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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을 떠나는’ 나이듦과 1980년대 로드 무비 >
Ⅰ. 들어가는 글
대한민국은 2017년 ‘고령사회’로 진입하였고 조만간 ‘초고령 사회’로 들어설 예정이다. 그런 이유로 고령화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노년의 삶에 대한 수많은 담론들이나 지침이 넘쳐나고 있다. 고령화는 전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령화 현상을 ‘노인 쓰나미’라든가, ‘회색군단’으로 부르는 것에서 고령화에 대한 불안과 늘어가는 노인들에 대한 차별을 직감하게 된다. 고령화는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고, 반대로 사회적 돌봄 대상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 큰 부담을 지운다. 반면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노인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안티 에이징’ 산업은 ‘노화’에 대한 불안을 자극하여 건강식품 소비와 외모 관련 지출을 늘리고 있다. ‘성공적인 노화’를 위해서 항상 현역으로 활동하라는 담론 또한 건강한 노인의 삶에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분주함’을 권고하여 비용을 줄이려는 사회적 의도를 담고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면의 자유와 자신감이 충만해지고, 사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대담하고 기이한 행동을 할 수 있다.”라는 노인정신의학자의 말처럼, ‘나이듦’이 생에 대한 완전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는(떠나는) 삶’을 실천할 수도 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목표를 ‘본연의 자신이 되는 것’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의 말처럼 인간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고픈 근본적인 동기를 지니고 있다. ‘나이듦’는 삶의 의무 때문에 도전하지 못했던 인간의 본질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이듦’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새롭게 답할 것을 요구한다. 현실적인 장벽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거나 포기했던 삶의 가치있는 문제나 공동체의 난제에 도전할 수 있다. 나이듦은 “나를 넘어 공공성의 관점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헌신과 자기 존재의 확장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길의 떠남’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 변화되지 못한 정신으로는 새로운 길을 갈 수 없다. '성인‘이 아이와는 전혀 다른 책임과 의무를 지니게 되듯이, 60 이후의 삶도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시간인 것이다. 과거에는 짧은 수명 탓에 삶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였다면, 이제 늘어난 수명은 그 시간의 활용을 새로운 도전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2020년대 새로운 길을 출발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참고 자료가 존재한다. 그것은 1980년대 ‘로드 무비’이다. 80년대 로드 무비는 대부분 청춘의 고뇌와 고민을 바탕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순수하지만 열정적인 탐구의 여행이었다. 당시 여행자들은 여행 중에 사람들을 만나고, 문제와 직면했으며, 해답을 찾기 위해 고뇌했다. 그들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그 모습 속에는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여행자의 기본적인 준비가 담겨있다. 그들의 모습을 현재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거나 낡지 않은 근본적인 ‘삶’이라는 여행의 지혜이다. 이 글은 80년대 로드무비가 2020년대 새로운 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주는 지혜의 목소리를 찾고자 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삶에 대한 근본적 태도일 수도 있으며, 40년이 넘는 세월이 누적되고 변환되어 나타나는 삶의 지침일 수도 있다. 그 길을 가기 전에 먼저 현재 진행 중인 ‘노화’에 관한 담론과 1980년대 로드무비의 성격에 대하여 알아본다.
