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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소설가협회에서 발간한 "소설로 읽는 하동" <하동과 전설, 그리고 소설>에 수록된 소설가 박주원 회원의 단편소설 "돌, 만 점"을 올립니다.
단편소설 돌, 만 점 박주원
이 이야기는 지방 신문의 기자 생활을 할 때 ‘이명산 전설’을 취재하는 도중에 얻었던 정보를 정리한 기록이다. 하동 북천면과 진교면의 경계에 이명산이 있다. 이 산은 ‘이맹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옛날에는 동경산이라고 했다. 동경산은 신라 서울인 경주의 비산인 까닭이다. 산의 이름이 바뀌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먼저 수집하였던 이명산에 얽힌 전설부터 적어보기로 한다. 이명산은 원래 동경(경주)의 비보산이었는데 이 산 정상에 있는 못에는 이무기가 살았다. 어쩌다 한 번씩 심술 난 이무기가 독기를 뿜어내면 독기를 맞은 방향의 주민들이 맹인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무기에게 제물을 바치고 치성을 드렸지만 소용이 없어 태산 같은 걱정을 안고 살았다. 어느 핸가 이무기가 쏘아 보낸 독기로 임금님과 공주가 눈이 멀고 말았다. 영문 모르는 임금님은 어마어마한 상금을 걸고 전국의 유명한 의원을 청해 들였다. 그 가운데 어느 도인이 이맹산 이무기의 짓인 것 같으니 이무기를 무찌르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했다. 임금님의 명을 받은 신하들과 마을 주민들은 도사가 시키는 대로 불에 달군 많은 돌로 못을 채우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물에서 견디지 못한 용은 진제하 심연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무기가 이맹산에 서 옮겨간 후에는 공주도 눈을 뜨고 맹인이 생기지 않아 이맹산은 다시 이명산(理明山)으로 개칭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명산 달구봉에는 돌이 불에 달궈져서 녹아 붙은 형상을 볼 수 있어 이명산의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뒷받침 해주고 있다. 또 이명산의 용이 옮겨가 승천을 하기 위해 사다리를 놓았다하여 민다리(용다리)라 하였고 민다리 뜻을 한자로 표기하여 진제, 또는 진교(辰橋)라고 하였다 한다. 그 이명산 자락에는 ‘만점’이라는 동네가 있고 그 너머 북천 쪽 자락에는 사람살이가 태양빛을 쏘이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쏘이면 야사가 된다는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문학관이 있다. 지금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도 내가 입수한 사진 한 장을 참고하지 않으면 야사나 전설이 될 확률이 높다. 지인이 제공한 사진 속에는 갓 쌓은 돌탑 하나가 산밭을 배경으로 오뚝하게 서 있었다. 돌탑이라면 대뜸 여러 사람들의 비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성황당의 이끼 낀 검은 돌무더기를 연상하는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 사진 속에 담긴 새 탑이 안고 있는 개인적인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몹시 궁금증이 부풀었다. 사진과 함께 손에 쥔 주소를 들고 찾아 간 곳은 머잖아 개발 바람이 불 것 같은 도시의 한적한 변두리 마을이었다. 하고 있던 손빨래를 멈추고 나를 맞이하는 중년 여인은 너무나 소박해 보였다. 방문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을 때 그녀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하는 눈치를 보였다. “여사님 저는 기잡니다. 호기심을 못 참는 성미도 저희들 사이에는 정평이 나 있고요.” 아예 빨래대야 옆의 시멘트 구조물 턱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언구럭을 댔다. 여인은 모면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린 것을 인지한 양 젖은 손의 물기를 털면서 대문을 향해 앞장을 섰다. 골목 끝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음료수 캔 두 개를 산 여인은 백여미터 떨어져 있는 기찻길로 나를 안내했다. 