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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태사공(始祖 太師公)
■ 시조 태사공(太師公)에 관한 유래(由來)
1. 출생
시조 태사공은 신라 효공왕(孝恭王) 5년(901년) 흥덕궁(興德宮)에서 태어 나셨다. 공의 용모는 봉(鳳)의 눈과 용(龍)의 수염, 별의 정기(精氣)와 호랑이의 위엄을 갖추셨다. 효공왕은 진성여왕 때의 실정을 만회코자 노심초사하였으나 뜻을 이루시기에 너무 늦었었다. 결국 보좌에 오르신 지 16년 만인 912년에 붕서(崩逝)하였으니 유일한 혈육인 우리 시조는 겨우 춘추 11세로 보위에 오르지 못하시고 경애왕(景哀王) 3년(926) 춘추 26세에 고창(高昌) 성주(지금의 안동시)로 나가셨다. 지리상, 군사상 주요 진성에 성주(城主)가 되셨으니 그 임무 또한 막중한 것이었다.
2. 시대상황
그러나 이때는 왕실내외가 매우 어렵고 복잡한 시기였다. 우선 왕실내부에는 왕위계승이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았고 또 재위기간도 짧았으며 걸출한 왕도 없었다. 특히 경문왕(景文王: 861~875)이후 아들 둘이 즉위하지만 헌강왕(憲康王: 875~886)은 재위기간이 불과 11년 이였고, 정강왕(定康王: 886~887)의 경우엔 1년 이였으며, 딸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이 그 자리를 이어 10년간 통치하였으나 완전히 정치를 망쳐 놓았다. 왕실에서는 하는 수 없이 헌강왕의 서자 효공왕(孝恭王)이 위를 이어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기울어진 왕실의 쇠운을 바로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신라의 서북지방을 살펴보면 죽주(竹州: 竹山縣. 지금의 용인시)에 기훤(箕萱)이란 자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시)에는 양길(梁吉)이란 자가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때 세달사(世達寺)의 중 궁예(弓裔)가 891년(眞聖女王5)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대우가 좋지 않자 다시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는 895년(진성여왕9) 10여군을 탈취하는 전공을 세우더니 901년 드디어 왕으로 칭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 그러다가 세력이 더 커지자 904년(孝恭王8)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수도를 철원(鐵圓: 지금의 鐵原郡)으로 옮기었으며 그 영역은 오늘날의 강원, 경기, 황해의 대부분과 평안, 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또 진도와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시)을 점령하여 서남해 상권을 장악하였다. 이런 전과로 오만해진 궁예는 포악한 짓을 하기 시작하여 부하들의 신임을 잃었다. 918년(景明王2)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또 한편 서남지방에는 상주 농민의 아들 견훤(甄萱)이란 자가 892년(眞聖女王6) 완산주(完山州: 지금 全州)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무진주(武珍州: 지금 光州)를 습격하였으며 900년(孝恭王4) 10월 견훤이 갑자기 신라왕도 경주로 쳐들어가서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던 경애왕을 잡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고 왕제(王弟)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궁중의 진보(珍寶)와 병장(兵仗)을 털어서 달아났다.
뒤미쳐 신라의 청을 받고 달려오던 왕건은 공산(公山: 팔공산)에서 대전투를 벌렸는데 왕건은 김락(金樂), 신숭겸(申崇謙)을 잃고 겨우 탈신도주할 수 있었다. 견훤은 그 여세를 몰아 다음 해 5월에는 강주(康州: 지금 진주)를 습격하고 11월에는 부곡(缶谷)을 공격하였고, 929년(太祖12) 7월에는 갑병(甲兵) 5,000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 지금의 의성군)를 공격하여 성주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이렇게 연전 연패한 왕건은 통곡하며 ‘나는 왼손과 오른손을 다 잃었다’라 할 정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견훤은 의기 백배하여 거침없이
3. 고창대첩(古昌大捷)
(1) 경과(經過)
930년(敬順王4, 高麗 太祖13) 정월 병술일(丙戌日)에 후백제 견훤군이 기습적으로 쳐들어 와서 석산(石山: 지금의 安東市 臥龍面 西枝洞)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군이 저수봉(猪首峰)을 넘어서 불과 500보 밖에 있던 견훤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승패가 결정되었다.
양군이 전투를 하고 있을 때에 우리 시조께서는 성주로써 고을사람 김행(一名 幸, 훗날 고려태조로부터 權으로 賜姓을 받았음)과 장길(張吉) 등과 소속 군사들을 거느리고 견훤군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복배(腹背)에 공격을 받은 견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지금 안동댐의 보조댐이 있는 곳으로 퇴각하였다가 도주하고 말았다.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병졸들은 사분오열되어 우왕좌왕하다가 8,000여명이나 사살되었다.
이 전투에 대하여 《고려사》권2 태조13년 정월 병술조에는 ‘왕[王建]이 몸소 장군이 되어 고창군 병산(甁山)에 진치고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쳤는데 서로 500보정도 떨어져 있었다. 드디어 전쟁을 하여 저녁에 이르러 견훤이 패주하였다.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았고 죽은 사람은 8,000여인이다.’
또, 《영가지(永嘉誌)》에도 ‘병산은 안동부에서 북쪽 10리에 있으며 고려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이곳에서 싸움을 했는데 그 때 견훤은 패하여 달아나고 시랑 김악은 사로잡혔다. 죽은 사람은 8,000이라 했는데 시체가 쌓여 개울을 막았고 물은 역수 하여 거꾸로 흘렀다.’라 기술되어 있다.
(2) 고창대첩에 따른 논공
태조 왕건은 이 전승의 의의를 깨닫고 전쟁이 끝난 뒤 5일 만인 정월 경인(庚寅)일에 성주인 우리 시조에게는 대광(大匡: 正二品上)을 내리시고 고을 사람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였던 권행과 장길에게는 각각 대상(大相: 正四品上) 벼슬을 내렸다. 이러한 직품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고려건국 후 이 전쟁이 있기까지 귀순(歸順) 귀부(歸附)해 온 자들에게 내린 향품직(鄕品職)을 보면 태조 6년11월 진보성주(眞寶城主) 홍술(洪術)의 아들이 고려에 귀부 하였을 때 그에게 원윤(元尹: 正六品)을 내렸고, 태조 11년7월 이찬(伊餐)을 지낸 진경(進慶)이 죽었을 때 그에게 내린 관직이 증대광(贈大匡)이였으며 태조13년 8월에 우릉도(芋陵島)에서 사신으로 온 백길(白吉)에게는 정위(正位: 從七品), 토두(土豆)에게는 정조(正朝: 正七品)을 내렸을 뿐이다.
