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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儒醫)의 길 -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문정공 범희문范希文이 말하기를, “내가 글을 읽고 도를 배우는 이유는 천하의 인명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黃帝의 글을 읽어 의학의 심오함을 깊이 연구할 것이니 이 역시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옛 사람의 뜻을 세움이 이와 같이 자애롭고 컸다.(정약용, 「마과회통서麻科會通序」, 마과회통麻科會通, 1797)
지금 너희 종형제가 5~6명이 된다 하니, 내가 만일 하늘의 은혜를 입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오직 5~6명을 가르치고 훈계해서 모두 효제를 근본으로 삼게 하고, 또 경사經史와 예약, 병농兵農과 의약醫藥의 이치를 꿰뚫게 하여 4~5년이 지나지 않아 찬란한 문채를 볼 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정약용, 시문집詩文集, 「서書」, ‘두 아들에게 부침(4)’(여전與全 1집集, 21권卷))
정다산은 의학에 정통하였다. 그를 비방한 사람들은 그의 의술이 서양학에서 나왔다고 하였다.(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제1권 상上(1895년 이전) ‘정약용의 의술’)
1. 머리말
조선 후기의 걸출한 사상가인 정약용(1762~1836)은 의학과 의술 분야 다방면에 걸쳐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무엇보다도 정약용은 종두법 도입에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박제가와 함께 그는 국내 최초로 인두법 도입을 시도한 인물이었으며, 최초의 우두법 도입자이다. 정약용은 또 한의학의 생리학, 병리학, 진단법 등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오행론적五行論的 술수術數 이론을 강하게 비난함으로써 조선의 의학사에서 가장 통렬한 한의학의 관념성을 비판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한 비판의 근거에는 서양의 학문인 한寒·열熱·건乾·습濕을 물리적 특징으로 하는 사정四情 이론이 깔려 있었으니, 의학적 측면에서 서양의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정약용의 마과회통麻科會通(1797)은 또 어떠한가? 18세기 조선을 휩쓸던 마진(麻疹, 삼씨처럼 작은 반점인 생긴다 하여 붙은 이름, 대체로 홍역을 지칭함)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온 이 책은 조선 의가의 경험과 중국의가의 이론과 처방을 종합한 것으로서 동아시아 최고수준의 마진 전문 의서로 평가 받았다. 정약용은 당대를 대표하는 유의儒醫로서 순조(純祖, 1790~1834)와 그의 아들 익종(翼宗, 1809~1830)의 진료에 참여할 정도로 실제 의술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은 당연히 일찍부터 여러 학자의 관심을 끌었다. 1935년 한국의학사 연구의 개척자인 미키 사카에(三木榮)는 조선종두사朝鮮種痘史라는 얇은 책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조선 내 종두법 도입의 역사를 다루면서, 인두법과 우두법의 최초 도입에 끼친 정약용의 활약을 특기했다. 그는 인두법의 경우 박제가와 함께 최초 도입의 공을 나누는 것으로, 우두법의 경우는 정약용이 단독 최초임을 밝혔다. 1940년 국학연구자 최익한은 동아일보에 4회에 걸쳐 연재한 “종두술과 정다산 선생”이라는 글에서 2년 전 출판된 마과회통에 실린 인두법과 우두법의 내용을 대중에게 소개했다. 여기에는 정약용의 우두법 도입이 일본보다 십수년이 더 빨랐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글의 전반적인 논조는 정약용의 위대한 애민 정신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미키 사카에는 이후 조선의학사급질병사朝鮮醫學史及疾病史(1955년 등사본, 1962년 활자본)에서 다시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전반을 폭넓게 고찰했다. 그는 정약용의 방대한 저작인 마과회통은 그것이 당시까지 중국과 조선의 홍역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정약용의 한의학 술수이론 비판, 서양과학 수용의 내용을 정리했는데, 이로써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의 전반적인 윤곽을 확연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에 나타난 특징을 실증성과 이용후생으로 규정지으며 그것을 실학의 테두리 안에서 파악했다.
1962년 북한에서는 정약용 탄생 200주년에 즈음하여 과학원 철학연구소에서 탄생 200주년 기념논문집 다산 정약용을 펴냈는데, 여기서 리용태는 정약용의 자연과학사상 전반을 다루는 가운데 의학 내용을 논했다. 그는 ‘과학적’인 태도에 초점을 맞췄는데, 진맥에 관한 술수 측면에 대한 비판, 수입 종두법에 대한 실험, 약초의 성능 연구 등에서 그것을 찾았다.
1980년 홍문화는 정약용의 의학과 의학만을 다룬 최초의 논문을 냈다. 「의·약학자로서 다산과 사상 및 업적」라는 논문이 그것인데, 여기서 홍문화는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의 과학사적 의의에 대해 이전의 그 어떤 저작보다 더욱 대담한 평가를 내렸다. 정약용의 의학의 특징을 “관념적 음양오행설이나 운기運氣 의론醫論을 탈피한 실증의학”으로 본 것은 이전 학자와 같지만 마과회통이 중국의 한의학의 추종에 그친 것이 아니라, 독자적 체계에 따른 집대성이라는 것, 「의령」에 예기와 내경마저 통박痛駁하는 혁신적 의론醫論 실려 있다는 것, 「의령」에 실린 약물학적 지견과 치험례 등은 미신과 불합리를 타파하고 역학적, 예방의학적, 사회의학적, 실증의학적 임상의술의 특징을 보인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정약용을 현대의 과학적 의학의 개조로 높이 평가했다. 즉 정약용이 이전의 의학과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의학, 즉 과학적 의학의 개조開祖가 될 정도의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키 사카에, 최익한, 리용태, 홍문화 등의 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은 오늘날의 잣대로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을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1900년대 황현의 평가, 즉 “정다산은 의학에 정통하였다. 그를 비방한 사람들은 그의 의술이 서양학에서 나왔다고 하였다.”고 한 것과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단순히 정약용의 의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말하려는 대신에, 후대의 학자들은 정약용의 의학에서 보이는 선진성, 합리성, 실증성 등을 부각시키는 데 애썼다.
1990년대 들어 베이커(Donald Baker)는 이런 근대주의적 시각을 비판하면서, 정약용의 의학을 당대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두법으로 대표되는 정약용의 의학 업적이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차원과 관련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보았다.
한의학이 아닌 서양의학을 다루는 한국 의사들도 다산이 종두법을 소개한 사실을 들어 그가 의학계의 선구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정약용이 주목할 만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의 18세기 육체에는 오늘날 다산을 존경하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20세기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산 인물로서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보다 진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시대의 현안들에 대응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며 저술하는 한 인간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사고·행동·저술 등에서 18세기 말, 19세기의 초의 조선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와 해결책의 형태를 결정짓고 있던 가정과 범주를 여전히 지침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베이커는 18세기 말~19세기 초·중반의 시대적 고민에 대응하는 정약용의 모습을 매우 잘 잡아냈다. 그는 두창과 홍역이라는 전염병의 문제, 지방의 의료가 열악하다는 현실, 관념적인 의학이론과 처방의 난무 등에 맞서는 지식인 정약용상을 그려냈다. 또한 그는 정약용에게서 서학이 이러한 시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자극제가 되기도 하고, 자료의 원천으로 구실했음도 보여주었다.
