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초와 관중과 이끼계곡, 일월산
1. 일자: 2021. 5. 29 (토)
2. 장소: 일월산 일자봉(1,129m), 월자봉(1,170m)
3. 행로와 시간
[도로(10:35) ~ 윗대티(10:55) ~ (계곡) ~ 큰골 갈림(11:30) ~ (급경사) ~ KBS 중계소/갈림(12:12) ~ 월자봉(12:20)~ KBS중계탑/점심(12:28~40, 일자봉 1.4km) ~ (앵초 군락) ~ 일자봉/해맞이광장(13:19) ~ (이끼계곡 2.8km) ~ 계곡 입구(14:05) ~ 동굴/굿터(14:23) ~ 선녀탕/용화사(15:00) ~ 아래대티(15:03) / 9.48km)]
< 일월산 산행을 준비하며 >
산행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일월산을 신청했다. 일출 풍경이 영양 팔경 중 제 1경이고, 맑은 날 일자봉에 서면 동해가 훤하게 보인다. 산정은 평평하나 산세가 하늘에 우뚝 솟아 웅장하고 거대하다. 월자봉에 서면 봉화 청량산도 목격된다 한다.
한국의 산하에서 산행 정보를 얻는다. ‘산이 높아 해와 달이 뜨는 것이 잘 보이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산마루에 천지가 있어 그 모양이 해와 달과 같아서 일월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정상부에 주봉인 일자봉(1,219m)과 그 서쪽에 월자봉(1,170m) 두 봉우리가 있다. 영양읍 북쪽으로 약 1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화와 평해의 중간 지점인 오지에 있는 산이다. 높은 산이면서도 산형이 험하지 않고 순하여 순산이라는 애칭도 있다.’ 오지에 산이라 지레 험하다는 느낌이 있었으나, 순산이라 하니 마음이 놓인다.
산행을 삼등분 해 본다. 윗대티를 출발하여 월자봉까지는 약 3km 거리다. 큰골 1.5km, 월자봉 갈림 1.1km, 월자봉 0.4km로 갈림에서 월자봉에 오른 후 돌아와야 한다. 월자봉 ~ 일자봉은 1.4km 거리이며, 길은 두 개의 선택이 가능하다. 일자봉에서 삼거리를 지나 급경사 내리막이 이어지며 선녀탕 부근 날머리까지는 약 3km 거리다. 총 8km, 비고 650m, 순수 걷는 시간은 4시간을 예상하다. 휴식과 식사를 포함하면 여유 있는 5시간의 산행이 예상된다.
< 희망사항 >
오래 전부터 마음에 담아둔 산이었다. 마침내 인연이 닿는다. 월간 산에서 박영래 화백이 그린 산행지도를 본 기억이 있으나 찾아 내지 못했다. 한창 가지 않은 산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할 때가 기억이 난다. 한 때의 열정이 조금은 더 여유로워진 지금의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영양 땅은 아주 오랜만이다. 오 가며 차장으로 보는 산야의 풍경이 무척 기대된다. 고향을 찾는 기분이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많이 달랐다.)
< 영양가는 길에 >
참 좋은 날씨다. 평택~제천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차창 풍경이 새롭다. 금새 단양휴게소에 도착하더니 풍기 IC를 지나 국도로 진입한다. 여기서부터는 눈에 익은 정겨운 풍경과 마주한다. 매년 초가을 벌초하러 지나던 길을 산을 오르기 위해 지난다. 논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가을의 황금들녘을 꿈꾸어 본다.
풍기에서 일월산 입구까지는 70km, 1시간 거리다. 생각보다 금방이다. 봉화, 봉성, 법전, 춘양을 거쳐 간다. 외가집 부근도 지났다. 위치를 특징하진 못했다. 임기역 부근을 지나 구불거리는 지방도 10km 정도 지나 들머리에 도착했다. 시간은 10시 30분이 막 지난다.
< 윗대 마을 ~ 월자봉 >
좁은 1차로 도로에서 버스가 후진해서 들머리로 진입하려 한다. 무슨 일인지…. 결국 뒤 차에 막혀 내려서 걸어간다. 애당초 버스가 다닐 곳이 못 되는데 굳이 들머리를 이리로 잡은 이유를 모르겠다. 시작부터 꼬인다.