우리 시조는 삼한(三韓) 통합의 대업이 이루어진 후에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에 책록되어 공신각에 화상(畵像)을 모시게 되었으며 또한 태조가 우리 시조를 만나면 아부(亞父)로 호칭할 정도였다. 또한 최고의 벼슬인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를 내렸다.
(3) 고창대첩의 영향
1) 《고려사》에서도 ‘고창지첩(古昌之捷)’이라 할 정도로 고려의 삼한통일 대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겠다. 그간 후백제에 계속 밀리거나 패하기만 하던 고려군에게 사기를 북돋아준 계기가 되었다.
2) 전쟁이 끝나고 5일이 되던 날 이 대첩의 소문이 크게 퍼지면서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30여 군현(郡縣)이 차례로 항복해 왔다. 이는 고려 군의 힘의 우위를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며 또한 대군(大郡)인 안동의 향배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3)
(4) 태사묘(太師廟) 향사(享祀)
전술한 바와 같이 930년(太祖13) 신라, 고려와 싸워서 승승장구하던 후백제가 고창성에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가 고려 왕건 군과 고창성주이신 우리 시조, 고을사람 김행(金幸), 장길(張吉)의 협공에 대패하여 군사 8,000명을 잃고 도주하였다. 그 후 후백제는 가족 간의 내분으로 6년이 채 못 되어 망하고 고려가 통일대업을 이룩하였다.
태조 왕건은 고창대첩에 공이 많았던 이 세분의 공을 치하하여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亞父功臣)으로 서품(敍品) 하고 군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이 곳을 식읍지로 하였다. 그리고 이 세분이 안동(安東)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김(金), 권(權), 장(張)의 시조가 되셨다.
안동사람들은 이 세분의 공을 잊지 못하여 삼공신(三功臣) 위판(位版)을 처음에는 부사(府司)에 모시다가 객사(客舍)로 옮겨 모시던 중 1542년(中宗37) 부사로 온
1608년(宣祖41) 11월 삼공신위판(三功臣位版)을 개조하였으며 1613년(光海5) 7월 구묘(舊廟)를 증축하고 삼공신묘를 태사묘(太師廟)로 개칭하였다. 1721년(景宗元年) 3월 16일 서문(西門)에서 일어난 큰 화재로 부사청(府司廳)도 타버렸으나 묘우(廟宇)는 무사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위판을 길안면(吉安面) 국난계곡(菊蘭溪谷) 깊은 동굴로 옮겨 3년이나 봉향(奉享)하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옮겨 모셨다. 6,25동란 때에는 위판을 성곡동(城谷洞) 안동 장씨의 광풍정(光風亭)으로 옮겨 모셨다가 다음해 8월 13일 능동(陵洞) 안동권씨재사(安東權氏齋舍) 보판각(普板閣)으로 옮겨 모셨다가 1958년 9월 다시 중건한 묘우로 옮겨 모셨다.
태사묘의 위치는 안동시 북문동 24의 1번지에 자리하며, 대지는 1.229평이다. 건물은 태사묘우(太師廟宇), 숭보당(崇報堂), 경모루(景慕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주사(廚舍), 전사청(典祀廳), 안묘당(安廟堂), 보물각(寶物閣), 전차각(戰車閣) 등이 있다. 이것은 기념물 제15호와 보물 제451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각에 소장되어 있는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유물은 주칠탁잔(朱漆托盞), 혁과대(革跨帶), 관(冠), 동인(銅印), 포선(布扇), 옥관자(玉貫子), 은구개합(銀鉤蓋盒), 은시저(銀匙箸), 노국공주(魯國公主)의 가죽신, 고견포(古絹布), 공민왕(恭愍王)의 교지(敎旨) 등 12종 22점이 있다.
4. 시조묘단(始祖墓壇)
왜 시조산소를 묘단이라 하는가? 그 이유는 고려후기의 오랜 전란과 자손이 번성치 못하여 실전되어 오다가 조선 인조4년(1626)에 비로소 묘단을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묘단의 위치는 안동시(安東市) 서후면(西後面) 태장동(台庄洞)이며 천등산(天嶝山) 좌록(左麓) 자좌(子坐) 봉정사(鳳停寺) 동편에 설단하였다. 제향(祭享)은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봉행한다.
시조 산소가 오랫동안 실전되었음에도 찾을 여력을 갖지 못하다가 청음(淸陰) 상헌(尙憲) 상공(相公)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화의를 반대하고 소산 청원루(淸遠樓)에 수년간 기거를 하였다. 이때 공은 시조의 묘소를 찾으려고 천등산 산신에 제사를 올리고 향중의 여러 일가 사람들과 같이 탐문과 답사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1626년(仁祖4) 김연(金縯)공이 시조묘소를 찾으려 다니던 중에 사냥꾼들이 매가 천태암(天台庵) 유점리(鍮店里) 김태사 묘골로 날아갔다고 하는 말을 듣고 대책을 강구하려 향중의 일가들이 의논하였으나 역부족이라서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68년이 지났을 때 안동부중에 살고 있던 호장공파(戶長公派) 시언(時彦)공이 간인(奸人)들의 작변(作變)을 확인하고 상경하여 몽와(夢窩) 창집(昌集) 상공(相公)을 찾아가서 실정을 고하니 몽와공(당시 대사간)이 안동부 동헌에 고발하여 간인들을 문초케한바 태사공의 유해는 작은 궤에 넣어 산북쪽 이일랑(李日郞)의 밭머리에 묻고 지석은 깨어서 천태암 우물에 버렸다라는 공초를 받아 내었다. 이에 천태암 우물을 준정하여 지석파편과 파쇄지석을 찾았고 유해가 든 소궤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1695년(肅宗21) 10월에 시조 태사부군(太師府君) 묘단(묘(墓)단(壇))을 비로소 완성시키고, 1703년 (肅宗29) 장석을 풍기에서 운반하여 세웠고 그 다음해 묘단전면에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아부공신김선평제단(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亞父功臣金宣平祭壇)’이란 묘표(墓表)를 세웠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묘단과 계축을 개수한 일이 있으며 투장(偸葬)이 들어 여러 차례 굴이(堀移)한 적도 있었다.