Ⅱ. ‘나이듦’의 담론과 1980년대 로드 무비
1. 나이듦‘에 관한 담론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사회적 관심은 ‘노화’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국가는 늘어가는 의료비와 복지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노인들에게 적절한 생활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의 자발적인 독립이 중요해졌다. ‘성공적인 노화’ 모델로 많은 국가들이 ‘생산적인 노화’를 강조하는 것은 노인에 대한 지원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다. 우리 정부의 지원 정책이 주로 “일자리 재정 지원 확대, 직업 특화훈련 강화, 민간 일자리 지원” 등의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고령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태도는 ‘생산적인 노화’에 대한 전반적인 지지를 담고 있다. “일로부터 해방되는 삶의 자유, 즐거움, 휴식 등을 누리는 여가가 노년의 일상생활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부여된 일정한 역할없이 보내는 긴 자유시간은 노년의 삶을 해친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적인 노화 모델은 대부분 노인이 아닌 사람들이 제안하는 경우가 많으며 노화를 조명하기보다는 비노인층이 지닌 불안과 욕망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마거릿 크룩생크는 『나이듦을 배우다』에서 생산적인 노화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생산적인 노화는 그 밑바닥에 거의 모든 것을 감수하는 개인의 책임과 개인의 노동, 심지어 인생 후반기를 가치있게 만들기 위한 많은 것의 포기가 있기에 가능하다.” '생산적인 노화‘가 강조하는 ’분주함‘의 권유는 오히려 노년의 삶의 질을 파괴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크룩생크는 중요한 것은 노화가 삶의 성숙함과 충만함을 만들어가는 시간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며 느려지는 것을 통하여 “사람, 문화, 일, 자연, 몸과 마음이 서로 깊이 연결되기 위해 시간과 평온함을 요구”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 보았다.
젊고 생산적인 노인만이 대접받은 분위기에 반기를 드는 일본의 담론도 있다. 일본의 ‘향노학’은 늙음의 부정적 측면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수용할 것을 강조한다. “늙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고민을 우리에게 던져주지만, 그것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늙는다는 것 자체가 공포이자 불안일 수밖에 없다. 늙음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배우는 것이 바로 향노학이다.”
'나이듦‘을 정치적 참여를 확대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선배-시민 살아가기‘라는 담론도 있다. 노년은 가족의 영역을 넘어 사회에 대한 관심을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며 진정한 사회적 참여가 가능한 시간이다. 노년의 정치 참여는 ’성찰하는 선배 시민‘의 모델을 후배들에게 제공하며, 사적인 관심에서 해방되어 공적인 장에서 진행되는 의사소통행위라는 진정한 정치행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공적인 노화’에 관한 현대적 담론 이외에도 고대 인도사회에서 이상적인 삶의 단계가 권장하는 노화의 담론이 있다. 인도의 힌두 문화에서는 50세가 지나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임무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탐색하라는 ‘임처기’가 있다. 이것은 마지막 단계인 세속적인 욕망을 모두 버린 ‘수행자기’와는 다르다. 사회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이 단계의 핵심적 의미는 세속적 의무와는 다른 인간의 보편적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지만 사회적 관계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힌두의 담론은 근대 서구의 철학적 권고와도 일치한다.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정직한 노력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사람의 힘을 늘리는 것은 소유물이 아니라 진리 탐구이며, 이것을 통해서만 인간의 완성에 끝없이 다가갈 수 있다.”
이 글에서 중심으로 다룰 나이듦의 ‘새로운 길을 떠나는’ 모델은 정치적 참여를 넘어, 진정한 자유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실험하는 모델이다. 그것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넘어서고, 개인의 물질적 부에 집착하지 않으며, 사회적 제도에 종속되지 않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모델이며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개인의 변혁이 중심이 되는 ‘나이듦’이다. “외부적 변화는 우리의 내부적 혁명이 수반되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2. 1980년대 로드 무비
로드무비는 ‘인생’이 전개되는 과정과 닮아있다. 여행을 통한 성장,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삶의 단편들에 대한 은유로 이해될 수 있다. 로드 무비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요소들이 길떠남(여행), 길 위에서 만나는 사건들, 인물들의 배움과 성장이 중심이라면 로드무비는 결국 우리 인생의 근본형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로드무비는 본격적으로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은 한국 로드무비의 형식적인 특징을 정립하는 작품이었다. 남성 둘과 여성 하나가 동행하는 여행 구조는 이후 등장하는 로드무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본격적인 로드무비는 아니지만, 젊은이들의 성장을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 포착하려 했다는 점에서 로드무비적 성격을 지닌다. 70년대 로드무비가 폐쇄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산업의 발전으로 몰락하는 고향의 정서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담고 있다면, 80년대 등장한 대표적인 로드무비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1980년 새롭게 집권한 신군부의 폭력 앞에 사회적 비판의식은 중단되었다. 많은 영화인들이 정부가 허용한 ‘성적자유’의 영역으로 이동하여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사회적 의식을 지닌 영화인들은 ‘로드무비’를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1980년대 로드무비는 양적인 측면에서는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질적인 면과 실험적인 정신에서는 한국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시각을 금지당한 시점에서, 로드무비는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로 눈을 돌렸다. 삶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핵심적인 의문,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가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충돌하는 문화적 갈등 등이 영화의 중요 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어쩌면 ‘사회’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보다 더 근원적인 영역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는지 모른다.
