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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하여 안수하니라 (행 6:1-7)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가 공산국가들 다음으로 투표율이 높은 국가라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마 사오십 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십 수 년 전에는 칠십 퍼센트에서 최고 팔십오 퍼센트까지 기록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 같은 공산독재국가야 잘 알다시피 강제동원에 의하여 거의 일백 퍼센트에 가까운 투표율을 자랑하고 있지만, 자율적으로 투표를 실시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칠팔십 퍼센트의 투표율을 기록하는 것은 좀처럼 찾기 힘든 현상입니다.
물론 투표율이 높은 것은 ‘정치 참여도’라는 의미에서는 두말할 필요 없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우리나라의 투표율이 그처럼 높았던 것은 그렇게 좋은 의미로 해석되기보다는 무언가 선거에 대한 과열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무 중에 하나인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정말 조금이라도 더 나은 후보자가 선출되게 해야겠다는 마음 대신에, 소위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치한 지역감정에 사로잡힌 가운데 특정 정당 출신에게 무조건 표를 몰아주려고 투표장에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런 빗나간 선거 열풍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곤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했던 어느 한인교회에서 직분자 선출이나 목사 청빙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공동의회를 모이는 주일에는 보통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교인들이 출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평소에는 주일을 잘 빼먹던 교인들, 혹은 몇 달 이상 한 번도 출석하지 않고 있던 장결자들까지도 갑자기 그 주일만큼은 반드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그런 교인들일수록 공동의회 도중에 말은 제일 많이 하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그냥 차분한 발언이 아니라 무슨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정의의 투사’나 된 것처럼 침을 튀기고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열변을 토해 내는 장면까지 흔히 연출하곤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공동의회 때에 보여 주는 그런 열심과 정열의 ‘반의 반’만이라도 평소의 교회생활에서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한 교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첫 공동의회는 예루살렘교회에 첫 일곱 집사들을 세우기 위해 모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어떤 정치적인 분위기 가운데 모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공동의회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경건한 행사였고, 질서 있게 진행되었으며, 또한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마쳐진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교회의 첫 공동의회를 통하여 교회가 직분자를 선출할 때 피택 후보자나 성도들이 공히 심령에 깨닫고 명심해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직분자를 선출하는 목적은 ‘교회를 더욱 온전하게 세우기 위함’에 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2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계속되는 핍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제자가 더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으니 오늘날로 치자면 개척교회의 창립예배를 드리는 주일부터 이미 대형교회로 시작한 셈이었으며, 어쩌면 이때쯤에는 출석교인들이 이미 만 단위에 이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교인들이 모이게 됨으로써 한 가지 ‘교회 행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구제사업’에서 나타났습니다.
1절 하반절에 기록된 대로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헬라파 유대인’이란 바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즉 오랫동안 이방 지역에 흩어져 살다가 보니 자연히 모국의 언어를 잊게 되고 그 대신에 평상시에 주로 헬라어 즉 그리스어로만 의사소통을 하게 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돌 그룹에 보면, 어릴 때부터 주로 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영어는 잘하지만 우리나라말이 서툰 멤버들이 섞여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앞서 언급했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이후에 그런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서 예루살렘교회에 들어오게 된 교인들이 많이 생겼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사람’이란 평상시 언어는 아람어를 구사하면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읽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전히 ‘헬라화’되지 않았던 ‘토박이 유대인’ 출신 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쪽이 수적으로 더 많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히브리파에 속한 교인’들이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구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루살렘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던 ‘사도’들이 모두다 ‘히브리파 사람’들이었으니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독 ‘헬라파 유대인’에 속한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의도적인 차별대우라기보다는 아마도 ‘언어 장벽’ 등이 원인이 되어 자연히 발생하게 된 결과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지금까지 온갖 외부의 박해들을 거뜬히 이겨내고 승승장구하고 있던 예루살렘교회가 오히려 안에서 둘로 갈라지려는 내분의 위험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열두 사도”들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즉시 “모든 제자를 불러” 모았습니다.