녹슨 기찻길 옆으로 연이어 있는 손바닥만큼씩한 채소밭에는 주인의 부지런함을 자랑하듯 짓푸른 남새들이 소복소복 밭둑을 넘치고 있었다. “그런 일로 이렇게 찾아오는 양반이 있다니, 참 부끄럽습니다.” 캔을 건네던 여인의 눈길이 내 손에 들려있는 사진에서 멈칫하며 꺼낸 첫마디였다. “다 알고 왔으니까 너무 겸양하지 마세요. 자식을 위해서 모든 부모들 열심히 기도들 하잖아요. 그걸 왜 굳이 그렇게 부끄럽다고 하시는지 무슨 깊은 뜻이라도 있으신지?” “아는 이들은 그렇게 말했지요, 남의 속도 모르고-.” 여인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더니 좀체 얼굴을 바로 들지않았다.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말뚝처럼 신중하고 진지한 인품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소리 없이 음료를 마시는 사이로 침묵이 같이 흘렀다. 손가락으로 캔의 표면에 어린 물방울을 지우고 있던 여인의 음성이 마치 벽을 넘어 온 소리 같은 정제된 낮은 음으로 건너왔다. “기자님은 결혼했어요?” 의외의 질문이었지만 나는 상대방이 자신을 열기 좋은 편안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말하기 곤란한데요. 어미의 신명을 이해 못할 이한테 괜히 욕만 먹기 쉬워요.” “결혼은 안 했고 직접적인 신앙 경험도 어릴 때 친구들이랑 교회에 다녔던 것밖에 없지만 어느 정도의 상식은 있어요. 어떤 글에서 읽었는데 어느 섬에 사는 여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을 조사해 보니 무려 일만팔천이 넘는 신을 숭배하고 있더래요. 그래서 저도 저의 다종교에 대한 호감을 스스럼없이 말하곤 해요. 그런 밑바탕 때문에 여사님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접근하기 훨씬 수월했죠. 요즘 같은 과학 문명 세상에서 더구나 도시에 주소를 둔 분의 기원 형태치고는 호기심 자극제가 충분하잖아요? 이 탑.”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던 여인의 표정이 바뀐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여인은 예의 그 차분하고 부드러운 음조를 회복한 다음 대화를 가질 준비가 되었다는 뜻으로 느껴지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다 듣고 오신 것 같으니까 달리 숨길 건 없지만, 우리가 올리는 많은 기원의 실체를 곰곰이 되새겨 보면 사실 남을 위한 기도는 없다는 것 하나는 확실히 말해 드릴 수 있어요.” “옛?!” 나는 핀트가 어긋나는 당황한 눈길로 여인의 입을 주시했다. 그 당시 여인의 아들은 이 나라 최고의 시험에 일차 합격을 해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아들의 완전 합격을 기원했을 어머니가 남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았다는 말 아닌가. 곤궁에 빠진 친구를 위해서, 건강이 나쁜 가족을 위해서,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람들이 올리는 새벽 기도나 철야불공은 그럼 어떤 해석을 내려야 될까. 여인의 깊은 사유 속에서 체득된 의미심장한 부분이었다. 의외로 뜻이 통하는 면도 없지 않았는지 여인은 아까 보다 훨씬 격의 없는 음성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기자님의 인연에 대한 견해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저는 인연을 몹시 소중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인연의 끈에 이끌린 그 곳에서 저는 저를 위한 기도를 드린 것뿐이니까 자식을 위해서니 어쩌니 그런 미화된 표현은 제발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그 인연의 끈은 무엇인지 그것부터 들려주세요.” 지금은 탑 모양으로 쌓였던 그 돌무더기도 다른 용도로 모두 해체되고 없으니 한갓 뜬소문 같은 전설이 된 일일 뿐이라며 여자는 더 이상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침묵으로 둘 사이의 경계를 지었다. 나는 돌탑이 찍힌 사진을 매만지며 석상처럼 완강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이따금씩 미안한 듯이 건너오는 여인의 표정을 곁눈질로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함직한 얼마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나는 드디어 여인으로부터 ‘돌 만 점’을 옮겨서 탑이 되게 한 연유를 듣게 되었다. 