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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한국 교회론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신 학 과
이 병 수
목 차
I. 서론․․․․․․․․․․․․․․․․․․․․․․․․․․․․․3
이 글의 목적과 연구의 방법․․․․․․․․․․․․․․․․․․3
II . 본론․․․․․․․․․․․․․․․․․․․․․․․․․․․․ 4
1. 21세기의 사회와 교회의 변화․․․․․․․․․․․․․․․․4
(1)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와 특성․․․․․․․․․․․․․․4
1)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의 ․․․․․․․․․․․․․․․․4
2)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성 ․․․․․․․․․․․․․․․․6
(2)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교회의 비판과 수용․․․․․․․․9
(3) 21세기 사회의 변화․․․․․․․․․․․․․․․․․․․11
(4) 21세기 교회의 변화․․․․․․․․․․․․․․․․․․․14
2. 교회 패러다임의 개혁․․․․․․․․․․․․․․․․․․․ 17
(1) 예배의 개혁․․․․․․․․․․․․․․․․․․․․․․ 17
(2) 교회성장에서 디아코니아 사회봉사로․․․․․․․․․․․20
(3) 도시 교회 중심의 개인 영혼 전도에서 지역사회를 향한 하나님 의 선교로․․․․․․․․․․․․․․․․․․․․․․․․․ 25
3. 21세기의 신학적 교회론․․․․․․․․․․․․․․․․․․ 32
(1) 교회론의 변천사 개관․․․․․․․․․․․․․․․․․․32
1) 고대 교회의 교회론․․․․․․․․․․․․․․․․․․ 32
2) 중세기의 교회론 ․․․․․․․․․․․․․․․․․․․ 33
3) 종교개혁의 교회론 ․․․․․․․․․․․․․․․․․․ 34
4) 현대 교회의 교회론 ․․․․․․․․․․․․․․․․․․35
(2) 새 시대의 통전적 신학적 교회론․․․․․․․․․․․․․38
(3) 에큐메니칼 교회론․․․․․․․․․․․․․․․․․․․ 42
1) 동방 정통 교회론 ․․․․․․․․․․․․․․․․․․․43
2)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 ․․․․․․․․․․․․․ 44
3) WCC의 교회론 ․․․․․․․․․․․․․․․․․․․․45
4) Joint Working Group의 교회론 ․․․․․․․․․․․․ 47
(4)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론․․․․․․․․․․․․ 48
(5) 민주적 교회론․․․․․․․․․․․․․․․․․․․․ 55
III . 결론․․․․․․․․․․․․․․․․․․․․․․․․․․․․61
참고 문헌․․․․․․․․․․․․․․․․․․․․․․․․․․․ 62
I . 서론
- 이 글의 목적과 연구 방법
연구의 목적 : 바야흐로 21세기가 눈앞에 닥쳐왔다. 이제 한국교회도 21세기를 대비하는 새로운 교회론을 정립해야 할 시기이다. 한국 교회는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된 포스트모더니즘과 정보화 시대의 특성에 맞는 신학과 교회론을 가지고 새로운 현실에 대응해가지 않으면 안된다. 본 논문은 종교를 포함하여 제반 가치를 상대화시키며 해체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21세기의 사회적 교회적 변화에 대응하여 교회가 연구해야 할 교회론의 문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21세기의 교회론은 어떤 방향으로 연구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논구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연구방법 : 본 논문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만연되어 있는 현재 포스트 모더니즘의 현상들을 고찰하기로 한다. 나아가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는 한국 교회의 바른 교회론을 제시하고 그러한 교회론의 정착을 모색하는 방안을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을 토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 경향인 현대와 새로운 변화가 예견되는 21세기에 한국 교회가 건전하고 균형적인 성장을 이루어나가기 위하여 어떠한 교회론을 세우고 추구해야 하는지 논하고자 한다.
II . 본론
1. 21세기의 사회와 교회의 변화
(1)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의와 특성
1)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의
현 시대는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란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의 지배적 경향을 이루고 있는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구미 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의 현실도 이미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지배적인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는 21세기에도 당분간 계속되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21세기의 교회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도록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이냐는 아직도 확실히 정의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형성되어 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후”, “탈(脫)”이란 뜻의 “Post”와 “근대주의”라는 뜻의 “modernism”이 결합된 용어로서, 우리말로 “후기근대주의” 혹은 “탈근대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근대주의”, “현대주의”로 불리는 모더니즘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고, 시민 생활의 중요성 및 기계 문명을 구가하는 사조로, 20세기 초엽 세계를 풍미했다. 계몽주의, 프랑스 대 혁명, 미국의 독립, 산업혁명, 기술 과학의 발달 등은 모두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모더니즘이 믿었던 실용성이나 합리주의, 이성적이고 총체적 동질성에 대한 믿음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모더니즘을 해체하여 재구성하자는 사고가 차츰 고개를 들게 되었고, 기존의 전통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파괴적이고 혁신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고가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종래의 관습적인 문화 양식으로는 20세기 후반의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을 도저히 묘사할 수 없다는 고갈 의식이 포스트모더니즘 태동의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에서 “새 시대의 고양된 시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가, 건축 분야에서 이론적으로 정립되면서부터 국제적인 용어가 되었다. 건축에서 과거처럼 과학적인 원칙(그 기준이나 법칙이 피타고라스적인 균형 비례에 따라 세우는 것)으로 건물을 짓지 않고 불균형적이고 파격적인 모습으로 건물을 지으면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스의 철학과 사회학, 미국의 문학과 예술과 법 해석에 이르기까지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해 가기 시작했다. 이 용어가 인식론이나 사회 과학의 여러 분과들에 수용된 것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이르러서이지만, “포스트모던”이란 표현 자체가 문학계에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1세기 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적, 과학적, 실증주의적, 형이상학적 사고의 극복으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주로 현상으로서 논의되며 그 실체가 불분명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정의를 보기로 한다.
김욱동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를 요약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기본 입장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동시에 또한 모더니즘의 한계를 초월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윤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구조주의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 관계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의 지적 전략에 뿌리를 둔, 보편주의적 인식론의 해체를 통해, 현대의 위기를 벗어나 보려는 탈(脫) 현대주의의 사회사상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서광선은 그의 저서 한국 기독교 정치신학의 전개의 제 10장 “포스트모더니즘과 한국 기독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은 모더니즘 이후라는 뜻으로서 굳이 우리말로 바꾼다면 ‘탈현대주의(脫現代主義)’, 즉 현대주의 혹은 현대성을 이탈하거나 비판적으로 뛰어넘고 극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좁은 의미로 이 말과 이 운동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해체주의(解體主義)’, 영어로는 deconstructionism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현대’로 표방되는 모든 것, 즉 서구 지성사에서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찬양되었던 인간 이성, 과학성,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합리성과 인간 중심주의 등에 대하여 과격하게 비판하고 해체하는 지적 혹은 예술적 운동으로 말하기도 한다, 넓은 의미로 파악한다면, 위에 열거한 현대성의 특징들에 대한 비판, 혹은 현대 문명에 대한 문화 비판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확정된 의미를 지닌 예술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지금도 형성되고 있는 불확정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획일적 통일성을 깨닫는 탈(脫) 형식화, 탈(脫)쟝르화 현상이 나타난다. 획일성, 동질성, 통일성 등과 같은 합리주의적 전통을 무시하고, 다양하고 대중적이고 개성적인 것을 존중하며, 보편적 가치라고 여겨졌던 것들을 과감히 거부하는 정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서구 중심주의, 엘리트주의, 남성 중심주의 등의 가치관이 전면 부정된다. 또한 고급 문화나 엘리트주의를 거부하고 대중주의를 지향하기에, 대중과 유리되는 것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대중에게 친근하게 접근하고자 애쓴다.
둘째, 불확정성(不確定性)현상이 나타난다. 이 말은 현대 문화의 여러 특성들인 애매 모호성, 불연속성, 임의성, 반역, 무작위, 해체, 변용 등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에서는 절대성이란 없으며 삶의 다양성과 우연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깊이 없는' 문화를 창출하게 되었다.
셋째, 단편화(斷片化)현상이 나타난다. 모더니즘은 자본주의 생산 관계 속에서 파편화되어 가는 인간 삶의 총체화를 시도하면서 예술의 상품화를 거부하는 데 비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예술 작품이 상품 유통 속에 편입되어 단편화를 거듭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일체의 가치 기준을 거부하고, 예술은 가치 판단이나 가치 지향적 요소가 개입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넷째, 역사의식이 빈곤하다. 현실을 구경거리, 환영(幻影)으로 생각하고 과거를 망각해 버리고자 하기 때문에 비정치적, 비역사적 성격을 띄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정치는 언제나 관심 밖이며, 불연속 단절로서의 역사만이 존재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둘 뿐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 가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섯째, 개성을 강조하는 평등지향 사회를 지향한다. 소수 엘리트 계층이 사회를 이끌어 가던 사회 구조에서 개성 존중의 평등 지향 사회로 전환된다.
여섯째, 권위주의가 해체된다. 절대적 진리란 그 진리를 규정한 가치 기준이 무너지면 자연히 진실과 허위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절대적 믿음과 절대적 진리가 부정된다. 그러므로 이전에 사회를 이끌어 가던 소수 엘리트 계층은 사회 주체로서의 아무런 매력도 갇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되고 권위주의의 해체가 점차 가시화 되는 것이다.
김영한은 그의 논문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에서 포스트모던 사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다원화 사고이다. 이것은 곧 정치 경제의 다원화이로서 후기 식민주의 및 후기 제국주의 사회의 도래를 나타낸다. 생태사회적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있다. 또한 후기산업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후기 이데올로기적 문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둘째, 가치의 변화이며 윤리책임성의 강조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기술에서 인간에 봉사하는 기계기술로의 가치의 변화이다.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에서 자연과의 일치 속에서 인간의 진정한 관심과 필요를 촉구하는 산업으로의 가치 변화이다. 자유와 정의가 화해하는 살아 있는 민주주의로의 가치변화이다. 책임 윤리는 지구위의 인간과 자연을 보존시키기 위한 생태이상사회의 윤리이다.