여기서 ‘모든 제자’란 ‘예루살렘교회의 교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오늘날로 말하자면 바로 ‘공동의회’가 모인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이런 문제가 생겼으니 해결책을 찾아야겠다.’는 것이 그 공동의회가 모이게 된 동기였고 곧 이어 집사를 선출하게 된 목적이었습니다.
즉 예루살렘교회의 첫 ‘일곱 집사’는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사람’들 사이의 무슨 ‘파워 게임’의 결과로 선출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교회의 건전한 발전에 걸림이 되는 문제를 즉시 제거하고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한 목적 하나 때문에 피택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첫 예루살렘교회도 결코 완전무결한 교회는 아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지상에 ‘완전한 교회’라는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만약 ‘완전한 교회’라는 것이 있다면 도대체 누가 그런 교회의 교인이 될 만한 ‘완전한 자격’을 갖출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처럼 지상교회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한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자기 교회를 조금이라도 더 완전한 교회로 세우고자 하는 열성과 사명감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며, 직분자는 더욱 그러해야 마땅합니다.
어느 외국 정치가가 우리나라 정치가들을 비판하면서 “한국 정치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바로 애국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외국 사람의 말이라고 다 옳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 비판만큼은 정말 우리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말이라고 절실히 공감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치가가 되려는 사람과 ‘권력에 대한 욕심’만이 동기가 되어 정치가가 되려는 사람 사이에는 그 기본적인 자질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교회의 직분자는 어떠하겠습니까?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직분을 맡게 되는 사람과 그저 ‘교회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서게 되는 사람 사이에는 실로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하든지 ‘교회가 잘되도록 해야 하겠다는 일념’과 ‘교회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곧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나갈 사명감’을 가진 직분자가 세워져야만 그 교회의 미래에 희망이 생길 수 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 공동의회를 통해서 이처럼 항상, 무조건 ‘교회 쪽에 서는 사람’을 세움으로써 우리 경향교회를 이전보다 더욱 온전하게 세우고자 하는 목적을 반드시 성취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직분자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궁극적으로 ‘목사의 말씀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3절과 4절 말씀에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2절 하반절을 다시 보면, 사도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공궤”란 문자적으로는 ‘식탁에서 시중드는 일’을 뜻하며 바로 ‘집사’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교회의 공적 구제사업’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초창기에는 사도들이 직접 교회의 구제사업을 일일이 관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4장 37절에 나오는 대로, “바나바”와 같은 교인들이 자기 부동산을 팔아서 특별헌금을 바치면 그것으로 가난한 교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특히 당시의 과부들은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길이 사회적으로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예루살렘교회에서는 그런 과부를 경제적으로 돕는 구제사업이 교회의 대표적인 행정업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인의 숫자가 수천 명으로부터 만 명에 육박하게 되자 열두 사도들이 그 일을 직접 맡아 수행하는 것은 절로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결과 ‘헬라파 유대인’ 교인들로부터 불평의 소리까지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도들로서는 자기네의 리더십에 대하여 처음으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열두 사도들은 문제의 초점을 정확하게 찾아내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네 직무의 최우선이 어디에 있어야만 하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입니다.
“공궤” 즉 구제사업도 교회가 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적어도 사도들이 “일삼아” 전념해야 할 최우선의 업무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구제사업은 사도가 아니라도 능히 잘 해낼 수 있는 교인들에게 맡기고 자기네들은 어디까지나 사도 고유의 직무 곧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첫 일곱 집사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교회의 행정 업무에 마음과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마땅히 전념해야 할 영적 사역에만 더욱 집중하고 충실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의 직분자들이 세워졌던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결코 목사가 ‘팔방미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목사가 교회의 모든 세세한 일들까지 자기 혼자 다 처리하려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어디까지나 ‘강단’을 지키면서 ‘설교 사역’을 최우선으로 삼고 거기에만 최선을 다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훈도권’ 즉 ‘성경 말씀으로 가르치는 권한’이 교회 안에서 오직 목사에게만 주어진 신성한 직무인 것을 망각하는 목사는 자기가 지켜야 할 자리를 이미 스스로 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면에 장로는 자신의 직분이 무슨 ‘목사의 독재’를 막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결코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월급 주는 사람이 높나, 받는 사람이 높나?’ 하면서 마치 장로가 목사 위에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야말로 장로교회의 질서와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는 심각한 악습입니다.
