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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2026년 2월 7일 (토)
2. 날씨: 맑음 (추위)
3. 경로: 분황사 - 구황동 모전석탑지 - 황복사지 삼층석탑 - 진평왕릉 - 보문선원 - 설총 묘 - 보문사지 - 수오재 - 효공왕릉 - 신문왕릉 - 사천왕사지 - 선덕여왕릉 - 능지탑지 - 마애보살삼존좌상 - 독서당 - 미탄사지 삼층석탑 - 황룡사지 - 원점회귀
4. 거리: 약 14km
5. 소요시간: 3시간 반
6. 코스정보 : 분황사, 황룡사, 진평왕, 신문왕, 선덕여왕,
7. 지역: 경주시
8. 트랙:
9. 코스지도
[분황사]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창건된 사찰로, 원효대사와 자장법사가 머물렀던 역사 깊은 절이다. 절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모전석탑이 있으며, 이는 통일신라 이전에 세워진 대표적인 전탑 양식이다. 모전석탑은 본래 5층 이상이었으나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사리장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탑 1층에는 감실과 수문장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사자상도 함께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돌우물인 삼룡변어정이 있으며, 호국용 전설이 전해진다. 이 우물은 1965년 석불 14구가 출토된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분황사에는 약사전, 약사여래입상, 석등, 대석 등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다. 화쟁국사비부는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석의 받침돌로, 고려 명종 때 만들어졌다. 현재 분황사는 역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고찰로 평가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나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 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분황사 홈페이지)
[분황사 모전석탑] 삼국시대 신라의 석탑이다. 이 탑은 석탑이면서도 안산암이란 돌을 벽돌처럼 잘게 잘라서 쌓아 올린 이른 바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서도 주목 받고 있다. 그러나 탑의 기단과 탑신의 받침돌, 그리고 사방의 탑문과 문기둥은 화강암으로 축조하여 석탑의 잔재도 보여주고 있다. 1층 탑신에는 사방에 탑 속으로 방을 만들고 역시 화강암으로 두 짝의 출입문을 달았으며 양쪽의 문기둥에는 탑을 지키는 인왕상이 새겨져 있다. 이와 함께 기단의 네 귀에도 사자상을 배치하여 탑을 호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탑신은 전탑(벽돌탑)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기둥이 없고 지붕은 위아래가 모두 층단을 이루고 있으며 1층 탑신은 높이가 매우 크지만 2층부터는 탑신의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지붕을 여러 층으로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의 전탑이나 모전석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탑신의 층수도 5층 이상으로 설계되는 것이 보통이다. 현재 이 탑도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탑이었다고 전해지며 1915년에 탑을 수리할 때 탑 속에서 사리를 봉안한 여러 가지 장치기구들이 나왔고 이때 고려 시대의 동전도 함께 나와 이 탑이 고려 시대에도 한 차례 수리공사를 거친 것으로 판명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구황동 원지 유적 일원]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인공연못 유적이다. 원지(園池)의 전체 형태는 동북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방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이고, 규모는 남북 최대 길이 46.3m, 동서 최대 너비 26.1m이다. 왕궁 내의 월지(月池), 용강동 원지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조경 사례를 보여주는 왕경 원지 유적으로서 가치가 높다. 2019년 2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낭산]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왕실 및 불교 유적 관련 산으로 해발 115m, 102m, 100m의 3개 봉우리를 중심으로 긴 능선이 남북으로 이어진 야산이다. 신라시대에는 3사(三祠) 가운데 대사(大祠)를 받들던 중악(中嶽)으로 서라벌의 진산(鎭山)이어서,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실성왕(402∼416) 때는 ‘신유림(神遊林)’이라고 하여 성스러운 산으로 추앙하였다. 곧『삼국사기』권3 실성이사금조에는 “낭산에서 구름이 떠올라 바라보니, 마치 누각과 같고 향기가 짙게 퍼지며 오랫동안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왕이 ‘이것은 반드시 선령(仙靈)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것이니, 아마 이 땅은 복지(福地)일 것이다’고 하면서, 이 때부터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의 서쪽에 반월성, 동궁 및 월지 등이 위치하여, 신라 왕실과 매우 밀접히 연관된 산으로 알려져 있다.