김대원은 정약용이라는 명성에 미리 사로잡히지 말고, 정약용의 의학 내용 그 자체가 과연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여부부터 따지자고 했다. 그는 다산이 서양의학의 이론을 받아들였다는 그 자체가 선이 될 수는 없으며 그 서양의학이 얼마만큼 타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었으며, 얼마만큼 현실적 유용성을 지녔는지에 대해 따지려고 했다. 그는 마과회통 연구에서 “근대적인 인물로서 정약용이 아니라 어설프게 서양의학을 전통의학에 적용시켜 보려다 실패한 정약용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전 논문에서 이미 베이커나 김대원의 문제인식이 연구사적으로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한다. 그럼으로써 정약용의 의학에 관한 논의가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이를 논의할 수 있는 본격적인 장이 열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인의 관심에 부합하는 일부 내용을 부조하여 평가하는 대신에 역사학이 일반적으로 묻는 상식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정약용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의학 분야만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며, 경학과 사학을 비롯한 이른바 정통 학문에 대한 관심에 비한다면 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히려 초라할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의학 부분에서 높은 성취를 이뤄냈다. 누구한테서 의학을 배웠으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의학과 의술 능력을 키워나갔을까? 또 그의 의학과 의술의 전모는 어떠하며, 그것은 어떠한 형태의 독특한 특징을 띠고 있는가? 또 그는 왜 의학과 의술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그의 의학과 의술의 시대적 가치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에 관한 저작 전반을 검토의 대상으로 올려야 할 것이다.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에 관한 자료를 보면, 대부분이 그가 정리한 것들이다. 그는 자신이 쓴 의학서적으로 3종을 언급했다. 마과회통(1797), 촌병혹치村病或治(1801), 의령(1802~1818 무렵) 등이 그것이다. 마과회통(12권)은 당시 조선에서 정약용이 구할 수 있는 모든 중국과 조선의 의학서적에서 마진麻疹과 관련된 내용, 또 그것과 비교 검토하기 위한 두창 의학에 관한 내용 등을 총망라한 방대한 것이다. 일단 1797년 편찬이 완료된 것이지만, 이후 세상을 뜰 때까지 약간의 증보가 있었다. 인두법을 다룬 「종두설」, 우두법을 다룬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 등과 함께 마과회통 출간 이후 모은 청국의 마진 전문처방의 증보 등이 그것이다. 촌병혹치(2권)는 정약용이 경상도 장기에 귀양 가자마자 지역민의 요구에 따라 저술한 간편한 처방서인데,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의령(2권-여유당집에 따름)은 그가 강진 유배지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총 43항의 짧은 글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한의학 이론에 대한 비판, 약물학 경험 등 정약용의 의학관이 잘 담겨 있다. 이상 3종이 정약용이 직접 지었다고 하는 의학서적의 전부이며, 현재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의서 3~4종이 존재하는데, 이는 일단 그의 이름을 가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의학서적 이외의 정약용의 의학에 관한 내용은 여유당전서 시문집 안에 연대미상의 4개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의설醫說」과 「맥론脈論」1·2·3이 그것이다. 비록 기사 수는 몇 개 안 되지만, 이것들은 따로 시문집에 추려 실렸을 정도로 정약용 의학관의 핵심을 차지한다. 「의설」은 그 자신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의학의 ‘참 모습’에 대해 논했고, 「맥론」은 한의학의 진단법 중 자신이 받아들이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논변한 것이다.
이밖에 정약용의 여러 저작 안에 의학과 의술 관련 내용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경세유표(1817)에서는 고대 제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주례 제도를 염두에 두고 국가 보건의료기구인 내의원·전의감·혜민서 제도에 대해 짧게 논했다. 아언각비(1819)는 문자학에 관한 책이지만, 본초와 관련된 내용이 20여 종의 문자적 진위를 가렸다. 당연히 그 식물이 무엇인지 속성을 자세히 논했다. 목민심서(1818년 편집, 이후 보완)는 지방 수령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사항 가운데 하나로 의약 대책을 다뤘는데, 주로 ‘애민육조愛民六條’에 그런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중 역병 대책에 관한 2개의 기록이 주목된다. 그가 귀양지에 있을 때의 전염병 대책, 1821년 콜레라 유행에 관한 대책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 이외에 정약용이 그의 아들과 주고받은 편지 가운데 몇몇 의학, 의술 관련 내용이 있다.
정약용 저작 이외의 것으로 그의 의학과 의술에 관한 기록으로는 그다지 많지 않다. 실록 등에 그가 익종과 순조의 임종 때 의약동참醫藥同參( 어의가 아니면서 일반인 가운데 의술이 고명한 자를 궁중 진료에 포함시키는 일)으로 입진했다는 몇몇 기록이 있고,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醫藥五洲衍文長箋散稿에 「종두변증설」(인사편, 기술류, ‘의약’ 조) 등이 있다.
이 정도의 분량이면, 조선시대 의학사의 대상이 되는 그 어떤 인물보다도 풍부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의학과 의술과 관련된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텍스트들이다. 행적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더러 있지만 그것은 파편적인 성격을 띤다. 이를테면, 70대의 정약용은 궁중 진료에 뽑혀 올 정도로 높은 의술 수준에 도달해 있었는데,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충분히 알려주는 사료는 없다. 대체로 몇몇 책만 남아 있고, 책에는 가려 뽑은 처방과 의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얼마나 많이 임상에 참여했는지 알 수 없다. 또 그의 의학이 얼마나 많이 임상 경험과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텍스트에는 그의 높은 의학적, 의술적 식견이 묻어 있다. 이런 괴리 때문에 우리는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을 역사적, 계통적으로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이런 자료만으로는 위에서 제기한 여러 연구 질문에 충실히 답할 수가 없다. 겨우 그의 의학과 의술의 범위와 특징 정도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도, 나는 관련 사료를 시기별로 나누어 조목조목 따져 봄으로써 비록 거칠기는 하지만 더 많은 물음을 던지고자 하며,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정약용이 의학과 의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 그것의 진행 궤적, 그것이 그의 삶과 학문 안에서 차지하는 위상, 그것이 19세기 조선사회에서 지니는 가치 등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단순한 직업적인 의원의 차원과 구별되는 유학자의 관심이 그의 의학과 의술이 지향하는 내용과 방법을 1차적으로 규정했다고 가정한다. 그의 의학과 의술이 자신의 병을 돌보고 단지 환자를 잘 고친다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지역 주민, 더 나아가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고, 의학 전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 것은 이러한 유자儒者의 관점에 따른 것이라 본다. 나는 이를 ‘유의儒醫의 길’이라 말하고자 한다. 물론 유의儒醫의 관점만으로 그의 의학과 의술의 특징까지를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나는 그의 의학과 의술을 지배하는 고증과 실증이라는 정신은 그가 살았던 18세기말~19세기 초의 사상적 자장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게다가 그를 의학정보와 약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처지로 몰아넣었던 18년의 귀양살이 또한 그의 의학과 의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본다.
2.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에 관한 관심의 추이
1) 마과회통(1797) - 정약용 의학 공부의 시작?
현재 남아 있는 문헌 가운데, 의학과 관련된 정약용의 첫 기록은 놀랍게도 마과회통이라는 대작이다. 1797년 정약용은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홍역 전문서인 이 책을 편찬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이 책 이전에 그가 의학을 심도 있게 공부했다는 그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회갑을 맞이하여 정약용 스스로가 쓴 「자찬묘지명」을 보면, 자신은 어려서 총명했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했으며, 규장각·홍문관 관직에 있으면서 귀한 서적을 제한 없이 읽었다고 한다. 이러한 박학 가운데 의학이 포함되어 있었는지 여부는 알기 힘들지만, 적어도 의학이라는 분야를 독서하는 데 필요한 기본 소양을 남김없이 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과학기술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배에 관한 논의인 ‘주교舟橋에 관한 규제’의 마련(1789, 28세), 서양 기술까지 응용한 화성 성역의 설계(1792, 31세) 등에서 임금의 명을 충실하게 수행한 바 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정약용은 의학 같은 전문 분야라 할지라도 그 자신의 총명함과 엄청난 기초 독서량을 바탕으로 하여 그 분야의 높은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실제로 사서오경을 비롯하여 주자의 저술에는 의학에 연관된 내용이 적지 않다. 이런 내용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학경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정약용과 동시대에 살았던 흠영欽英의 저자인 사대부 유만주(兪晩柱, 1755~1788)의 일기를 보면, 그가 학문의 한 분야로서 소문을 완독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아마도 책벌레인 정약용도 이런 식으로 유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의학지식을 마스터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정약용은 의학 분야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과회통이라는 결과물이 그 증거이다. 의서를 짓는 것은 그것이 생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의학 책을, 그것도 중국과 조선의 마진학麻疹學(홍역 전염병학) 전부를 정리한다고 나섰으니 대단한 패기라 할 수 있다.