나는 속기와 아울러 녹음 버튼을 눌렀다. * 다 듣자면 지루할 수도 있는 제 이야기를 다 듣겠다고 작심하고 오신 분이니 시작하겠습니다. 저도 그때는 ‘자식교’에 푹 빠져있던 시기였지요. 말로 표현하면 이해하는 사람은커녕 가족조차도 빙의된 초짜 무당을 보듯 하는 공간에서 단물을 머금은 것 같은 얼굴로 저 혼자 푹 젖어들어 있었던 결정적인 시기가 그때였습니다. 아까 기자님이 말했듯이 나는 도처에 산재해 있는 신들과 같이 살며 그들 사이를 비집거나 헤매기도 했지요. 제가 들은 바로는 인생 전체를 볼 때 전생 차생 후생을 통털어서 한 개인은 삼천불의 옹위를 받으면서 살아간답니다. 신이란 내가 의지하고 싶은 절대의 능력자라고 인정할 때 뜻이 있고 눈길이 머물고 발길이 닿는 곳 어디든 신은 존재한다는 말이겠죠. 저 역시 깊이 공감한 바 있어서 인용하는 바입니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얇디얇은 피부의 한 꺼풀 속에 존재하는 환과 상상 즉, 꿈과 희망이라는 팔구십 프로의 정신세계가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짐짓 간과하면서 사는 셈이죠. 우리가 자고 눈뜨고 먹고 일하는 현실은 사실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겠는데 저는 먼저 인연의 묘한 연결에 대한 운을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제 경험으로 우연은 필연이라는 말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처음, 그 사람 강 여사는 서화당이라는 건재약방 주인으로 나를 맞이했습니다. 내가 모르는 정신세계에 대한 그 여자의 경험은 나를 점점 매료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동갑내기인 걸 안 우리는 두터워진 친근감을 깔고 그 나이에 있을 법한 이런 저런 일상사를 주고받았지요. 그때 나는 아들의 재수 문제를 흘렸고 그녀는 ‘절에 다 한 3개월 쯤 보냈다가 재수학원으로 보내라’는 조언을 했습니다. 자식의 교육에 대한 전문 지식이나 경험도 없이 막막하던 참이라 그녀의 말대로 내가 다니는 절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죠. 그 후 무려 몇 년간 강 여사와는 연결이 닿지 않았습니다. 서화당 간판이 내려진 이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도 다잡아서 알아 볼 어떤 생각도 없이 그저 그런 적 있었던 한때로 묻혀 갔지요. 그런데 2000년 봄 우리는 우연히, 참으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사설이 좀 지루하겠지만 눈빛 한 톨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함의를 인정한다면 한결 누그러진 마음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겁니다. 친구 둘과 함께 다솔사 뒤에 있다고 말만 들은 암자를 찾아가기로 했죠. 그러나 산길 초입에서 우리는 산불감시원들의 제지를 받았습니다. 입산통제가 아직 해지되지 않았으니 자기들 눈길이 미치지 않는 다른 길로 돌아서 가라는 것이었어요. 도리 없이 그들이 손짓해준 곳으로 길을 에둘렀는데 말로 표현 못할 만큼 몹시 헤매었습니다. 집중력이 거의 바닥나 우리가 이 고생을 하며 거기를 왜 꼭 가야하는지 자문하며 멈칫거릴 즈음 마침 숨겨놓았다가 누군가가 꺼내놓은 비밀지도처럼 절 이름이 적힌 손바닥만한 팻말을 발견했어요. 찾았으니 안 만져 볼 수 없다는 심정으로 길을 잡고는 산동네의 마당이 너른 한 집에다 차를 세웠습니다. 이제부터가 내가 왜 인연이라는 단어를 누누이 되뇌는지를 느끼게 될 부분입니다. 산마을 특유의 적요함과 함께 휑하게 넓은 마당 귀퉁이에다 차를 세우고 나오는 우리를 보고 지나가던 동네아저씨가, “그 집 주인이 얼매나 겁나는 사람인데.” 밑도 끝도 없이 간여를 했어요. 주인이 어디 계신데요? 허락이라도 받는 것이 온당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며 묻자, 지금은 집에 없어요, 싱거운 음성으로 건성 대답을 한 아저씨는 건너편 산자락을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집주인이 왜 무서운지를 설명하는 듯 덧붙였습니다. “저기를 봐요.” 별스러운 경각심 없이 우리가 돌린 눈길 속에는 ‘산신각’으로 짐작되는 작은 돌집과 인위적으로 세운 것 같은 커다란 입석, 그 옆에 서있는 긴 장대 끝에서 나풀거리는 태극기가 보였지요. 