낭산에 분포한 대표적인 유적은 산의 남쪽 끝에 있는 사천왕사(四天王寺)터와 망덕사(望德寺)터를 비롯하여 동북쪽에 자리잡은 황복사(皇福寺)터, 서쪽 가운데에 위치한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陵只塔), 남쪽 봉우리 아래의 선덕여왕릉 등이다. 황복사는 신라 왕실의 기복사찰이었는데, 절터 주변에서는 ‘황복(사)(皇福(寺))’, ‘왕복(王福)’과 같은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삼층석탑 앞에 금당터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여러 개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묻혀 있다가 발견되었고, 그 남쪽에서는 2구의 석조 귀부가 파손된 채 남아 있었다. 또한 절터 주변에서는 글자가 새겨진 비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비문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사적비나 탑비로 추정된다. 황복사터의 삼층석탑은 1942년에 중수할 때 발견된 2구의 순금 불상과 사리구를 비롯하여, 금동함에 기록된 탑지(塔誌)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왕실의 기복을 위하여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릉 아래에는 사천왕사터가 자리하고 있다. 사천왕사는 망덕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사찰로, 문무왕 때 명랑(明郎)의 비법에 의하여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 호국사찰이었다. 금당터 앞에 배치된 목조 쌍탑터는 통일신라시대 사원 건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앞에 놓인 2구의 석조 귀부 가운데 하나가 문무대왕비였던 점도 사찰 건립의 배경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당시 활동하였던 조각의 명장(名匠)인 승려 양지(良志)의 작풍(作風)을 알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동해남부선이 금당터와 강당터를 가로질러 개설되면서 유적 전체가 파괴되었다. 현재 원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낭산의 서북쪽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을 바라보는 곳에 신라 말 유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책을 읽었다는 독서당이 남아 있으며, 그 아래에는 신라시대의 목탑터 또는 건물터가 있어 옛 자취를 살필 수 있다. 한편 독서당 남쪽에는 절터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그밖에도 일제강점기 때 옮겨진 석조관음입상을 비롯하여 여러 석탑의 부재가 흩어져 있다. 특히 독서당과 능지탑 사이에 자리한 중생사(衆生寺)의 마애지장보살상은 유례가 희귀한 피모보살상(被帽菩薩像)으로 알려져 있다. 능지탑 동쪽 마을은 강선리(降仙里)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옛 사적에 따라 붙여진 전통적 이름이며, 마을 주변에서도 흩어져 있는 탑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낭산은 경주의 역사·인문·지리적으로 중요한 산이며, 신라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산이다. 특히 선령이 깃든 신유림에 위치하여 신라 고유 정서와 불교가 함께 흔적을 남겼고, 호국사찰인 사천왕사와 망덕사가 자리하여 신라 국가를 지키는 호국사상이 부각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복사지 삼층석탑] 통일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국보)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활산] 경주시의 동쪽 보문동과 천군동 사이에 솟아 있는 산이다(고도 : 204m). 신라 수도의 중심지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문헌에 등장하였다. 삼국사기에 6촌 중의 하나로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 나와 명활산이 신라 건국 이전부터 중요하게 인식된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405년(신라 실성니사금 4), 431년(신라 눌지마립간 1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한 것 등 많은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명활산성은 원래 토성이었다가 554년에 석성으로 바꾸고, 593년에 현재의 크기로 증축한 것으로 있다. 647년(신라 선덕여왕 16) 비담의 난 때는 김유신파가 월성을, 비담파가 명활성을 각각 점유하여 각축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경주가 신라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자 명활성의 활용가치가 떨어져 지속적으로 관리되지 못하였고, 아울러 명활산의 인식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에는 명활산이 경주부 중심지의 동쪽 11리에 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경주부 중심지의 풍수적 인식이 강화되면서 명활산의 가치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동경잡기에는 명활산 세주에 경주부 중심지의 산줄기가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인식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진산(鎭山)을 낭산으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평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6대(재위: 579~632) 왕이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토대로 관제 정비 등 지배체제 구축과 정비에 힘썼다. 특히, 초기에는 군사·재정·관리·인사 관련 관서를 주로 정비하였고, 후기에는 관원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였다.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중국 문물과 제도를 신라에 반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석가불 신앙을 내세우면서 입당 구법승을 적극적으로 파견하여 불교사상을 통해서도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고구려·백제와 치열한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설총]은 신라의 이름난 승려인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라의 제35대 임금인 경덕왕 때 주로 활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신분은 6두품이었다. 6두품은 신라 사회에서 왕족 다음가는 신분을 가리킨다. 성골이나 진골을 제외한 두품 중에서는 으뜸으로, 아찬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지낼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설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똑똑했다고 한다. 