마과회통은 정약용이 잠깐 외관직에 나가 있을 때 저술되었다. 1789년 중앙 관직에 나선 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치던 그를 시기하는 자가 많아지자, 정조는 그를 외직인 곡산부사로 임명하면서 한가한 고을에서 사기선史記選 찬주를 산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앙의 요직보다 다소 한가해서였는지, 정약용은 그곳에서 사기선 찬주를 산정하는 일 이외에 의서인 마과회통을 편찬했다.
마과회통 서문에서 정약용은 이 책을 짓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몽수蒙叟 이헌길李獻吉의 뜻을 계승하기 위함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근세에 이몽수李蒙叟라는 분이 있었는데, 사람됨이 뛰어났으나 명성을 얻지 못했고, 사람 살리기에 뜻을 두었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다. 마침내 마진痲疹에 관한 책을 가져다 독자적으로 탐구하여 살린 어린이가 만 명을 헤아렸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내 이미 이몽수로 말미암아 살아났으므로 마음속으로 그 은혜를 갚고자 하였으나 어떻게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몽수蒙叟의 책을 가져다가 그 근원을 찾고 그 근본을 탐구한 다음, 중국의 마진에 관한 책 수십 종을 얻어서 상하를 자세히 풀어 보고 조목마다 상세히 알아보았다. 다만 그 책의 내용이 모두 산만하게 뒤섞여 조사하고 찾기에 불편하였다. 마진은 그 병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열이 대단하므로 순식간에 목숨이 왔다갔다하니 세월을 두고 치료할 수 있는 다른 병과는 다르다. 이에 잘게 나누고 유별로 모아, 눈썹처럼 정연하고 손바닥을 보듯 쉽게 하여 병든 자로 하여금 책을 펴면 처방을 얻어 번거롭지 않게 찾도록 하였다. 이를 무릇 일곱 차례 초고를 바꾼 뒤에 책이 비로소 이루어졌으니, 아, 몽수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아마 빙긋이 웃으며 흡족하게 생각할 것이다.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나갔던 시절에 즈음하여 그는 생명의 은인인 이헌길의 처방집을 얻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처방을 정리한 책인 마진방麻疹方과 그것을 확충한 자신의 책인 마과회통의 편찬을 동시에 진행했다. 현재 규장각 소장본을 보면, 이 마진방(마진기방麻疹奇方)에는 마과회통의 서문과 동일한 서문이 붙어 있고, 정약용이 쓴 「이몽수전」이 발문으로 붙어 있다. 또한 본문 가운데 마과회통의 내용과 동일한 대목에 ‘몽수’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 책은 정약용이 편집한 것이다. 이 책 이외에 정약용은 이헌길의 뜻을 계승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마진 연구를 확충하여 마과회통을 내놓았다.
물론 정약용이 마진학 연구를 하게 된 것이 단지 생명의 은인에 보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몽수전」에서 정약용은 그의 마진 의술이 대단한 효과를 보였다는 점을 특기했다. 이렇게 훌륭한 의술이 존재했지만, 정약용이 보기에는 그가 세상을 뜬 이후 세속의 의원들은 마진 병에 대해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진료나 연구에 나서지 않았고 처방을 낸다 해도 효과가 없었다. 정약용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슬프다. 병든 사람에게 의원이 없는 지 오래되었다. 모든 병이 다 그렇지만, 마진이 더욱 심하니 어째서인가. 의원이 의원을 업으로 삼는 것은 이익을 위해서이다. 마진은 대개 수십 년 만에 한번 발생하니, 이 마진병 치료를 업으로 해서 무슨 이익 되는 것이 있겠는가. 업으로 삼으면 기대할 만한 이익이 없다고 하여 하지 아니하며, 환자를 만나서는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부끄러운 일인데 더구나 억측으로 약을 써서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아, 잔인한 일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정약용은 이헌길의 책을 되살리고, 확충하는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이미 송대의 범문정이 말했듯, 이처럼 황제의 의서를 읽어서 의약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올바른 정치를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마과회통은 총 8편이다. 그것은 「원증편原證編」, 「인증편因證編」, 「변사편辨似編」, 「자이편資異編」, 「아속편我俗編」, 「오견편吾見編」, 「합제편合劑編」, 「본초편本草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증편」에서 마진의 정증正症인 홍역을 정의하고, 발병 요인을 캐묻고, 일반적인 치료법과 병에 진행에 따른 각종 치료법을 제시했다. 「인증편」에서는 마진 때 나타나는 온갖 증상을 여러 개의 무리(땀·피·갈증·음식 먹기·인후통·복통·심리 정신상태·대소변·설사·이질·감채疳瘵(괴저성 口內炎)·멍울·회충·잡증) 등으로 나누어 범주화했다. 「변사편」은 유사 질병을 구별하기 위한 편으로, 마진으로 오인할 수 있는 발반發斑이나 수두水痘 같은 각종 발진성 질환을 다뤘다. 「자이편」에서는 오랜 의학 전통을 지닌 두창에 관한 의학으로부터 마진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얻고자 했다. 「아속편」에서는 위 각각의 편목에 대해 조선 의학계의 마진학을 보완했다. 「오견편」에서는 여러 의가와 그들의 의학이론, 처방 등에 대한 정약용의 비평을 실었다. 「합제편」에서는 처방을 실었고, 「본초편」에서는 처방에 들어가는 약물의 약성을 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약용은 중국과 조선의 마진학을 하나로 회통했고, 책 이름을 마과회통이라 붙였다. ‘마과회통’이란 모습은 회통이라는 측면에서 다음 네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마과麻科’에 관한 모든 문헌을 망라하려고 했다. 정약용은 만전세萬全世의 의심법, 마지기馬之其의 마진휘편 등 중국의서 57종과 이헌길의 을미신전, 임서봉任瑞鳳의 임신방壬申方 등 조선의서 6종을 수집했다. 마진이라는 한 분야에 63종이라는 것은 대단히 큰 규모이다. 그것은 당시 중국과 조선에서 출현한 마진 관련 의서 대부분을 망라하는 것이었다. 마과회통 서문에서는 7차례 수정을 거쳤다고 했는데, 새 책이 계속 추가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마진방·마과회통은 아직 탈고하지 못했는데, 겸하여 또 새로 몇 종류의 새 책을 구했으니, 각 부분에다가 첨가해 넣어야 책이 완성되겠습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둘째, 마진학을 병증, 약제, 본초 등 셋으로 범주화 하여 분류했다. 위에서 언급한 8편의 체제가 그것이며, 63종의 책에 담긴 관련 내용 전부를 일목요연하게 범주화하고 분류했다. 마진학 분야에서 이와 같은 저작은 이전에 없었다. 이 부분은 마과회통 저술에서 가장 주목된다. 정약용의 학문방법이 거기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자료로 취급하는 63종 문헌 중 마진 관련 전체 내용을 병의 원인, 병의 주요 증상, 병의 부수 증상, 병의 이름과 증상의 이름 등 분류 범주 안에 모두 실었으며, 그것을 나란히 실어 비교토록 했다. 이런 편집 방식 때문에 마과회통은 비슷한 내용을 중복해서 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약용은 이런 방식을 통해 논의의 선후, 여러 의가의 중복 또는 표절 여부, 독창적인 창안의 내용을 구별할 수 있었다. 아울러 비교 검토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병증과 처방에 대한 논의를 심화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은 고증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정약용의 전형적인 지식 획득 방법이었다. 