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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로 가는 길의 이름은 ‘왕산로(旺山路)’다.
‘왕산(旺山)’은 대한제국 평리원 재판장 서리 등을 지내고 의병에 투신했던 허위(許蔿)의 호다.
1908년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 때 허위가 선봉장이 되어 동대문 인근까지 진격했기 때문에,
그 길에 왕산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는 학자 관료형의 애국투사였다.
전통 성리학을 학문기반으로 삼았으면서도 신학문에 대한 소양도 겸했다.그는 처음에는 보수 유생의 입장에서 위정척사의 우국투쟁을 벌였으나,
나중에는 관료의 신분으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도 벌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구국의 의병전쟁을 선도하면서 일신을
희생시킨 저명한 의병장으로 이미지가 승화되었다.
1908년 9월 27일 53세의 한 사대부가 서대문 형무소 교수대에 섰다.
정2품 참찬 벼슬과 지금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평리원 원장을 지낸
왕산 허위다. 서대문형무소 첫 사형수였다.
"하늘에 뜬 해의 빛이 없어졌다."-〈대한매일신보>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옥졸 두 사람도 비분을 견디다 못해 모자를 찢고 물러났다."
-매천 황현 <매천야록>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허위 선생 평(評)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1854년 4월 1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林隱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진사인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이며,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위로 세 분의 형님이 있었다.
맏형 훈(薰, 호 舫山)을 비롯하여 둘째형 신(藎, 호 露州)․셋째형 겸(蒹, 이명 魯, 호 性山)이 그들이다.
요절한 둘째형을 제외하고 맏형 방산 허훈은 한말의 거유로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였다.
셋째형 성산 허겸도 만주․시베리아 벌판을 풍찬노숙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였다.
그의 가문은 독립운동계에서는 당당한 명문대가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가문 일족이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러시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고통과 시련의 세월을 지내야 했기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였던 우리의 민족적 고통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그는 자를 계형(季馨), 호를 왕산(旺山)이라 하였으며, 김해가 본관이다.
임은리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이름높은 학자 집안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니, 특히 작은아버지 해초공(海樵公)과
20세 위인 맏형 방산공으로부터 학문을 수학하였다. 특히 방산공은 조부인 태초당(太初堂) 허임(許恁)에게
글을 배운 뒤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 등과 같은 당대 최고 학자들의 문하에 출입하며
문명을 크게 떨쳤으며, 막내 아우인 선생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남달리 총명한 그는 8세 때 벌써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때 지은 시 가운데는,"달은 대장군이 되고(月爲大將軍) 별은 만병이 되어 따르노라(星爲萬兵隨)"라는 구절이 있다.
뒷날 13도창의군을 모아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왕산 허위 자신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꽃을 꺾으니 손에 봄이요(折花春在手) 물을 길으니 달빛이 집 안에 드네(汲水月入家)"
라는 구절은 그의 뛰어난 시상(詩想)을 짐작케 한다.
1896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살해하자 왕산은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백부에게 양자로 간 형 허훈은 3천 마지기(60만평) 농토를 선뜻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이때의 의병전쟁은 준비도 부족했고, 또 고종도 의병 해산을 명했기 때문에 장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의병을 해산하면서 읊은 시 한 수가 전한다.
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네
산새도 이렇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왕산 허위가 중앙 관직에 진출해 있던 기간에 주목되는 사실은 유명한 항일언론가이자 개신유학자인 장지연(張志淵)과
교유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그때까지 전통 유학을 학문기반으로 삼아 처신해 왔지만, 장지연과의 교유를 계기로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사상 전환의 단면은 1904년 8월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었을 때 정부에 건의한 10가지
조목 가운데 학교 건립, 철도․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을 주장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1904년 2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한국침략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함으로써 한국침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국의
군사요충지를 ‘합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고 나왔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자,
그는 이상천(李相天)․박규병(朴圭秉) 등의 관료 동지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당시의 배일통문 속에는 전 국민이 의병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 …
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를 부셔 칼을 만들고 … 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당시 일제침략에 대해 정부관료 중에 그 누구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선생이 주동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항변하였던 것이다.