생뚱스러운 풍경이었지만 산야 곳곳에 존재하는 천신만령의 숭배라 여겼을 뿐 무심하게 발길을 돌려 암자로 향한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와 관계된 장소란 걸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누군가의 싯귀마냥 꽃이 꽃으로 다가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절 구경을 하고 산기슭 양지에서 도시락을 먹은 우리가 동네로 내려오자 아까 그 아저씨가 마치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우리더러 차 한 잔을 하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찻집 간판을 건 남자 주인도 아니고, 순간 우리는 참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주고받았지요. 낯모르는 외간 남자의 청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아저씨는 더 절실해 보이는 순박함으로 자기가 만든 차 한 잔 마시고 가기를 권했고 우리는 아저씨를 대변하는 진득한 그 무엇을 뿌리치지 못하고 멈칫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이에 아저씨는 자기가 손수 만든 차라며 벌써 찻물 끓일 준비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순수한 인정을 거절하고 떠나면 우리만 매몰차고 비인간적인 사람이 될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고향 친지의 대접을 받는 것처럼 경계심을 풀고 차를 마시는 동안 아저씨는 담장가에 열린 잘 익은 앵두를 맛보라며 따다주기도 했습니다. 예정에도 없는 시간을 엉뚱한 곳에서 제법 보냈습니다. 처음 만난 낯선 아저씨로부터 차 대접을 받은 이상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차를 세워둔 곳으로 내려왔지요. 마침 아까는 없던 집주인 여자가 농기구를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를 곁눈질하고는 자기 일을 하려는 여자의 어딘가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어렴풋해진 옛날 기억을 되돌리며 말을 걸어보았지요. “혹시 서화당?” 내 음성을 접한 여자의 얼굴이 갑자기 내가 던진 팔매를 맞은 듯 반짝 들렸습니다. 아, 맞구나! 나야 갑장. 오오, 갑장! 무려 팔구 년 만의 조우였지만, 마치 백년지기를 만난 듯 단절되었던 토막정이 돈독하게 둘 사이에서 회복되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여자는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몇 년 동안 이곳으로 와서 자기가 이룬 업적이라면서 아까 이웃집 아저씨가 손짓해 보였던 건너편으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어릴 때 소풍을 와서 단 한번 본 곳인데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향수처럼 머리에 인이 박혀 있어 이곳으로 오자 오랜 방랑자가 고향에 돌아와 안착을 한 것처럼 그렇게 맘이 편할 수가 없어. 내 죽기 전에는 이곳을 안 떠날 거야. 터가 이렇게 넓은데 이걸 나혼자 힘으로 되나. 우련히 힘이, 기운이 모여서 되는 기제. 나는 여기서 이루고 싶은 꿈이 많아. 이루고 싶은 역사가 있다고. 지성으로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 갑장아, 저 산 위를 봐라. 팔공산 갓바위가 있지만 그건 인공으로 만든 거 아니가. 글치만 저것은 자연으로 된 탑이다.” 그의 설명을 듣는 동안 나는 이미 이상한 전율로 두근거리는 심장의 동계를 느끼고 있었지요. 비로소 생판 모르는 아저씨로부터 차 대접을 받으면서 우리가 시간을 보낸 것도 예사롭지 않은 사건으로 다가왔고요. 우리의 극적인 만남을 위한 기막힌 연대 맞추기인 것으로 그 지체의 순간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는 건성으로 보았던 국기 게양대가 확대되어서 다가왔습니다. 더구나 강 여사 그녀가 세운 국기였으니까요. 얼마 전에 내가 꾸었던 꿈과 어찌 이리도 일치하는 상황인지 꿈에서 본 장면도 되살아났습니다. 높은 기둥 위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데 맨눈으로는 식별이 잘 안 돼서 장치된 확대경으로 확인된 것은 커다란 국기였지요. 