의학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이 단순히 문헌적 방법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변에서 겪고 본 것, 이헌길의 유방遺方을 정리, 검토하면서 얻은 것을 기초로 하여 이러한 고증학적 방법을 결합시켜 자신의 마진학을 세워나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약용이 마과회통 서문에서 밝혔듯, 그는 이헌길의 처방에서 효험을 확인했던 것을 그 처방이 어떻게 구분될 지를 따졌고, 그 처방의 연원이 상당수가 중국의 마진서에서 비롯한 것임을 찾아냈다. 다시 그 처방에 관한 이론을 검토하고, 그것을 다른 의자醫者의 설과 검토하면서 차츰 차츰 마진학의 범위를 넓히고 내용을 심화했다. 이런 사실은 정약용의 마진학이 단순히 문헌만을 모아 정리한 책상물림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셋째, 병증, 처방, 본초 셋 사이를 상호연결하고 색인화 했다. 즉, 병증에 보이는 처방명은 합제편이나 본초편에서 매우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정약용은 “마진이라는 병은 혹독하고 매서워서 시급을 다투어 인명이 판가름 나는 병으로······내용별로 분류하고 같은 것끼리 모아서 조목별로 보기 쉽게 하였다. 그리하여 병이 생긴 집에서 책을 펼치면 방문을 쉽게 얻게끔 하기 위해 7번이나 초고를 고쳐 책이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가 이 부분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넷째, 「오견편」에서 선학에 대한 비평과 자신의 견해를 과감하게 제시했다. 오늘날의 학자들이 마과회통 가운데 가장 주목한 부분이 여기다. 이전의 학술 저작을 면밀히 분석, 검토하는 작업을 끝낸 후, 정약용은 “나는 비록 의술의 이치에 어둡지만 오랫동안 진서疹書를 열람하였더니, 점점 마음에 잡히는 것이 있게 되었다.”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토로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기존의 의학내용과 의술 수준을 평가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이를테면 마진학의 대가로 알려진 만전萬全에 대해서는 “치료기술이 상당히 정교”하지만, “사람됨이 과장되고 음험하여 ……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평가했고, 허준(許浚, 1546~1615)에 대해서는 “마진이라는 명칭도 알지 못하고 독역이라 하였으니, 현재 취할만한 것이 못 된다.”하면서도 “그의 이론은 12경經의 학문에 가장 깊은 것들이니 귀중한 것이다.”라 평했다. 이처럼 「오견편」에서 정약용은 의가의 독창성, 관찰과 임상의 정밀성, 이론과 처방의 타당성 등을 기준으로 하여 옛 의사들의 성취와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런 비평과 함께 정약용은 시중의 의사인 속의, 홍역이 유행하는 주기를 논한 운기運氣, 홍역 유행연표인 연차年次, 홍역의 증상과 이름을 분명히 밝힌 변명辨明, 병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인 예비, 증상에 관한 논의인 증론症論, 홍역과 연관된 것으로 짐작되는 회충, 홍역에 찬 약을 쓸 수 있는가에 관한 논의인 한약寒藥, 그 밖의 똥·오줌 치료 따위의 잡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정약용의 마과회통은 책 제목에 걸맞게 마과麻科 전체를 회통하는 것으로서, 당시에 나온 중국과 조선의 마진 의서 가운데 가장 볼륨이 많고, 가장 체계가 잡힌 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게다가 기존의 의론醫論과 처방을 종합한 데 더 나아가 자기의 안목을 덧붙임으로서 동아시아 마진학의 경지를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종두법에 대한 관심 - 인두법에 대한 관심(1800)
정약용은 조선 최초로 종두법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2인 중 1인이다. 정약용은 국내에서 최초로 종두가 시행되던 전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처음 이참판 기양基讓씨가 의주부윤이 되었을 때 정씨종두방을 얻어 돌아와서 나에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박검서朴檢書 제가齊家를 만나 그에게 이를 말하였다. 박공은 또한 의종금감醫宗金鑑 가운데 있는 종두요지種痘要旨를 얻어 그것을 포천에 사는 이생원 종인鐘仁에게 전하였다. 이종인은 시묘時苗로써 접종을 시험하여 4, 5인을 거치면서 (양질의) 두묘痘苗를 얻어냈는데, 그것이 마침내 방서에서 말한 바와 같았다. 그리하여 이공은 두痘를 익혀서 서울에 들어와서 어린아이에게 종법種法을 시행하여 마침내 이를 터득하였다. 이는 우리 동국에서 실시한 최초의 종두이다. 때는 성상 24년(1800) 경신 3월에 소계어자苕溪漁者가 쓰다.
이 글을 보면, 1800년 무렵 정약용과 박제가가 서로 다른 경로로 종두법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박제가가 이 종두법을 이종인에게 전해준 후 그가 이 방법을 널리 퍼뜨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정약용은 우연히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일 뿐, 최초 시행에 그다지 기여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했다.
나중에 최초 종두법 실시 과정을 소상히 적은 정약용의 「종두설」에서는 1800년 적은 것과 약간 다른 내용이 담겨 있다. 우선 그는 이기양이 중국에서 가져온 정씨종두방(鄭望頤 저)을 보기 이전에 강희자전에 실린 “신두법神痘法은 대체로 두즙痘汁을 코에 넣고 호흡하면 당장 솟는다.”는 내용을 통해 “묘한 방법이 있는데도 우리나라에는 전해오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섭섭하게 생각하여 왔”음을 밝혔다. 이어서 그가 이기양의 책을 본 것이 1799년임을 밝혔다. 이어 1800년 이후 박제가의 만남과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상술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800년 박제가와 만났는데, 박제가는 내각장서 가운데 내용을 뽑아 두었다고 했다. (이 책이 전겸錢謙의 의종금감일 것이며, 이규경의 「종두변증설」에 따르면 박제가가 1790년 연행 시절에 이 책을 구해 가지고 온 것이다.) 하지만 박제가는 그것이 1~2장으로 너무 소략해서 시행할 수 없었다. 정약용이 본 것도 소략했기 때문에 정약용은 두 책의 내용을 종합하여 한 책으로 만들었고, 그 내용을 가지고 박제가와 토론했다. 둘의 토론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어떻게 하면 양질의 두종(痘種, 딱지 형태의 백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이었다. 정약용이 본 정씨종두방에 실린 내용 가운데 “여름에는 5~6일, 겨울에는 15일 지난 두종은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박제가는 현재 중국에만 있는 두종을 가져다 쓰려면 “한 겨울에 북경에서 아무리 빨리 두묘 딱지를 가지고 와도 15일 이내에 올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사실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서 두종을 국내에서 제작해야 할 것에 대해 토론했다. 정약용은 “두창을 잘 겪은 자에서 채취한 딱지를 3~4번의 접종을 걸쳐 양질의 두종으로 만들 수 있다”는 내용에 주목하여 두종 채취 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정약용, 박제가 둘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던 차, 박제가가 영평현(오늘날의 포천)의 현감이 되어 나아간 후 그곳에서 종두법을 관리에게 이야기했고, 그 가운데 흥분한 이방이 잘 된 것을 구해 자기 아이에게 접종했다. 아이의 종두는 잘 되었지만, 그로부터 얻은 두종은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관노, 세 번째 초정의 조카의 접종을 거쳐 얻은 두종은 종핵種核이 더욱 커진 양질의 것이 되었다. 이어 박제가는 의사 이씨(李鍾仁)를 불러 처방과 두종을 주어 세간에 퍼뜨리도록 했는데, 선비 집안에서 많이 접종했다.
이 내용을 보면, 최초의 실시 과정에 정약용이 관심을 가졌던 정씨종두방이 조선의 첫 종두법 실시에 시발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약용이 박제가에게 준 자신의 종합본 종두서가 중요한 구실을 했음도 알 수 있다.