의병 해산 후 청송군 진보면으로 이사한 형 허훈에게 가서 계속 공부에 진력하던 중
고종의 근신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이 "허위의 경륜과 포부는 세상에서 관중과 제갈량이라고 한다"고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그는 "벼슬은 나의 근본 뜻은 아니지만 왜적을 없애지 않을 수가 없고 국가를 회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시험해 보리라"고 다짐하면서 상경했다.1899년 벼슬길에 나선 허위는 1904년에 평리원(平理院) 재판장이 되었다.
<왕산허위선생사실대략>은 "사무를 본지 불과 수일 동안에 쌓였던 송안(訟案)을 일체 공평하고 분명하게 판결하니
사람들이 그 밝은 식견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평리원 재판장은 오늘날 대법원장에 해당한다.
재판과정에서 권력 가진 척족들이 개입했지만 모두 배격하고, 정의편에 섰다.이어 정2품 의정부 참찬이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오른 후 10개조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산업을 증진하여 민생 안정에 힘쓰고, 군사력을 강화해야 하며,
물가안정과 은행 설립, 노비 해방과 적서차별을 철폐하자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양반 출신으로 노비해방과 적서차별을
주장한 것은 획기적이었지만 이 건의가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나라가 가망 없게 돌아가자 일제의 죄상을 알리는 격문을 작성하여 뿌리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자 허위는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황제까지 저들 마음대로 뗐다 붙였다 하는 판국이니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었다. 허위는 과거같이 고립된 의병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경상, 경기, 충청, 전라, 강원 각 도를 돌면서 연합의병 결성을 역설했다.
허위 자신은 경기도 포천, 연천, 적성, 양주, 강화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했다.그래서 1907년 9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13도 의병 1만명이 모여 연합의병창의군을 결성할 수 있었다.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허위는 참모장인 군사장이 되었다.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했다며 낙향하자
왕산은 이인영의 몫까지 맡아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다.
허위는 3백명의 선봉대를 지휘하여 동대문밖 30리까지 진출했지만 후속 부대의 도착이 지연되고, 일제가 화력전을 쏟아붓자
결국 후퇴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일제는 연합의병이 동대문밖 30리까지 진출해 수도를 탈환하려 한 서울진공작전에 크게 놀랐다.
서울진공작전에 놀란 일제는 허위 체포에 사활을 걸었다. 허위는 경기도 북부로 군대를 이동시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1908년 5월 24일 연천에서 일제 헌병에게 기습당해 생포되고 말았다. 매국노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경상도관찰사나 외부대신
자리를 주겠다고 회유하고 간 다음날이었다.
그는 휘하에 있다가 포로가 된 한 의병으로부터 소재지를 탐지한 철원헌병대에 의해 경기도 영평군 서면 유동(柳洞)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서울로 압송된 선생은 일본군 헌병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일제의 한국침략을 당당히 성토함으로써 의병장으로서 절의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한국을 멸할 흑심을 가졌다.
우리들은 결코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미력하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일제침략이 의병봉기의 원인이 되었음을 명쾌히 설파하였다.
그 뒤 왕산 허위는 사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1908년 9월 27일(양력 10. 21) 교수형을 당해 5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그의 올곧은 의기와 품성은 순국 직전의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형의 집행에 앞서 왜승(倭僧)이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하려고 하자 왕산 허위는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 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라고 대성일갈하며 이를 물리쳤다.
검사가 그에게 사후 시신을 거둘 이가 있느냐고 묻자,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도 무방하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그 4개월 후 허위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들에 의해 사형 1호로 순국했다.
왕산은 열 살이 되기 전에 "달은 대장군이 되고 별은 군사처럼 따르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라는 시를 지었다.