[자료출처: 안동김씨대동보 병인보, 기해보, 예의소승공파 파보 수편]
■ 시조 태사공(太師公)에 관한 사료(史料)
▪ 삼중대광(三重大匡) 김선평(金宣平)의 묘는 안동부(安東府) 서쪽 고태장(古台庄)에 있으니 부(府)로부터의 거리가 30리이다.
[선덕(宣德) 2년 정미 경상도열읍명현묘소인출록(慶尙道列邑名賢墓所印出錄)과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나오다.]
<原文>
三重大匡金宣平墓在安東府西古台庄 自府相距三十里, [出宣德二年丁未 慶尙道列 邑名賢墓所印出錄 及輿地勝覽]
▪ 김태사(金太師)의 묘는 부(府) 서후면(西後面) 고태장리(古胎藏里) 유점동(鍮店洞) 자좌(子坐)의 산에 있다. [
<原文>
金太師墓在府西後面古胎藏里鍮店洞子坐之山出權龍巒記永嘉誌
▪ 병인년 정월에, 야수(野叟), 경진(景晉),
‘김태사(金太師)의 묘가 저기 있는데 나는 바로 네 조선(祖先)이니 어찌 감히 사람을 시켜 무덤을 파느냐’ 하였는데 깨어나서는 병을 얻어 이내 죽었다고 한다. 일이 매우 기이(奇異)하다. 소위 ‘저기 있다’ 는 것은 곧 ‘멀지 않다’ 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알 수 없었다. 또 묘를 찾을 때 종인(宗人)이 촌가(村家)에서 묵었는데, 캄캄한 밤에 산하(山河)에 갑자기 불과 같은 빛이 있어서 솔잎을 셀 수 있었으니 사람들이 영괴(靈怪)라고 하였다. 지금도 마을 백성들이 이야기를 전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이 주자(朱子)께서 말씀하신 소위 지기(地氣)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서로 전하기를, 김태사 묘는 태장(台莊) 유점동(鍮店洞)에 있다고 하였는데, 유점동은 여기서 1리(400미터) 사이에 있으니, 비슷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다. 후손 수증(壽增)의 화산기(花山記)에서 나왔다.
<原文>
丙寅正月 與野叟 景晉
▮ 고려공신록(高麗功臣錄)
고려(高麗) 태조(太祖) 통합삼한익찬벽상공신(統合三韓翊贊壁上功臣) 2등(二等) 제2인(第二人) 김선평(金宣平)이는 또 문화유씨(文化柳氏) 족보에도 보이는데 모두 20인이며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原文>
高麗太祖統合三韓翊贊壁上功臣二等第二人金宣平 右又見文化柳氏譜凡二十人多不能盡錄
▮ 안동부 명현록(安東府名賢錄)
고려 태조는 김선평(金宣平)을 아부공신(亞父功臣)으로 삼고, 권행·장길을 공신(功臣)으로 삼아, 모두 공신당(功臣堂) 벽상(壁上)에 도화(圖畵)하였다.
<原文>
高麗太祖以金宣平爲亞父功臣 權幸張吉爲功臣 皆圖畵功臣堂
▮ 동국통감(東國通鑑)
신라 경순왕 3년(929) 겨울 12월에 견훤이 고창군을 포위함에 고려왕이 가서 돕고, 4년 봄 정월(正月)에 상고하건대 경순왕 4년(930 庚寅) 은 곧 후당(後唐) 명종(明宗) 장흥원년(長興元年)이니 황명숭정(皇明崇禎) 갑신후(甲申後) 금삼(今三) 경술(庚戌)에서 861년이 된다. 려왕(麗王)이 스스로 군병을 고창군 견산(甄山)의 군북십리(郡北十里)에 있으니 속명은 가수천(佳水川)이다.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치고 싸우다가 견훤이 패주하고 죽은 자 팔천여인이다. 고창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과 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아 그 군을 안동부로 승격하다. (右는 東國通鑑에 있다. 高麗史와 東史要略도 같다)
<原文>
新羅敬順王三年冬十二月 甄萱 圍古昌郡 高麗王往救之 四年春四月按敬順王四年庚寅卽後唐明宗長興元年 麗王自將軍於古昌郡甁山在郡北十里俗名佳水州 甄萱軍於石山遂與戰 萱敗走 死者八千餘人 以古昌城主金宣平爲大匡 權幸張吉爲大相 陞其郡爲安東府 在高麗史東史要畧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동은 본래 신라의 고타야군(古陁耶郡)이니 경덕왕(景德王)이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치고 고려 태조와 후백제 왕 견훤이 군지(郡地)에서 싸워 패함에 군인(郡人)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이 태조를 도와 공이 있음으로 선평은 대광(大匡)을 배하고 권행과 장길은 대상(大相)을 배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군을 부로 승격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뒤에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치고, 성종 14년(995 乙未)에 길주자사(吉州刺史)라 일컫고, 현종 3년(1012 壬子)에 안무사(按撫使)로 되고, 현종 9년(1018 戊午)에 고쳐서 길주지사(吉州知事)라 하고, 21년(1030 庚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불렀다. 명종 27년(1197 丁巳)에 남적(南賊) 김삼(金三) 효심(孝心)등이 주군(州郡)을 표략(剽略)하여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이를 토평(討平)하였는데, 부(府)에 잘 막아낸 공이 있다고 하여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昇格)시켰다. 충렬왕 34년(1308 戊申) 복주목사(福州牧使)로 고치고, 공민왕 10년(1361 辛丑)에 홍건적을 피하여 남순(南巡) 주련(駐輦)하여 다시 지금 이름으로 올리고 대도호부(大都護府)로 되었다.
<原文>
安東 本新羅古陁耶郡 景德王改古昌郡 高麗太祖與後百濟王甄萱戰於郡地 敗之 郡人金宣平 金幸張吉佐太祖有功拜宣平爲大匡 幸吉爲大相 因陞郡爲府 而改今名 後改爲永嘉郡 成宗十四稱吉州刺史 顯宗三年爲按撫使 九年改知吉州事 二十一年復稱今名 明宗二十七年南賊金三孝心等剽略州郡遣使討平之 以府有捍禦功 陞爲大都護府 忠烈王三十四年改爲福州牧 恭愍王十年避紅巾賊南巡駐輦 復陞今名爲大都護府.