햇살을 안고 1.5km 가량 도로를 걷는다. 길가 엉컹퀴가 보라빛 요염한 자태로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한가한 시골 동네를 지난다. 외씨버선길 안내도 보인다. 당초 들머리인 윗대티부터는 계곡을 끼고 걷는다. 어제 비에 물이 불어 시원하다. 짙은 녹음을 안고 걷는 계곡 길은 운치 있었다. 갈림이 나타난다. 왼쪽 길로 들어선다. 포장도로가 끊기고 입산한다. 정확히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몰라도 정상까지는 2km란다. 한동안 평탄하고 시원한 계곡을 오른다. 계류를 이어주는 작은 다리를 몇 개 건너자 오르막이 나타난다. 이끼의 짙은 녹색이 인상적이다. 고도 700미터 부근까지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온 것 같다.
정상 2km라는 이정표도 믿지 않았는데 곧 0.9km가 나타나더니 한참을 올랐는데 0.8km란다. 거리 기준이 들쑥날쑥이다. 조짐이 좋지 않다. 갈림이 나타난다. 큰골로 추정된다. 고도는 800m 어름, 급격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비고 400m를 치고 올라야 한다. 산이 하늘과 맞닿는 모습이 올려다 보이는데도 모퉁이 돌며 또 봉우리가 등장한다. 비탈은 점점 심해진다. 간간이 등장하는 계단 덕에 조금은 덜 지루했다. 들머리에서 길게 걸었던 긴 평지 탓인지 오르막은 더 힘겹게 다가온다. 기대를 포기할 때쯤 T자형 길에 선다. KBS중계소가 등장한다. 월자봉 400m, 일자봉 1.4km, 고도는 1200m를 넘어선다.
월자봉 길은 잘 닦인 평지 수준의 오르막이다. 고도 부담이 사라지자 다리에 힘이 난다. 월자봉 정상은 실망스럽게도 작은 공터에 커다란 비석만 서있다. 왠지 억지로 정상으로 꾸민 느낌이다. 먼 풍경이라도 볼세라 돌 위에 올라가 보지만 별 풍경이 없다.
애써 오른 보람도 없이 허탈하게 왔던 길로 내려간다.
< 월자봉 ~일자봉 >
돌아 내려와 KBC중계소 밑에서 점심을 먹었다. 모처럼 준비한 죽이 입맛을 돋운다. 빵 조각과 비교가 되지 않게 좋았다. 홀로 걷는다. 이끼가 낀 좁은 돌길 옆으로 앵초가 무리 지어 피어 있다. 그 옆에는 관중이 특이한 모습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길이 좁고 음침하고 습하다. 예상대로 고도 차가 크지 않아 그리 힘들지는 않지만 산정에 이끼가 짙게 낀 돌길은 의외다. 지나는 이도 없고 어두컴컴하고 스산하다.
동쪽 풍경이 나무에 가려 감질나더니, 꽤 근사한 바위 전망대가 나타난다. 눈 여겨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곳이다. 난간에 서니 눈 맛이 시원하다. 녹음이 짙게든 초여름 산이 끝간 데 없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마을 없이 오직 산만 보이는 풍경은 오랜만이다. 바위 난간에 분홍 꽃망울 한 개만 달랑 남긴 진달래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어둡고 습한 이끼 낀 숲, 흔치 않은 풍경이지만 산에서 같은 풍경이 오래 계속되면 몸은 쉬이 지쳐간다. 우측으로 군부대가 들어선 산정이 얼핏 보인다. 정상을 길게 우회해 일자봉으로 가는 길이 나 있었다. 트랭글이 부저를 울린다. 마지막 비탈을 힘 내어 오른다. 커다란 정상석이 있는 데크 광장이 펼쳐진다. 놀랍다. 이토록 큰 인공 구조물이 왜 이곳에 필요할까? 생각이 미친다. 해맞이 기념행사용이로구나. 세 과시가 필요한 군수님의 작품인가 보다. 지나온 길게 이어진 이끼 낀 좁고 위험한 돌 길을 생각하니, 일자봉 구조물은 더욱 생뚱맞다. 그래도 확 트인 풍경을 보니 힘겨운 돌 길에 위안이 된다. 산 넘어 먼 풍경에서 바다를 읽는다.