로드무비는 관람했던 연령대에 따라 다른 감동과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도전과 포기하지 않은 용기에 대한 위로를 얻고 그 속에서 겪게 되는 사랑의 감정에 주목하였다면, 60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젊은 날의 회고를 넘어 ‘남아있는 날들’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젊음에서 찾는 부러움의 감정이 아니라, 여전히 희망과 의지로 재무장할 수 있는 남아있는 날들에 대한 열려진 삶의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있는 텍스트는 언제든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있게 다가온다.
‘새로운 길을 떠나는’ 나이듦에서 우리는 어떻게 준비하고 길을 떠나야 하는가? 헤밍웨이는 여행은 돌아오기 때문에 의미있다고 이야기했고 오디세우스의 여행 또한 ‘귀환’을 위한 여행이지만, 우리가 떠나는 새로운 여행은 돌아오지 않는 여행이며, 목적지가 없는 여행일 수도 있다. 그것은 걷는 과정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며, 걷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이 소중하며, 끝이 무엇이든 자신의 본질을 찾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내면을 향한’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는 여행이 될 것이다. ‘죽음’을 향해 가는 여행은 결코 두려움과 불안의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이 풍요로워지는 자유의 시간이다. 여행은 반드시 물리적 여행만을 뜻하지 않는다. 때론 사고실험과 같은 정신의 여정일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나이듦’을 동반하는 여행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여행의 핵심 요소와 성격 또한 차이가 없다. 형식이 아닌 본질적인 태도가 중요한 여행인 것이다.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 떠나기 전 오래 전 텍스트와 함께 하면서 여행의 지혜를 찾아보자.
Ⅲ. 1980년대 ‘로드무비’에서 발견하는 ‘떠남’의 지혜
1. ‘떠나기 전’(여행을 준비하는 마음)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아탈리는 <호모 노마드>에서 다음과 같이 여행을 찬미한다. “인간은 여행을 통해 태어난다. 인간의 몸은 정신과 마찬가지로 노마디즘에 의해 형성된다. 인간의 고유한 특질은 우선 두 발로 달린다는 점이다.”여행은 인간을 탄생시키고 변화시키며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그는 노마드적 집단이 정착함으로써 타락하였다고 말한다. 정착은 안정을 제공하고 일상에서의 기쁨과 만나게 한다.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장소, 익숙한 환경이 삶의 여유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러한 안정에 대한 집착이 때론 거대한 증오와 편견의 씨앗이 되고 누군가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집착이 파괴적인 배척과 증오로 표출되며 외부의 것들에 대한 배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떠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증오와 배제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다. ‘안전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때만이 세상을 객관적이고 평화롭게 바라볼 수 있다. 익숙한 삶에 고착될수록 불안과 공포는 더욱 커진다. ‘떠남’의 첫 번째 태도는 익숙함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공간적인 안정에서, 제도의 보호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삶과 자유를 선택했을 때 집착을 벗어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때만이 떠날 수 있다. 현재의 익숙함에 매어있는 한, 떠남은 불가능하다.