▮ 동국사략(東國史略)
경순왕 4년(930 庚寅), 견훤이 고창군을 포위하자, 고려왕이 유금필(分黔弼)의 계책을 따라 병산(甁山)으로 진군하여 견훤과 싸웠다. 견훤이 패주하고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획득(獲得)하였다. 고창성주 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 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고, 군(郡)을 올려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原文>
敬順王四年 甄萱圍古昌郡 麗王從庾黔弼計 進軍甁山 與萱戰 萱敗 獲得侍郞金渥以古昌城金宣平爲大匡 權幸張吉爲大相 陞郡爲安東府.
▮ 동사(東史)
신라 경순왕 3년(929 己丑. 後唐 天成 4년, 고려태조 12년) 12월에 견훤이 고창군(古昌郡)을 포위하니 고려왕이 가서 이를 구하였다. 유금필(庾黔弼)이 진군하여 급히 공격할 것을 청하니 고려왕이 이를 따랐다. 금필은 곧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분격(奮擊)하여 대승(大勝)하였다. 고려왕이 그 군(郡)으로 들어갔다. 경순왕 4년(930 庚寅) 정월에 고려왕은 고창군 병산(甁山)에서 스스로 장군이 되고 견훤의 군사는 석산(石山) 있어 서로의 거리가 5백 보쯤 되었다. 드디어 싸우니 견훤이 패주하였다. 고창성주 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 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고 군(郡)을 올려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原文>
新羅敬順王三年己丑(後唐天成四年麗太祖十二年)冬十二月 甄萱圍高麗古昌郡 高麗王往救之 庾黔弼 請進軍急擊 麗王從之 黔弼 乃自猪首峰奮擊大克 麗王入其郡 敬順王四年庚寅正月麗王自將軍於古昌郡甁山 萱軍 於石山 相去五百步許 遂與戰 萱敗走 以古昌城主金宣平爲大匡 權幸張吉爲大相 陞其郡爲安東府.
▮ 동사강목(東史綱目)
경순왕 3년(929 己丑. 後唐 天成 4년, 견훤 38년) 12월, 견훤이 고창군을 포위하자 고려왕 건(建)이 스스로 장군(將軍)이 되어 이를 구하였다. 경순왕 4년(후당 장흥 원년, 견훤 39년)에 고려왕 건(建)은 고창에서 견훤을 대파(大破)하여 동방(東方)의 주군(州郡)이 모조리 고려에 항복하였다. 왕이 고창을 구(救)함에 예안진(禮安鎭-지금의 禮安)에 둔차(屯次)하여, 제장(諸將)과 더불어 상의(相議)하기를 ‘싸워서 불리(不利)하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대상공(大相公) 홍유(洪儒)가 말하기를 ‘불리할 것 같으면, 마땅히 간도(間道)를 따라야지, 죽령(竹嶺)을 따라서는 안 되며 마땅히 미리 간로(間路)를 수리(修理)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장군 유금필이 말하기를 ‘병(兵)은 흉기(凶器)이며 전쟁은 위험한 일이니 죽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은 연후(然後)라야 결전(決戰)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적을 임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먼저 꺾이고 패배할 걱정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 만약 급히 구하지 않는다면 고창의 삼천여 민중(民衆)을 팔짱을 끼고 적(賊)에게 주게 되니 어찌 통탄(痛歎)할 일이 아니겠는가? 신(臣)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왕이 이 계책을 따랐다. 병술년(926)에 고려왕의 군대가 북쪽 병산(甁山-지금의 안동군 북쪽 10리)에 있고, 견훤의 군대는 석산에 있어 서로의 거리가 5백 보(步)였다. 드디어 싸워서 해질 무렵이 되었는데, 금필이 경병(輕兵)을 인솔하여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공격(攻擊)하니 견훤이 패주하였다. 그의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고 백제군의 죽은 자가 팔천여 인이었다. 고려왕이 입성하여 금필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경의 공이다’ 라고 하였다. 견훤은 장수(將帥)로 하여금 순주(順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사람을 납치하여 갔다. 고려왕은 곧 순주로 가서 그 성을 수리하고 다시 낮추어
<原文>
敬順王三年己丑(後唐天成四年甄萱三十八年)十二月 甄萱圍高麗古昌郡高麗君建 自將救之 敬順王四年(後唐長興元年 甄萱三十九年)高麗君建大破甄萱於古昌 東方州郡 盡降於高麗 王救古昌 次禮安鎭(今禮安) 與諸將議曰戰而不利將奈何 大相公洪儒曰 如不利 宜從間道 不可從竹嶺 宜預修間路 將軍庾黔弼曰 兵凶器 戰危事 有死之心 無生之計 然後可以決戰 今 臨敵不戰 先慮折北何也若不急救 以古昌三千餘衆 拱手與賊 豈不痛哉 臣願進軍急擊 麗王從之 丙戌 麗王軍於北甁山(今在安東郡北十里) 萱軍 於石山 相去五百步 遂與戰至暮 黔弼 引輕兵 自猪首峰擊之 萱 遣將攻陷順州掠人戶而去 麗王 卽幸順州 修其城 復貶爲下枝縣 得元奉 以有前功宥之 以古昌城主金宣平爲大匡 金幸張吉爲大相 陞郡爲安東府 於是 永安(今豊山) 河曲(新羅曲城郡 麗改爲臨河縣 今屬安東) 直明(明 一作寧 今一直 屬安東) 松生(今靑松)等三十餘郡縣 降高麗 高麗 自此兵力漸强國 以東沿海 州郡部落 皆降高麗 自溟州至興禮府 摠百十餘城.
▮ 고려사(高麗史)
태조 13년(930 庚寅, 후당 천성 5년 경순왕 4년) 정월에, 고창성주 김선평과 형관(刑官) 권행 장길이 내조(來朝)하였다. 선평(宣平)을 대광으로 삼고 권행 장길을 대상을 삼았다. 이렇게 되어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20여 군(郡)이 차례로 내항(來降)하였다.
<原文>
太祖十三年庚寅(後唐天成五年敬順王四年)春正月 古昌城主金宣平與刑官權幸張吉來朝 以宣平爲大匡 以幸吉爲大相 於是 永安 河曲 直明 松生等二十餘郡 相次來降.