< 일자봉 ~ 선녀탕 >
길이 좌우로 나뉜다. 좌측은 선녀탕, 우측은 야생화 단지로 향한다. 약속대로 선녀탕으로 향한다. 가파른 돌 길이 이어진다. 초입이 험로라는 건 알고 있었던 터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정이 나타난다. 고도 1085m, 우측이 선녀탕이다. 길 사정이 나아지겠지 기대했는데, 비탈은 더 가파르고 등로는 희미해진다. 돌도 굴려 위험은 더해진다. 최소한 위험구간에는 밧줄이라도 설치했으면 좋으련만…. 올라올 때도 그랬으니 계곡이 나타나면 좋아지겠지 하며 걷는다.
고도 800m 어름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살았다 여긴다. 근데 아니었다. 계곡은 너덜 수준에 원시림이다. 길이 끊기고 계류를 건너고를 수 없이 반복한다. 이끼 낀 돌 길은 이제 일월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몹시 미끄럽다. 습기 만땅이다. 원래 길 사정이 이렇지 않았을 게다. 언제인진 몰라도 물난리에 계곡이 어지러워진 탓이라 여긴다. 이정표는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 메어 놓은 붉은 리본이 구세주 역할을 한다. 밑으로 내려 가도 길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커다란 동굴과 무녀들의 굿을 하는 장소도 보인다. 길이 더 음침해 진다. 이끼는 짙어지고 물살은 거칠어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당황한다. 미끄러져 자빠지고 나서야 나도 위험할 수 있겠단 판단이 선다. 다행인 건 앞 선 이들은 용케도 잘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함을 내 본다.
산이 무너진 너덜 지대를 지나 한참을 더 가자 등로가 조금은 평탄해 진다. 고도는 600m 초반이다. 지난 가을의 잔재인 갈색 낙엽이 수북이 쌓인 위로 녹색의 새 생명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길이 넓어진다. 살 것 같다. 선녀탕에서 잠시 쉬며 탁족을 한다. 발이 시리도록 물이 차다. 새삼 올 봄은 비가 참 자주 왔다는 생각이 든다. 용화사를 지나자 이내 주차장에 도착한다. 일행의 반은 하산한 듯하다. 용하다. 이 험한 길을…. 실력자들이다.
산을 내려와 드는 총평은, 계곡으로 올라 평탄한 정상 능선을 걸은 후 거친 계곡으로 내려오는 八자형 등로였다. 듣기 보다 오르내림이 심하고 정비되지 않은 오지의 산으로 두 번 올 곳은 못 된다. 특히 겨울철엔 하산 시 몹시 위험한 곳이라 판단된다. 순산이란 말은 거짓이었다. 차 몰고 KBS 중계소에 내려 정산만 다녀올 데나 통하는 말이다. .
< 에필로그 >
오지 않는 마지막 한 분을 1시간 넘게 기다리다 버스는 출발한다.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데 걱정이다. 좋지 않은 예감과 편치 않은 마음이 교차한다. 여려 가지로 일월산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을 것 같다. 버스가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녹동마을을 지난다. 기차 철로가 보인다. 아주 어릴 적 밤 기차 타고 낯선 곳을 지나던 기억이 희미하게 스쳐간다.
일월산에서의 예상은 여럿 빗나갔다. 계곡이 끝나고 큰골 갈림에서 시작된 길고 가파른 월자봉 가는 길, 볼품없어 싱거운 정상 월자봉, 앵초와 관중과 이끼가 있는 좁은 돌길, 일자봉의 생뚱맞게 큰 정상 데크, 너무도 험한 선녀탕 계곡 하산길 등은 새로웠지만 당황스러웠다.
특히, 일자봉에서 선녀탕 하산로는 안전사고가 우려될 만큼 위험했다. 오전에 오른 윗대티 등로와 너무도 다르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숲과 계곡은 그저 위험한 원시림에 지나지 않는다. 길을 막든지 위험구간에 안전시설을 했어야 한다. 과하게 치장한 해맞이 광장과 비교할 때 방치 수준이었다.
다행히 뒤처진 분은 30분 늦게 하산했단다. 다행이다. 하산 후 긴 기다림과 회원들 간의 언쟁. 기다리자, 무슨 소리냐 시간이 지났으면 가야지. 주장들이 난무한다. 안내산악회의 한계를 본다. 코스 상태 파악 미흡, 원칙과 예외 그리고 산행안전 간의 충돌.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 남의 일 같지 않다.
버스가 법전을 지나 갈방산을 지나고 있다. 또 옛일들이 머리를 스친다.
많은 일들을 생각하지 하는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