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기행>이 기록한 우리의 민속
2003년 출간된 이형권의 『풍속기행』은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민속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는 우리 민속문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는 것들의 실제 관찰기록이 담겨있다. ‘진도 씻김굿’은 전남 지역 세습무의 기예가 가장 잘 드러나는 종교와 예술의 종합적인 무대이다. ‘씻김굿’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바라는 민초들의 소박한 소망이 담겨있다. 모두 12마당으로 펼쳐지는 씻김굿의 묘사와 설명은 마치 현장으로 안내하는 것처럼 간결하면서도 상세하게 전개된다. 이처럼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탐방한 민속의 현장기록이 펼쳐지는 것이다. ‘진도 씻김굿’의 애절하면서도 깊이있는 춤과 사설 그리고 그것를 따라가며 울리는 절묘한 피리의 가락은 지켜보는 모두에게 인간의 삶이 지닌 슬픔과 아픔을 동감하게 만든다. 또한 격포 해안과 가까운 위도의 ‘띠뱃놀이’에서는 마을 공동체의 풍어와 어민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엿볼 수 있으며, 1300년간 이어져 온 부여의 ‘은산 별신제’에서는 백제 부흥을 위해 싸우다 안타깝게 죽은 복신과 도침의 영혼을 위로할 뿐 아니라 망국의 아픔을 겪었던 그곳 주민들의 응축된 분노와 해원의 갈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랫동안 마을을 중심으로 마을굿을 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원 대보름날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마을굿이었다. 굿은 보통 상당굿과 하당굿으로 나뉘어졌는데 상당굿은 마을을 보호하는 산신에게 드리는 유교식 제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하당굿은 마을 입구에 세워 마을을 보호하고 액을 없애고 복을 비는 존재들에 대한 기원과 놀이로 이루여졌다. 하당굿의 대상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장승이나 솟대 그리고 남근석과 같은 것들이었다. 마을 입구는 안전한 마을 내부와 위험한 외부를 경계짓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전통사회에서 마을 입구는 마을 안의 신성한 세계와 마을 밖의 무질서한 세계가 경게지어지는 공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수호신을 세워 부정한 것의 침입을 막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신앙이 성립된 것이다.”
마을의 안전과 복을 비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을 입구의 영물들은 지역별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뭉특한 코와 커다란 눈을 가진 해학적인 돌장승들은 마을을 지키는 마을장승과 절을 보호하는 사찰장승으로 나뉘어지는데 전남의 영암과 나주시 경계의 국사봉 기슭에서는 사찰장승이 많이 발견된다. 반면 부안과 나주 지역에서는 마을장승이 많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라도 지역에 돌장승이 많은 이유는 이 지역이 17세기 이후 부유해진 것과 관련지을 수 있는데, 상업활동으로 부유해진 마을 주민들의 후원을 통해 상당한 자금이 필요한 돌장승이 다수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라도 지역의 장승은 단지 자연적 재앙뿐 아니라 사회적 재앙 즉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대항하기 위한 지역민들의 의도도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장승이 설치된 지역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많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인과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승문화의 쇠퇴와 단절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로의 단절”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전라도 지역에 돌장승이 많은 반면, 충남 칠갑산 주변에는 나무 장승이 많이 제작되었다. 칠갑산은 오래 전부터 산이 험하고 호랑이 출몰이 잦았던 지역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장승제를 통해 마을의 평안과 호환으로부터의 보호를 빌었던 것이다. 나무장승이 마을 주민들의 보호를 위하여 만들어진 지역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지역에서는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주변에도 나무장승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전쟁때 죽은 수많은 원혼들을 위하여 나무장승을 세웠던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장승이나 남근석 그리고 솟대들은 매우 운이 좋은 경우이다. 과거 마을 곳곳에는 이러한 민속신앙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민속은 미신으로 폄하되었고 마을의 민속은 사라져갔다. 해방 이후에도 새마을 운동의 공격 타켓이 되어 사라져갔던 것이다. 새마을 운동 당시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던 남근석을 음란하다 하여 마을청년들이 땅에 묻었다가 한참이나 지나 다시 복원하여 마을 입구에 세운 사례를 통해서도 우리의 민속이 얼마나 핍박당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과거의 민속을 지키고 있는 마을들은 마을공동체의 정신이 유독 강한 지역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속이 남아있는 지역들도 그것을 유지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전 국토가 소멸위기에 빠져있는 지금, 마을굿은 이제 명맥을 이어가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20년 전에 기록된 책에서도 위기를 강조하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더욱 참담하다. 특히 문화적으로 중요한 몇몇 민속연희를 제외하고는 계승자도 없으며 마을에서의 행사도 중단되어 가고 있다. 80년대 대학가에서 전통문화와 전통예술이 활발하게 부활했던 이유는 민속문화가 가졌던 공동체적 의식과 협동의 정신이 그 시대의 시민적 연대의식과 결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우연히 충남지역 마을굿의 현재 현황을 기록한 자료를 본 적이 있다. 그 기록에는 현재도 많은 지역에서 마을굿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참여자는 소수의 사람들뿐이고 행사 규모도 대단히 축소되어 있어 마을굿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마을굿이나 공동체적 행사는 우리의 농경문화가 만들었던 사회적 현상이었다. 생활의 형태가 바뀌었고 마을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과거 형태의 민속이 유지되기는 어렵다. 다만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만 보존회를 통해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의 민속문화가 마을의 유대와 자주적 정신을 대변했듯이, 민속문화의 상실은 농촌의 공동체가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나게 한다. ‘사라져가는 것들과의 만남’을 위하여 새롭게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전남 지역의 돌장승을 보러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간간히 열리는 민속행사를 찾아봐야겠다. 대학 시절 <은산별신제>를 보러 시외버스를 타고 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에는 어떤 이유였는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때의 열정과 현재의 경험을 결합시켜 우리의 민속을 만날 시간이다. 사라져가는 우리 시대의 남아있는 것들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하여.....
첫댓글 - 풍속, 풍습, 민속, 민예, 전통....... 예전이나 지금이나 돈벌이가 되면 살아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