문인 집안 소년이 장수의 시를 지은 것은 소년 시절에 의병장의 길을 예감한 것일까? 순국 직전 시 한 수를 남겼다.
"국치와 민욕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 하겠는가. 아버지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해서
충성도, 효도도 못한 몸이니 죽은들 어이 눈을 감으리(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
왕산이 순국한 후 일제와 친일파들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왕산의 둘째 형 성산 허겸은 1912년 왕산의 남은 가족과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만주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왕산에게는 종형제가 둘 있었는데 이들의 가족도 1915년 만주로 망명했다.야반도주하다시피 망명한 것이다.
왕산의 종형 허형(許蘅)의 손녀로 임정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손부가 되는 허은(許銀) 여사다.
그의 구술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서간도로 망명할 때의 정황을 전해준다.
"1915년 음력 3월 (중략) 언제 짐을 다 싸 놓았던지 우리는 하늘이 아직 깜깜할 때 집을 나섰다. (중략)
성산 어른이 먼저 당신네 가족을 데리고 도만(渡滿)해서 통화현 다황거우에 자리를 잡아놓고 나서 우리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우리는 밤길을 걸어서 구미 아래에 있는 김천시 남면 부상역에 와서 기차를 탔다. 새로운 땅 신천지를 찾아 나선 동네 사람들
수십 명이 깜깜한 어둠 속을 걷고 또 걸었다. 대부분 친척들이었고 타성바지도 더러 있었다."
만주로 망명한 왕산의 일족들은 모두 대일항쟁에 나섰다. 형 허겸이 민주공화정의 씨앗이 된 경학사가 부민단(扶民團)으로
개편되자 초대 단장으로 선임된 것을 비롯해서 이 일가의 독립전쟁 행적은 뒤따라가기에도 숨 가쁠 정도이다.
왕산의 고향 임은동 이웃 마을 상모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다.
둘째 형 박상희가 항일의 길을 걸은 것은 아마도 왕산 허위의 우뢰같은 이름을 듣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달랐다. 혈서로 황국신민 충성서약을 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후일 육영수와 대구에서 결혼할 때 왕산의 형 허훈의 손자로서 당시 대구시장이었던 허억(許億)이 주례를 섰다.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당황한 신랑 친구가 주례석으로 올라가서 신랑 신부의 이름이 바꿨다고 알린다.
주례 허억 시장은 "평생 처음 서는 결혼식 주례라서 잘못하였나 봅니다.
신랑 신부는 이 주례의 실수를 추억으로 간직하였으면 좋겠다."고 주례사를 이어갔다고 한다.
구미 임은동 바로 이웃 마을 칠곡 오태동(현재는 구미시 오태동)에 장승원(張承遠)이 살았다.
장승원은 집안 대대로 영남 제1의 만석꾼 갑부였다.이웃 고을 왕산 허위가 고종 임금의 신임을 얻어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 비서원승 등 고관에 오르는 것을 보고 20만 원을 고액권으로 바꿔 보스턴 가죽 가방에 넣고
한양(서울)으로 올라갔다. 그는 왕산 집 문을 두드렸다.
허위는 문전에서 장승원을 쫓지 않고 맞아들였다. 장승원은 좌정 후 곧 원거리 방문 사유를 단도직입적으로 아뢰었다.
"소생이 돈은 좀 있사오니 나라 살림에 보태십시오."
장승원은 허위가 자기를 경상관찰사로만 천거해 주면 가죽 가방에 든 거금 20만 원을 다 드리고 가겠다고 했다.
평소 강직한 왕산은 일언지하 거절한 뒤 장승원을 쫓으려 했다. 그 시절에는 벼슬을 돈으로 사는 일이 매우 흔했다.
하지만 꼬장꼬장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허위가 어찌 매관매직을 한다는 말인가.
그때 박상진(후일 대한광복회 총사령)이 왕산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눈치채고 스승을 불러낸 뒤 슬며시 진언했다.
