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은 조선의 중심 궁궐 바로 법궁이다.
풍수지리상으로 천하의 명당에 자리한 경복궁이다.
아무리 천하의 명당이라고 해도 허점은 있게 마련이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에서는 전미지지(全美之地)는 없다고 했다.
부족한 부문을 보완해서 활용한다. 이를 풍수에서는 비보(裨補)라고 한다.
왕의 침전 강령전이 위험하다.
서쪽 인왕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인왕산은 바위덩어리 산으로 기(氣)가 드세기로 유명하다.
인왕산의 드세고 나쁜 기는 동쪽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 기가 노리는 정동(正東)쪽 임금의 처소 강령전이다.
태종의 측근들이 나섰다. 풍수지리의 비보책을 마련한 것이다.
그 공격적인 기는 허점을 안고 있다, 그 허점을 노린 것이다.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氣風卽散 界水卽止)
물을 만나면 멈추는 기의 결정적인 약점을 파고 든 것이다.
기를 막아내는 수단으로 물을 동원한 것이다. 기의 통로에 연못을 판 것이다.
강령전 서쪽에 사각모양의 연못을 조성했다. 그 연못으로 바리케이트를 친 것이다.
그 연못에 세 개의 섬을 만들고 가장 큰 섬에는 누각 경회루를 세웠다.
연못으로 기를 차단하였고 육중한 경회루로 이중의 방어막을 설치한 것이다,
경회루는 풍수 음양 주역 도교 등 전통사상과 이념으로 무장한 강령전의 지킴이다.

왕의 침소 강령전 서쪽에 판 큰 사각형의 연못(남북 113m 동서 128m)이다.
그 연못은 네모꼴의 세 개의 섬을 안고 있다. 서쪽 두 개 섬은 작다. 그리고 동쪽 섬은 아주 크다.
세종 때 대제학 변계량은 이 연당의 세 섬을 이렇게 노래한다.
"경회루·광연루 높기도 높을사 넓으나 넓어 시원도 하다.
이내는 걷히고 맑은 기운 불어든다.
하늘 밖에 눈을 놀리니 강산풍월 경개도 천만 가지
답답한 심회를 활짝 풀어준다.
위, 올라보는 경 긔 어떠하니잇고.
봉래(篷萊) 방장(方丈) 영주(瀛州) 삼신산
위, 어느 시대에 찾아 볼꼬."-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 4월 2일 기사에서
이 세 섬은 동방의 가장 유명한 낙원 삼신산(三神山)이다.
동쪽의 발해 바다 어딘가에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 황금과 은으로 지은 궁궐이 있고 불사약이 있다는 소문이 발해만
지역 주민들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배를 타고 삼신산을 찾아 나섰다.
가장 적극적으로 삼신산의 탐색에 열을 올렸던 왕이 그 유명한 진시황(秦始皇)이다.
진시황은 여러 차례 방사(方士)라는 마술사들을 시켜 삼신산을 찾아보게 하였다.
이들 마술사들은 제주도까지 찾았으나 끝내 실패한다.

연못 동쪽 가장 큰 사각형의 반듯한 섬에 경회루가 들어섰다.
경회루는 의젓하고 장중하다, 288평의 경회루는 198평의 근정전보다 크다.
정면 7칸 측면 5칸 모두 35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여기에 건물 전체를 큰 한 칸으로 여긴다.
그래서 경회루는 총 36칸이라고 했다. 경회루는 바로 주역 36궁을 건축물로 구축해 놓았다는 뜻이다.
경회루는 여수의 진남관과 충무의 세병관과 함께 조선의 3대 누정 건축물로 꼽힌다.

조선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이 지은 경회루이다.
경복궁 서쪽 누각이 허물어졌다. 누각이 있던 땅이 습해서 건축물도 무너진 것이다.
"땅이 축축하여 기초가 든든하지 못해 기울었구나."
태종이 박자청에게 경회루를 지을 것을 명령한다. 그는 노비출신이다.
태종을 도와 한양건설을 주도했다. 나중에는 공조판서까지 오른 인물이다.
창덕궁 성균관 문묘 종묘 사직단 건원릉 헌릉 살곶이다리 등이 박자청의 걸작품이다.