▮ 고려사제강(高麗史提綱)
태조가 고창을 구함에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제장(諸將)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싸워서 불리(不利)하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대상공(大相公) 홍유가 말하기를 ‘불리할것 같으면, 죽령도(竹嶺道)를 따라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미리 간로(間路)를 수리(修理)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장군 유금필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병(兵)은 흉기이며 전쟁은 위험한 일이니 죽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살고자 하는 기(氣)를 없앤 연후(然後)라야 결전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적을 임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먼저 꺾이고 패배할 걱정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약 급히 구하지 않는다면 고창의 삼천여 민중(民衆)을 팔짱을 끼고 적에게 주게 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臣)은 진군(進軍)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왕이 이 계책을 따랐다.
병술년에 고려왕의 군대가 북쪽 병산(甁山-지금의 안동군 북쪽 10리)에 있고, 견훤의 군대는 석산에 있어 서로의 거리가 5백 보(步)였다. 드디어 싸워서 해질 무렵이 되었는데, 금필이 경병(輕兵)을 인솔하여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공격하니, 견훤이 패주하였다. 그의 시랑(侍郞) 김악을 사로잡고, 백제군의 죽은 자가 팔천여 인이었다. 고려왕이 입성하여 금필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勝利)는 경(卿)의 공(功)이다.’ 라고 하였다. 고창성주 김선평을 대광으로 삼고 김행 장길을 대상으로 삼았다
<原文>
太祖救古昌 至禮安鎭 與諸將議曰 戰若不勝 將如之何 大相公洪儒等曰 如或不利不可從竹嶺 道還 宜預修間路 將軍庾黔弼曰 臣聞兵凶器 戰危事 有死之心 無生之氣 然後可以決戰 今 臨敵不戰 先慮折北何也 若不急救 以古昌三千餘衆 拱手與賊豈不痛哉 臣願進軍急擊 麗王從之 丙戌 進次古昌郡之甁山 萱軍石山 相距五百步許 遂與萱戰至日暮 黔弼 引輕兵 自猪首峰奮擊之 百濟兵大塊 萱脫迅走 獲百濟 侍郞金渥等濟軍死者八千餘人 王入城 謂黔弼曰 今日之捷 卿之功也 以古昌城主金宣平爲大匡 金幸張吉爲大相.
▮ 국조실록(國朝實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는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이다. 안동(安東)은 본래 고타야군(古陁耶郡)이었는데 경덕왕이 고창군으로 고치고, 고려 태조 13년(930 庚寅)에 스스로 장군이 되어 후백제왕 견훤과 더불어 고창에서 싸워 이를 패퇴시키니 군인(郡人) 김선평 김행 장길이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으므로 선평을 배(拜)하여 대광을 삼고, 행(幸) 길(吉)을 대상을 삼았으며, 그 군(郡)을 승격(昇格)하여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뒤에 고쳐서 영가군(永嘉郡)이 되고, 성종 14년((995 乙未)에 고쳐서 길주자사(吉州刺史)로 되고, 현종 3년(1012 壬子)에 고쳐서 안무사(按撫使)로 되고, 9년(1018 戊午)에 고쳐서 길주지사(吉州知事)로 되고, 21년(1030 庚午-송나라 인종 천성8년), 다시 지안동부사(知安東府事)로 되고, 명종 23년(1193 癸丑-
인 부호군(副護軍)
<原文>
安東大都護府 使一人判官一人 安東 本古陁耶郡 景德王改古昌郡 高麗太祖十三年庚寅 自將 與後百濟王甄萱戰於古昌 敗之郡人金宣平 金幸 張吉 佐太祖有功 拜宣平爲大匡 幸吉爲大相 陞其郡爲安東府 後改爲永嘉郡 成宗十四年乙未 改爲吉州刺史 顯宗三年壬子 改爲按撫使 九年戊午改爲知吉州事二十一年庚午(宋仁宗天聖八年) 復爲知安東府事 明宗癸丑(二十七年 宋光宗紹熙四年) 南賊金三孝心等摽略州郡 國家 連年遣師 始克討平之以府有輔佐功 陞爲大護府 忠烈王三十四年戊申 改爲福州牧 恭愍王十年癸丑(元至正什一年) 避紅賊南巡駐輦 以州人盡心供頓 壬寅 復陞爲大都護府 別號 綾羅郡 昌寧國 地平郡 古寧郡 石陵郡 一界郡 花山郡 古藏郡此皆新羅時稱號 屬縣八 臨河縣 豊山縣 本下枝縣 景德王改名永安縣 爲醒泉郡領縣 高麗改今名 一直縣 甘泉縣 吉安縣 奈城縣 春陽縣 才山縣 出世宗實錄地理志肅宗八年壬戌四月癸巳 安東府有高麗功臣金宣平 權幸張吉三太師廟 一行南向 而金居東 權居中 張居西 金權兩家子孫 副護軍金壽一 僉知權說 各上疏請定位次上下 壽一則曰東是首位說則曰中是正位 爭說甚多 事下禮曹 禮曹覆啓曰 高麗史及東國通鑑 麗太祖庚寅 以古昌城主金宣平爲大匡 權幸 張吉 爲大相 遂以其郡爲安東府 李滉記文有曰 麗朝功臣三人曰金公宣平 曰權公幸 曰張公吉 又曰 爲城主者金公 倡降麗者權公 則位次先後自可區別 史籍及先儒之論如此 宜以金宣平爲首 權張次之 上允之 出肅宗實錄.
▮ 묘단제축문(墓壇祭祝文) : 태장 묘단에서 제사 지낼 때의 축문이다
功冠一時(공관일시) 공훈은 한 때 으뜸이셨으며,
德垂後裔(덕수후예) 덕은 후손들에게 내리셨습니다.
托靈玆山(탁령자산) 이 산에 영령(英靈)을 의탁하였사오니,
著明永世(저명영세) 오래도록 저명(著明)하소서.
霜露旣降(상로기강)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렸으니,
不勝遠慕(불승원모) 멀리 사모(思慕)하는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謹以時需(근이시수) 삼가 시절(時節)의 제수(祭需)를 가지고,
祗薦歲事(지천세사) 이에 해마다의 제사를 올립니다.
▮ 부(附) 홀기(笏記) : 태장 묘단에서 제사 지낼 때의 홀기이다.