‘로드무비’ 속 인물들은 떠날 때, 어떤 미련도 갖지 않는다. 아니 현재의 삶이 그들을 떠나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떠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고래사냥>의 병태(김수철)은 배척받고 무시된다. 그의 내면적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 또한 자신이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고래를 잡으러간다는 것은 내면의 숨겨진 진실을 찾는 작업이다. 그것은 ‘떠날’ 때만 얻게 되는 자유를 향한 여정일 것이다. <만다라>의 법운(안성기)도 오랜 방황 끝에 새로운 ‘떠남’을 시작한다. 그때 그는 오랫동안 애증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만나 모든 것을 용서하고 끊어낸다. 그들은 익숙한 것과의 이별을 통해 떠남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여행은 무엇과 이별해야 할까? 현실적으로 모든 소속, 친구, 가족, 직장과 이별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에 대한 집착과 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누구에 의해서도 나의 정신이 지배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혼자가 되어 홀로서기를 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자폐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과잉화된 ‘일반화된 타자’와 거리를 두는 능력의 획득을 말한다.”
2. ‘떠날 때’ 준비해야 할 것
‘여행’을 떠날 때 많은 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때론 준비한 것이 짐으로 인식될 때가 있다. 더구나 우리의 ‘떠남’은 귀환을 위한 여행이 아니다. 떠남은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다. 오랜 전, 인류의 성자들도 떠날 때 많은 것을 지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려는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주고 따라오라고 말했다. 싯달타 또한 부와 지위를 모두 버리고 떠났다. ‘떠날 ’ 때, 사람들이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은 물질적 재산이다. 정착한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경작한 논밭이며, 살던 집이며, 기르던 가축들 때문이다. 때론 부가 여행을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부’에 집착하는 한, 여행은 본질적 성격을 잃고 만다. 자신의 내면을 찾기 위한 여행에서 ‘부’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다면 현재의 안정에 미련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여행은 ‘귀환’을 생각하는, 과시하기 위한 여행에 불과하다.
로드무비 속 인물들의 물질적 재산은 없다. 거의 빈털터리 가깝게 물질적 소유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고래사냥>에서 왕초(안성기) 옷 속에 숨겨진 일상의 물품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뿐이다. 그 이상은 여행에 불필요하다. 오히려 물질적 빈곤이 동행자들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기회로 작용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이기성을 탈피하고 타인의 고통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지켜야 할 물질이 없기 때문에 여행의 과정이 불안하지 않은 것이다. <바보선언> 속 인물들도 여행 중에 생활자금을 얻기 위해 임시로 일을 한다. 그들의 빈곤이 경험의 풍부함으로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것이 없기 때문에 외부의 것과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살아가게 했던 것이다.
‘새로운 길’을 떠나는 사람들도 현재의 부에 집착한다면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할 것이다. ‘부’는 집착할수록 그에게 불안을 가중시키고 그의 자유를 빼앗아간다. 재산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어떤 연구조사는 부에 대한 집착에서 파생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부에 대한 집착은 권력에 대한 집착과 동일하다. 끊임없이 지나간 것과 어리석음에 집착하는 것이다. 결국 집착은 사회적 문제를 확산시키고 인간관계를 파괴적으로 만들어간다. 진정한 내면을 찾기 위한 여행에서 부는 어떤 해답을 주지 못한다. 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만이 ‘떠난 후’의 정신적 자유를 확장시킬 것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버리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무소유는 자기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나는 난을 던지고서야 나를 바라보는 눈을 뜰 수가 있었다.”
3. ‘떠난 후’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오직 인간이자 여행자로 본다. 반대로 정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고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방어하고 외부의 것들을 배척한다. 여행자에게 고착된 것은 없다. 그는 다만 그것을 응시할 뿐이다. 그때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신분이나 지위, 외부적 특징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여행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들일 뿐이다.
<만다라>에서 법운은 괴팍하지만 진리에 대한 특별한 동행자를 만난다. 지산(전무송)이라는 파계승은 법당에서는 결코 조우하지 못할 존재였다. 법운도 만행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지산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바보선언>에서 여행자들은 찌질한 이유로 만나고 동행하지만, 그러한 동행도 개인의 존재가 공격받고 존엄함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단단한 연대로 작동한다. 혜영(이보희)이 부유층 사내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동칠(김명곤)과 육덕(이희성)은 그들을 공격하여 응징한다. 어떤 관계도 아니지만 동행했다는 것은 인간을 오직 인간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힘을 제공한 것이다. 영화 속 연대는 구체적 현실에서 경험되는 “타자의 고통과 굴욕에 대한 감수성”에서 나타난 보편적인 분노였던 것이다.