셋째, 전체적인 조망이다. 인간의 이성적이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경향들 사이의 균형적 사고를 말한다. 그것은 다양한 차원에 있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말한다. 그것은 서구적 미국적 사고와 동양적 아시아적 사고 사이의 균형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는 감성적이고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이 있다.
넷째, 현대의 비판적 지속이다. 복고주의는 비판, 자유, 다원주의와 관용이라는 현대적 가치를 수용하지 않는다. 후기 현대는 이러한 복고적 정신을 말하지는 않는다.
하버마스는 1980년 현대사회는 과학, 도덕, 예술의 자율적인 영역으로 분화되었지만 이 자율화 과정에서 축적된 이성의 능력을 통해 보편적인 메타언어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료타르가 논평하듯이 인간의 유한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계몽주의적 환상에 머물고 있다.
(2)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교회의 비판과 수용
앞서 현재와 21세기에 우리 사회의 주된 정신적 사조로 이해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교회의 비판과 수용은 어떤 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과학과 이성의 새로운 이해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적 객관주의와 합리주의의 우상을 여지없이 붕괴 시켰다. 이것은 기초주의의 붕괴라고 한다.
둘째,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배경사, 편견, 도식이나 존재론적 소여없는 지식이란 없다. 인간의 자아는 자아와 세계인식의 절대적인 아르키메데스적 관점이 될 수 없다. 자아의 유한성과 한계를 인정되어야 한다.
셋째,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악이 실재한다는 현실적 비관의식이 낙관의식을 대체하고 있다. 모더니즘이 지향하는 속박과 억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이란 역사의 과정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넷째, 교회의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다원주의는 부정적으로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포기하는 종교다원주의를 허용했다.
료타르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의 종말이 아니라, 모더니즘의 지속적인 탄생”이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포스트는 “원천적으로 망각돤 것을 작업해 내는 분석, 상기, 재생, 그리고 변형의 재과정”이라고 본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적으로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전통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과 그 위기의 극복으로 보아야 한다.
다섯째, 신학과 교회의 새로운 역사적 정황에 대한 적응이다. 여기서 신학은 다가오는 21세기의 새로운 과학기술적, 문화적 정황과 대화해야 한다.
여섯째, 가치와 윤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료타르는 “지성인의 묘비”라는 글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주체로서의 지성인 시대는 끝났다고 진단한다. 그의 진단은 현대가 추구했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회의이다.
일곱째, 종교에 대한 새로운 요청이다.
종교는 카톨릭 교회나 개신교 근본주의가 주장하는 바 같이 신 죽음을 선언한 현대주의에 대하여 현대의 죽음이라고 선언하고 역사로부터 퇴각하는 반현대주의의 길이 아니다. 이에 반하여 변증적인 현대주의의 길도 아니다. 이 길은 극단화된 계몽의 관점에서 현대를 옹호하고자 한다. 현대옹호자들은 이성의 결핍은 이성을 통하여 보충하고자 하고 학문의 근본결핍과 기술의 근본 손상은 더 높은 학문과 기술에 의하여 보충된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현대주의자들의 신념은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낙관주의 환상에 있다.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와 니체가 진단하고 예견한 종교의 소멸은 후기현대에 일어나지 않았다. 전통종교의 신자가 감소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제도적 종교의 나약성 때문이지 종교자체가 환상이거나 무력한 것 때문은 아니다. 근대의 무신론자들이 외친 “종교의 소멸이란 거대한 환상이었다.”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응하여 교회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먼저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신학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포스트모더니즘이 deconstruction과 reconstruction의 순환 논리를 의미한다면 모든 기독교 신학도 그와 같은 과정을 밟아왔다. 2,000년의 기독교 신학사가 바로 그러한 과정을 설명해 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시도한 것과 같은 운동이 여러 번 있었다. 신의 죽음의 신학,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 혁명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등으로 불려지는 급진적 신학은 다같이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에 대하여 한국 교회가 새삼스럽게 놀라거나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단지 현 사회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정확히 알고 바르게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응하는 21세기 교회의 신학에 대하여서는 제 2장에서 통전적 신학을 논할 때에 상술하기로 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인들은 각자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사사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보편적인 진리, 보편적인 의미, 보편적인 가치, 보편적인 윤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던 착상을 수용할 수 없다. 보편적인 진리와 의미와 가치와 윤리는 존재하며,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진리와 의미와 가치와 윤리는 인간이 자의대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뜻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대응하는 교회의 자세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복음에 중심을 둔 사도성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3) 21세기 사회의 변화
21세기의 사회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사회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급격하게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큰 흐름에 있어서는 현재 우리사회가 지닌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이 21세기가 되어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본다. 예견되는 21세기의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21세기는 정보화 시대이다. 이미 우리 사회도 지식 정보화 사회로 돌입된 상태이다. 그렇다면 “정보화”라는 말의 실체는 무엇인가?
황두현 교수는 정보화의 종합적 특징을 이렇게 제시하였다.
1) 어떤 특정한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나 일 어 나는 보편현상이다.
2)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적절하게 결합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3) 경제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4) 정보화는 장기간에 걸친 누적현상이다.
5)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분야에서 서로 협조하여 나타난다.
6) 정보화는 1차, 2차, 3차 산업을 모두 포함하는 분야에 나타나며 작용 한다.
7) 정보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활동에 효율성을 제 공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정보화 시대는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사회 전반에서 누적현상으로서 지속될 전망이다.
우리는 이제 현상적 측면보다 더욱 거시적인 안목에서 21세기를 조망해 보도록 한다.
공동체성서연구원장 김영운 목사는 21세기의 특징과 조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먼저, 21세기는 “여성의 시대”이다. 이는 존 나이스비트 등 미래학자들이 한결같이 예견하는 바이다. 이미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으로, 21세기는 “영성의 시대”이다. 지난 2-3세기 동안 인류는 너무나 물질주의에 휩쓸려 살았으므로 이런 전환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21세기는 또한 “공동체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다음 세기는 “생명 문화의 시대”이다.
21세기는 “동양의 시대”이다. 이 또한 미래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라 한다. 동양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서양인들은 비로소 요한복음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상기한 김영운 목사의 주장을 생각해 보자. 먼저 “영성의 시대”에 대한주장의 타당성은 어떠한가? 실로 지금은 잠시 휴지기를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의 이념이 유물론을 토대로 하고 있고, 현재 세계의 이념이 자본주의임을 생각할 때에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 문화의 시대”와 “생명 문화의 시대”, 이러한 예견들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미래 사회의 하나의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이 세계적으로 더욱 개인주의화되는 추세 및 유전자복제와 조작 등 창조질서와 생명을 파괴하는 경향과 어떻게 조화되느냐가 중요하며,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중요시되리라 본다.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의 메가트렌즈 “우리의 삶을 변형시키는 새로운 십대동향”은 21세기의 사회 변화를 다음과 같이 예측하였다.
1) 인위적 기술에서 하이테크로
2) 국가경제에서 세계경제로
3)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4) 계급체제에서 네트워크체제로
5)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6) 단기정책에서 장기정책으로
7) 제도적원조에서 자립체제로
8) 대의민주주의에서 참여민주주의로
9) 북부에서 남부로
10) 양자택일에서 다종선택으로
한국에서도 나름대로 21세기의 전망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21세기 준비위원회에서 전망한 “2020년의 한국”에 대한 보고서는 벌써 빗나간 것이 많으나, 아직도 22년이 남아 있는 미래를 생각하며 그 주요제목만 열거해 본다.
1) 인구구조의 변화와 인구의 고령화에 따르는 노인문제, 2) 인력수급의 변화와 노동시장의 유연성, 3) 여성고용과 여성정책, 4) 청소년문제와 교육제도 개선, 5) 새로운 사회복지 요구와 국민 건강 문제, 6) 환경문제의 심각성과 대책강구, 7) 식량자급문제, 8) 에너지 사용의 폭증과 해결책, 9) 국토 통일에 대한 대비와 관리문제, 10) 다국적기업시대에 대한 기업구조조정과 경쟁력강화, 11) 정보화사회와 지역균형발전, 12) 지방자치제도의 정착과 민주공동체 가치 고양, 13) 시민운동의 활성화와 시민사회의 막강한 세력화, 14) 남북한의 통일여건 조성과 문화예술의 통합작업, 15) 통일 한국의 꿈 실현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21세기 한국 사회는 비교적 예측이 가능한 변화들을 이루어나갈 전망이다.
(4) 21세기 교회의 변화
21세기에 일어날 교회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에 따르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교회가 먼저 이상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여 사회를 선도하는 것이지만 한국 교회는 물론 세계 교회의 현실은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는 정도로 나아가게 되리라고 본다. 이제 예상되는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은 손인웅 목사의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1)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한 교회를 정립, “하나님 나라”운동으로 교파운동이나 개교회주의는 교인들과 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교회의 일치와 통합운동이 강하게 일어나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2) 선교의 개념의 변화와 함께 선교의 다원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미래사회의 교회는 교회의 선교나 교회자신을 위한 선교, 교회성장을 위한 선교를 지양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포괄적이고 입체적이며 통합적인 선교개념을 정립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개인전도와 사회선교의 통합, 선교와 봉사의 통합, 해외선교와 국내선교의 통합, 다원사회에서의 특수선교 등 다양한 선교방법이 활발해질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위한 교회의 디아코니아 사역이 더욱더 강화될 것이다. 세상의 요구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교회가 선교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을 섬기고 세상으로 나가는 본질적 사명이 더 강화될 것이다.
4) 세상이 급변하는 가운데 기성교회의 영성이 황폐해 진 후에 제3의 교회에서 영성강화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새로운 영성강화운동은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초문명적인 성격으로 나타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될 것이다.
5) 평신도와 여성의 역할이 증대될 것이므로, 전횡적 목회자와 남성우위의 목회, 일인 중심(일원적 목회)의 목회는 어려울 것이다.