▷ 헌관이하(獻官以下). 서립지영(序立祗迎)
▷ 찬인(贊引). 인(引) 축(祝) 급(及) 제(諸) 집사(執事). 입(入) 취배위(就拜位)
▷ 재배(再拜) ▷ 찬인(贊引). 인(引) 헌관이하(獻官以下). 입(入) 취배위(就拜位)
▷ 재배(再拜). 찬인(贊引). 인(引) 축(祝) 급(及) 제집사(諸執事). 예(詣) 관세위(盥洗位). 관수(盥手) 세수(帨手). 각(各) 취위(就位)
▷ 진설(陳設)
▷ 찬인(贊引). 인(引) 초헌관예(初獻官詣) 관세(盥洗). 위(位) 관수세수(盥手帨手)
▷ 인(引) 예향안전(詣香案前). 궤(跪)
▷ 상향(上香). 삼상향짐주(三上香斟酒)
▷ 강신(降神) ▷ 부복(俯伏) ▷ 흥(興) ▷ 재배(再拜) ▷ 인강부위(引降復位)
▷ 찬인(贊引). 인(引) 초헌관예신위전(初獻官詣神位前)
▷ 궤(跪) ▷ 짐주(斟酒) ▷ 전작(奠爵) ▷ 부복(俯伏) ▷ 독축(讀祝)
▷ 상저(上箸). 흥(興). 재배(再拜). 인강부위(引降復位)
▷ 찬인(贊引). 인(引) 아헌관예관세위(亞獻官詣盥洗位). 관수세수(盥手帨手). 인(引) 예신위전(詣神位前)
▷ 궤(跪) ▷ 짐주(斟酒) ▷ 전작(奠爵) ▷ 부복(俯伏) ▷ 흥(興) ▷ 재배(再拜)
▷ 인강부위(引降復位)
▷ 찬인(贊引). 인(引) 종헌관예관세위(終獻官詣盥洗位). 관수세수(盥手帨手). 인(引) 예신위전(詣神位前)
▷ 궤(跪) ▷ 짐주(斟酒) ▷ 전작(奠爵) ▷ 부복(俯伏) ▷ 흥(興) ▷ 재배(再拜)
▷ 인강부위(引降復位) ▷ 헌관이하(獻官以下). 부복일경(俯伏一頃)
▷ 흥(興) ▷ 하저(下箸) ▷ 헌관이하(獻官以下). 재배(再拜)
▷ 찬인(贊引). 인(引) 초헌관(初獻官). 예분축소(詣焚祝所)
▷ 분축(焚祝) ▷ 예필(禮畢) ▷ 이차출(以次出)
▮ 부(附) 진설도(陳設圖)
神 位
素炙 看覽 黑看覽 餠淸 白看覽 看覽 素炙
湯 湯 湯 湯 湯 湯
脯 折肉 燭 沈菜 沈菜 燭 醯
果 茶食 果 果 果 中桂 果
• 소적(素炙) : 양념하지 않은 적(炙).
적은 어육 魚肉을 대꼬챙이에 꿰어 양념하여 구운 음식.
• 간람(看覽) : 간납(肝納). 소의 간이나 천엽 기타 어육 魚肉으로 만든 저냐.
전유어(煎油魚).
• 병(餠) : 떡
• 청(淸) : 꿀 또는 조청(造淸)
• 탕(湯) : 제사에 쓰는 국의 일종. 건지가 많고 국물이 적음.
소탕(素湯), 어탕(魚湯), 육탕(肉湯) 같은 것.
• 포(脯) : 저며서 양념하여 말린 고기. 육포(肉脯), 어포(魚脯)
• 절육(切肉) : 얄팍얄팍하게 썰어 양념에 재워서 익힌 고기.
• 촉(燭) : 촉대(燭臺)
• 침채(沈菜) : 김치
• 혜(醯). : 식혜(食醯) - 이밥이나 찰밥을 엿기름으로 삭힌 음식. 단술.
- 어초(魚酢), 생선젓 생선을 토막 친 뒤 소금과 흰밥 또는 천초나 귤피를 넣고 만든 젓.
• 과(果) : 실과(實果) 또는 조과(造菓).
• 중계(中桂) : 중계과(中桂菓). 중배끼. 유밀과(油密果)의 한 가지. 사각형의 약과(藥果).
▮ 부(附) 집사분정기(執事分定記)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찬자(贊者).
찬인(贊人) 3인, 진설(陳設) 2인, 축(祝), 봉향(奉香), 봉로(奉爐)
봉작(奉爵) 2인, 전작(奠爵) 2인, 사준(司罇) 2인.
▮ 제태사묘단문(祭太師墓壇文) - 후손 창협(昌協)
삼가 생각하니 우리 할아버지는 큰 공덕(功德)이 있으시니
사(社)에 제사가 없은 지가 팔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자손들은 음덕(蔭德)이 아름다워 선련(蟬聯)하여 석혁(舃赫)하니
본시(本始)에 대한 생각을 어찌 감히 혹시라도 싫어하겠습니까?
오직 세대(世代)가 멀어져서 그 유택(幽宅)을 잃었으니
묘(墓)는 태장(台莊)에 있다고 앞서 크고 명백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아래위로 더듬어 찾았으나 지금은 그 옛날이 아니라
비석(碑石)이나 지석(誌石)이 깊이 숨겨져서 오래되어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물리치고 감추는 바가 있었으니
따라서 소송(訴訟)을 하였으나 더욱 그 자취가 없어졌습니다.
마음에 슬프고 머리가 아픈 것이 그 어찌 다함이 있으리까?
일은 궁(窮)하고 희망은 끊겨 일월(日月)은 더욱 쌓여갔습니다.
이름을 따라서 유허(遺墟)를 밟을 때 늘 깊이 슬퍼하였으니
인정(人情)은 같은 것이라 제례(祭禮)의 뜻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설단(設壇)하여 제사(祭祀)함이 예(禮)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
초목(草木)을 제거(除去)하고 단(壇)을 쌓으니
크고 엄연(嚴然)하고 날아갈 듯합니다.
우러러보면 엄숙(嚴肅)하여 마치 체백(體魄)이 가까이 계신 듯하고
먼 후손들이 모두 있으니 서직(黍稷)으로 제사를 올립니다.
그것을 지금부터 시작하니 영구(永久)히 삼가도록 신칙(申飭)하니
높이 바라건대 존령(尊靈)께서는 굽어 내려다보시고 흠향(歆饗)하옵소서.