마과회통 부록에는 「종두요지種痘要旨」라는 몇 장 분량의 글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 글은 정망이(鄭望頤)의 정씨종두방과 전겸의 의종금감을 종합한 내용이다. 정약용의 「종두설」에서는 이 책이 난리에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여유당전서 마과회통에는 이 글이 실려 있다. 원본인지 나중에 다시 편집한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이글은 인용한 두 책의 전 내용을 범주로 나누어 나란히 실어 놓은 형식을 띠고 있다.
종두요지의 내용은 천행두의 특징과 원인인 태독설을 다룬 ‘천행두’, 종두의 유래와 효능을 다룬 ‘종두’, 두종을 얻기 위한 방법인 ‘선묘善苗’, “서늘한 곳에 두라”는 두종의 보관법인 ‘축묘蓄苗’, 종두하기 좋은 시점인 ‘천시’, 길일 선택인 ‘택길’, 접종 대상자의 건강상태 확인인 ‘선아選兒’, 종두하는 법인 ‘하종下種’, 접종 후의 상태 진전인 ‘묘후苗候’, 접종이 효과를 거두게 되는 이치인 ‘오장전송지리五臟傳送之理’, 접종 후의 여러 현상인 ‘항핵項核’·‘신묘信苗’·‘경휵驚慉’ 등과 금기 등과 함께 ‘한묘종법旱苗種法’·‘두의종법痘衣種法’·‘두장종법痘漿種法’ 등 여러 가지의 접종 방법을 다뤘다.
이 책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두 책의 내용 비교와 종합을 통해 미지의 방법인 종두법을 더욱 분명하게 파악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마과회통 같은 책을 편찬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 작업은 정약용에게 그보다 훨씬 수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둘째, 남아 있는 저술 가운데 처음으로 “술수術數를 배격하는” 정약용의 의학관이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정약용은 「종두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두 책을 종합하여 1편을 지으면서 혹 뜻이 깊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약간의 주해를 달기도 하고, 아울러 술가의 올바르지 못한 설은 모두 삭제해 버렸다. 예를 들면 시술하는 날의 간지에 따라서 잡아매는 실의 색깔을 다르게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실제로 「종두요지」에서도 이런 태도가 확인된다. 예컨대, 접종 때의 선택에 대해서는 “천시란 근거 없이 잘못된 것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 순음이니 일양이니, 여름이 서늘하고 겨울이 따뜻하다는 등의 말은 모두 술가術家의 케케묵은 말이니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고 했다. 또 날짜를 잡는 택길에 대해서는 “더욱 거짓되고 혼란스러운 것”이라 혹평했다. 이와 함께 하종할 때 “의종금감에서 붉은 실을 쓴다고 한 것은 역시 술가로서 사람을 속이는 짓”이라 비난했다. 비슷한 논리로 “독의 기운이 오장에 차례차례 전달된다”는 오장 전달의 학설도 근거가 없는 것이라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 종두설 가운데 특기할만한 사항은 정약용이 박제가의 말을 옮긴 다음 구절이다. “북경의 모든 종두 하는 의사는 각기 전담된 구역이 있어서 갑 구역의 의사가 몰래 을 구역에 가서 종두를 하면 을 구역의 의사는 관청에 송사를 제기하여 그 죄를 다스린다네” 이는 일종의 의무접종, 관에서 구역을 정해 종두의사로 하여금 그 지역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를 소개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조선에서도 “누구나 다 종두를 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정약용의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읽을 수 있다.
3) 귀양지 장기에서의 촌병혹치 편찬(1801)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한 후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여 정약용은 정치적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801년 신유사옥의 여파로 2월 경상도 경주부근의 장기長鬐로 유배되어 이해 11월 전라도 강진현으로 유배지가 바뀔 때까지 10달 남짓 이곳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촌병혹치村病或治라는 소규모의 의학 책을 지었다. 그가 장기에 유배된 지 수개월 후 아들이 정약용의 건강관리를 위해 의서 수십 권과 약초 한 상자를 보내왔는데, 그는 그것을 재료로 하여 간편 의서를 엮었다. 책을 짓게 된 동기에 대해 「촌병혹치서村病或治序」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내가 장기長鬐에 온 지 수개월 만에 내 자식이 의서醫書 수십 권과 약초藥草 한 상자를 부쳐왔다. 적소謫所에는 서적이 전혀 없으므로 이 책만을 볼 수밖에 없었고, 병이 들었을 때도 결국 이 약으로 치료하였다. 하루는 관인館人(객관을 지키고 손님 접대를 하는 사람)의 아들이 청하기를, “장기長鬐의 풍속은 병이 들면 무당을 시켜 푸닥거리만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먹고, 뱀을 먹어도 효험이 없으면 체념하고 죽어갈 뿐입니다. 공公은 어찌하여 공이 보신 의서로 이 궁벽한 고장에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까.” 하기에, 나는 “좋다. 내가 네 말을 따라 의서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 책을 짓게 된 동기가 “장기 지방의 촌민들이 의약을 이용하지 않고 푸닥거리나 근거가 부족한 민간요법에만 의존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지방 관인의 요청에 흔쾌히 동의한 것은 아마도 이 일이 의학지식을 갖춘 유교적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촌병혹치는 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책의 내용과 특징은 문집에 남아 있는 이 책의 서문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약용은 이 책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의서 중에서 비교적 간편한 여러 처방을 뽑아 기록하고, 겸하여 본초本草에서 주치主治의 약재(君臣)를 가려 뽑아서 해당 각 병목病目의 끝에 붙였으며 보조 약재(佐使)로서 4~5품에 해당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고, 먼 곳에서 생산되거나 희귀한 약품으로서 시골 사람들이 그 이름을 모르는 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 상편上篇은 주병酒病(술병)으로 끝마감하고, 하편下篇은 색병色病(여색에 관한 병)으로 끝마감하였으니, 또한 세상을 깨우치고 건강을 보호하는 나의 깊은 의미를 붙인 것이다.
이를 보면, 이 책이 지향하는 바가 크게는 행동거지의 절제와 수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술병과 색병을 각기 상권과 하권의 끝에 두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 중 둘째 아들 학유(丁學游, 1786~1855)의 음주를 걱정하는 편지에서 술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시키거나 흉패한 행동을 보이게 할 뿐 아니라 온갖 나쁜 술병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제발 이 천애의 애처로운 애비의 말을 따르도록 하라”며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정약용은 술을 삼갔기 때문에 결코 반 잔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가 촌병혹치에서 주병酒病을 경계한 것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학 기술적으로 촌병혹치는 매우 단순한 형태를 지향했고, 지역 특성을 최대한 감안했다. 각 병증(이도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병들이었을 것임)에 대해 20여종의 의서의 내용을 비교 검토한 후 여러 처방을 뽑았고, 처방에 들어가는 약재 가운데 본초(신농본초경)에 적힌 주치 약재만 두고 나머지 보조 약재들은 과감히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그 지방에서 구할 수 없는 것, 그 지방 사람이 모르는 것도 포함시키지 않았고, “장기 지방 촌민의 병에 장기와 주변에서 나는 약재로만 치료할 수 있도록” 했다.
과연 이런 방식의 의서가 최선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정약용은 그 자신도 병증과 처방에 대한 정보의 한계를 잘 인식했다. 그는 “더 많은 책을 비교, 검토하면서 병증을 파악해내고 그 병에 좋은 처방을 선택해야 했는데” 불과 20종밖에 참고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책 이름의 ‘혹치或治’, 즉 “간혹 병에 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라 한 것은 이를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훗날 귀양에서 풀린 후 확충할 것을 기약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이 책이 뭇 세상의 형편없는 의서보다 오히려 훨씬 나을 것임을 기대했다. 정약용이 보기에 세속의 많은 의서들이 “약재의 성질과 기운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차고 더운 약을 뒤섞어 나열함으로써 이쪽과 저쪽이 서로 모순되어” 도저히 효험을 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정약용은 자신의 책이 병증에 대해 간략하게, 반드시 주된 처방만을 가렸기 때문에 “그 효과를 얻는 것이 전일하고 빠를 것”임을 기대했다.