6) 개인주의의 발달로 인한 “교회 없는 교인들”(Churchless christians)의 증가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7)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게 될 것이며 “교회안의 작은 교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것이다. 조직이 경직된 교회, 권위주의적 목회자의 맘모스 교회의 퇴조와 작은 교회들이 교회의 기능을 극대화하게 될 것이다.
8) 제3세계(2/3세계교회)의 성장과 함께 세계교회의 리더쉽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9) 종말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현실도피적인 현상도 나타날 것이다.
10) 전통적인 가정 붕괴의 증가로 인한 독신가정, 결손가정, 이혼가정 증가하여 핵가족 제도까지 위기를 맞을 것이다.
11) 생명경시풍조에 대응하는 생명신학운동이 확산할 것이다.
12) 오순절 계통의 은사운동이 제3세계를 중심으로 크게 일어날 것이다.
13) 종교 다원주의가 보편화되어 갈 것이다.
14) 사이비 이단 종파들이 더욱 극성을 부릴 것이다.
15) 탈종교화 현상과 무신주의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16)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운동으로 작은교회를 선호한다.
17) 복음주의 운동이 주류교회안에서 일어난다.
18) 통일 이후의 한국교회는 북한동포들의 선교와 하나의 교회를 위해서 많은 진통을 겪으나 결국은 복음으로 민족동질성 회복에 크게 공헌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21세기의 급격한 사회 변화에 맞서서, 한국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가는 노력과 교회의 비본질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개혁하는 노력을 겸하여 응전을 해야만 할 것이다.
2. 교회 패러다임의 개혁
21세기에는 필연적으로 사회가 변화한다. 그것을 따라서 교회의 변화도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그러므로 21세기를 대비하는 목회 패러다임도 바뀌어야만 한다.
김영운 목사는 다음과 같이 21세기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시하였다. 나의 생각으로는 김영운 목사의 주장은 21세기 한국 교회의 목회 패러다임의 변화에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먼저, 개인 구원에서 공동체 구원으로의 전환이다. 성서는 공동체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개인도 그 속에서 중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교회 성장에서 교회 성숙으로의 전환이다. 기존의 큰 교회 위주의 성장론은 이제 작은 교회론으로 바뀌게 된다. 혹은 큰 교회의 성숙론으로 바뀔 것이다.
세 번째로, 인간 중심 사상에서 생명 중심 사상으로의 전환이다.
네 번째로, “지배체제”의 세상에서 “지배없는 질서”로서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의 전환이다. 이는 힘의 하향적 사용에서 힘의 상향적 사용에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은 구약성서의 샬롬 공동체의 이상을 현실에 추구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제 21세기 목회 패러다임의 개혁을 위한 각론에 들어가기로 한다.
(1) 예배의 개혁
21세기의 목회 패러다임의 개혁을 위한 첫 번째 시도는 예배의 개혁이어야 한다.
정용섭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갱신”을 위한 것이었고 그러한 교회의 갱신은 직접적으로 예배의 갱신 또는 예배의 개혁을 통해 추진되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21세기의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은 예배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성희 목사가 말하는 예배 갱신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배 갱신이 성경적이며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인가
둘째, 예배의 내용과 형식이 충실하고 우리 시대에 적절한가
셋째,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인가
넷째, 예배에 공동체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있는지
다섯째, 우리의 예배가 예배시간만의 예배인지 일상생활의 예배인지의 문제이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기존의 예배형식에서 진일보한 새로운 예배형식 모색과 예배의 축제적 의미의 강화가 요청된다. 한국 교회는 텔레비젼이나 영화를 보듯이 단순히 예배를 ‘보러 가는’ 현재의 피동적인 수준의 자세를 지양해야 한다. 교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자신의 온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수준으로 발전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박근원은 우리의 예배에서 ‘구원의 축제’라는 예배의 역동적 성격이 늘 살아 숨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21세기 예배론의 관건이라고 주장하며, 박은규 역시 한국교회가 함축성 있는 경축의 뜻과 효과를 살려서 보다 더 현실성 있는 예배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예배 갱신은 예배의 요소가 아니라 예배 형식을 갱신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상실한 것들을 다시 회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오늘날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목적의식과 감격의 상실이다. 예배에서 축제성을 회복하고 감격을 되살리는 노력이 예배 갱신 정신의 요체이다.
미국교회 예배 형식도 예전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축제적 성격의 예배로 탈바꿈하는 추세이다. 미래 교인들이 대화와 찬양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의 의견은 21세기 예배론의 핵심이 그 축제적 역동성의 회복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하비 콕스(Harvey Cox)는 교회를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기의 교회, 감사와 축제가 있는 시편의 교회, 새하늘과 새땅을 지향하는 계시록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그 역시 “예배에서 축제성이 상실된 다음부터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死神神學)이 나왔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래 교회의 예배는 예전적인 데서 축제적인데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미래인들에게 영감과 의미를 주게 될 것이다. 현재의 엄숙한 예배에서 재미있는 예배로 탈바꿈해서 살아있는 예배, 열린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수직적이면서 동시에 수평적 차원에서의 창의적이고 대화적인 예배형식의 개발이 당면한 과제이다. 앞으로는 기존의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목사 주도형 예배에서 진일보하여 새로운 쌍방 통행적 예배가 가능할 수도 있다. 개신교는 만인제사장직의 신학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평신도의 지위 및 역할 상승의 신학이 대두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는 유리하다고 하겠다. 세례교인을 위주로 한 전 회중이 참여하고 대화하는 예배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강구될 필요가 있다. 예배의 본질적인 차원은 어디까지나 견지하되 예배와 코이노니아의 방법적인 문제에 있어서 창의성과 신선한 대안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교회 내의 대화적 예배 형식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대화적 예배 형식 마련에도 유념해야 한다. 이미 리마 예식서를 많은 교단에서 활용하고 있으며, 한국 내에서도 개신교와 가톨릭 공용의 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듯이, 미래 교회는 인터넷, 텔레퓨터 등 멀티미디어 정보통신의 이기를 통해 이제껏 할 수 없었던 교단의 성직자들은 물론 평신도 간의 많은 유익한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서로에 대한 무지와 오해, 그리고 편견에서 벗어나 이제는 각 교단 예배의 장점을 대화와 학습으로서 연구하고 흡수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개신교도 지금껏 쌓아온 교회와 예배의 전통 위에 더욱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의 자녀들이 평화와 기쁨을 누릴 예배 양식의 발전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미래 사회는 전술한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가 선도하는 고도 자본주의로 인한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편의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영성이 매우 황폐화할 전망이다. 이미 지금도 영성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 사회는 영성을 그 질적, 양적 수준에서 잘 인도해가는 미래교회의 역할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미래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선도해가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미래교회는 예배형식에 있어 종래의 단순히 ‘보는’ 예배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드리는’ 예배, 사회로 파송되어 자신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생활을 이끌어내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교회성장에서 디아코니아 사회봉사로
1970년대에 민족 복음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개신 교회의 부흥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개신 교회는 1994년 이후 1년에 20만 명씩 성도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지난 3년 동안 마이너스 4.3%의 성장율을 기록했다. 만약 21세기에 개인 전도, 복음 전도가 없으면 이제 25 - 30% 교인 가지고 일명 교인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수평 이동 교인 유치 작전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에 비친 교회상이 20세기보다 더 악화되어 전도의 문을 막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성장과 정체에 관한 한 사회학자의 연구결과를 살펴보자.
“한국 교회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물량주의라 할 수 있다. 물량주의란 ‘교회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物)과 수치로서 측정할 수 있는 것(量)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확장하는데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는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물량주의는 한국 교회에 강력한 영향을 주면서... 한국 교회의 위기적 상황이 나타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 이러한 사회학적 관점에 따라서 한국 교회의 물량주의가 형성되는데 작용한 사회구조적 조건은 크게 1.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적 발달, 2. 경쟁적 다종교사회의 형성, 3. 한국 교회 조직의 특성, 4. 한국교회의 성장론 등의 네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 아울러 이러한 물량주의가 한국 교회에 주는 결과에 대해서 1. 복음의 훼손, 2. 교회간 불균형과 사회적 무관심, 3. 도덕성의 위기와 신도 증가의 한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하겠다.”
계속해서 한국교회의 물량적 성장의 요인을 살펴보도록 하자.
“해방 후 한국 기독교회의 신도 수는 60년대 이후 비약적인 증가세를 보이다가 1990년을 전후하여 침체 혹은 감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그리하여 신도 수 증가와 감소의 요인은 서로 별개의 요인이 아니라 동일한 요인의 정도 차이와 그 요인에 대한 해석이나 태도의 변화에 따라 생겨난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 측면에서의 역J곡선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직업과 거주지의 이동이 심해졌고 경제성장을 이루는 가운데 많은 긴장과 불안의식이 생겨나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기독교 신앙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산업화가 많이 진척되면서 사람들이 사회변화에 따른 긴장과 불안의식에 적응하는 능력도 커졌고, 경제성장의 결실을 누리기 위한 소비활동에 몰두하면서 교회로부터의 발걸음을 돌려, 신도 수가 정체되는 역J곡선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2) 해방 후 한국 사회는 이념적 차원에서 볼 때, 자본주의에 근거한 반공 및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그리고 서구화(혹은 미국화)로 구체화되는 근대주의가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기독교는 이러한 이념과 비교적 잘 결합하였기 때문에 60년대 이후 많은 신도 증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최근 들어서는 사회 전반에 적지 않게 유포된 반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냉전체제에 대한 거부, 전통에 대한 재해석, 세속주의적 가치관 등은 앞서 말한 근대주의를 거부하는 성격을 띠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근대주의와의 친화력을 통해서 신도증가를 이루었던 기독교와 충돌하면서 기독교회의 신도증가에 장애 요인이 되는 역J곡선 현상이 일어났다.