<原文>
恭惟我祖有大功德 沒祭于社歷禩八百 子姓蔭休蟬聯舃赫 本始之思庸敢或斁 惟世旣遠失其幽宅
墓于台莊前志孔晳 下上尋求匪今伊昔 碑版昧昧久莫能獲 厥或疑似有攘而匿 從以訟之益滅其跡
痛心疾首曷其有極 事窮望絶日月愈積 循名踐墟每深怵惕 人情所同禮意可式 設壇而祭於義不忒
旣除旣築孔嚴翼翼 瞻望肅焉如卽體魄 雲仍咸在以薦黍稷 其始自今永永祗飭 尙冀尊靈俯垂鑑格
▮ 묘단입비고문(墓壇立碑告文) - 후손 영한(甯漢)
현윤(顯允)하신 태사(太師)께서는 바로 우리 시조(始祖)이시니
고려를 도와 견훤을 격파(擊破)하고 그 무위(武威)를 드날리셨도다.
은택을 생령(生靈)에게 입히시니 맹부(盟府)에 훈기(勳記)되어
장성(長星) 낭월(朗月)처럼 환우(寰宇)에 휘영(輝映)하도다.
축단(築壇)하여 제사를 모신 지 세월이 다시 백 년이 되는데
신도(神道)에 세운 것이 없으니 먼 후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종중(宗中)이 모두 힘을 합쳐서 이에 궁석(穹石)을 잘라
길일(吉日)을 점쳐서 예의(禮儀)를 갖추어
밝게 위적(偉蹟)을 후세(後世)에 전합니다.
<原文>
顯允太師惟我肇祖 佐麗破甄以揚厥武 澤被生靈勳記盟府 長星朗月輝映寰宇 築壇設享歲更二百
神道無樹苗裔有責 擧宗齊力爰伐穹石 諏吉備儀昭垂偉蹟
▮ 영(詠) 시조태사사(始祖太師事), 시동종제군(示同宗諸君) - 후손 상헌(常憲)
려대론공재사편(麗代論功在史編) 고려 때의 논공(論功)은 사편(史編)에 남아 있으니
황황오조관권장(煌煌吾祖冠權張) 빛나도다 우리 할배 권장(權張)에 으뜸이셨네.
일시대려환여사(一時帶礪還餘事) 한때 대려(帶礪)의 맹서(盟誓)는 별것 아니요
청백전가팔백년(淸白傳家八百年) 청백(淸白)을 집에 전하여 팔백년(八百年)이로다.
▮ 서회(書懷) - 후손 수증(壽增)
요요아시조(遙遙我始祖) 멀고 먼 옛날 우리 시조 할아버지는
려초기고창(麗初起古昌) 고려 처음에 고창(古昌)에서 일어나셨도다.
읍민회기덕(邑民懷其德) 읍민(邑民)이 그 덕(德)을 그리워하여
제사관권장(祭社冠權張) 묘사(廟社)에 제사하니 권장(權張)에 으뜸이셨네.
계경이도후(啓慶以燾後) 경사(慶事)를 열어서 후손을 비추어 덮어주시니
세업수무강(世業垂無疆) 세업 세업(世業)은 내려오며 끝이 없도다.
오호만자손(嗚呼萬子孫) 아아 많고 많은 자손들이여
면면호부장(勉勉胡不臧) 힘쓰고 힘써서 어찌 착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보냐.
추감(追感)
▮ 영(詠) 태사사(太師事) - 후손 수증(壽增)
아김지현(我金之顯) 우리 안동김씨가 뚜렷이 나타난 것은
조자리당(肇自李唐) 중국의 당나라 때에 비롯되었도다.
황황태사(煌煌太師) 빛나도다, 시조 태사(太師)할아버지시여
공렬휘광(功烈揮光) 훈공(勳功)은 열렬(烈烈)하여 번쩍번쩍 빛나도다.
유량좌한(猶良佐漢) 장량(張良)이 한고조(漢高祖)를 도운 것과 같으시며
약망극상(若望克商) 태공망(太公望)이 은(殷)나라에 이긴 것과 같으셨네.
분모석토(分茅錫土) 띠를 나누고 땅을 주어 봉작(封爵)을 내리시니
엄유고창(奄有古昌) 문득 고창(古昌)을 다스리셨도다.
자려흘금(自麗迄今) 고려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성기주(天星幾周) 하늘의 별이 몇 바퀴나 돌았던가?
유상여재(惟桑與梓) 오직 고향에 조상이 심으신 뽕나무와 가래나무는
울피고구(鬱彼故丘) 저기 옛 언덕에 저렇게 울창(鬱蒼)하도다.
중규루조(重圭累組) 홀을 들고 인수(印綬)를 띤 고관(高官)이 거듭나니
유택영류(遺澤永流) 끼치신 은택(恩澤)이 영원히 흐르도다.
적선곤곤(積善滾滾) 적선(積善)함이 끊임없이 곤곤(滾滾)하면
의공의후(宜公宜侯) 마땅히 공(公)도 되고 후(侯)도 되리라.
▮ 갈태장단(謁台庄壇) – 후손 문행(文行)
태장유묘속창망(台庄遺墓屬蒼茫) 태장(台庄)의 유묘(遺墓)가 창망(蒼茫)하게 되었으니
단선공여숙초황(壇墠空餘宿草荒) 단선(壇墠)만 헛되이 남아 숙초(宿草)가 거칠도다.
문설신광증섬삭(聞說神光曾閃鑠) 이야기 들으니 신광(神光)이 번쩍하고 사라진 적 있다는데
부지하처시진장(不知何處是眞藏) 어느 곳이 바로 참된 묘소(墓所)인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 己巳十月十日會奠時(기사시월십일회준시) - 근차청음선생운(謹次淸陰先生韻)
: 기사년 월 일 모여 시향을 지냈을 때, 후손 익진
개국안민저사편(開國安民著史編) 개국안민(開國安民)한 사실 역사책에 현저하니
당시오조여장권(當時吾祖與張權) 당시 우리 시조 장권(張權)과 함께 하셨도다.
후손현달유선음(後孫顯達由先蔭) 후손이 현달함은 조선(祖先)의 음덕 때문이니
덕업충훈천만년(德業忠勳千萬年) 덕업(德業)과 충훈(忠勳)은 천만 년이로다.
■ 시조 태사공(太師公)에 관한 야사(野史)
▪ 안동김씨 시조 태사공은 흥덕왕의 증손?