길 위에는 수많은 고통과 비극이 진행되지만, 떠나지 않고 폐쇄된 공간 속에 숨어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은 세계일뿐이다. 보이지 않지만, 진행되고 있는 고통은 결국 이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동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자들을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최상의 상황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거대한 악에서 비롯되는 재난에 최소한의 연민 밖에 느끼지 못하는데 자신은 그런 재난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겪는 재난을 못 본 척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일반적으로 잔혹감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감정은 자신의 운명이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겨난다.”타인이 겪는 고통은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감춰진다. 오직 길을 떠나 고통과 직면할 때만에야 보이는 아픔이다. 고통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 무관심한 자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침묵과 무감각함이 도덕적 대가를 지불하고 나면 머지 않아 당신이 살고 있는 곳 근처에서 혼란과 무법의 정치적 댓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4. ‘길 끝’에서 만나는 죽음
우리의 떠남은 돌아오지 않는 여행이다.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죽음을 생각했기 때문에 삶의 진리를 추적하는 성찰의 길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언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른다. 오랜 여행의 시간을 허락할지도, 아니면 떠나자마자 다가올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죽음에 대하여 불평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았는가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스토아 철학자 무소니우스는 “축복받은 자는 늦게 죽은 자가 아니라 잘 죽은 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만다라>에서 지산은 술을 마시고 암자로 돌아오다 추위에 얼어 죽는다. 법운은 지산을 화장하면서 그의 삶을 생각한다. 지산은 비록 종단에서 파계되었고, 수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법운은 그가 참다운 진리와 인간의 본질을 찾아 노력했음을 안다.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이 그를 화장해주었다는 것은 지산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떠남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줄 뿐 아니라, 죽음의 의미도 부여한다. 죽음은 예측할 수 없지만, 죽음이 오기 전에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며, 지산은 ‘잘 죽은 자’였다. 반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속의 부자 노인은 자신의 과거에서 완전하게 해방하지 못한 채 길을 떠났기에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병들고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은 오직 타인에게 종속된 인물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죽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맞을 것인가, 아니면 타인들에게 종속될 것인가’ 는 그 죽음의 존엄과 가치를 결정한다.
죽음을 여행의 과정으로 보았던 또 다른 작가도 있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시 <생의 계단>에서 죽음을 여행에 대비하면서 죽음에 대한 자유로운 정신과 태도를 강조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그러면 임종의 순간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하리라.”길을 떠난 우리에게 죽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문제이며, 결정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돌연사이든, 고독사이든 중요하지 않다. 삶이 ‘죽음’을 표현할 뿐이다.
5. ‘길 위’에서 만나는 역사와 사회
길을 떠나는 행위는 철저하게 개인의 일이며, 개별적 결정이다. 하지만 길은 혼자만 걷지 않는다. 그 길은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고, 여전히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분명 ‘떠남’은 인간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향한 출발이고 여정이지만, 그 속에 숨겨진 역사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이다.