3) 기독교 신도증가의 교회 내부적인 요인을 살펴보면 먼저 개교회주의에 근거한 교회팽창 정책이었다. 이것은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고, 전도와 교회성장신학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어느 정도 이상에 이르면 세속적 동기의 개입과 신도의 질적 저하를 가져와 신도 수 증가에 방해가 된다. 또한 개교회주의는 신도들의 공동체 욕구를 잘 충족시켜 주어서 안정된 지역 및 친족 공동체를 상실한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가진 팽창주의적 정책과 공동체적 성격이 오히려 신도증가를 방해하는 역J곡선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 해방 후 어쩌면 한국의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처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 신도 수 증가의 정체현상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지는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 역J곡선 현상의 J자 끝부분이 더욱 감소추세를 보여, 역U곡선 현상이 일어나서 개신교 신도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거나 아니면 N자형을 그리며 일시적인 감소가 다시 증가로 돌아설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21세기 들어 산업사회가 정보화사회로 넘어가고 현재의 WTO체제가 상징하는 바와 이 국가간의 산업경쟁이 심화되면서 새로운 사회구조의 개편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우리사회 성원들이 많은 긴장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면 새로운 신도증가의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가족약화 현상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리고 남북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 이념이 변화하는 사회적 가치관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 변수가 될 것이다. 이 경우 인간성과 생명 존중이라는 종교적 이념을 새로운 사회 상황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핵심적인 과제라 하겠다. 사회적 상황에 대한 적응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주체로서의 교회조직 자체의 갱신과 건강성의 회복은 더욱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상황에서 종교에 끌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인이 발생한다 하여도 교회조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 사람들은 다른 종교나 종교적 대체물을 선택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의 성장 제일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교회론을 가져야 한다. 즉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추구하는 디아코니아 교회론이 필요하다.
디아코니아 교회론은 세상과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교회,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앞장서서 껴안고 함께 하는 세상의 종된 교회를 추구한다.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인 동시에 매우 중요한 영적 활동이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의하면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 나버지 앞에서의 정결하고 더러움 없는 경건’ 이다. …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본질적 차원을 한 걸음 더 넘어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과제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성의 문제이며 실천(praxis)의 문제가 바로 교회의 디아코니아적 사명에 달려 있다.
한국의 국민들은 지금 영적 갈급함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정의의 실현과 도덕성의 회복, 상식이 통하는 사회의 건설 등을 어느 때보다 갈구하고 있다. 교회는 그러한 대중적 갈망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진리를 통해 채워줘야 한다. 대안을 바라는 이들에게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교회가 스스로 회개하고 바로 선다면, 그리하여 기독교의 확실한 차별성을 인정받게 된다면, 지금은 한국 교회의 성장을 위한 호기(好機)가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교회는 참으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란 전도뿐만이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해 있는 사회악의 일소에도 있다.” 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심각한 공해와 자연 파괴의 현실에 맞서서 환경보호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한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이 일을 할 주체는 현재까지 교회 밖에 없다. 한국 교회는 상기한 바와 같은 사회적 봉사활동과 생활운동에 있어서 주님께서 모범을 보이신 섬기는 종의 소명을 감당해야만 한다.
(3) 도시교회중심의 개인 영혼 전도에서 지역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문화 내지는 도시의 독특한 생활양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도시 사회의 환경이나 도시 나름의 독특한 사회문화적인 경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유의웅 목사가 지적하는 도시 사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시화는 공동체 의식의 약화 내지는 상실을 가져온다.
둘째, 고시화가 진행됨에 E짜라 익명성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셋째, 도시화는 매우 강한 이동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넷째, 도시화 현상은 도시의 세속화를 가속화시킨다.
이어서 유의웅 목사는, “도시화 현상에 따라 도시교회에 나타나는 우려할 만한 문제점은 도시의 위기적 상황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 내지는 방관적인 태도이다. … 이러한 방관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교회가 도시의 모습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교회의 모습을 재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교회는 도시화된 지역사회 안에서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도시사회의 세속적인 사고와 문화의 노예가 될 것이 확실하다. 교회는 도시의 황폐화를 촉진시키고 도시의 신앙적, 영적 파산에 기여하게 되고 말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교회의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의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와 지역사회를 완전히 분리해 놓고 지역사회 주민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만 치중해 온 점이다. 둘째, 지역사회는 마치 교회를 위해 존재하며, 그러므로 모든 선교활동은 교회중심의 것이어야 한다는 태도이다. 셋째, 우리나라의 모든 지역교회는 교회가 존재하고 교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사회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또한 주민의 삶의 현실과 현장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문제이다. 이러한 태도는 교회를 지역사회의 삶에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편협한 사회선교관을 갖게 된 이유는 이러하다.
기독교 선교를 복음 전도와 개인 영혼 구원, 교회 건립과 성장 등의 매우 단순한 차원으로만 이해해 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역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를 모이는 교회의 구조, 즉 ‘구원의 방주로서의 교회’ 신앙을 탈피하지 못하게 된다. 자연히 성속의 이분법적 사고를 갖게 되며 종교의 사회적인 긴장과 갈등을 야기시킬 수 밖에 없다.
둘째, 선교를 전도로만 이해하면 개교회주의가 강화된다.
셋째, 선교를 전도로만 이해하게 되면 성공의 척도를 가시적인 숫자와 물량에 두게 된다.
넷째, 선교를 단순히 전도로만 이해할 때 교회는 성장제일주의를 표방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교회의 사회적인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이런 이론들을 살펴볼 때에, 우리는 교회의 참다운 구조조정에 대하여 올바른 방향을 제시받게 된다. 최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교회의 구조조정은 그 인력과 재정과 기구가 교회의 안을 살찌우는 내수적인 구조에서부터 교회 밖을 섬기는 외향적인 구조로 조정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인력과 재정은 교회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부문에 지나치게 많이 소비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지역사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첫째,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지역사회의 선교의 주제는 지역주민의 전인적인 생명을 보호하고 온전케 한다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전인으로서의 주민은 구체적인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이 지역사회는 생명을 포용하고 성장발달시키는 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구체적인 현장 속에 사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지역사회를 분명히 사랑하셨다.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역사회 안에 세우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역을 위해 세움을 입은 사역의 공동체이며 지역사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넷째,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핵심적인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지역사회 안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섬김을 통해서, 지역주민의 요구를 위해 실제적인 희생과 봉사로 사랑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러면 사회선교의 신학적 준거는 어떠해야 하는가?
교회의 사회선교를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것으로 규정할 때 신학적 기반은 하나님의 선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몇가지 점에서 전통적인 교회의 선교 개념과는 대조가 된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의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선교와는 대조가 된다. 교회 중심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선교로 대치되었다.
둘째, 전통적인 선교 개념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사명보다 교회의 본질을 더 중시하며 교회의 정통성과 교회의 순수성에 더 많은 역점을 두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가 된다.
셋째, 평신도가 선교할 수 있는 교회구조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선교의 역군들을 교회 안에만 머무르게 하지 말고 그들을 훈련시켜 세상에 보내는 훈련장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역할을 하기에 교회와 세상의 관계도 새로워져야 한다. ... 교회의 참 사명은 흩어진 곳에서 세상을 섬기는 일에 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세상에 군림해서 영광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이는 지역사회 선교를 하나님의 선교의 입장에서 이해하므로, 모이는 교회로서의 종래의 구조보다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구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81년 2월 설립한 도림교회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의 봉사사업을 통하여 유의웅 목사가 느낀 앞으로의 과제를 보자.
1. 사회봉사에 대한 교인들의 지속적인 의식개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봉사를 위한 중간 지도자의 개발이 시급하다.
3. 사회봉사가 넓게는 지역개발이라고 볼 때 지역주민들을 사회봉사에 주체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4. 지역사회 여건의 변화와 주민 욕구의 다양성에 따른 적합한 프로그램의 개발과 아울러 사회봉사의 전문화가 요청된다.
사회선교에 대한 유의웅 목사의 결론 및 제언은 다음과 같다.
1. 목회자의 사회선교에 대한 깊은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 교회 전체가 사회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3. 교회내 인적, 물적 자원을 철저히 조사하여 최대한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4. 지역사회에 대한 현황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사회선교의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
5. 지역사회는 각 교회와 지역의 특수한 실정에 다라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지역사회 선교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과 연대 조직을 구성하며, 주민운동에 정신적 지주가 되어줌으로써 주민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지역사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거시적 차원의 사회선교도 찾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21세기 교단 발전 정책 개발 위원회는 제83회 총회 회의안 및 보고서 별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생명공동체”라는 제목의 교단 발전 개발 제안서를 제시하였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외적 성장과 내적 성숙 사이의 심각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교회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즉 하나님의 나라이다.
한국 교회는 세계화, 지방화, 전문화 시대인 21세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개교회주의를 탈피하여 교회의 일치와 연대를 이루며, 역사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조명하면서 악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여기서는 제1장 “새로운 세기를 향한 교단의 지향”만을 요약하여 보도록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새로운 선교적 지향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복음진리에 기초하여 위로부터의 자기 성찰과 아래로부터의 변화욕구를 수렴하고 포괄하는 중심으로부터의 영적 갱신을 지향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복음의 능력으로 세기말적인 상극적 죽음(죽임)문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천년을 향한 상생(相生)적 생명(살림)문화의 건설을 지향한다. 이는 교회가 교회중심, 인간 중심의 편협된 인식의 틀을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생명 공동체 건설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선교의 목표인 평화에 기여하는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위하여 먼저 교회내부에서부터 지역간, 계층간, 집단간의 갈등구조를 극복하는 일치와 화해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넷째,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하여 지역별, 선교분야별 협의회를 활성화하고,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강화하므로 구체적인 선교의 현장에서 연대적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에큐메니칼한 교회문화의 정착을 지향한다.
다섯째,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전인적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삶의 현장을 선교현장화하고 전교인을 선교요원화하는 삶과 예배의 통전을 지향한다.
여섯째, 하나님의 경제신학과 경제윤리에 입각하여 대안적인 경제체제와 삶의 모델을 개발하고 실천하므로, 자본의 힘에 의하여 인간성과 자연의 생명이 유린당하는 이 시대에 경제적 정의를 실현하는 신앙의 실천을 지향한다.
일곱째,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는 교육훈련을 실시하므로 기독교적 자아정체성을 지닌 인간, 더불어 함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인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역사적 책임을 수행하는 인간의 형성을 지향한다.