국기를 건 한 청년이 내려왔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건장한 상체가 목욕이라도 한 듯 온통 땀에 젖어 번질거렸지요. 물론 그 꿈의 해몽은 내 아들의 노력이 장한 성과를 이루는 예지몽으로 강한 최면을 걸어놓은 상태였고요. 그 꿈의 현장이 바로 여기였던 것입니다. 산불지기로부터 거부당해서 길을 에두른 것도, 만남의 시간을 아귀 맞추기 위해 낯선 아저씨의 차 대접을 받은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하루가 신령스러운 어떤 조화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 것입니다. 아아, 이런 기이한 일도 있구나. 나도 몰래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했습니다. 짐작하겠지만 그 즈음 나의 나날은 기원으로 지고 새는 일상이었습니다. 이름 있는 산봉우리나 깊은 용소를 찾아다녔고 영험 있다는 소문을 들은 곳이면 어느 곳 어느 대상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 간절한 염송을 올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꿈도 여럿을 꾸었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 그 가운데 지워지지 않고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는 꿈을 말합니다. 첫 번째 꿈입니다. 아들이 몇 번이나 낙방을 하는 바람에 덧없는 희망에 매달려 고생만 시키는 게 아닌가, 아들이 안쓰러워 질 때입니다. 겨울인가 봐요. 잔디가 노랗게 퇴색한 무덤에서 자전거 길 두 줄기가 비롯되어 흘러 간 자국이 보였습니다. 노력 여하로 좌우될 수 있게 길은 아직 막히지 않았다는 증거겠지요. 조상의 도우심으로 길이 열리려나 보다, 무척 위안이 되었고 흩어진 집중력을 다시 수습하는 용기가 되었지요. 두 번째는 또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집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집 옆 골목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런 말소리가 들렸어요. ‘이 집이 그 집 아니가’ 제가 넘겨다보니 그들이 가리키는 이 집이란 바로 저의 집이었어요. 다시 그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저기 저거 봐라, 대문이 더들덜덜 떨리지? 저게 운 들어가는 거 아니가. 그 순간 정말 저희집의 잠긴 대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어떤 흔적으로 대문이 달달달 흔들리고 있는 것이 제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습니다. 예지몽은 간절한 자기최면으로 이루어진다는 심리학자들의 말도 있지만 저는 그 꿈을 믿고 현실화될 그 꿈을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을 찾기로 했던 것입니다. 지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그 때 그 재수생 아들은 지금 어찌 지내느냐고 강 여사 그녀가 물었습니다. 나는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고요. 내 말 끝에 그녀가 아주 힘찬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물건 하나 만들어보자. 기도하면 된다.” 그렇게 ‘만점’에서의 기도는 시작되었지요. 마지막 시험이라 각오한 이차 시험 날 나는 강 여사와 같이 만든 제물을 산신각에다 차려놓고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6월 넷째 주, 나흘간의 이차 시험 첫날은 그날따라 비바람이 몹시 거칠게 대지를 뒤흔들었습니다. 비안개로 가려진 앞산의 탑을 보려고 눈을 부릅뜨고 평소에 외우던 대로 어미의 업보를 소멸해서 아이에게 ‘정답 명답’을 쓸 수 있는 맑은 기운을 달라고 빌었습니다. 저로 인해 아들의 앞날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어미의 죄업이 얼마나 크냔 말입니다. 그런데 참 기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산신당 지붕 한편의 빈틈에서 비명 소리 같은 괴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거였어요. 