경회루(慶會樓)는 어진 임금이 훌륭한 신하를 만나는 기쁨의 공간이다.
"경회(慶會)라는 뜻은 대개 올바른 정사를 펴는 인군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라고 할 수 있다."-하 륜의 <경회루 기문>에서
태조 이 성계에게는 정 도전이 있고 태종 방원에게는 하 륜이 있다. 그 하 륜이 기문을 쓴다.
이곳은 나라의 큰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활용되었다.
"새로 큰 누각을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지었다.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제도가 굉장히 커서 앞이 탁 트이고 시원스럽다. 또한 연못을 파서 사방으로 둘렀다.
궁궐의 서북쪽에 본래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임금이 좁다고 하여 명하여 고쳐 지은 것이다."
-태종실록 1412년 4월 2일 기사에서-
인공방형 연못 안 동쪽에 조성된 네모반듯한 가장 큰 섬이다.
그 섬 둘레를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으로 삼고 위에 누각 경회루를 세웠다.
그 돌 기단 돌레에는 돌난간을 들렀다. 그 모퉁이마다 돌로 조각한 12지상을 장식하였다.
경회루는 음양과 주역 그리고 도교의 사상을 담고 있다.
우선 48개의 돌기둥부터 그렇다. 바깥은 24개의 사각기둥이 둘러싸고 있다.
안쪽에는 24개의 원기둥이 있다. 그 바닥이 한 단 높게 조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하늘은 둥글고(天圓) 땅은 네모나다고(地方)했다.
옛 선조들의 우주관을 상징하는 화강암기둥이다.
이 돌기둥 24개는 1년 24절기를 뜻한다. 주역의 48괘를 상징하는 48개의 돌기둥이다.



사각모양의 섬에 들어선 경회루이다. 그곳으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경회루로 가는 다리는 세 개가 있다. 남쪽 돌다리는 중간 다리와 북쪽의 것과는 모양이 다르다.
남쪽 돌다리는 폭이 넓다. 임금만이 다녔다. 중간의 다리는 왕족이 이용했다, 관람객들은 중간다리로 건넌다.
그리고 북의 다리는 신하용이었다.

경회루 2층의 구조는 참으로 의미가 깊다. 2층의 중심부문이 한 단 높게 조성되어 있다.
이 부분을 중당(中堂) 또는 중궁(中宮)이라고 한다. 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헌(軒)이다.
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회랑(回廊)이다. 중당은 정면 4개 측면 2개 모두 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을 면(面)으로 따지면 3칸이다. 중궁 3칸은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를 상징한다.

경회루 2층에서는 중앙부분의 바닥을 더 높여서 외진-내진-내내진(內內陣)을 형성했다 .
2층의 세 공간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공간의 위계를 명확히 했고, 필요에 따라 들어올려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토록 했다. 북쪽으로 백악, 서쪽으로 인왕산, 남쪽으로 남산을 멀리
볼 수 있어서 이 곳이 자연을 끌어와 연회를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2층 분합문을 달아놓아 필요에 따라 들어올려 하나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2층에는 모두 12개의 창을 냈다. 1년 12달을 상징하는 창이다.

창틀을 통해 창 밖 근정전의 경치를 끌어다본, 차경(借景)의 멋진 모습이다.

연산군는 경회루에서 풍류를 한껏 즐긴 군주이다.
이곳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배에 오르고 내리던 선착용 돌계단이다.

1959년 세운 육각형 평면의 정자 하향정(荷香亭)이다.
당시 이 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돌 기둥 두 개는 물속에 깊숙히 담그고 있다. 마치 선비들이 발을
물에 담그는 탁족(濯足) 놀이하듯 말이다.1999년 지붕 일부를 해체 수리했다.

인왕산에서 쏟아지는 드센 기(氣)를 차단하기 위해 조성한 연못이다.
그 연당에 사각의 세 섬을 조성했다. 그 세 섬은 봉래 방장 영주 바로 삼신산이다.
연못 동쪽 가장 큰 섬 위에 조선의 대표적인 누정 경회루를 세웠다.
경회루는 그저 먹고 노는 유희장소가 아니였다.
어진 임금이 훌륭한 신하를 만나는 기쁨의 누정이었다.
누정 경회루는 음양과 주역 그리고 도교의 심오한 사상을 담아낸 걸작품이다.
"세상천지의 모든 것은 변한다. 해가 뜨면 지기 마련이고 달도 차면 기운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이렇듯 선인들은 천문과 지리를 살펴 천지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고 그것을 인간들의 생활에 적용시켜 생각했다. 사람은 사람 자체가 작은 우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자라고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과 흥망성쇄와 길흉화복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일은 모두 천지 자연의 법칙과 작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며 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음양사상이고 하늘과 땅 사람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천인합일사상이다.
이 사상이 경회루 곳곳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미술사학자 허균의 책 <새로 보는 경복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