새로운 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이러한 교단의 시도는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본래적 모습은 소유기관이 아니라 분배기관이기 때문에 교회는 과감하게 소유 모델에서 분배 모델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 스스로의 개혁이 있을 때 교회는 사회를 위한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사회를 섬기는 교회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이제 교회가 기존의 선교 양식을 벗어버리고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3. 21세기의 신학적 교회론
(1) 교회론의 변천사 개관
여기서는 먼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교회론을 논한 후에 21세기 교회의 신학적 교회론을 미래 교회가 나아갈 방향으로서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교회론의 변천사를 간략히 살펴 보자.
1) 고대 교회의 교회론
고대교회의 교부들은 점진적으로 기독교 교회론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몬타니즘, 군주신론 등 이단의 도전에 맞서 기독교 신앙의 정립과 함께 교회의 조직과 체제의 정비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대 교회는 사도들의 뒤를 잇는 감독들의 권위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교회론을 전개하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교회 신학에 통일성과 다양성 부여하였고, 교회론을 하나의 완전한 주제로 다룬 것이 아니라 교회일치를 염두에 두면서 교회론적 주장의 일부를 펼쳤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에서 감독(bishop), 장로(presbyter)의 위계질서가 생기고, 보편적 교회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미 당시에 현대 장로교회와 흡사한 직제, 계층질서가 생겨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교회일치의 핵심은 성만찬이었다.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의 도전에 맞서 교회의 표지가 사도적 복음전승(사도성)임을 제시하였다.
381년 니케아 신조의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론은 이미 터툴리안에게서 드러나고 있다.
교회의 본성에 관한 본격적 이론을 전개한 것은 키프리안이었다. 그는 최초로 교회를 어머니로 보았다. 교회일치의 초점을 정통성 있는 감독직으로 생각하였다.
오리겐의 교회론의 핵심은 이레네우스, 터툴리안과 같이 교회의 연속성과 보편성을 논하며 그 근거를 “사도적 전통”과 “신앙 규범”에서 찾는 것이었다. 그는 베드로의 승계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반론을 가했다.
고대의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도 교회론에 대한 중요한 고백들이 이루어졌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는 동방정통교회가 특히 중시하고 있다. 제 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령에 관한 부분 첨가(“filioque”)하였다. 여기에서는 특히 교회에 관한 최초의 에큐메니칼적 정의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다음에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믿사오며”라는 고백이 첨부되었다.
어거스틴은 기독론과 성령론이 그의 교회론의 바탕을 이루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통일성의 원리였다. 그는 예정(선택)교리를 교회론에 적용하였다.
2) 중세기의 교회론
중세기 중에서도 1200년에서 1300년 어간의 시기에는 수도원을 통한 교회 갱신운동이 있었다. 이집트 등 동방에서 기원한 수도원 운동은 서방교회에 와서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가 되었다. 그 이유는 서방의 수도원 운동은 은둔적이고 폐쇄적이며 이원론적 경향이 있는 동방의 수도원 운동과는 달리 세상 속에서 기독교적 봉사와 선교를 수행하고 공동체적 삶을 중시하며 교황 이하 성직 체제의 오른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쿨루니, 시토, 카르멜, 어거스틴, 프란시스코, 도미니크 수도회 등이 그들이었다.
11-13세기 당시에는 그레고리 7세와 이노센트 3세 등의 교황들이 교황절대주의 시대를 열어갔다.
중세기의 교회론은 스콜라 신학자들이 주도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표준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비적 몸 즉 신비체인 교회, 성령의 창조물인 교회, 혼합된 사회로서 성도들의 교제이면서 완전하지 않은 교회를 논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스콜라주의 신학자로서 교황권을 옹호하였다.
1350-1500년 어간의 후기 중세기는 교황청의 부패로 인하여 중세 교황주의 교회의 몰락이 예시되고 있었다. 1309-1377년의 “아비뇽 포수”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러한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하여 협의회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다시 교황 독재주의를 낳고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는 “개혁 이전의 개혁자들”로서 교황을 피라밋으로 하는 교회의 계층질서적 성직체제와 7성례를 통한 은총의 매개를 비판하며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3) 종교개혁의 교회론
이제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은 복음의 재발견과 이신칭의였다. 그에게 교회란 이신칭의 받은 자들의 공동체였다. The Papacy at Rome에서 교회론을 시작한 루터는 교회의 표지를 복음 설교와 세례, 성만찬으로 보았다.
그는 만인제사장론을 1520년의 세 논문 “독일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 “크리스챤의 자유”에서 주장하여 교회론의 새로운 혁명을 이루었다. 1521년에는 사제(priest)개념의 재해석으로서 “성도의 교제”와 “만인제사장론”에 근본을 두고 말씀의 교역자(특수교역자), 공동체의 허락이나 선임자의 동의를 얻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usburg Confession)는 고대의 공인된 신조들에 의해 인정을 받았다. 사도신경 중 교회론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에큐메니칼적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다.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신자들은 일정한 표지와 특성을 지닌 공동체를 교회로 믿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보편적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모든 피택자들로서 하나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속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는 목사, 장로, 교사, 집사의 4중직을 제시하고 교역자의 투표와 안수, 치리와 교역에 대하여 논하였다.
4) 현대 교회의 교회론
먼저 근현대 교회의 모습들을 개관하여 보자.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소위 전통교회는 귀족 중심의 교회였다. 당시에는 사제나 목사의 설교 방향이 소수 귀족을 향하였고 대중은 설교자의 옆 얼굴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19세기를 지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소위 자유교회가 등장하였다.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 한국 등지의 교회는 자유로움이 있었고, 따라서 폭발적인 교파 분열을 이루었다.
20세기 후반에는 이른바 예언자적 교회가 등장하였다. 제3세계를 중심으로 태동한 예언자적 교회는 민중을 중심으로 하고 사회 참여와 정의 실현을 강조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민중 교회들이 생겨났으며, 80년대 이후 구미 교회들도 영성과 정의의 조화를 주요 주제로 삼게 되었다.
현대의 교회론은 다룰 것이 많으나, 여기에서는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의 교회론만을 살펴보고, 후에 에큐메니칼 신학론에서 좀 더 논하기로 한다.
칼 바르트의 교회론은 교회교의학의 화해론에서 찾아야 한다.
바르트가 1948년 암스텔담총회에서 발표한 그의 교회론은 하나님의 수직적인 은혜의 행동으로서 “사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그는 기독론에 근거한 교회론을 전개한다. 교회의 본질은 종말의 시기에 시작한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증거하도록 신자들을 회집하는 사건이다.
바르트는 “성령과 기독교 공동체의 모임”(CD IV/1) 서두의 요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지상적 역사적 실존양식으로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이다.
바르트는 “성령과 기독교 공동체의 파송”(CD IV, 3/2)에서 기독 공동체의 소명에 대해 네가지를 논한다.
1) 세상 사건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2) 세상을 위한 공동체
3) 공동체의 과제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예스로 고백해야 한다.
4) 공동체의 교역 - 교역의 본질을 삼중적으로 분류하여, 복음 선포, 복음 설명, 복음 적용으로 본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는 교역의 본질을 삼중적으로 분류하여, 복음 선포, 복음 설명, 복음 적용으로 본다. 바르트의 교회론은 기독론과 성령론, 칼케돈 회의를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예스로 고백해야 한다.
바르트는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따라서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주장한다. 이에 대한 영적 기준은 사도성이다. 바르트의 교회론은 이신칭의 차원에서 성화, 파송의 단계로 나아간다. 바르트는 교회의 교역을 ‘파송’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교회를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회중이며, 종말론적 시기를 살아가는 ‘사건’으로 본다. 바르트의 교회론은 기독론과 칼케돈 회의를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몰트만의 교회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몰트만의 교회론인 성령의 능력 안에 계시는 교회는 그의 희망의 신학, 십자가 신학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몰트만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위격과 사역에 근거시켰다.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의한 메시야적 교역을 내세우고, 여기에 근거한 교회론을 종말론적 시야를 가지고 펼쳤다. 교회는 종말론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그의 ‘친구되심’을 덧붙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가지 현존양식을 논했다. 바르트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복음의 교회론이 몰트만에게 와서는 종말론적 성격이 강조되는 교회론으로 발전한다. 기독론에 근거한 몰트만의 교회론은 성령에 의하여 역사와 사회 안에서 실현된다. 성령론의 틀,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틀 안에서 구원의 수단들과 교회의 교역들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는 메시아적 공동체로서 교회를 논한다. 그 다음에 이 교회의 역사참여와 사회참여의 종말론적 의미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종말론의 역사적, 사회적 해석을 시도한다.
몰트만의 교회론은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바르트)와 이 계시에 의해서 밝혀진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케제만)에 기초했고, 기독론에 해방신학의 요구를 어느정도 수용하여 교회의 사명 가운데 이 요구를 포함시켰고, 이 모든 과정에서 특수(구속사)에서 출발하여 보편(보편사)으로 나아갔다.
고대교회로부터 현대까지의 교회론을 살펴 보았다. 교회론은 당시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대응하여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대응의 중심에는 복음과 사도적 전통이 존재하고 있었다.
(2) 새 시대의 통전적 신학적 교회론
손인웅 목사는 그의 논문 “21세기 교회,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에서 교회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초기교회는 기독론 시대, 중세교회는 구속론 시대, 종교개혁교회가 성찬론 시대, 18-19세기 교회를 선교론 시대라고 한다면, 20세기는 교회론의 시대라는 것이다.
21세기에 살아남을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이것이 새시대의 교회론을 요청하게끔 하는 질문이 될 것이다.
1910-에딘버러 선교대회와 1948년의 세계교회 협의회의 탄생(W.C.C)과, 1962년-65년 간의 제2바티칸 회의는 교회사적인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정책회의였다. 피선교지에서 일어나는 혼란과 교파분열과 서구교회의 쇠퇴 등의 원인으로 가톨릭 교회에서부터 개신교 신학자들이 ‘교회란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해서 활발한 연구가 신학적으로 전개되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교회의 본질과 소명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와 ‘교회의 존재론적 근거를 어디에서 찾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교회를 연구하기 위한 자료는 성경과 2,000년 교회역사 뿐인데, 이 두 가지 자료는 어디에서도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이상적 교회의 원형이다’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에서 교회의 원리와 사명을 찾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의 틀을 가지고 에클레시아의 개념을 정립해야하고 교회의 근거를 “하나님의 통치”에 두고 교회 중심의 사고에서 하나님의 통치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 나가야만 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완성시키시는 방법인 “하나님 자신의 선교(Missio Dei)”에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불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교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서 세상을 섬기며, 세상을 구원한다.
