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병관 통영12공방 전통공예품전시판매장1
세병관으로 올라가는 일일회원2
통영 문화동 벅수(중민7호).統制使以下皆下馬碑3
벅수(장승)는 나무나 돌의 상부에 신장상이나 귀면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고 하부에
신장명이나 이정을 새긴다.이 돌벅수는 마을의 전염병이나 액운을 막기위한 비보장승으로
동남방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광무10년(1906년)세병관 입구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채색장승으로 요물스런 귀신을 막아내는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높이는 198cm 둘레는160cm 정도이다.
統制使以下皆下馬碑는 통제사이하 벼슬아치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을지닌 비이다.
三道大中軍衙門4
외삼문인 望日樓(세병루)(종루)5
광해군3년(1611년) 우치적(10대)통제사가 세웠으며 영조45년(1769년) 이국현(128대)
통제사가 화재로 소실된것을 다시 세웠다.일명 세병문이라고도 하며 통행금지를 알리는
큰종이 있어서 종루라고도 하였다.소실된 것을 다시 2000년에 중건하였다.
삼도수군통제영(사402호)(사인보드)6
1604년에 설치되어 1895년 폐영될 때까지 전라.충청.경상 3도 수군을 지휘하던 본부였다.
임란 때 이순신장군이 제1대 통제사로 임명후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최초의 통제영
이다.정유재란후 여러곳으로 옮겨져 있다가 두룡포에 자리를 정했다.1604년 이경준(6대)
통제사후 홍남주(209대)까지 290년간 조선수군의 총본부였다.1998년 복원계획으로 운주
당.백화당.병고.중영청.산성청.12공방 건물들을 복원했다.
수항루(受降樓)7
수항루는 2층누각으로 통영성 남문밖에 위치하였는데,임진왜란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서 숙종3년(1677년) 윤천뢰(58대)통제사가 건립했다. 이곳은
봄가을 군점(수조) 때 모의 왜병으로부터 항복받는 행사를 거행해 왔다.
해안매립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어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세병관의 출입문인 내삼문 지과문(止戈門)8
석인(石人)9
숙종27년(1701년) 류성추(77대)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과정에서 석인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시삽석통(旗揷石桶).두룡포(통영의 옛이름)기사비(頭龍浦記事碑)10
세병관 앞 뜰에 영기와 장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고정하는 커다란 두개의 돌기둥으로
정조10년(1786년) 류진항(142대)통제사가 세웠다.원래는 두기가 있었으나 현재서쪽1기만
남아있다.
두룡포기사비(유112호)는 두룡포에 통제영을 설치한 이경준(6대.9대)통제사의 치적을 기
록한 이경준사적비로 인조3년(1625년) 구인후(19대.25대) 통제사가 세웠다.두룡포는 작은
포구였으나 요충지가 되었다.비신과 머릿돌로 구성되었고 비문은 박홍미(창원대도호부)
이 비석은 원래 통제영 영문자리에 있던 것을 190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통제사비군11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놓은 것을 말한다.표제도 송덕비.추사비.거사비
사적비.불망비.타루비.유애비.선정비 등으로 다양하다.
통제사김공휘영수타루비(統制使金公諱永綬 墮淚碑)12
타루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사람 양호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에서 인용하였다.김영수공은 140대(1786.01-1786.07)
통제사로 6개월만에 순직하였다.타루비 하나로 보드라도 당시 통제사공에 대한 애뜻한
마음을 짐작할 수가 있는 타루비로 정조10년(1786년)에 건립되었다.
洗兵館(국305호)13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로 이경준(6대)이 통제영을 옮겨운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김응해(35대)가 1646년 규모를 크게하여 다시지었으며 채동건(194대)이 1872년 다시 고쳐지
었다.정면9칸.측면5칸의 9량구조 단층팔작집으로 경회루.진남관과 더불어 조선건축물 중 바
닥이 가장 넓은 건축물이다.세병이란 挽河洗兵에서 따온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
라는 뜻이다.세병관 현판은 徐有大(137대)가 쓴글씨이다.
본영군은 통제사가 제반의전을 치르던 중심영역으로 통제영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전면에 내삼문인 지과문.외삼문인 망일루.백화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뜰안에는 석인.기삽석통
이 있고 좌측에는 백화당과 잉번청이 자리하고 있다.
徐有大(137대 통제사)가 쓴 글씨14
세병관 내부벽화15
세병관 내부벽화16
세병관 내부벽화17
세병관 내부벽화18
세병관 내부 괘궁정(掛弓亭)19
운주당(運籌堂)20
운주당은 인조23(1645년) 이완(21대)통제사 때 경무당과 함께 창건하였다.
운주는 운주유악지 중에서 나온 말로서 군막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말이
니 즉 통제사가 통제영에서 군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운주당21
운주당제영 함안총쇄록 발췌(안)
신거장곤공무보(身居將곤功無補)몸이 장수직책에 있으면서 나라에 도움을 줄 티끌
어연애구송교서(於捐埃口誦敎書)만한도움도 없고 입으로만 글을 외워 가르쳤네.
면유참췌어군여(面有참悴於軍旅)얼굴엔 군대생활에 대한 부끄러움이 많은데.