"스승님, 조선은 이제 곧 망합니다. 다시 나라를 되찾으려면 군대와 인재를 육성하고, 젊은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일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지금 그 돈을 받지 마시고, 후일 나라가 망한 뒤 독립자금이 필요할 때 그에게 받기로 단단히
약조하시고, 그의 청을 못이긴 척 들어주십시오. 제가 보기에는 장승원이란 자가 저 돈가방으로 누구를 구워 삶건 틀림없이
벼슬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허위는 제자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아 차리고 사랑에 든 뒤 장승원과 독대했다.
"그 돈의 액수가 얼마요?"
"20만 원입니다. 이 돈이 적으시다면 더 보태겠습니다."
당시 20만 원은 거금이었다. 허위도 장승원의 배포에는 놀랐다.
"음, 20만 원이라. 그만하면 됐소. 어쨌거나 내가 그 돈은 나라를 위해 쓰겠소. 지금 당장은 그 돈이 필요 없으니까 장(張) 공께
맡겨두겠소. 우리가 일본을 몰아내는 일이나 조선의 독립을 위한 일을 할 때 그 돈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장(張) 공에게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는 지체 말고 주셔야 합니다."
"아무렴, 대감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수결(手決, 서명)을 둔 문서라도 써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소.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며, 일구이언(一口二言)은 견자(犬子, 개새끼)지요."
"그러고 말구요. 제가 어느 안전(案前, 존귀한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인데 감히 허튼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더욱이 두 집안 간은 선대부터 오랜 세교에다가 부르면 대답할 수 있는 지호지간이 아닙니까."
"알았소. 그럼 물러가 기다리시오."
"대감 은혜 망극합니다."
그 제자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이 독립운동에 쓰겠다고 그 돈을 달라고 하자 장승원은 딱 잘라 거절했다.
박상진은 장승원을 그의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단했다.
장승원의 아들이 미 군정 때 수도경찰청장을 지내고 이승만 정부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이다.
그가 미 군정 때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좌익으로 몰아 죽인 데는 장승원이 독립운동가에게 죽은 구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박정희는 장승원이 사망하고 이틀 뒤, 오태동 옆 마을 상모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성빈은 장씨 집안의 머슴이자 소작인이었다.
그는 성주 태생으로 1895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 접주로 동학군을 이끌었다. 동학군이 패퇴하면서 그는 고향을 떠나
칠곡군 약목을 거쳐 1917년 구미 상모동에 정착했다. 훗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1963년 10월 정읍 황토현에서
열린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준공식에 참여해 추도사를 한 것은 이런 집안의 내력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소작인의 막내아들이 5.16쿠데타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장택상이 볼 때는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었다. 소작인의 아들하고는 상대도 하지 않았던 장택상이가
그렇게 하고 싶던 대통령을 소작농의 아들이 대통령을 하다니. 장택상은 박정희를 극도로 비난했다.
장택상은 5.16쿠데타 이후 반 박정희운동에 앞장서며 당시'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단한 번도 붙이지 않고,
'박정희씨' '박정희군'이라고 낮춰 부르며 매우 심한 독설을 늘어놓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박정희대통령은 세상이
변할 줄도 모른 채 아직도 자기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깔본다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장택상이 고향 경북칠곡에서 2대에서 5대까지 내리 네 차례나 연속해서 70% 이상의 유효 득표율로압도적으로 당선된
장택상의 텃밭에서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 또다시 입후보하자 박정희가 총재로 있었던 민주공화당은 무명의 정치신인
30대 송한철을 내세워 보기 좋게 낙선시켰다.
선거에 진 가장 큰 원인은 칠곡 경찰서에서 장택상후보를 특별히 신변보호를 한다는 명분으로 무장경찰 네댓 명을 앞뒤로
경호를 시키자 시골사람들이 무장경찰을 무서워한 나머지 장택상후보 유세장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