이러한 교회론을 일컬어 통전적 신학적 교회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21세기의 통전적인 신학적 교회론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응하는 교회의 신학들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상기한 신학들로서 포스트모던 신학과 개혁신학에 대하여 다루기로 한다.
앞서 살펴 본 포스트모던 사고의 공헌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과학의 권능과 역사의 진보를 맹목적으로 신뢰한 계몽주의의 환상을 깨뜨린 점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를 인정하는 포스트모던 정신이 극단화하여 해체주의로 나아갈 때 다가오는 21세기는 분열과 해체의 심연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 정신은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는 하나의 큰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교회론들이 수많은 박해와 이단 및 세속사회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 형성되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 교회로 하여금 다가오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착상을 배우게 하는 의미를 주는 것이다. 새로운 착상이란 영적 차원으로서의 거룩성과 종교성의 차원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을 닮은 포스트모던 신학 자체가 21세기의 교회론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포스트모던 신학은 개혁적 성향을 지닌 진보적 신학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통전성이 결여된 신학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신학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응하는 기독교 신학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홍정수 교수는 한스 큉(Hans Kung)을 따라 포스트모던 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모던’ 신학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되, ‘근대 이전’ 신학으로 회귀하지 않는 신학 ‘운동들’ 그러므로 ‘근대’를 넘어서되 ‘근대’가 표방하였던 비판 기능과 자유 정신의 가치를 존중하고 계승하여야 한다는 단서를 지키는 신학들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신학은 여러 가지 문제점과 갈등의 소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이 시대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적극적인 신학으로서의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정신에 대응하는 기독교인의 자세는 단지 현 시대의 다원주의적인 패러다임을 쫓아가고자 하는 포스트모던 신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기독교의 정체성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반응하고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신앙과 신학, 그리고 실천(praxis)이 요구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디트리히 리츨 교수의 주장과 같이 개혁파 교회와 개혁파 신학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피터 드러커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맞이한 지구촌에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탈(post)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오래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시는 전환의 시대이다. … 확실히 지금은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이다. ……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이 소용돌이 속에 있다. 지금은 행동을 할 때이다.”
여기에서 디트리히 리츨 교수의 강연 “21세기와 개혁파 교회”의 결론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 … 우리와 거대한 세계 종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계속 수행하는 일은 21세기에 우리 개혁파 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심되는 주제는 아닐 것이다. 중심되는 주제는 신약과 구약성경의 복음을 계속 해석하되 우리 각각의 전통을 고려하면서 설명하는 일과 참된 ‘성령신학’ 곧 우리의 상황을 교회 내의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증거와 그리고 성경의 증거와 연관시킬 수 있는 성령신학을 펼치는 일이다. 교회 내에서 이런 성령 신학을 형성하는 일은 항상 ‘항상 개혁하는 원칙’을 따른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매일 아침마다 ‘새로이’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는 진지하고도 통전적인 개혁파 신학을 일관되게 발전시키고 실천하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 상대적이고 다원적이며 공동체성의 상실이라는 특성으로 말미암아 포스트모더니즘은 교회에 위기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변치 않는 유일한 진리를 신앙하고 그 진리를 탐구, 변증하는 것은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할 기독교인과 신학자의 임무이다.
21세기의 신학은 여러 가지 과제를 가지고 있다. 미래의 신학은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상황을 향하여 열려 있으며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또한 자연과 환경과 종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신학이 요청된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신학적 이론 정립도 요청된다. 특히 생물학적 혁명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요청된다.
21세기의 신학은 그러므로 통전적 신학이 되어야 한다. 21세기의 신학적 교회론은 근원으로 돌아가 초대교회로부터 종교개혁, 현대에 이르는 교회론의 정수들을 되새기면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탐구해야 한다. 그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통전적 신학적 교회론은 진리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해야 한다.
이제 그러한 통전적 신학적 교회론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논하도록 한다.
(3) 에큐메니칼 교회론
먼저 21세기의 통전적 신학적 교회론은 에큐메니칼 교회론이어야 한다.
이성희 목사는 교회론의 에큐메니컬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주장한다.
“파벌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빚어진 개교회주의는 역사 변천의식과 교회 일치이념으로 극복해나가야 한다.
제2의 물결시대는 분리와 경쟁을 그 기조로 하였고 제3의 물결시대는 협력시대, 제4의 물결시대는 통합과 공동창조의 시대이다.
자연히 제3의 물결로 말미암아 에큐메니칼 운동이 발달하고, 연합을 기조로하는 교회 운동이 활성화될 것. 이 결과 한국교회는 제3의 물결에서 제4의 물결로 급속하게 진입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는 한국 교회에서 개교회주의의 퇴조를 수반한다.
“전통적 교회관이 사라지고 미래형 교회관이 발달하면서, '내 교회'라는 소아(小我)적 의식 대신 '우리 교회'라는 생각이 두드러질 것이다. '우리 교회' 개념이 강해질 때 내 교회를 고집하지 않고 아무 교회나 편의에 따라 찾게 될 공산이 크다.
이동성(mobility)의 발달로 개교회주의가 퇴조하였고, 대부분의 대도시 교회들은 지역교회 개념을 이미 상실하였다.”
“일회성과 이동성의 발달 그리고 제4의 물결이라는 변천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전반적 흐름이었던 개교회주의가 크게 퇴조하고 자연히 교회연합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교회연합은 한국교회 전체가 사는 생존방식이다.
우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다양성 가운데의 통일을 추구하고 변화를 당위로 받아들이는 미래 사회에서 교회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해야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영성과 사회성을 동시적으로 보존해야 교회일 수 있다.
한국교회가 교회연합을 이룬다면 선교와 교회행정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본격화된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로서의 통일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개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흐름이다. 이는 세계화와 지방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미래의 요구에 적합하다. 21세기를 앞두고 한국교회도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정치,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제는 한국 교회 밖의 에큐메니컬 논의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동방교회, 제 2 바티칸 공의회, WCC, 조인트워킹 그룹의 교회론들의 중요사항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21세기의 교회론은 우선적으로 교파간, 종교간, 그리고 창조세계의 우주적 보편적 코이노니아를 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교회는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올바르게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1) 동방 정통교회 교회론
가. 각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듯이 전체로서의 교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상에서 다양성 속의 일치의 신비 재연한다.
나. 교회는 성육신의 연장이며, 성육신이 영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인간들 가운데 역사할 때 상호보완적이다. 성령 충만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몸, 성령 충만으로서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반사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결론적으로 동방 정통교회는 성서 이외에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령론 그리고451년 칼케돈의 정통 기독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바, 그들의 교회론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근거시키고 있다. 그런데 위 두 에큐메니칼 신조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 및 개신교 일반도 공유하는 에큐메니칼 교회론의 토대이다.
2)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
일찍이 교황 레오 13세는 개신교는 물론 성공회까지도 그리스도의 참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대체로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신만이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로 자처하며 타 교파들을 흡수, 통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58년 교황직에 오른 요한 23세는 이러한 로마 카톨릭을 변화시켰다.그의“aggiornamento"(bring up to date : 가톨릭 신앙을 현대세계에서 재해석하고자 함)는 제2바티칸공의회 전체의 기조이자 정신이다. “교회에 대한 교리헌장”과 “현대 세계 속에 있는 교회에 대한 사목 헌장”은 “계시에 대한 교리 헌장”과 “에큐메니즘에 대한 교령”과 함께 에큐메니즘에 크게 기여한 내용들로서, 교회론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Lumen Gentium>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것이라면, <Gaudium et Spes>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교리헌장<Lumen Gentium>”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으로서 네가지 교회론적 축을 가진다. 1) 하나님의 백성 안에 있는 세상의 일치의 본래적인 성례인 신비로서의 교회를 논한다. 제2장 “하나님의 백성”에서는 동방교회를 분리된 “교회들”, 개신교회를 “교회적 공동체들”로 칭한다. 2) 평신도와 사제가 수위권과 동등권의 신비 안에서 만나는 교회의 제도적인 구조를 논한다. 제3장 “교회의 계층구조:주교직에 관하여”에 나오는 “사도들의 동료적 연대성”과 “주교들의 동료적 연대성”은 매우 중요하다. 3) 교회 안의 거룩하고 은사적인 구조 4) 종말론적 성령론적 차원에서 보이는 우주적 완성을 말한다. 제7장은 종말론적으로 모든 구원얻을 자들이 하나될 것을 내다봄으로서 에큐메니칼 교회론에 대해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3) WCC의 교회론
원래 WCC 고유의 교회론이란 없다. 그러나 WCC는 꾸준히 교회일치 추구의 과정에서 일치 지향의 교회론을 발전시켜 왔다. WCC는 1927년 로잔의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 이래로 1993년 스페인의 “신앙과 직제” 대회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직제”는 계속해서 세계 교회들의 신학적인 일치 특히 교회론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왔다. 1948년 암스텔담 WCC 이래로 이 “신앙과 직제”는 WCC 산하기구로 일해오고 있는 바, 역대 WCC 총회 분과보고서에 나타난 교회일치 추구는 대체로 “신앙과 직제” 분과의 연구결과에 기초한 것이다. 이제 21세기의 통전적 신학적 교회론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WCC의 교회론을 개관하여 본다.
가) 비교교회론 - 1948년 암스텔담 총회는 “비교교회론”적 입장을 지향한다. 암스텔담에서 논의된 것은 교파간의 가시적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불가시적 일치였다.
나) 기독론적 교회론 - 1954년 에반스톤 총회는 교파들의 가시적 일치의 기독론적 기초를 확실히 하고, 선물로 주어진 불가시적 일치에서 한걸음 나아가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일치의 추구를 과제로서 촉구하고 있다.