산신당의 지붕에 덮인 찢어진 부직포와 비닐막이 바람에 마구 펄럭이면서 내는 을씨년스럽고 산만한 소리 속에 뒤섞여서 그 소리는 흡사 귀신의 흐느낌이나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요새 세상에 이런 낮 시간에 그럴 리 없다고 부인했지만 기도처라고는 절의 정갈한 법당이나 교회당밖에 달리 생각해 본 적 없었으므로 처음부터 이런 음습한 돌집에 꿇어 엎드려서 기도를 드리는 일은 낯설고 서먹하던 참이라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까 인가에서 온 개와 고양이가 지붕 뒤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고 그것들이 어울려서 내는 소리라는 걸 짐작하면서도 찢어진 지붕으로 우르르 흘러내리는 빗물과 흙덩이와 바람까지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그 괴기스러운 소리는 닫힌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을 만큼 무섬증을 고조시켰습니다. 조금만 더 그 무섬증에 휘둘린다면 필경 그곳을 박차고 나가고 말 것 같은 순간 나는 지금 내 자식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중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각인시키려고 애썼지요. 저것은 필경 악령을 보내서 나를 시험하려는 신의 의도인 거야. 여기서 내가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안 돼. 악령에 맞서는 담대함을 가져야 한 다. 어미의 능력을 시험하려 한다면 나도 응당 그 시험에 합격을 해야 지금 이 순간 시험지와 맞싸우고 있을 아들에게 큰 기운이 전달될 것 아닌가. 나는 그 소리들을 무시하면서, 아니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열심히 절을 하고 또 했습니다. 딱딱한 황토로 다져진 밑바닥에 무릎이 부딪칠 때마다 통증이 파고들었지만 염주를 헤아리며 백배 이백 삼백 사백……. 시험이 끝나는 시간까지 멈추지 않고 절을 했습니다. 시험이 끝나는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오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치미 떼고 하늘은 말짱 개어 있었습니다. 어미의 기도를 잘 받아들인 표시인 것 같은 해석으로 날아갈 듯 심신도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0.00 얼마라는 차이로 또 실패를 했습니다. 지팡이도 밧줄도 없이 아이를 등 떠밀어 생고생을 시키는 것 같은 안쓰러움으로 통곡이 절로 터뜨려졌습니다. 다시 칠전팔기라는 말에 단단히 매달렸고 또 그 말처럼 우리에게 희망적인 화두는 일찍이 없었던 인내의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전국의 수재들을 이런 제도에 묶어두는 것은 국가적인 손해라는 여론도 심심찮게 매스컴을 오르내렸으니까요. 이제부터 기자님이 듣고 싶은 돌탑에 대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마지막 이차 시험을 앞둔 일월 달부터 매주 화요일이면 우리는 목표한 ‘돌 만 점’을 나르기 위해 이명산 밑으로 갔습니다. 왜 하필 ‘돌 만 점’을 나르기로 했느냐고요? 일월 일일 첫날 해맞이를 한 후 같이 떡국을 먹는 자리에서 우리가 올린 화제는 제 아들이 올해는 꼭 시험을 끝내야 할 텐데, 였습니다. 그때 같이 걱정하고 있던 강 여사가 이런 말을 하는 거였어요. “바깥 선생님이 기가 좀 약합니다.” 가슴이 덜컥했지요. 아들의 합격 기운을 위해 온 가족이 힘을 다 모으고 있는데 정작 수장인 아버지의 기운이 기울다니요. 약한 기운을 보강하는 것이라면 단단하고 힘센 무엇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 힘으로 구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걱정이 태산인 채 돌아오는 길에 언뜻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언젠가 강 여사가 성지를 조성하는데 무한정의 돌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없는 돈을 마련하는 억지를 부린들 과연 몇 차떼기나 돌을 실어 날라야 아버지의 기운이 보강되어 그 기운은 또 아들의 합격점으로 이어질 것인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이런 것이 기도의 참 모습이 아닐까 싶은 한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곳에 필요한 돌을 날라보자. 