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39
최세윤(崔世允) 大將
자는 성집(聖執), 호는 농고(農皐), 또 이름을 세한(世翰), 자를 성집(成執)이라 한 때도 있었으며 관향은 곡강(曲江)이다. 단기4200(서기1867)년 11월10일 경북 흥해군 동부면 곡성리에서 출생. 약관 이후로 교육에 뜻을 두고 원근의 아이들을 모아 한문을 교육했다. 단기4229(서기1896)년, 고종33년 국모 시해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병신(丙申)의병이 각처에서 일어나자 공(公)은 29세의 나이로 격렬한 어조로 격문(檄文)을 지어 동해 각 군에 발부하여 사기를 고양시켰다. 을사늑약 후 병신(丙申:1906)년 3월 산남의진을 일으킬 때 정용기 대장의 서한을 가지고 이한구 의사가 찾아왔으나 전신에 습진(濕疹)이 있어 동행하지 못하다가 몸을 추슬러 영천 진영으로 찾아가 생사를 함께하기로 서약하였다. 그러나 몸이 완쾌되지 않아 후방에서 군인징발과 군수품 모집 등으로 지원을 하면서 동해 연안의 참모부 역할을 하였다. 정미(丁未:1907)년 9월1일 입암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여러 장병이 전사하자 정순기 의사, 그 지방의 주인인 월성 손씨 문중 등과 더불어 장의(葬儀)를 거행하고 동엄 정환직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9월24일 정환직 대장이 부대를 이끌고 북동대산을 출발, 청하를 거쳐 흥해를 습격하여 적의 분파소와 주요 근거지를 섬멸하였다. 그날 밤 대장 숙소를 천곡사(泉谷寺)로 정하고 공(公)은 대장을 모시고 후사(後事)를 논의하였다. 11월 초순에 흥해를 재습격하여 적의 수비병을 전멸시킨 후 폭우로 인해 보경사에서 진영을 쉬면서 부하요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환직 대장이 뒤를 이을 대장으로 최세윤 공을 지명하였다. 정환직 대장이 적의 손에 잡혀 총살을 당하여 전순(戰殉)하자 정순기 의사 등이 서한을 보내 공(公)의 입진(入陣)을 독촉하므로 습진이 완쾌되지 않았음에도 무신(戊申:1908)년 정월 초이튿날 출발하여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 거동사에 당도하였고 2월 5일 3대 대장에 추대되었다. 최세윤 대장은 작금의 상황을 고려하여 본부를 남동대산(南東大山)으로 옮긴 후 북상(北上)을 포기하고 경상도 일대에서 지구전(持久戰)을 펼칠 전략을 세웠다. 경주·울산·흥해·포항 등은 본부가 담당하고, 청송동부 지역은 주왕산 일대에서 서종락, 청송서부 지역은 철령 일대에서 남석구, 영천북부 지역은 보현산 일대에서 이세기, 영천서부 지역은 팔공산 일대에서 우재룡이, 영천남부 지역은 구룡산 일대에서 이형표, 신녕 지역은 화산일대에서 조상환, 의성 지역은 춘산일대에서 박태종, 군위 지역은 효령 일대에서 남승하, 청도·경산 지역은 운문산 일대에서 임중호, 경산서부 지역은 주사산 일대에서 손진구, 청하·죽장·기계 지역은 북동대산 일대에서 정순기·구한서가 담당하고 각 부대들은 모두 본부와 연락을 취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해 2월부터 7월까지 각 부대에서 왜적과 교전을 벌였으며, 각지 분대에서 본부를 중앙으로 옮겨달라 청하므로 의성 춘산으로 이동하던 중 의성지역에서 참패를 당하고 다시 동해방면으로 돌아와 장기(長鬐)지역에 근거를 두었다. 본부에서 각 분대를 조종하던 중 최세윤 대장이 용동(龍洞)에서 적에게 붙잡히고, 1911년 11월15일 10년형을 언도받아 경성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6년 옥고를 치르던 중 11일 단식으로 1916년 8월9일 순절(殉節)하였다. 공의 장자(長子) 산두(山斗)는 공이 적에게 잡히기 전에 체포되어 부친행방을 알고자 모진 고문을 당하고 끝내 대구옥(獄)에서 순절하였고, 부인 윤(尹)씨 또한 옥바라지 끝에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고 다음 해 병고로 서거하였다. 그 뒤로 그의 고향에서 칭찬하기를 ‘그 집은 충(忠), 효(孝), 열(烈) 삼강(三綱)이 완비되었다.’ 라고 전한다<山南義陣遺史 제4편 崔世允大將略歷 P307~335><山南倡義誌 卷下 P33~34> 1968년 독립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