다) 삼위일체론적 교회론 - 1961년 뉴델리 총회는 1960년 스코틀랜드 센 앤드류의 신앙과 직제 대회 문서인 “하나의 주, 하나의 세례”에 나타난 성과를 근거로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에 근거한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교회일치를 추구하였다.
라) 협의회를 통한 친교로서의 교회론 - 1968년 웁살라 총회는 1961년 뉴델리 총회의 개교회적 혹은 지역 교회의 차원에서 나아가 “보편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장차 로마 가톨락 교회와 기타 비 WCC회원 교회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을 근거로 “진정으로 보편적인 에큐메니칼 협의회”를 제안했다.
1982년 페루의 리마 신앙과 직제 대회는 BEM(세례, 성만찬,직제)문서를 통과시켰다. 1983년 뱅쿠버 WCC총회는 BEM 문서에 근거하여 리마 예전서를 만들었다. 뱅쿠버 총회는 일치의 징표로서 3가지를 들고 있다. 1. 사도적 신앙의 공동이해, 2. 세례, 성만찬, 직제의 상호인정, 3. 공동의 결의 방법과 권위있는 공동의 교도방법이다. 이중 “사도적 신앙의 공동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뱅쿠버는 BEM을 인류의 갱신과 교회의 사회참여로 연결시킨다. 즉 교회는 인류 공동체의 갱신을 위해서 가시적 일치추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 코이노니아 교회론 - 1991년 캔버라 WCC 7차 총회는 “교회론에 대한 에큐메니칼 시야를 발전시키고 교회의 본성과 사명을 논의함에 있어서 코이노니아 개념은 가장 유용한 개념이다.” 라고 한다. 성령 안에서의 교회일치는 창조세계 전체와의 코이노니아로 확장되어 나간다.
WCC가 지향하는 교회일치는 결코 획일적인 일치추구나 어느 한 교파로의 흡수통합 같은 일치추구가 아니라, 일치와 다양성은 기독교적 코이노니아에 있어서 한 쌍을 이루는 요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 다양성은 한계가 있다. WCC 교리헌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받아들이는 교회(교파)로서 일정 조건을 갖춘 교회라야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4) Joint Working Group의 교회론
로마 카톨릭 교회와 WCC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 “연합 연구 위원회”(JWG)를 형성하였다. 이 JWG가 채택한 두 문서 중 하나인 <The Church:Local and Universal>은 에큐메니칼 문제에 관한 양측의 수렴문서이다. 현재 국제적 교파적 양자간 대화의 초점은 교회론이다.
“친교의 교회적 요소들”에서는 양측이 충만한 친교를 위해서 지녀야 할 교회적 요소들을 제2바티칸 공의회와 WCC의 역사에 비춰 설명하고 있다. 그 요소들은 5가지이다.
가) 사도적 신앙
나) 성례전적 삶
다) 참으로 하나의 상호 인정된 교역(직제에 대한 상호 인정)
라) 협의회적 관계와 결정을 위한 구조
마) 세계 속에서 공동 증언과 봉사(사회 참여)
이러한 교회론은 교황의 베드로 승계와 수위권을 제외하고는 로마 가톨릭과 가장 가까운 동방 정통교회의 교회론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교회란 곧 교파간 연합은 물론, 형제 교단들과, 그리고 나아가 타종교와도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는 열린 교회이다. 에큐메니칼 교회론은 당면한, 그리고 미래에 더욱 심화될 종교다원주의에 대응하는 교회론이기도 하다. 타종교와 대화하는 동시에 타종교 및 이단 종파에 대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기능을 강화하고 앞서 언급한 디아코니아적 영성으로 종교적 우위성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을 분석해 보면 과거 한국교회는 교파분열이 하나의 성장요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영적 성장이기보다는 물질적 성장이었으며, 질적 성장이 아닌 양적 성장이었음을 지적해야겠다.
이형기 교수는 저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의 모색에서 개신교의 진보적 진영과 보수적 진영, 그리고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사회참여 신학을 모두 논하고, 그 공통점을 복음과 교회, 교회의 사회참여라고 하는 두 기둥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국의 예장 통합측 교회는 무엇보다도 이 두 기둥 중 두 번째 기둥을 튼튼히 하는 신앙고백서 차원의 문서작업을 다시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실천의 차원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 기독교인들은 무엇이 서로 다른가를 찾아내려고 애쓰기보다 무엇이 서로 같은가를 강조하면서 피차 간에 신앙의 형제됨을 확인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한다.
(4)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론
21세기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단지 기독교적 공동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계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상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다. 예배공동체로만 만족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생활 전반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교회의 개념은 성전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회당으로서의 개념으로 발전해야 한다. 예배하는 기능에 집중되어 있는 교회가 아니라 예배와 교육과 교제가 균형을 이루는 교회이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론이 추구할 바는 정의와 사랑이 조화되는 사회,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로서 희년정신의 구현, 청소년에 대한 각종 대안 교육의 실시, 실제 공동체 사회의 구성 등 다양하다.
먼저 현재의 상황과 21세기의 진단을 위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로 이야기되고 있는 공동체의 실종에 대한 대표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리요타르와 데리다는 공통적으로 공동체적 삶의 회복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기꺼워 하지 않는다.
하버마스는 사회적 유대로서의 연대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데리다의 접근이 모종의 사상적 공동체를 전제한다 하더라도 그의 철학에는 사회적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어떻게 다변성과 공동체가 함께 번영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제시할 전망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련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은 간단히 “거대담론들에 대한 불신”이라 정의된다. 그 책임은 나치의 아우슈비쯔, 1953년의 베를린, 56년의 부다페스트, 68년의 프라하, 80년의 폴란드 등 최근 역사의 사건들에 돌려졌다.
역사철학들의 문제는 다도해 사이의 통로들, 즉 생의 연계성과 통일성에 대한 조망들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 통로들은 아무데로도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동체의 부재와 개인주의의 심화라는 문제는 21세기에도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앞서 인용한 김영운 목사의 강연에서는 21세기의 특징 중 하나로서 “공동체문화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희망사항이며 또한 반드시 그러해야만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논리적 당위라 하겠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상이나 논리로 사람들의 생활이 영위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공동체의 부재와 개인주의의 심화 문제는 21세기의 교회가 떠안아야 할 무거운 짐이 될 수가 있다.
이성희 목사도 정보화 시대의 공동체의 한계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공동체는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한 공동체는 아니다. 긴장관계에서 만나는 이익사회이며, 사랑과 책임이 어우러진 게마인샤프트를 기대하기 힘든 곳이다. 유기체(organism)가 아닌 하나의 조직(organization)에 불과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방안은 교회의 공동체가 첫 번째는 가정 위주로, 두 번째는 소그룹 위주로 하여 편성된 것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 교회 전체의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활성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 교회는 어떤 형태의 교회이든지, 가정 중심의 교회, 가족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는 역사 속에 현존하는 교회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세 가지 양식 속에 표현하였다.
첫째 - 함께 함 (Togetherness, 친교)
둘째 - 세우는 일 (Edification or Building, 설교와 교육)
셋째 - 나누어 주는 일 (Giving, 선교와 봉사)
주님의 포로가 된 교회만이 인류가 요구하고 열망하는 바를 꾸준히 충족시키려는 자세를 갖춘 참으로 자유로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거기에 끊임없이 가까운 모습이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한다.
“교회의 원리는 교회와 함께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시작한다”라는 판넨베르크(Pannenberg)의 말처럼,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교회의 모든 삶과 행위를 결정짓는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사상은 레25:8-55 성결법전이 추구하는 희년 사상과 맞닿아 있다.
희년의 정신은 역사적 반성을 통한 회복의 정신이며 해방 50년 한국의 역사 속에서는 민족분단에 대한 죄책의 참회와 통일을 향한 회복이 그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희년의 정신을 교회갱신과 관련하여 재정운영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면 ‘나눔을 통한 화해의 정신’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눔을 통해 한국교회가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사명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교회는 나눔을 통한 화해의 정신으로 한국 사회의 통합과 조화에 기여할 수 있다.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사회통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한국 교회는 나눔과 화해의 희년 정신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로 인한 병폐의 극복은 현대사회 속에 처한 기독교회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 방법의 근본 원리는 ‘나눔을 통한 화해의 희년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한국 교회는 나눔을 통한 화해의 희년 정신으로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야만 한다.
IMF시대라 불리우는 현재의 경제위기는 공동체의 위기로 연결되고 있다. … 이러한 위기에 빠지면 사회성원 개개인들은 자신과 그 가족의 이익을 중심으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행동이 자기중심적이 되면서 상대방에 대한 공존과 배려의 의식이 약화되면 우리는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되고 믿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 위기의 시대에 공동체를 보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첫째, 한국 교회는 경제 위기의 시대에 ‘정직과 책임’의 규범을 강화해야 하겠다.
둘째, 한국 교회는 경제 위기의 상황에서 나눔과 절제를 통한 공동체의 회복에 앞장서야 하겠다.
셋째,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위로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지향하는 21세기의 교회는 이렇게 변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과 “성령의 공동체”(Communitv of Holy Spirit)와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으로서의 에클레시아의 모습을 지닌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분별하는 영적인 공동체로서, 역사에 대한 책임지는 역사적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기다리는 종말적인 공동체로서, 선교적인 몸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명을 다해야 한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한 전령으로 선택함과 부르심을 받은 에클레시아 공동체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의 다스림 속에서 인간의 관계성과, 역사적 상황의 변혁과, 삶의 가치의 전도를 가져오는 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하나됨 속의 다양성을, 다양성 속의 하나됨을 이루어서 교회의 공동체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코이노니아 사역을 강화하고 “교회안의 작은 교회”인 소그룹 목회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셋째, 교회는 이러한 “하나됨과 다양성”을 자신과 세계를 향한 디아코니아, 그리고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실천하여야 하며 이러한 사역을 자원함 속에서 이루어 나가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튼튼히 세우기 위해서는 “말씀의 섬김”(the service of the word) 즉, 설교와 교육의 사역이 선행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지속적이고 균형있는 성장을 위한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에 응답하는 섬김(the service of response to the word)”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Diaconal ministry).