돌의 단단함은 아이 아버지의 약한 기운을 보충하는 의미도 되지 않을까. ‘만점’인 이곳 지명대로 아들이 ‘만점’ 답안을 낼 수 있도록 돌 만 점을 날라보자. 마치 우리를 위해서 숨겨진 비의를 바로 찾아낸 것이 아닐까, 발굴된 아이디어가 너무도 신나고 벅차게 여겨졌습니다. 다행히 만점의 산기슭에는 흘러내린 형국으로 즐비한 돌너덜이 여럿 있었습니다. 길 밖에서 길을 찾지 말고 장소 아닌 곳에 서 장소를 찾지 말자는 가난하고 간절한 기원이었습니다. 남이 들으면 상식으로 이해 안 되는 치기스러운 발상이라 실실 웃었을 지도 모르지요. 남편 역시 처음에는 쉽게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부를 대신 해줄 수도 없고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줄 재정적인 능력도 없습니다. 아들도 부모인 우리도 우리들 스스로가 꼭 해내야만 살 수 있는 막다른 길에 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우리의 활로는 아들의 합격으로 열리는 것이 순리이고 꼭 그래야지만 합심해서 걸어 온 이제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것 또한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아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건강을 위한답시고 일없이 등산도 다니는데 우리의 건강을 위한 운동도 되고 자식을 위한 가장 절실하고 잡념없는 기도도 실행하는 셈 아니냐는 끈질긴 설득으로 우리 부부는 드디어 마음을 합쳤습니다. 우리는 이차 시험이 끝나는 날까지 어려운 공부를 같이하고 시험 답안까지 같이 푸는 심정으로 돌을 나르기로 했습니다. 성장에너지가 충만한 화요일을 작업하는 날로 정하자 남편은 육 개월 간의 화요일 날마다 우리가 하루에 날라야 할 작업 개수로 돌의 숫자도 대략 편성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설픈 지게질과 임질로 돌을 나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많고 많은 게 돌이지만 무게나 모양에 따라서 선택이 되고 버려지는 돌도 있었구요, 무게 또한 섣불리 접근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하루 백 개의 돌을 나르면 최소 일 킬로그램의 돌을 열 개만 지거나 머리에 이고 산 밑으로 내려와도 온 몸이 흔들거리며 어깨도 머리통도 몸속으로 박혀드는 통증을 감내해야 합니다. 게다가 책상물림인 남편은 지게를 지는데 익숙할 리 없었지요. 돌짐을 지고 엎어진 남편의 온 몸은 멍자국으로 문신이 됐고 두 다리는 딱지 떨어진 데서 다시 피가 흘러 상처투성이가 됐습니다. 하지만 특유의 근면성을 가진 남편은 이왕 시작한 일이라 열심히 묵묵히 여자인 나보다 더 많은 돌짐을 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일을 제의한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식의 성공을 비느라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힘들게 한다는 송구함으로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지금 우리를 내려다보며 짓고 계실 표정이 내심 마음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만 점의 돌을 다 나르고 나면 합격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도 보탬이 돼서 마음먹은 일이 꼭 성사될 것이라는 믿음만은 흩뜨리지 않았습니다. 날라 온 돌을 하나둘 모아 놓다보니 둥그렇게 모양이 나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텃세를 부리는 일도 있었지만 천지간에 모습을 드러낸 우리들 기도의 가시적인 흔적에 우리 자신도 무릇 새 힘을 일깨워 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신을 감동시키려면 사람부터 감동을 시켜야 한다는 기도의 본질을 깨달았습니다. 신은 육안으로 보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있다는 사람에게는 있고 없다는 사람에게는 없는 게 신이라는 것이 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겨울의 찬바람을 피해 언덕 밑에서 점심밥을 먹으면 따뜻한 국을 줄까 차를 끓여다 줄까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고 은근히 퍼져나간 소문을 듣고 우리를 유심히 살펴보는 시선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노인은 탑이 되네, 탑이 되네, 저 탑을 보게, 하면서 부모 된 자의 가없는 자식 사랑을 이웃에게 본보기로 전했다는 격려의 말도 해주었습니다. 