안동김씨 족보에 나오는 시조 태사공의 탄생에 대한 기록은 너무 아쉽다. 태사공은 신라 효공왕 5년에 흥덕궁에서 탄생한 것으로 돼 있다. 신라 효공왕 5년이란 연대만 나올 뿐 효공왕의 후손이란 말이 없다. 자신이 (신)안동 김씨라면 어찌 이런 모호한 정보에 아쉬움이 없겠는가?
분명한 것은 태사공이 26세에 고창(현 안동)의 성주가 된 것으로 봐선 신라 왕성인 김씨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태사공이 어느 왕의 후손인가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다.
효공왕 5년에 태어났다고 하니 효공왕의 아들로 볼 수도 있고, 지금은 없는 흥덕궁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하니 흥덕왕의 후손일 수도 있다.
사실 신라는 후대에 와서 왕권 경쟁이 치열했다. 따라서 경쟁에서 진 쪽은 핍박을 당할 수도 있었다. 효공왕만 하더라도 말년에 또 다른 왕성인 박씨와의 왕권 경쟁에 져 박씨에게 왕권이 넘어간다. 헌강왕의 서자인 효공왕 때에는 신라의 국세가 기울던 시기로 궁예와 견훤의 발호로 나라가 어지러웠다.
모반을 한 셈인 궁예 역시 신라왕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역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렇게 나라가 어려운 중에도 효공왕은 천한 첩에 홀려 정사를 돌보지 않아 보다 못한 대신 은영이 간했으나 왕이 듣지 않으므로 은영은 그 첩을 잡아다 죽였다고 한다.
신라 왕조에서 왕자가 선왕의 자리를 계승하지 못하는 경우는 왕에게 왕자가 없거나 왕권경쟁에서 진 경우다. 효공왕 이후 왕권이 타성으로 넘어간 것이 효공왕에게 왕자가 없어 그렇게 됐다는 말은 없다. 대신 은영이 왕의 애첩을 잡아다 죽일 정도면 효공왕이 타성과의 왕권 경쟁 에서 진 것이 확실하다. 효공왕은 여색을 탐한 왕으로 역사에 묘사돼 있으므로 왕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앗은 쪽에서 나라를 망친 요인으로 지목한 첩의 소생이라면 왕자로 대우받긴 어려웠을 것이다.
왕궁에 남아 있으면 바로 선왕의 왕자이므로 대신들의 꾀임에 의한 모반의 염려도 크고 하니 성장하는 대로 멀리 변방으로 보냈음직하다.
효공왕의 서자로 보첩에 기록 되지 못 한 것은 보첩이 정리된 조선 시대의 유교적 사고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효공왕도 헌강왕의 서자다. 야사에도 나오는 이야기처럼 효공왕은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었고, 나중에 진성여왕이 오빠인 헌강왕의 후사로 인정해 왕위를 계승시킨다. 이렇게 보면 (신)안동 김씨의 시조 태사공은 효공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하나 남은 문제는 흥덕궁이라는 탄생 장소다. 지금은 흥덕궁이라는 건물이 남아 있지 않고, 그런 건물에 대한 기록조차 없어 흥덕궁이라는 건물 명칭으론 알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신)안동 김씨 보첩은 시조 태사공이 신라 어느 왕의 아들인지는 기록하지 않았으면서 하필 어느 궁에서 태어났다는 것만 기록 했을까 하는 점이 의문이다.
신라 왕궁 중에 흥덕궁이란 명칭을 붙여 쓸 수 있는 궁이 있었다면 필시 흥덕왕과 관련된 궁이었을 것이다. 흥덕왕은 효공왕이나 헌강왕보다 훨씬 상대의 왕으로서 당시엔 왕의 동생과 아들이나 손자가 순서 없이 왕권 경쟁을 벌여 번갈아 가며 왕을 하던 왕권 경쟁이 치열하던 때였다. 흥덕왕은 바로 윗대인 헌덕왕의 동생이며 원성왕의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다시 말해 (신)안동 김씨의 시조인 태사공이 탄생한 효공왕 때엔 이미 흥덕왕의 후손은 왕권에서 멀어진 지 오래 된다. 그러니 어느 왕의 아들이라 기록할 수는 없고 흥덕왕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그 탄생 장소만 밝혀 놓은 것일 수 있다.
흥덕왕의 손자인지 증손자인지도 알 도리가 없다. 연대를 보면 증손자 이상일 가능성이 있다. 변방에서 모반하는 세력들이 발호하던 신라 말기에 (신)안동 김씨의 시조 태사공이 변방의 성주라 할지라도 군사력을 지닌 자리인 그런 위치에 오른 것만 봐도 당시 신라 왕인 박씨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는 세력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박씨에게 적대적인 세력일 가능성이 큰 바로 윗대인 효공왕의 아들은 아니었을 거란 소리다. (신)안동 김씨의 시조 태사공이 박씨 성을 가진 경애왕을 살해한 견훤을 토벌하러 나선 것만 봐도 그렇다.
이렇게 보면 (신)안동 김씨의 시조 태사공은 효공왕의 아들이라기 보단 흥덕왕의 후손일 가능성이 더 높다. 효공왕의 아들이라 보면 흥덕궁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을 설명 할 길이 없지만, 흥덕왕의 후손이라면 효공왕 5년에 신라의 왕궁의 하나인 흥덕궁에서 태어났지만 효공왕의 아들로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위 모든 역사 추리가 (신)안동 김씨 시조 태사공에게 꼭 맞는 탄생 비화일 수는 없다. 추리는 어디까지나 추리인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인생사의 논리를 대입해 볼 때 가장 그럴 듯한 추리일 수는 있다.
어쨌건 (신)안동 김씨의 시조 태사공이 신라의 왕성의 하나인 김씨의 후손이라는 점은 명확하고, 그 연원은 신라의 삼성 신화에 나오는 알지 왕에게로 이어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자신의 뿌리를 더듬어 보는 일도 뜻 깊은 일이겠지만, (신)안동 김씨의 시조 태사공 이후 선조들이 어떻게 노력해 자신의 가문을 빛냈는가를 참고하여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동시에 가문도 빛내는 일거양득의 삶을 궁구하는 것이 더욱 보람된 길일 것임을 재삼 밝히면서 이 짧은 글을 마친다.
김흥년(시인/비평가/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