<길소뜸>은 자식을 찾기 위한 여행을 통해 삶의 역사적 의미를 탐색한다. 이 영화는 길 위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묻고 있다. 80년대 나온 많은 한국전쟁 관련 영화나 드라마들은 비극과 화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념적 갈등과 증오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복수의 연쇄를 가져왔는가를 보여주면서, 화해와 용서의 필요성을 말했다. 하지만, <길소뜸>의 접근 방식은 ‘화해’와 ‘용서’만으로 역사의 상처가 쉽게 아물 수 없다는 점을 냉정하게 말해준다. ‘용서’가 심리적인 안정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현실의 비극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현재의 행복을 위해서 과거의 상처를 망각해야 하는가? 그것 또한 쉽지 않은 결정이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서도 역사의 상처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내의 유골을 북쪽 고향땅에 뿌리려했지만 실패한 후, 여행 중에 만난 여인(이보희)과 새로운 삶을 결심한 남자(김명곤)는 아내의 유골을 여관 안마당에 뿌린다. 하지만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떠나는 배에서 신내림을 당한 여인의 처절한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역사의 상처는 그렇게 쉽게 해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길을 출발하는 사람에게 역사의 문제는 우리가 ‘대한민국’의 길을 걷는 한,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현실적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여행자의 눈으로 접근하고 바라볼 때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대한민국 현대사의 쟁점은 ‘피해 당사자가 사라져 자연스럽게 망각되어야 하는 것인가, 희생자가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을 때,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역사를 현재적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의 과제이다. 역사적 체험 당사자들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최소한의 비극적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럴 때만이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에서 역사의 진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떠나는 여행자에게 이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새롭게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과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이다.
Ⅳ. 나오는 글
‘나이듦’에 대한 문제에 80년대 로드무비를 적용했을 때, 영화 속 내용이 반드시 ‘나이듦’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거나 명백한 주제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 속 ‘열린 태도’이자 ‘포기하지 않는 용기’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명백하게 해결할 수 없는 과제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떠날’ 뿐이다. ‘떠남’은 포기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떠남’은 성취가 아닌 과정의 중요성을 보여줄 뿐이다. 그때에만 길 끝에서 만나는 결과와 관계없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이듦’은 ‘연령차별주의’가 공격하는 냉소적 시선의 범주로 묶여서는 안 된다. ‘나이듦’은 개인적인 안전을 위하여 ‘생산적인 노화’에 몰두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남은 모든 자원을 쏟아 붓는 탐욕을 넘어서야 한다. ‘나이듦’은 신체적인 퇴행과 정신적인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현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멈추지 않는 ‘새로운 길을 떠나는’ 나이듦이 되어야 한다. 분명 ‘떠나는’ 나이듦이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허용될 수는 없다. 신체적 질병과 경제적 빈곤이 그 길을 막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길’을 향한 출발은 가능하다. ‘정신적 자유’가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도할 수 있는 여행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앞에서 언급한 핵심적인 태도일 뿐이다.
‘새로운 길을 떠나는’ 나이듦은 결국 자기 내면의 실현이다. 푸코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타자에 대한 증오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해방을 향한 길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악의적이고 사악하며 적대적인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관찰해야 하고 유지해야 하는 곧은 행보 내에서 자기 자신에 몰두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자신에 몰두해야 합니다.”우리의 삶은 외부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평가한 ‘내면’의 성숙도를 통해 완성될 것이다. 진정한 사회적 혁명 또한 이러한 개인의 ‘내면적’ 변혁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 글은 점점 확산되고 있는 고령화 속에서 ‘나이듦’이 과거의 프레임처럼 ‘돌봄’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촉매’적 역할이 될 수 있음을 탐색하였다. ‘나이듦’은 이제까지 역사의 중심에서 사회적 변화를 이끈 청년들의 열정 못지않게 새로운 변화를 이끄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의무와 생계적 부담에서 해방된 ‘나이듦’은 생존의 불안 때문에 변화를 시도하지 못했던 시간에서 남아있는 날들에 대한 실존적 가치를 확인하는 시간으로 도약할 수 있다. 80년대 로드무비가 지닌 ‘삶의 지혜’를 검토한 것은 ‘새로운 길을 떠나는’ 나이듦을 향한 점검이다. ‘새로움’이란 언제든 불안과 압박을 동반한다. 더구나 신체적 노화와 정신적 약화가 시작된 ‘나이듦’에서 새로움은 피하고 싶은 대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탐색하고 싶다면, 사회적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고 싶은 의욕이 있다면, ‘떠남’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은 ‘용기있는 자’만이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남아있는 날들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
첫댓글 - ‘죽음’을 향해 가는 여행! ‘떠날’ 때만 얻게 되는 자유를 향한 여정!! 죽음을 생각했기 때문에 삶의 진리를 추적하는 성찰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