유교의 경전은 물론이고 역사에도 남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향찰을 체계적으로 모아 정리한 일이다. 향찰이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 중 하나를 뜻한다. 조선 초기에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이전에는 향찰과 같이 한자로 우리말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총이 향찰을 정리하면서 한자를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어 유학과 한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문동 사지]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터로서 199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88,485㎡. 이곳에서 ‘普門(보문)’이라고 새긴 평기와가 출토되고 있어 보문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금당지(金堂址) · 동서목탑 등의 건물터와 석조(石槽) · 당간지주(幢竿支柱) · 초석 · 석등부재(石燈部材) 등이 남아 있지만, 절터의 대부분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금당지의 높이는 경작지의 표토에서 1m 정도이며, 흙으로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배치되어 있다. 목탑지는 금당지 앞의 높은 단 위에 남아 있는데, 서탑지의 중앙에 남아 있는 대형초석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서쪽에 69㎝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상대하고 있는 두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북쪽의 논 가운데 62㎝의 간격을 두고 동서방향으로 있는 두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1987년 지정)의 높이는 1.4m이다. 이 밖에도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비롯하여 석등의 옥개석(屋蓋石) 및 장대석(長大石) 등의 석조물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효공왕] 통일신라의 제52대(재위:897~912) 왕이며,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요(嶢). 헌강왕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또는 文資王后)로 추존된 김씨부인이다. 할아버지는 경문왕이고, 할머니는 헌안왕의 장녀 영화부인(寧花夫人)이며, 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해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진성여왕 9)에 태자로 봉해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재위시 신라의 형세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신라는 907년에 서남쪽에서 점점 세력을 키운 견훤에게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이남의 10여 성을 빼앗겼다. 한반도에서 궁예와 견훤의 세력다툼은 점차 열기를 더해갔다. 이런 정세 속에서도 신라왕실의 실정(失政)은 계속되어, 911년에는 대신 은영(殷影)이 효공왕의 천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기까지 하였다. 승하한 뒤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또는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仇智堤) 동산(東山)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문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1대 왕이로 재위 기간은 681~692년이며 문무왕의 장자이다. 즉위하던 해에 일어난 귀족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고 철저히 숙청함으로써 왕권을 공고히 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앙관제의 정비, 5소경제와 9주 및 군현제의 완성 등 지방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전제왕권 중심의 통치질서를 완비했다. 9서당제 군사조직을 완성했고,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를 차등 지급해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긴 평화의 상징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천왕사지] 경주시 낭산(狼山) 남동쪽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터로서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 문호왕 법민조(文虎王 法敏條)에 기록된 건립 설화를 보면, 삼국통일 직후인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되었으며, 경주 망덕사(望德寺)보다 5년 앞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675년(문무왕 15) 당나라의 50만 대군이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하여 이곳에 채백(彩帛)으로 가사(假寺)를 만들고 초목(草木)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고 명랑법사(明郞法師)가 12명의 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자 교전(交戰)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가사(假寺)를 사천왕사로 고쳐짓고 국찰(國刹)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문종 때에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도량을 27일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사찰이 유지된 것을 알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김시습의 시 '유금오록(遊金鰲錄)'을 통해, 15세기 후반 경 이미 민가(民家)로 변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수습 조사된 바 있으나 전제적인 가람배치와 녹유소조상의 배치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확인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덕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32~647년이며, 진평왕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당과 연합하여 국가를 보존하려 했고, 백제의 침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이 함락되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에 유학 중이던 자장을 귀국시켜 불교사상을 왕권강화책으로 적극 활용했고, 호국 중심 사찰인 황룡사에 왕권의 상징물로 구층목탑을 건립했다. 비담 등 진골 귀족들의 반란 와중에 재위 16년 만에 죽었다.