소위 ‘민주주의의 삼권 분립의 원칙’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한인교회 중에 제직회 회장을 목사가 아니라 장로도 아닌 집사 중에서 선출하는 교회도 제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제직회 석상에서 “지난달에 담임목사가 제직회장에게 사전 동의를 얻지 않고 지출한 돈이 있다.”라고 목사가 집사로부터 공적으로 책망(?)을 듣는 꼴까지 당했는데, 그런 수치는 그야말로 그 목사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로나 집사는 목사를 견제하거나 혹은 다스리기 위하여 주어진 직분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운영되어야 하는데, 목사가 바로 그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일’에 전무하는 직분자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를 위시한 모든 직분자들은 목사로 하여금 교회의 다른 일 때문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말씀 사역에만 마음과 힘을 다 쏟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배려하고 전적으로 협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목사의 ‘교권주의’를 옹호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직 ‘성경 중심’으로 세우고자 한다면 교회에서 유일하게 ‘말씀을 맡은 장로’인 목사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장로와 집사와 권사에게 주어진 고유의 직무는 각각 다르지만 그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바로 ‘목사로 하여금 오로지 기도하면서 말씀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 주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깨닫고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직분자에게 요구되는 자격은 ‘그 맡은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신앙과 능력’입니다.
5절과 6절에 기록하기를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 공동의회를 소집한 이유와 집사를 세우기 위한 목적을 온 예루살렘 교인들 앞에 설명했을 때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지기 위하여, 또한 사도들이 그 본래의 직무에만 충실하기 위하여 직분자를 세워야 하겠다는 마음에 하나가 되었을 때에, 거기에는 그 어떤 ‘정치적인 갈등’이나 ‘인간적인 꿍꿍이속’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집사 선출은 오직 모든 교인들이 기뻐하는 가운데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장로, 집사, 권사를 피택하는 공동의회가 다가올 때 목사는 전전긍긍하고 온 교인들은 뒤숭숭해진다면, 그 공동의회는 열지 말아야 할 회의임에 틀림없고 그 피택 후보자들은 직분자로 세우지 말아야 할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직분자 선출이 교회의 ‘기쁜 행사’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걱정거리가 된다면, 굳이 그것을 강행해서 교회 안에 시험거리를 스스로 불러들일 필요가 도대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오직 ‘기쁨’ 중에 집사 일곱 명을 세웠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방법으로 선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경우에는 ‘제비’를 뽑아서 한 것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간혹 모든 교인이나 전 제직들을 장로와 집사 후보로 내놓고 제비를 뽑아서 선출하는 것을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시행하는 교회가 있는데,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가룟 유다 대신에 열두 번째 사도를 보선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그 외 모든 구약의 왕이나 선지자, 혹은 신약의 직분자들을 뽑을 때에는 전혀 사용된 적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집사를 선출할 때에도 그들 가운데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택하여” 즉 ‘골라서’ 사도 앞에 “세웠다”고 했습니다.
즉 ‘전 교인 후보’나 ‘무작위 추출’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자격을 갖춘 사람을 어떤 합리적인 선출 방식을 사용하여 뽑았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사도들은 그처럼 피택된 일곱 집사에게 “안수”함으로써 정식으로 그들을 교회의 집사로 임명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그 일곱 집사가 모두 다 ‘헬라파 유대인’ 식의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히브리파 사람’들 중에서도 헬라식 이름을 가진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며 본문에 나오는 “빌립”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그 ‘빌립’을 제외한 다른 여섯 명의 이름들은 모두다 유대 본토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안수를 받은 예루살렘교회의 첫 일곱 집사는 대부분이 다 ‘헬라파 유대인’이었다고 단정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처럼 특별히 ‘헬라파 유대인’들이 많이 선출된 이유는 역시 그 구제사업과 관련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헬라파 유대인에 속한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서 빠지게 되었던 문제를 해결하려고 집사를 세웠으니, 우선 그들과 헬라어로 의사소통부터 잘되는 사람이라야 그 일을 더 효과적으로 잘해 낼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까 3절에서 사도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을 선출하자고 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즉 ‘성령의 감동에 따른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지혜로써 일을 잘해 내는 능력’이 충만한 사람이 곧 예루살렘교회가 필요로 했던 집사의 자격이었던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라야 교회의 장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선입견입니다.