이후 18년씩이나 자신의 귀양살이가 지속될 것인지 알지 못했겠지만, 정약용의 긴 유배생활은 그의 의학관의 형성과 실제 의술의 진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의약에 대한 제한된 정보와 의약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현실 속에서 불가피하게 “단방을 위주로 한” 그의 의학과 의술이 형성됐을 것이다. 벽지의 상황을 최대한 고려한 간편의서인 촌병혹치는 바로 그 문턱에 있다.
4) 강진 유배기(1802~1818)의 의학론 - 의령
회갑년을 맞이하여 정약용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유배 생활 18년 동안 자신의 학문 연구를 정리한 바 있다. 이 시기 그는 경전에 전심하여 시·서·예·악·역·춘추 및 사서의 제설에 대해 200권을 저술했고, 대개 조정에 있을 때 작품들인 시문을 70권으로 엮었으며,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안옥按獄·무비武備·강역의 일과, 의약·문자의 분변 등을 잡찬한 것이 200권이라 했다. 비록 말단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의약 저술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곳에서 마과회통 12권을 수정·보완했으며, 의령醫零 1권을 완성했다. 또한 적지 않은 본초학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문자의 분변을 다룬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을 지었다. 이 세 의학저술 내용 가운데 여기서는 의령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김대원은 의령의 체제와 내용을 분석했는데, 이에 따르면 현재 여유당전서에 포함되어 있는 간행본 의령은 여유당집에 포함되어 있는 의령보다 내용이 소략한 것이다. 여유당집의 의령은 2권 총43항으로 여유당전서의 1권 33개 항목보다 10항목이 더 많으며, 양쪽에 포함된 7항목의 경우에도 더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의령 분석은 당연히 여유당집의 내용을 기본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의령은 “의학醫學에 관한 영세零細한 내용”들이라는 뜻이다. 정약용은 본격적인 의서로 마과회통 3권을 언급했으며, 이에 포함하지 않는 의학 내용을 의령으로 엮었다. 그것이 거창한 의서가 아니라 의약의 여러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 자신이 여려 형태로 견문한 의약 관련 지식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의령이라는 서명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의령은 크게 의론醫論, 의설醫說, 옛 처방을 모은 것[集古], 다시 추가한 처방인 속집續集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령醫零의 의론 부분은 「육기론六氣論」(1-3), 「외감론」(1-3), 「이증론裡證論」(1-2), 「허실론」(1-2), 「탄산론呑酸論」, 「비풍론非風論」, 「뇌론腦論」, 「제량론劑量論」, 「시령론時令論」, 「근시론近視論」, 「인면창론人面瘡論」, 「반위론反胃論」 등 총 18항목이다. 이 가운데 성호사설에도 그대로 보이는 「뇌론」의 경우 “삭제할 것”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의령의 의론 가운데 대부분인 「육기론六氣論」(1-3), 「외감론」(1-3), 「이증론裡證論」(1-2), 「허실론」(1-2), 「탄산론呑酸論」, 「비풍론非風論」, 「근시론近視論」 등의 항목은 명말의 의학자 장개빈張介賓의 경악전서景岳全書 「전충록傳忠錄」로부터 논의의 단서를 찾은 것들이다. 또한 의론의 절반 이상은 의학의 술수학적術數學的 측면, 즉 자연과 인체의 술수학적 상응관계, 인체 부위 사이의 술수학적 상응관계, 오장과 약물 사이의 술수학적 상응관계를 거부하는 논의였다.
의설은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병인 반위에 대한 경험을 다룬 「반위설反胃說」, 약의 기운을 보존하기 위해 탕약을 끓이는 기준에 대한 「전약설煎藥說」, 술·인삼·산용삼産用蔘 등을 다리는 법을 다룬 「잡설1」, 자신의 건강법인 신유혈腎兪血을 문지르는 방법인 「잡설2-신유혈」, 우황청심환 등 많은 종류의 약재가 혼합된 처방의 효험을 다룬 「잡설3」, 두창 치료 묘병에 관한 「잡설4」, 부종과 창독에 관한 처방을 다룬 「잡설5」, 인후통·물사마귀·살갗과 점막에 생긴 물집을 치료하는 방법을 다룬 「잡설6」, 인후통·치통을 치료하는 방법을 다룬 「잡설7」, 혈리血痢·허리통증을 치료하는 방법을 다룬 「잡설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열성 약인 부자를 법제하는 법을 다룬 「제부자법製附子法」도 이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거나, 이전의 징험을 듣거나, 옛 책에서 본 처방을 담은 것이다. 대체로 민간에서 쓰는 단방 위주의 경향을 보인다.
「집고」의 8개 기사, 「약로기藥露器」, 「가알롱본초加穵弄本草」, 「속집」의 5개 기사는 대체로 정약용이 관심을 가진 여러 질병에 대해 옛 문헌에서 여러 질병에 대한 각각의 효험방을 뽑아 소개하는 것들이다. 대체로 「의설」과 「집고」, 「속집」 부분에서는 시골에서 쓸 수 있는 긴요한 것들을 담았다. 관심 있는 여러 병에 대해 효험 있는 처방을 제시했고, 약재의 확인, 약을 제조하는 법 따위의 실용 기술과 지식이 담겼다. 많은 내용이 자신과 민간의 경험이나 의서가 아닌, 문집과 유서 등에 실린 의약기사들이다. 특히 옛 책 가운데에서는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의 지봉유설이 많이 실렸으며, 성호사설의 글도 보인다.
(1) 한의학의 술수적 측면을 공격함
정약용은 자연과 인체의 상응관계 이론인 육기론과 외감론, 신체의 안팎의 상응관계를 논한 표리론, 인체 여러 부위와 오장 사이의 상응관계를 논한 장상이론臟象理論과 약리론을 거부했다. 이런 태도는 「종두요지」(1800)의 의학의 ‘술수학적’ 측면 비판을 더욱 상세한 수준에서 논의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육기론」에서는 병을 일으키는 외부의 기로 여섯 종류가 있으며, 그것들이 인체와 상응관계를 이루며 병을 일으킨다는 육기 이론을 비판했다. 우선 정약용은 「육기론1」에서 기가 여섯 종류가 아니라 네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 딴죽을 걸었다. 그는 의학이 말하는 풍風·한寒·서暑·습濕·조燥·화火 등 여섯 기운이 서로 대등한 범주의 기본 요소가 아니라고 보았다. 즉 한서寒暑는 자연운행의 때와 관련된 것이고, 조습燥濕을 물정物情의 형形이고, 화火는 원물元物의 본체이고, 풍風은 원물로 인해 생겨난 황사와 같은 종류라는 것이었다. 그가 볼 때 두 개는 계절과 관련된 것이고, 두 개는 물物의 기본적인 모양이고, 나머지는 물의 본래의 모습과 그것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한데 묶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한寒·열熱·조燥·습濕 등 네 가지만이 범주상 같이 묶일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 네 가지 요인의 편패偏敗로 병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육기론2」에서는 육기가 오행의 상극에 따라 전변한다는 설을 견강부회라 비판했으며, 「육기론3」에서는 열성 전염병인 온병溫病이 네 계절의 변화에 대응해서 생긴다는 상한설傷寒說이 이치가 없음을 비판했다.
「외감론」에서는 자연과 인체, 인체 여러 부위 사이의 상응관계에 대해 비판했다. 「외감론1」에서는 “바깥의 나쁜 기운이 피부를 통해 들어와 병을 깊게 만든다”는 설이 의자醫者가 허황된 수數에 집착해서 생긴 병폐라고 비판했으며, 「외감론2」에서는 “몸속의 오장육부가 피부의 12경락이 대응한다는 표리설”이 억지 대응 논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고, 「외감론3」에서는 “몸 겉에 생긴 것을 모두 표증表症으로 보는 것”을 비판했다.