기원의 돌덩이를 나르러 가는 날이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고개 숙인 심정으로 다리 아픈 이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듯이 우리의 기도를 한 걸음 한 걸음 새겨나갔습니다. 기도란 정하고 맑고 밝은 심신으로 자신의 위치에 착좌하는 거였습니다.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듯이 흔들리지 않은 자세로 부모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다시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건강에너지를 자식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어미 된 저의 역할이며 기도의 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 거기까지. 나는 여인의 말을 경청하는 동안 인터넷에서 읽은 ‘모성과 자아’에 대한 근거 불확실한 정보를 지워나갔다.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어 머릿속의 기억을 날려 보내는 동안 먼 풍경으로 보이는 그림 한 장을 다시 채워나갔다. 자식의 합격 기원을 몸 바쳐서 실행하는 부모가 등짐을 지거나 머리에 이고 ‘돌, 만 점’을 나르는 모습이다. 장돌뱅이 보부상도 아니면서 정해진 날마다 열심히 이고 지고 돌을 나르는 이들 부부의 행동을 눈여겨 본 사람들은 그곳을 지날 때면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기억 속에서 펼쳐볼 것이다. 그리고 풍문으로 떠돌던 그 모습은 어느덧 조금씩 전설이 될 것이다. 그곳에 돌탑이 해체되어 만들어진, 줄 늘어서 있는 긴 돌담장과 함께. * * [작가 노트] 이명산에 서린 돌 만 점의 전설
산책을 다니는 산길 옆에는 절이 있고 그 아래 골짜기에는 비가 오면 제법 폭포수 형태를 보이는 층층의 바위 너덜이 있다. 어느 날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중씰한 어느 여인이 하염없는 동작으로 바위틈에 낀 이끼들을 수세미질 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석간수가 가늘게 흐르는 샘물 옆에다 향초를 밝혀놓고 그도 미흡하다 여겨진 정성을 다하기 위해 주변을 청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픈 가족의 병구완인가. 아들 손자의 합격 기원인가. 아니면 지금은 만날 수 없어진 어떤 이를 위한 은원을 푸는 일인가. 비로 쓸고 물을 끼얹고 여인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씻고 닦은 얼굴처럼 환하게 바위는 정갈해지고 허접한 풀숲까지 주변 정리가 되었다. 여인은 날마다 촛불을 밝혀놓고 열심히 절을 했다. 얼마 후 모처럼의 산책길을 그쪽 방향으로 길을 잡았을 때 제물을 차려놓고 북을 치며 경을 읊던 돌샘가는 텅 비어 있었다. 인적없는 적요에 묻힌 골짜기에는 재잘거리는 작은 산새소리만 옅게 깔려있을 뿐이다. 애잔한 기도의 가엾음이 느껴지도록 가물가물 흔들리던 촛불도 물론 켜져 있지 않았다. 하나둘 무심히 떨어지는 낙엽 속으로 묻혀가는 기도 터. 천지신명이 감응하고 산신이나 용신이 감응하여 그녀의 기도는 성취되었을까. 다음 날은 또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서 무슨 기원으로 향을 사르고 촛불을 켤까. 한국인의 샤먼은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오래된 정신 치유의 한 방법이다.
박주원 1948년 진주 출생 1967년 대구KBS 단막극 <물에 뜨는 고향> 입상 1979년 동화 「민이와 엄마」 샘터사 공모 입상 1993년 <자유문학>에 단편소설 「포구」 신인상, <경남문학>에 단편소설 「영락복지원」 신인상 소설집 『마른 대궁』, 『달세상으로 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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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명산과 돌, 만 점의 이야기가 서로 어울려 새로운 전설이 탄생되었네요.
정말 산과 들 바위에 비손하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