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위의 책은 이덕일씨가 이회영을 아나키스트의 관점에서 저작하였고
우측의 하늘색 표지의 책은 배재수와 유문기가 중국에 귀화한 항일운동가 이회영에 대하여 썼고 (중국에서 발간된 책)
맨 마지막 책은 김명섭씨가 지위, 계급, 민족, 이념에 매이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적인 인물 이회영에 대하여 쓴 책이다.
책들마다 색깔이 조금씩 다르지만 66세를 살고 세상을 떠난 우당이회영이 남긴 사진이 단 한 장 뿐이어서 인지 맛이 같다.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며 일체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아나키스트 이회영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애를 온전히 복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생몰의 연대를 확실하게 알고 있고 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과 기억들이 있기에
그의 독립에의 의지와 신념,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을 알 수 있다.
우당 이회영의 전기들은 아직도 그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나의 의문을 밝혀주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알게되리라 기대하며
그의 연보를 정리해 본다.
1867년 4월 21일 서울시 중구 저동(명동성당 일대)에서 이조판서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출생.
1885년 ~ 1890년 : 신흥사에서 이시영, 이상설, 이동녕등과 함께 신학문 서적을 탐독.
1894년(28세) :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겪으며 나라의 앞날에 대한 염려.
1895년 ~ 1901년 : 구국운동과 인재 양성을 위해 재정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목재 사업과 개성 인근에 인삼농장 경영
목재사업도 망했고 인삼농장도 일본인들의 농간으로 망함
1901년(35세) : 인삼농장사건으로 일인을 고소하고 법정투쟁을 벌려 승소. 고종으로 부터 탁지부 판임관으로 임명받았으나 사양.
1905년 (39세) : 상동파 동지들과 을사조약 파기운동 전개, 을사오적 암살 모의 실패,
1906년 (40세) : 이상설, 이동녕, 정순만, 여준 등과 함께 해오독립운동기지 설치 계획 수립, 용정 서전서숙 설립에 참여.
1907년(41세) : 상동교회 상동학원 학감 취임, 헤이그 밀사 파송을 고종에게 건의,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파송케 함.
전덕기목사. 양기탁, 이동녕, 이관직, 김진호 등과 함께 신민회 조직.
1908년(42세) :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상설을 찾아가 독립운동 정책 논의, (교육, 실력 양성, 비밀결사, 재정확보)
신민회 산하에 근대식 학교를 세우고 교사 파견, 상동교회에서 이은숙여사와 재혼, (한국최초의 신식결혼)
1910년(44세) : 이동녕, 장유순, 이관직과 남만주 시찰, 독립운동기지 구상, 한일병탄 후 서둘로 6형제가 집단 망명.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
1911년(45세) : 추씨들의 고발로 추방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원세개의 조선인 첩을 통하여 원세개를 면담하고 토지와 거주의 문제를
해결, 통화현 합니하로 일부 망명자 이동, 대회를 열어서 경학사를 세우고 초대회장에 이상룡 추대.
1912년 (46세)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 설립, 이석영 교주, 이철영 교장 선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에 패쇄될 때까지 독립군
양성(3500명의 독립군 배출)
1913년(47세) :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귀국
1915년(49세) : 일경에 연행되었으나 곧 바로 방면됨
1918년( 52세) :고종 망명계획을 주도, 고종의 서거로 좌절됨.
1919년 (53세) : 고종의 국장을 계기로 대규모 독립선언 계획, 거사 직전 북경으로 망명, 상해로 가서 임정수립에 참여를 했으나 내분에
북경으로 돌아감.
1922년( 56세) : 북경에서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 등의 아나키스트들과 만남, 러시아 아나키스트인 예로센코의 '행동하는 자유주의'에 참
여, 신채호, 감창숙도 참여, 중국의 노신, 대만의 범본량과 연대.
1923년 (57세) : 중국인 진위기의 제안으로 이을규, 이정규와 함께 중국 호남성, 한수현 횡도촌에 이상촌 건립을 추진했으나 좌절됨.
1924년 (59세) :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등과 함께 "재중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 「정의 공보」발간, 신흥학우단 결성,
김창숙, 유자명, 김원봉, 신채호 등과 의열단 후원.
1925년 (59세) : 조카 이규준, 아들 이규학, 이성춘 등 신흥학우단이 중심이 된 다물단 조직, 일본의 고등밀정인 김달하 처단.
1927년 ( 61세) : 상해노동대학 설립 추진.
1928년 (62세) : 상해에서 열린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 운동」제목의 글을 보내 논문의 취지가 대회
결의안으로 채택됨,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에 「탈환」축시 기고, 또한 「동방」창간호에 묵란을
그려서 보냄.
1929년(63세) :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 김좌진의 친척인 김종진의 권유로 '재만한족연합회'와 함께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시도.
1931년 (65세) : 남화한인연맹 결성, 기관지로「 남화통신」 발간, 항일구국연맹결성 ( 정화안, 백정기, 김성수, 중국인 왕아초, 화균실,
일본인 사노, 이토 등 참여) 흑색공포단 조직.
1932년 ( 66세) : 흑색공포단 일본기선 폭파, 천진영사관 폭탄 투척, 중국국민당 이석중, 오치휘, 호한민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고 무토대장을 암살하고자 북행을 결심.
만주에서 항일의용군 결성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하고 대련으로 이동, 대련에서 수상경찰에게
체포. 모진 고문으로 여순 감옥에서 순국.
연충렬과 이태공이라는 밀정의 고발로 일경들은 그의 행적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딸 규숙이가 여순 감옥에 가서 부친의 시신을 확인하였는데 옷에 피가 묻어
있었으며 얼굴에도 핏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화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가지고 황해도 장단으로 들어가서 이회영의
장례식은 장단에서 거행되었다.
우당 이회영의 생애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자료가 발굴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측에서 많은 자료가 발굴되어서
이회영이 마치 머리로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글들이 속히 극복되고 지양되길 바란다.
전기작가들이 그가 몸 담고 살았던 유하현, 통화현, 북경, 상해, 천진을 비롯한 만주일대를 여행하면 글들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전기작가들에 의하면 이태공이라는 밀정이 이회영의 둘째형의 아들인 이규서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규서는
작은 아버지 이회영이 친히 지도해서 조직하고 친형 이규준과 사촌형 이규학이 행동대원으로 있는 다물단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된다. 이 엄청난 비극을 어떻게 해석하고 감당해내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슬프고 아프다.
중국에서 나온 이회영투사의 일대기에 보면 한국세서 발간된 책에 나오지 않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그 중에 이규일이라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가들의 노력으로 밝혀야 하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