「이증론裏證論1」에서 “감정이 상해서 생긴 내상·피로로 인한 내상·호색으로 생긴 내상을 음식을 잘못 먹어 생긴 내상과 동일한 내상으로 간주하는 것”을 잘못이라 비판했다. 둘의 원인이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증론2」에서는 “얼굴에 나타난 오색五色을 보아 오장의 상태를 알아낸다”는 것은 술수론에 따른 것으로서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이라 비판했다.
「실증론1」에서는 ‘오장 사이의 허·실을 따져 보하고 사하는 이론’이 그릇된 것임을 논했고, 「허실론2」에서는 “약의 다섯 가지 맛은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장기를 찾아들어간다”는 약리설이 타당하지 않음을 논했다.
이상에서처럼 의령의 의학론은 비록 짤막한 단편을 모았지만, 거기서 제기된 문제는 한의학의 병리·생리·약리 이론체계 전반에 걸쳐 있는 술수학적 측면 전체와 관련된 것이었다. 조선후기 의학사에서 정약용 이전에 그 누구도 이렇게 대담하게 한의학의 핵심적인 이론을 공격한 인물은 없었다.
(2) 서양의학의 소개와 영향
의령에는 정약용이 서양의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읽을 수 있는 4개의 기사가 존재한다. 「육기론1」, 「뇌론」, 「근시론」, 「약로기」 등이 그것이다. 이중 “삭제할 것”이라는 이름이 붙은 「뇌론」은 성호사설에 실린 아담샬(1591~1666)의 주제군징의 내용과 동일한 것이다. 내용이 동일해서 삭제할 것을 지시했는지, 서학적 요소를 감추기 위해서 삭제한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다른 기사에서도 서학적 지식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서학적 요소의 노출을 크게 꺼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책인 안문사요기安文思要紀를 인용한 「약로기藥露記」의 내용은 서양의 의술을 소개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醫에는 내, 외 두 과가 있다. 오로지 초목을 전문으로 약을 삼는 자가 있는가 하면, 금석을 데우고 달군 약을 병용하는 자도 있다. 병을 보고 진맥하는 이외에 유리병에 오줌을 채워 그 색을 시험하여 병의 뿌리를 알기도 한다. 또한 패혈敗血이 생긴 것을 보아 병을 알기도 하는데, 막 발병하는 초에는 족 진주 분말 몇 푼을 사용하여 피를 서늘하게 한다. 독기를 없애는 약도 여럿 있다.(문사요기 참조)
이 내용은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의 송남잡지松南雜識의 ‘양인의학’에도 실려 있는 것이지만, 정약용은 서양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언급을 피했다. 또한 여유당전서 간행본에도 이 기사는 빠졌다. 이 기사에서는 서양의 의사가 내과, 외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 약종상이나 약제사의 존재, 초목과 금석 약재, 병의 진단법과 치료법 등이 간략히 실려 있다.
이밖에 「근시론」에서 정약용은 근시와 원시가 생기는 이유로 전통적인 견해인 “음기 또는 양기의 부족 때문에 근시와 원시가 생긴다”는 견해를 부정하면서 “안구가 돌출하면 가까운 것을 잘 볼 수 있고, 안구가 평편하면 먼 것을 잘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에는 당시 서양의 광학적 지식이 스며들어 있다.
서양의학 지식 가운데, 정약용의 의학관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리스의 4체액설일 것이다. 「육기론」에서 정약용은 풍·한·서·습·조·화 등 육기 대신에 한·서·조·습의 4정四情을 들고, 그것의 치우침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했다. 이 설은 고대 그리스에서 몸 안의 4개의 체액과 그것이 4개의 속성 즉 한·열·조·습의 네 가지 성질의 부조화에 따라 병이 생긴다는 이론과 동일한 것이다. 이 설은 주제군징主制群徵이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에 담겨 있던 것으로 이미 이익 등이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익이 단순히 이 이론을 소개한 데 비해, 정약용은 그것을 자신의 사상의 한 기초로 삼아 한의학을 비판하는 데 활용했다.
5) 경세유표(1817)의 대민의료 기구 회복론
정약용은 경세유표(「天官吏曹」 治官之屬)에서 국가 보건의료기구라 할 수 있는 내의원·전의감·혜민서 제도에 대해 논했다. 그는 고대 제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주례 제도를 염두에 두고 국가의 체모 유지에 이 기관들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이 기관의 원활한 운영을 논했다. 우선 내의원·전의감·혜민서 등 국가 의료를 책임지는 기구의 번듯한 체모 유지에 필요한 인력의 종류와 수자를 제시했다.
이 가운데 전의감과 혜민서의 회복론이 주목을 끈다. 당시 이 관청이 재정이 빈약하여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명칭만 겨우 남아 있을 정도였다. 정약용이 보기에 이는 주례에서 말한 질의疾醫와 양의瘍醫의 좋은 전통을 잇지 못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두 기관의 회복을 주장하면서 그 방략을 제시했다. 그것은 주례에서 말한 9부법九賦法 중 방중지부邦中之賦의 실행이었다. 즉, 다른 시중의 가게에서와 마찬가지로 약재를 매매하는 가게에도 부세賦稅를 매겨 그 돈을 활용한다는 안이었다. 서울 6부(예전에는 5부가 아니 6부로 두었음)의 약재 매매 가게는 상등, 중등, 하등 3등급으로 나뉘어 세금을 차등 납부토록 했다. 상등은 한 해 세 꿰미의 돈을, 중등은 두 꿰미의 돈을, 하등은 한 꿰미를 내도록 제안했다. 동쪽 3부의 수납금은 전의감에, 서쪽 3부의 수납금은 혜민서에 소속토록 하여 두 기관의 각종 경비를 담당토록 했다. 정약용은 “이 일은 그만 둘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의학은 나라의 큰 정사로서 형편없는 지경으로 놔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6) 아언각비(1819)의 본초학
아언각비는 정약용 스스로의 표현대로 문자의 분변에 관한 책이다. 정약용은 세간에서 잘못 쓰이고 있는 용어 450여 가지를 골라 이를 200여 항목으로 나눠서 분류한 후 바로잡으려 했다. 그중 본초와 관련된 내용이 20여 종으로, 식물성으로 산다(山茶), 백(柏 : 측백나무), 회(檜 : 전나무), 삼(杉 : 삼나무), 비(榧 : 비자나무), 단(檀 : 박달나무), 계(桂 : 계수나무), 노죽(蘆竹 : 갈대), 유형(杻荊 : 싸리나무), 가(檟 : 가래나무), 여공(藜 : 명아주), 공(笻 : 공죽), 두충杜仲, 해당海棠, 매괴(玫瑰 : 일명 배회화), 풍(楓 : 단풍), 유(楡 : 느릅나무), 사삼과 황련(沙蔘·黃連), 후박과 모란(厚朴·牡丹), 박하와 구맥(薄荷·瞿麥), 직(稷 : 피), 호마와 백소(胡麻靑蘇 : 참깨와 들깨), 촉서(薥黍 : 수수), 교맥(蕎麥 : 메밀), 시(枲 : 모시), 자초(紫艸), 지芝, 다茶, 의기(薏苡 : 율무) 등이 있다.
이 중에는 약초명 등 문자만 바로잡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물 자체의 고증이 수반되었다. 거기에는 정약용이 본초를 탐구하는 방식, 본초에 대한 입장이 담겨 있다. 이 가운데, 산다, 황련, 두충, 율무 등은 의령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의령에 실리지 않은 20여 본초 관련 내용이 이 아언각비에 실려 있는 것이다.