‘말씀을 맡은 장로’인 목사가 적어도 오십 대는 되어야 안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치리 장로’만은 꼭 ‘나이가 지긋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집사나 권사를 교회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교인에게 무슨 명예처럼 얹어주는 직분으로 여기는 것 역시 어처구니없는 발상입니다.
목사고시에 계속 떨어지더라도 한 십년 지나면 그래도 목사로 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집사나 권사 역시 오직 그 직무를 맡을 수 있는 ‘신앙과 능력’이 반드시 구비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지금 경향교회의 ‘젊은 장립집사’들이 좀 더 빨리 ‘장로’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의도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야말로 생애 최고와 전부를 다 바쳐서 충성해 온 ‘경향교회 1세대 당회’의 장로님들과 비교해 볼 때, 지금의 삼사십 대의 젊은 집사님들 중에는 벌써 장로가 되었어야 할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처럼 담임목사와 선배 장로들이 ‘기대하고 있는 집사’들 중에 ‘신앙’ 혹은 ‘능력’에 있어서 아직은 ‘조금 부족한’ 사람들이 꽤 있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삼십 세 즈음’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나이 삼십 정도만 되면 이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정도에 있어서 충분히 성숙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 젊은 교인들 중에서 정말 교회의 일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신앙’이 분명하고 ‘능력’이 있으면 가능한 한 일찍 직분자로 세워서 주의 일을 더 오래, 더 많이 하게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더욱 ‘신앙’과 ‘능력’에 있어서 공히 ‘성령 충만’한 증거를 나타냄으로써 모든 성도들로부터 ‘기쁜 마음’으로 ‘택함’을 받아 주님께로부터 요긴하고도 크게 쓰임 받는 신실하고 충성된 청지기들이 우리 경향교회에 앞으로 더욱 많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교회는 정말 은혜롭게 첫 공동의회를 치렀습니다.
그 결과 7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는” 놀라운 일이 뒤따랐습니다.
그 직분자 피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지는’ 즉 ‘성경중심의 교회가 부흥하게 되는’ 큰 축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다음 주일 밤예배 후에 ‘직분자 피택을 위한 공동의회’를 모이게 됩니다.
이번 공동의회는 이전의 경우보다 좀 더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재작년에 우리 교회가 큰 시험을 당해 거의 교회가 공중분해되거나 파산에 처할 수도 있는 위기에까지 이르렀다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지켜 주심으로써 저와 여러분은 이 경향교회를 통해 그야말로 히스기야 왕처럼 ‘연장된 수한’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경향에 주어진 바로 이 소중한 기회를 결코 허비하지 않고 반드시 부흥과 축복의 새 시대를 이룩하기 위해서 다음 주일의 공동의회를 통해 이 일에 앞장서서 이끌어 나갈 장로, 집사, 권사를 선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의 직분자 선출 공동의회는 저와 여러분에게 실로 다른 때보다 더욱 감격스럽고 기쁜 행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오직 경향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서 이 교회를 더욱 온전히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직분자를 피택해야 합니다.
그 선출될 장로, 집사, 권사들은 각각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목사의 ‘설교 사역’에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인간적인 조건들은 배제하고 오직 ‘성령 충만’하여 ‘신실한 믿음’과 ‘지혜의 능력’을 구비한 자를 세울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친히 ‘안수’해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기쁘게 직분자들을 뽑는 성도가 되고 또한 그렇게 택함을 받은 청지기들이 충성을 다해 교회를 섬김으로써, 앞으로 우리 경향교회를 통하여 ‘제자의 수가 더 많아지고 허다한 무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큰 부흥의 역사를 꼭 함께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