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밥
정 목 일
시골 친척집에 가서 밥을 먹게 되었다. 밥상엔 밥그릇 위로 수북이 올라온 고봉밥이 놓였다. “어? 밥을 조금 밖에 안 먹어요.” 지레 겁을 집어 먹고 조금만 주길 청한다. “잡수세요, 산간벽지라 밥 밖에 대접할 게 없어요.”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난감해 있는데, 문득 어머니 생각이 스치면서 눈물이 핑 돈다.
고봉밥이 놓인 밥상을 언제 받아보았는가. 이제 고봉밥은 여느 집 밥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고봉밥엔 한국 어머니의 애환과 사랑이 담겨 있다. 어머니 몰래 월남전에 참전하기 한 달 전쯤, 하루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갔을 때였다. 저녁 무렵이었고, 알리지도 않았기에 밥이 있을 리 없었다. 어머니는 황급히 부엌으로 들어가시더니, 상 위에 고봉밥을 얹어 오셨다. “웬 밥이냐?”고 묻자, “오빠가 바깥에 나가 있어도, 엄마는 먼저 오빠 밥그릇부터 떠놓으신다.”고 여동생이 나즉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고봉밥은 사랑이었다. 옛 주부들은 출타한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서 반드시 밥을 떠놓았다.
객지에 있지만, 자나 깨나 그 모습이 눈에 밟혀서 고봉밥을 떠놓지 않을 수 없었다. 밥만은 거르지 말라는 기원과 염원이 담겨 있다. 밥은 곧 몸이고 생명줄임을 안다. 밥은 건강과 무사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디서든지 건강하게 기운을 차리라는 모성의 강한 기구가 고봉밥에 담겨 있다.
밥을 짓고 식구를 먹이는 일은 어머니 평생의 일이기도 했다. 무쇠 솥에 밥을 앉히고, 불을 때서 뜸 들이고, 솥뚜껑을 열어 밥을 푸기까지, 국과 된장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는 등 세 끼 식사를 마련하는 일을 하면서 한 마디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으셨다.
고봉밥은 젖가슴 같다. 포근하고 넉넉한 곡선은 부드럽고도 포만감을 안겨 준다. 고봉밥은 어머니가 젖을 물려주듯이 사랑으로 밥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두 손으로 받든 모습으로 ‘건강하게 잘 되라’는 염원으로 올린 탑처럼 보인다. 밥으로 쌓아올린 사랑의 탑이 고봉밥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남편과 자식이 바깥에 나가 귀가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어머니는 고봉밥 한 그릇을 떠놓아야만 마음이 놓이는 심사를 누가 알 것인가. 입이 짧았던 나는 반찬 투정이 심했고, 그 때마다 어머니는 밥을 더 먹이려고 애를 태우시곤 했다. 숟가락으로 먹성 좋게 퍼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 젓갈 넣어 생김치를 만들고, 깨소금과 참기름을 넣어 나물을 무치고, 등푸른 생선을 굽던 어머니셨다. 오랜 만에 고봉밥을 보니,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듯 눈물이 솟는 걸 참을 수 없다.
고봉밥은 산 사람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제사를 지낼 때도 고봉밥을 올린다. 제향 의식에서 고봉밥 한 그릇과 냉수 한 사발만으로도 정성을 바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만큼 고봉밥은 정성과 사랑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일까. 고봉밥 위에 숟가락을 꽂고서 절을 올리면서 산자와 죽은 자가 마음으로 만난다. 망자(亡者)에게 올릴 수 있는 최상의 정성과 예의는 고봉밥이다. 고봉밥을 올린다는 건 살아있건 죽었던 간에 지극한 정성과 애정의 행위다.
예전에는 자식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죽으면 어느 누가 밥 한 그릇을 차려줄 것인가?”고 한탄하는 소릴 듣곤 하였다. 삶이란 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밥은 본능, 몸, 생명, 삶, 그 자체를 상징한다.
우리 인사말이 “안녕하십니까?” 하기 전에는 “아침 드셨습니까?” “밥 먹었느냐?”며 제일 먼저 밥부터 챙기는 것이 순서요, 예의가 아니었던가. ‘안녕’ 보다는 ‘밥’을 챙겨야 하는 시절에 고봉밥은 최상의 정성과 배려가 아닐 수 없다.
고봉밥은 남편과 자식과 조상들을 위한 밥만은 아니었다. 머슴에게는 고봉밥을 주었다. 밥을 많이 먹어야 기운을 쓸 것이기에, 고봉밥도 모자라면 언제든지 더 챙겨 주곤 했다. 일꾼은 뱃심으로 일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많이 먹고 기운을 내라’는 응원과 격려의 마음이 들어 있는 밥이다.
머슴은 고봉밥을 먹고, 아침 일찍 들판에 나가 씨앗을 뿌리고 농작물을 기르고, 거둬들이기까지 대지에 땀을 뿌린다. 가을 들판의 황금빛 벼들의 수확은 고봉밥을 먹고 힘을 쏟은 머슴의 노고와 농부들의 근면과 성실의 덕분이다.
요즘 가정에서는 끼니마다 밥을 지어 먹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밥 대신에 빵 등 대용식이 많아졌다. 아침엔 빵과 우유로 식사를 대신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들도 있다. 고봉밥이 밥상에서 사라진 지도 오래 되었다. 비만을 걱정하는 현대인들에겐 고봉밥은 한낱 웃음거리가 될 법 하다.
하얀 밥그릇에 산처럼 젖가슴처럼 솟은 고봉밥! 행주치마 차림으로 밥상을 차려주시며 환히 웃으시던 어머니! 아, 이 밥으로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가정의 건강과 평온을 기원하며, 집 나간 남편과 자식을 기다리시던 어머니! 자신의 밥을 줄여서 고봉밥을 떠놓던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웃음과 평화로 피어났다.
고봉밥은 어머니의 몸이었고 마음이었고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