹 껴입은 옷
눈 속에 매운 눈물이
별자리로 뜨는 여자.
***
볼륨을 키우며/ 이수윤
태양 아래 기다리며
자두처럼 익어갈 때
왜 전화를 안 받는데?
소리치며 나타난 너
아차차 확인해 보니
음량 설정 무음이네
마음 이미 짓물러서
신맛 단맛 흐르는데
끈적이는 손가락 새
시시비비 나누다가
실없는 웃음 터트려
한걸음 더 다가가는
가을, 빨간 카네이션-2012 현모양처/ 이수윤
아랫배가 뻐근한 채
봄, 여름이 지나갔다
바야흐로 결정할 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다리를 건너야 닿는 블링블링 상류사회
점심 먹고 차 마시며
매너 좋은 그 남자는
꺼낼 본론 잊었는지
고창 가서 장어 먹자?
아서라 학원 빼먹는 중1 딸이 기다린다
시아버지 상 치른 후
들이미는 사채 증서
진실해서 결혼해준
딸 부잣집 외아들아
아파트 달랑 한 채인 그 재산도 과하더냐
쇼핑이나 남자밖엔
관심 없는 동창보다
잘 살기는 틀렸지만
평생을 해? 빚 친구랑?
편두통 하얀 타일에 툭 터지는 생리혈
국화 마당/ 이수윤
주인 없는 댓돌 곁을 지켜 앉은 노란 국화
누렁이가 그랬듯이 발소리를 기다린다
고개를 길게 빼들고 동구 밖을 향한 두 귀
코고무신 놓였던 곳 찌그러진 양은 그릇
이빨 자국 패인 채로 고여 있는 물 한 모금
꽃잎을 활짝 펼쳐도 닿지 않는 지체장애
서쪽 하늘 뜨는 금성 무릎걸음 변함없다
씁스레한 신음 끝에 안 아프다 소리치던
홀연한 그 빈자리에 국화향은 더욱 짙어
***
밤하늘 불꽃 눈송이/ 장경례
밤하늘 불꽃처럼
쌍곡선 그리다가
몰아친 눈보라는
포물선 그리면서
청백군
모래주머니
와르르 쏟아진다.
날리는 함박눈이
불빛에 오색 쏟으니
경쾌한 왈츠곡에
춤추며 너울너울
화려한
환상곡으로
하늘 선녀 불러온다.
금빛 들녘/ 장경례
가을은 풍성하고
금빛인 들녘 노을
무거운 알갱이가
돗자리 깔아폈네
시절엔
눈 줄 길 없어
탈곡기 목이 쉰다.
***
버릇/ 정춘자
버릇의
밑바닥이
그 얼마나 깊으간디
그 속 한 번
빠져들면
나오지를 못 하는가
도둑놈
감방 몇 번 가도
다른 길을 못 찾더라.
일을 하라/ 정춘자
일을 하라 즐겨 하라
그것이 극락이요
일하는 것 괴로우면
그것은 지옥이다
일이란
삶 속의 꽃이요 한 살이의 보람이네.
자식에게 육체노동
하지 말고 살라는 건
한평생 살아갈 적
부정 강도 하라는 것
구르는
돌멩이에는 이끼 절대 안 낀다오.
가을 소묘/ 정춘자
아침 햇살 내려앉은
국화꽃 봉우리에
진주 이슬 반짝반짝
송알송알 열렸더니
햇살이
쓰다듬어주니 기뻐 눈물 흘린다.
하늘엔 뭉게구름
솜털꽃을 피우는데
산허리를 단풍들이
색색으로 치장하니
우리의
가을 하늘은 요술쟁이 손이네.
***
풍경, 적막한/ 정혜숙
달의 운필이 동쪽에서 시작될 때
새순처럼 돋아나는 미간이 밝은 별들
어둠의 솔기 안쪽으로
꽃의 일가는 흩어졌다
고단한 생의 좌표일 수도 있겠다
별들이 빚어놓은 간결한 문장들
내 눈이 붉어지면서
문장을 따라간다
팔걸이의자에 앉아 입술을 축이며
소인 없는 편지를 가만히 음독한다
달빛은 흰 독말풀 근처를
배회하며 부서졌다
짐짓, 담담한 것처럼/ 정혜숙
전생, 어느 골목에서 우린 만났을 거야
첫 상면이 전혀 낯설지가 않구나
나 짐짓, 담담한 것처럼
너를 받아 안는다
오린 듯 작은 입술, 분홍빛 달싹임과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다정한 이 온기
오래 전, 어느 전생에서
분명 우린 만났을 거야
부드러운 숨결로 나를 매혹하며
온몸으로 건네는 환한 전문(全文)을 읽는다
후미진 생의 모퉁이가
문득! 눈부시다
구일역/ 정혜숙
푸른 지붕이 얹힌 아치형 다리를 건너
한 편의 그리운 시가 내 앞에 도착했다
비 긋는 어스름녘이어서
나무들도 수굿했다
일렬종대의 나무들 사이를 오래 걸었다
안양천 물줄기처럼 우린 말이 없었고
희미한 어린 날들이
간간이 이마를 때렸다
***
겨울이 왔다/ 최지형
오늘밤 찬 바람이 모여
음모를 시작했다
나무는 사색이 되고
잎들은 기댈 곳이 없다
이런 날
올 줄 알았겠지만
이별이라니 슬프겠다.
섭리의 자존/ 최지형
벼이삭에 부딪힌 햇살이 발 돌린다
푸르던 나뭇잎의 자존이 헐거워지고
메뚜기 마른 울음에 외로운 허수아비
생명의 그 바람도 비우는 계절인데
풋감은 마음속에 고운 정 그득 담아
떫은 맛 떨어내느라 가을 꼬리 씹는다
배설 없는 나뭇가지 첫눈을 퍼마시고
설렘 없는 겨울 꽃에 다소곳이 안기어
낙엽이 곯아 떨어진 풍경에 눈물 흘린다.
***
쇠기러기/ 강경화
흰 갈대꽃 사이사이 쇠기러기 한창이다.
노을빛 물어와 물 위에 뿌린 걸까
어느새
부리도 강물도
노오란 물이 들고,
날개를 편다는 건 너를 믿는다는 것
뜨겁게 끌어안고 날아왔을 하늘에서
떼 지어
부르는 소리
둥글게 이어진 소리
극락강역 인근/ 강경화
멈춘 듯 흐르는
놀 비친 강을 지나
뒷짐 지고 서성이는
할머니의 흰 등처럼
기차가 달리는 한 때
그리움도 둥글어진다
나무, 가을을 앓다/ 강경화
봄날의 그 푸른빛 변할 기미도 없더니
여름내 얼마나 속앓이를 앓았으면
싸-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까지 흐르는가
찬바람 앞에서 삽시간에 더 끓어올라
붉게 타올랐던 먼 기억의 사랑처럼
까맣게 타버리기 전에
이제는 손을 놓자
가을은 한 잎 두 잎 뜨겁게 끓어 넘쳐도
남겨진 잎들은 적막 속에 웅크린 채
떠나간 이들을 추억한다.
첫눈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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