[선덕여왕 설화] 선덕 여왕은 재임 중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아 왕으로서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먼저 당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씨앗 석 되를 보내 왔는데 이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았다. 다음으로 영묘사옥문지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울어댔는데 이것을 보고 서쪽 교외의 여근곡에 정병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끝으로 자신이 죽을 해, 달, 날을 예언하여 도리천 가운데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것이 <모란설화> 유형이다. 이 외에도 <지귀설화> 유형이 있다. 신라 사람 지귀(志鬼)가 선덕 여왕의 아름다움에 빠져 왕을 만나기를 학수고대한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영묘사에서 그를 만나려 하지만 지귀는 영묘사 탑 아래에서 깊은 잠에 빠져 만나지 못한다. 왕을 기다리다 잠들어 만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한 지귀는 마음에 화가 일어 몸을 태우고 화귀(火鬼)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능지탑지] 이곳은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으로 불렸던 능지탑이 있던 자리이다. 무너진 채 버려져 있던 탑을 신라삼산조사단이 1969년부터 수차례 조사하여 197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능지탑은 원래 기단의 네 면에 십이지신상을 세워 넣고 연꽃 모양의 무늬를 새긴 돌을 쌓아 탑신을 만든 5층탑으로 추정된다. 또한 발굴 중에 소조불상의 파편과 많은 양의 기와 조각들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탑의 네 면에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기단부는 돌을 다듬어 쌓고 윗면은 흙을 덮어 잔디를 심었다. 기단부 둘레에는 십이지신상 중 9구를 방위에 맞게 안기둥처럼 세웠다. 이중 8구는 낭산 동쪽 황복사 터 앞에 있던 미완성된 왕릉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기단부 위쪽의 탑신부는 기단부와 같은 형태로 돌을 다듬어 쌓았는데, 위쪽에 굄돌을 한 단 더 올린 점이 기단부와는 다르다. 탑의 꼭대기는 사모지붕 모양으로 흙을 쌓아 마감하였다. 현재 탑 주변에는 정비하면서 사용하고 남은 연꽃 모양을 새긴 돌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토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자신이 죽으면 10일 내에 왕궁 바깥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탑에서 가까운 사천왕사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어 경주 능지탑지에서 문무왕을 화장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능지탑이 능시탑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경주시 낭산(狼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마애불 불상군으로 198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88㎝. 중앙의 본존불은 경주 남산의 불곡(佛谷) 불상처럼 얕은 감실(龕室) 속에 부조된 좌상이다.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는 거의 표현되지 않았으며, 둥글고 비만한 얼굴은 광대뼈가 나오고 살짝 미소를 띤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탄사(味呑寺)]는 신라시대에 있었던 절로, 미탄사 남쪽에 최치원(崔致遠)의 옛 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황룡사(皇龍寺) 남쪽 200m의 사지(寺址)가 미탄사지(味呑寺址)로 비정된다. 창건연대나 폐사 시기 등은 알 수 없으나, 황룡사(黃龍寺) 남쪽이라는 기록에 따라 현재 황룡사지 남쪽 200m의 경주시 구황동 433-1번지에 위치한 삼층석탑 주위를 미탄사지(味呑寺址)로 비정하고 있다. 1980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로 기와편, 토기편, 석재 등이 출토되었으나, 토층의 교란이 심하여 사찰 영역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파괴된 탑재(塔材)를 모아 삼층석탑으로 복원하였는데, 9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된다.(네이버 지식백과)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皇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 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바람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불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 풍탁, 금동귀걸이, 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벽화의 소나무를 새들이 실제 나무로 알고 날아와 부딪쳤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룡사 전설] 신라 진흥왕 14년(553) 2월에 용궁 남쪽에 자궁(紫宮)을 지으려 하니, 황룡이 나타났다. 이를 이상히 여긴 왕은 궁을 사찰로 바꾸고 황룡사라 하였다. 이곳에 과거 부처인 가섭불(迦葉佛)이 좌선을 하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이 땅이 전불(前佛) 시대의 절터였다. 인도의 아쇼카 왕이 삼존불상을 주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철과 금, 불상의 모형들을 배에 실어 보내며, 인연 있는 곳에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기를 바랐다. 배는 신라 하곡현에 떠내려 왔고, 574년에 진흥왕은 이 금과 철로 황룡사에 장육존상을 주조해 모시게 했다.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땅이 흠뻑 젖었는데, 대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이 왕에게 청하여,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구층의 목탑을 조성하게 했다. 백제에서 온 공장(工匠)인 아비지(阿非知)로 하여금 목재와 석재로 탑을 짓게 하였다. 무열왕의 아버지인 용춘(龍春)이 이를 주관하였다. 아비지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는 일손을 멈추었는데, 문득 땅이 진동하며 어둠 속에서 노승(老僧)과 장사가 금당문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구층탑은 일본, 중국, 오월 등 주변 나라들의 침범을 막는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후 탑은 여러 차례 벼락을 맞아 계속 중수되었는데, 고려 고종 16년(1238)에 몽골의 병화(兵火)로 장육존상, 황룡사 전각과 함께 불에 타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