운주당주련 함안총쇄록 발췌(밖)
분성주잡용청잠(紛城周잡聳靑岑)통영주변에는 푸른산들이 높이 솟아있고
간간수죽우송림(間間脩竹又松林)산마다 긴소나무 송림이 가득하네
만호생가춘기난(萬戶笙歌春氣暖)집집마다 젓대소리에 봄기운 따뜻한데
일정시화우성심(一旌詩話雨聲深)한깃발아래서 공부하는 소리 빗소리에 잠기네
부지후회장하지(不知後會將何地)장차 어디서 만날지 모르지만
원견제공시일심(願見諸公是日心)모두가 충무공의 충심을 보길바라네.
내아군은 통제사가 업무를 보던 영역이다.영내 중심에 자리하며 세병관 동쪽에 위치한다.
여기에는 운주당과 이순신장군의 영당이자 관사인 경무당.우측으로 살림채인 내아가 자리
한다.지방의 관아는 공적공간과 사적공간(내아)이 공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경무당(景武堂)22
인조23년(1645년) 이완통제사 때 지은 통제사의 작은 집무실로
경무당은 이충무공의 뜻을 크게 우러러 본다는 뜻에서 연유한 것이다.
득한당(得閑堂)23
휴식을 얻는 곳이란 뜻으로 통제사가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이곳부터는 후원군으로 통제사가 휴식하면서 자연을 조망관조하고 연회나 시회를 하는 장소이다.
득한당.읍취헌.육의정.의두헌 등의 정자들이 주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유실수와 화목류가 심어
져 있는 곳이다.
읍치헌24
읍취헌은 통제사가 풍경을 조망하며 휴식을 취하던 정자이다.
읍취헌25
의두헌(依斗軒)26
순조5년(1805년) 류효원(153대)이 건립한 정자이다.
육의정(六宜亭)27
정조18년(1794년) 이득제(148대) 통제사 때 세웠던 작은 정자이다.
담장과 황간발과 육의정(위의 정자)28
주전소29
통제영 주전소 유구는 조선시대 동전을 만들던 곳으로
국내 최초로 조선시대 화폐인 상평통보와 도가니.화로 등이 출토되었다.
활터30
활을 쏘면서 심신을 연마하던 장소로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우물터와 You31
포토존장소32
통영항.시민문화회관.동피랑.동포루.미륵산.서포루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패부방(貝付房)33
자개를 붙여 나전제품을 만들던 곳으로
국가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기능보유자(송방웅).전수조교10호(양옥도)가 활동하고 있다.
상자방(箱子房)34
버들나무 등을 엮어 상자를 만들던 곳이나 현재는 염장(대발)공방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염장기능보유자 조대용(114호)이 일을 하는 공방으로 염장이란 발을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화원방(畵員房)35
각종지도 및 군사적 목적의 의장용 장식화를 그렸던 곳이다.
총방(총房).입자방(笠子房)36
총방은 말총을 엮어 망건.탕건.유건 등을 만들던 곳이며
입자방은 흑립이나 벙거지.삿갓.패랭이 등을 만들던 곳이다.
공내헌(工內軒)37
공내헌은 공방을 관리하던 공감의 집무실을 말한다.
12공방은 제반군기와 진상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백화당 서쪽에 자리하며 조직적인
분업의 군영공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1593년 이순신이 한산진에서 시작했으나
임란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다양한 생활용품을 생산하였다.
화자방(靴子房).안자방(鞍子房)38
화자방은 신발을 만들던 곳이고 안자방은 말안장을 만들던 곳이다.
소반장 기능보유자 추용호(99호)가 일을 하던 곳이며
식반.반상.식상으로 불리는 음식을 처려먹는 상을 말한다.
석수조39
물을 저장하여 자개 등을 갈고 닦는 등의 작업을 하던 곳이다.
백화당(百和堂)40
선조36년(1603년) 이경준(6대)통제사가 건립하였다.중국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를 맡았고 지방장관이 임명했다.
느티나무41
둘레는 5m로 수령은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통제영 창건당시 심어졌다고 전해진다.
1865년 제작된 통영의 고지도42
잉번청(仍番廳)43
잉번청은 숙종14년(1688년) 이세선(66대) 통제사가 건립했으며
통제영 공방의 건물이나 물건 등을 지키는 사람이 근무하던 곳이다.
산성청(山城廳)44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했던 곳으로 숙종44년(1718년)
오중주(83대) 통제사 때 건립했으나 소실된 것을 최근에 중건하였다.
좌청(左廳)45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던 곳으로 대변좌청이라고도 하며
1689년 신여철(54대) 통제사가 좌청과 우청으로 분청했다고 한다.
(2017.07.08)
첫댓글 올 한 해도 국내이지만 여러 곳을 다녀왔네. 그기다가 사진을 올리면서 세세한 낸용까지 올려 놓은 카페 운영은 자네 만큼 잘하는 카페는 없는 줄 안다네. 그간 수고 많았고 새해에도 더욱 여행을 꾸준히 하고 좋은 내용 많이 올려 놓기를 기대하네. Happy new year!
타루란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로 난 충무공 타루비만 있는 줄 알았는데,통제사 김영수라는 분의 타루비도 봤다네~연유는 부임후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진중에서 사망했던 모양일세~그래서 애도를 했는 것 같아~무술년에도 늘 행복하고 건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