다섯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교회의 모든 조직이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조직의 경직성은 교회를 마른 뼈와 같이 만들기 때문이다.
여섯째, 교회는 그 본질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모든 평신도들을 일깨워서 선교와 봉사와 교육에 총동원해야 한다. 특별히 여성들의 목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평신도들은 교회안에서의 봉사 뿐만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왕같은 제사장 역할을 보다 더 잘 감당하도록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일곱째, 교회는 전인적인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하는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치유목회를 해야 한다. 교회가 성도들의 영적인 문제에만 치중하거나 이원론적인 구조의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전인적인 목회영역을 확대해야만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건강위원회나 목회간호사역 같은 것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여덟째, 교회는 예배 공동체로서 예전적이면서도 회중중심의 열린 예배를 위해서 끊임없이 예배 갱신을 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회복운동과 예배 특성화와 열린 예배등 다양한 갱신을 해야 할 것이다. 예배는 회중을 위한 회중의 예배가 되도록 회중의 참여도를 높이고, 성만찬을 연 12회정도로 늘리며, 살아 움직이는 생동하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아홉째, 교회의 자원개발과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 교회의 구조를 조정하며, 교회의 모든 역량을 극대화하여, 선교와 봉사에로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운영도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여서 교회의 신임도를 높여야 한다.
열 번째, 황폐화해가는 교회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 “인간사랑” “자연사랑”을 통한 삼애일치(三愛一致) 영성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경건 훈련의 폐단과 비효율성을 지양하고 건전한 영성훈련을 강화해야 한다.
열 한번째, 경제 정의 실현과 생태계 보존과 정치민주화 등을 위해서 국내교회의 연합과 세계교회와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강화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기구, 연합기관의 기구를 과감히 구조 조정해서 통합해야 한다. 한기총과 NCC도 통합해야 한국개신교가 살아남을 것이다.
열 두번째,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성경에서 선포하는 메시지라는 점을 명심하고 교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신학적인 메시지를 용기 있게 선포하는 예언자적인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제사장적인 사역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설교갱신 없이는 교회갱신은 기대하기 어렵고, 설교가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 세계구원도 기대하기 어렵다.
열 세번째, 교회의 진술과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와야 한다”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날마다 갱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열 네번째, 교회의 지도력은 참여민주주의 방식으로 이끌어가면서, 양떼를 뒤에서 몰고 가는 목자와 같이 희생적이고 봉사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열 다섯번째, 교회의 목회는 성장지상주의 보다는 성숙지향의 목회를 해야만 할 것이다.
열 여섯번째, 21세기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통일이 이루어질 것인데 통일이후의 민족교회를 위해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민족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사역을 철저히 훈련해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5) 민주적 교회론
과거 한국 교회의 성장에는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의 요소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를 비롯한 대다수의 한국교회들은 율법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특성이 강한 유교 선비문화와 장로제도가 접목되어 성장해 왔다.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권위주의적 교회구조와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예배의 갱신, 여성목회자와 여신도의 민주적 참여를 장려해야 한다. 과연 새로운 세기에도 조선시대의 잔재인 선비문화를 변형한 가부장적인 권위로 가득한 교회직제나 당회의 모습이 평신도들에게 용인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것은 어렵다고 본다. 이제는 평신도와 여성의 위상과 역할이 한차원 상승되지 않으면 교회는 사회에 영영 뒤쳐진 기관으로 외면당할 것이 틀림없다.
당회로부터의 수직적인 체제보다 이제는 평신도 소그룹 위주의 교회활동이 중시될 것이 틀림없다.
교회 네트워크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할 미래교회에는 거대교회가 아니라 네트워크에 유연한 소그룹적 교회가 강세를 보일 것이다. 따라서 미래교회는 소그룹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소그룹의 교회 혹은 소그룹적인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미국의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대표적 소그룹 교회인데 2,000개의 소그룹을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가 평신도 중심의 민주적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은 한국 교회 교인들 자체의 문제도 내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 목회는 심방에 상당한 비중. 교인들의 목회자에 대한 의존성이 그 주된 요인. 무당종교(샤머니즘)는 현실성, 기복성, 의존성이란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는데, 한국 기독교에선 이 세 요소가 고스란히 나타난다. 즉, 교인들 스스로가 민주적이고 주체적인 신자로서의 책임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한국 교회를 위해서는 평신도 중심의 민주적 교회를 위한 교인들 스스로의 각성이 요구된다.
교회의 양적 성장 추구도 민주적 교회를 만드는 데 있어서 저해요소이다. 교회의 양적 성장은 아무래도 담임 목사 등 목회자들의 욕심에 기인한 바 크다. 교인들 하나하나를 돌보고 양육하기 보다는 많은 교인들을 만들어내어 교세를 불리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교회조차도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에 휘둘려져서는 안된다.
교회의 양적 성장 추구는 필연적으로 교회 마케팅 논란을 가져오게 된다. 이성희 목사의 주장을 들어보자.
“앞으로의 시대는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가 하나가 되는 프로수머(prosumer)의 시대이다.
소비자 중심 시대, 청중 중심 시대에는 개인이 직접 해보기 원하는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데, 이러한 욕구 충족은 소그룹을 통하여 가능하다.”
“‘고객 접촉 경영’은 고객을 만나서 그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경영을 의미하는데, 새로운 고객이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한 경영요소이다. 이러한 신경영기법에 따라서 최근의 많은 회사들은 사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제일 가까이에 가장 지위가 높은 부장이 앉아서 고객을 맞이하고 지위가 낮은 대리는 안쪽에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경영기법을 교회에 적용한다면 신입교인이 교회에 와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은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이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차 안내와 예배당의 안내를 담당한 사람은 처음 교회를 경험하는 교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일반적으로 처음 대하는사람의 인상이 새로 온 교인들에게는 그 교회에 대한 인상의 80퍼센트를 차지하게 된다. 평신도를 훈련하여 새 교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도록 하는 것은 교회성장과 성숙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지금까지의 성직자 중심의 편중된 교회 구조는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교회 구조로 조정되어야 한다.
교회를 위하여 평신도가 가진 다양한 기능을 이용해야 한다.”
평신도를 잘 활용하여 민주적 교회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이성희 목사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교회 마케팅 전략으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상업적 수단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마케팅 논란은 지금까지 미국의 경우였지만, 이젠 상기한 바와 같이 한국도 마찬가지 상황에 육박하고 있다. 즉, “현재 시장의 원리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제도나 기관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라는 미국의 마케팅 교회 목사의 견해가 우리 사회에서도 다수의 견해로 수용되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인구가 과밀한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현실이다. 더구나 양적 성장에 급급한 교회가 민주적 교회가 될 소지는 적다. 양적 성장의 강조는 언제나 인간 자체보다는 물질적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성희 목사는 한국 교회가 정체된 현실에 대하여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보다 영성적 기능을 앞세움으로서 돌파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미교회의 쇠퇴는 한국교회의 미래에 상당히 기치있는 교훈을 준다. 예언자적 기능에 지나친 무게를 둔 까닭에 유럽 교회가 쇠퇴하게 된 사실을 교훈삼아, 한국교회는 두 기능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며, 특히 영성적 기능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영성적 기능이 쇠퇴하면서 두 기능의 불균형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미래적 전망으로 볼 때 한국교회가 재성장 할 수 있는 길은 건강한 영성의 회복에 있다. 이 영성의 회복은 성경 본래의 모습, 교회 본연의 사명으로 회기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한국교회의 신종교개혁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교회가 가진 영성적 기능이 제사장적 기능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예언자적 기능도 중요한 영성적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마치 제사장적 기능만이 영성적 기능인 듯이 논리를 전개해서는 안된다는 데에 큰 오류가 있다. 오히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장 침체의 주 원인은 교회가 참다운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지난 십여년 간에 보여준 가톨릭의 지속적인 성장은 제 2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변화한 가톨릭의 사회참여의 신앙 양태가 대사회적인 성과를 거둔 결과이다. 반면에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사회로부터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집단, 자기 몸만 불리기에 급급한 집단으로 오해받고 있는 실정이다. 매우 부족하나마 그래도 한국의 종교 단체들 가운데에서 현재 사회 참여와 봉사를 가장 많이 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회가 이처럼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가 예언자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탓이다. 결코 제사장적인 측면에서의 기능을 소홀히 한 때문은 아닌 것이다.
참된 민주적 교회는 가시적 물질적인 양적 성장만을 바라보고 교회 마케팅에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신도들은 물론 사회를 향하여 올바른 기능 - 제사장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 - 을 수행해 갈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신교회의 원리인 만인제사장직의 이론을 따른다면 기독교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왕같은 제사장이다. 개개인 모두가 제사장인 교회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모이기에 힘 쓸 뿐 아니라 사회로 흩어져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할 때에 교회의 민주화는 이루어질 것이다.
III . 결론
지금까지 21세기 한국 교회의 교회론에 대하여 논하였다.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는 21세기를 맞이하여 복음과 상황(문화)이 조화된 바른 신학과 건전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영성에 근거한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교회 성장 위주에서 디아코니아(사회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 성숙으로의 교회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청되며, 우리 사회와 세계 교회, 역사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초대 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교회론의 정수를 수렴한 통전적 신학적 교회론이 개혁신학의 연속선상에서 꾸준히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하루속히 기독교의 교파간에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추구하여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의 연합을 지향하고, 종교간에도 대화와 협력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교회의 사명을 담당하기 위한 에큐메니칼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21세기의 한국 교회의 모델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모습을 지향해야 할 것이며, 21세기의 변화에 발맞추어 만인제사장론에 입각한 민주적 교회로의 전환을 서둘러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21세기 한국 교회의 교회론 중 많은 부분을 다루지 못했다. 특히 통일을 이루어가는 과정 중의, 또한 통일이 이루어진 후의 21세기 남북한 사회와 교회의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 매우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교회론의 문제를 상세히 논하여 볼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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