아언각비에 본초학 관련 내용이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것은 유배 생활 중 정약용이 본초학에 상당한 관심을 쏟았음을 일러준다. 특히 약은 생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그는 모란꽃의 진위를 농한 이 제학提學의 시로써 자신의 생각을 대변했다. “신농씨의 본초학도 낡았는지 의심된 점이 많아, 약으로 쓴다는 산 풀에 또 한 번 속았구만. 잡보리를 오히려 큰 콩으로 잘못 아니, 꽃을 떠나서 어찌 목단 껍질을 알겠는가? 팔은 아홉 번 골절을 경험해도 의원은 오히려 잘못하고, 입은 세 번 다물어 봐야만 맛을 자연 알겠구나. 우습구나 세상 사람의 이름은 다 거짓이지, 거짓 이름이 나에게 이름 해주니 내가 누구란 말인가!”
7) 목민심서(1797~1821) - 애민의 의료 대책
지방 수령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의약 대책은 목민심서에 표현되었다. 목민심서는 1818년에 편집된 것이지만, 그 이전의 경험도 담고 있고 편찬 이후의 사건도 추가된 모습을 띠고 있다. 의약대책은 주로 이 책의 ‘애민육조愛民六條’에 표현되어 있다. 정약용은 주례의 ‘보식지정保息之政’에 입각해 양로, 자유慈幼, 애상哀喪, 구재救災 등과 함께 관질寬疾을 수령이 백성을 사랑해야 할 여섯 가지 일로 보았다.
관질 중 으뜸은 폐질廢疾(선천성 장애)과 독질篤疾(중병)을 앓고 있는 자의 역役을 면해주는 것이었다. 관질이란 본래 뜻이 “병을 앓는 자[寬]를 너그럽게 해주는[疾]” 것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말 못하고 귀가 먹은 자의 생계를 돕고, 눈이 먼 자는 점술을 생업으로 하도록 하며, 다리를 저는 자는 그물을 짜서 생활토록 하며, 스스로 먹고 살만한 자라 할지라도 장애자와 중병자에게는 구휼을 베풀어 한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강조한 이면에는 실상이 그렇지 않았다는 현실이 놓여 있었다. 정약용은 “오늘날의 수령들은 역 면제에 대해 어질지 못하다”며 “불에 데어 손·발을 못 쓰게 된 아이의 병역을 면제해달라는 청원에 대한 수령의 거부”를 한 사례로 제시했다.
생활 능력이 떨어지는 자들은 옆에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종족宗族의 차원에서 이를 해결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장님·절름발이·손발병신·나환자 같은 이들은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싫어하는 바이다. 또한 육친六親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며 안주할 곳이 없는 이들에 대해서 그들의 종족들을 타이르고 관에서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안주할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들 중 친척이 하나도 없어서 어디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자에게는 그의 고향 마을의 유덕한 이를 골라 보호해 주도록 하며, 잡역을 덜어주며 그 비용을 대신케 해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기근과 역병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을 살려내고, 병든 사람을 구료해내는 것 또한 관질의 주요 활동 중 하나로 규정했다. 그는 중국과 조선의 여러 사례를 들어 지방 수령의 역병 대책의 모습을 주지시켰다. 이에는 역병 든 마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령의 모습, 역병 발생지역 방문 때 감염을 피하는 방법, 역병으로 죽은 시체를 묻어주는 것, 약을 제조토록 하여 보급하는 것, 가난한 이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것, 역병 구료에 힘을 쓴 자에게 상을 주는 것, 온역瘟疫, 마각온馬脚瘟(콜레라), 마진(홍역) 등에 필요한 신효한 처방 등을 제시했다. 이처럼 목민심서의 역병 대책은 지방 수령이 역병 때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처럼 상세하게 논했으며, 이런 것은 조선의 다른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로 정약용 자신이 역병 유행 때 적극 나섰다. 그가 강진에 있을 때인 1809년과 1814년의 큰 기근 다음 해 봄에 온역이 크게 유행했는데, 그는 이미 중국과 조선의 온병瘟病 유행 때 혁혁한 효험을 냈던 ‘성산자聖散子’ 처방을 내주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살렸다”고 했다. 그는 이 처방에 들어가는 약 가운데 ‘생生부자’가 ‘포泡부자’로 바뀌면 효험이 없다는 것을 지적할 정도로 지식의 정확한 실천을 강조했다. 아울러 지역의 기후의 차이로 인한 차이를 고려해야 하며, 기근 후의 역병은 “몸이 쇠약해진 상태인지라 찬 공격 약을 무리해서 써서는 안 되고 몸을 따스하게 보해주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했다. 좋은 처방이 있다 해도 그것을 대량생산할 수 없다면, 역병 대책으로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그 처방이 경제적이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게 되는데, 정약용은 이점을 고려하여 성산자가 “약 1첩에 겨우 7전 정도”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정약용은 조선에서 맹위를 떨치는 다른 역병, 마진(홍역)과 콜레라에 대해서도 처방을 제시했는데, 콜레라의 경우 현재 알려진 문헌 중 1821년 국내 첫 콜레라 유행 때 알려진 처방은 정약용이 구해온 것이 유일하다. 정약용은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도광 원년 신사년 가을(백로·추분 무렵부터)에 이 병이 유행하였다. 10일 이내에 평양에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요, 서울 성중의 오부에서 죽은 자가 13만 명이었다(상강 이후부터 점차 고개를 숙였다). 그 증상은 혹 교장사攪腸沙 같기도 하고 전근곽란轉筋癨亂 같기도 한데 그 치료법은 알 수 없었다. 그해 겨울에 섭동경葉東卿이 유리창 각본 처방문을 보내왔기로 이에 기록한다.
당시의 콜레라는 전국적으로 수십 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병은 국내 첫 유행으로서 너무나도 빨리 전염되고 또 치사율도 높았으며, 알려진 처방이 없었다. 그렇기에 정약용은 대응할 수 있는 처방을 중국에 요청했던 것 같으며, 섭동경葉東卿은 중국에서 찍은 치료 처방 2개를 보내왔다. 그 처방은 ‘치시행온역방治時行瘟疫方’을 비롯한 2개였다.
8) 종두법에 대한 관심2
- 우두종법의 국내 최초 소개(1828~1835 사이)
마과회통 말미에는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이라는 7쪽 분량의 짧은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도광 8년(1828) 중국 북경 유리창의 규장재奎光齋 중간본을 옮겨 실은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출간된 해인 1828년 이후에 입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과회통은 이 글이 언제 입수되었는지 적지 않았다. 이규경의 종두변증설에서는 “헌종 을미년(1835), 중국의 선비가 다시 일종의 기방奇方을 내놓았는데 정약용이 이를 간직하고 있다고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선행 연구자는 모두 1835년에 정약용이 최초로 우두법을 소개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당시 그가 우두법 관련 책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 말했을 뿐 그것이 언제 입수되었고, 또 언제 마과회통에 들어갔는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우두법 역사를 보면, 1796년 영국에서 제너가 우두법 개발에 성공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805년에 처음으로 그 내용이 소개됐다. 정숭겸鄭崇謙의 종두기법(1805)이 그것이다. 이후 구희邱熺의 인두략(1820)이 나왔으며 이어서 스탄튼(Thomas Stanton)이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1828)을 내놓았다. 이 가운데 연경사를 통해 1828~1835년 사이 어느 해인가 스탄튼의 책이 수입되었으며, 그것이 정약용에게 전달되어 마과회통 말미에 덧붙여진 것이다. 이 글은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이 책 내용 중 서양을 드러내는 모든 부분을 삭제했다. 서학 때문에 탄압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빌미거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이 책에는 종두법의 유래, 접종 방법, 접종 성공 여부를 확인하는 법, 접종 후 금기 사항 등과 함께 소아의 접종 부위와 접종 기구에 대한 그림이 실려 있다. 우두법의 유래 부분에서는 제너라는 명칭이 지워져 있지만, 제너가 우두법을 개발하게 된 내력, 스탄튼 자신이 중국에 우두법 관련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 등을 실었다. 우두의 기술적 내용이 이어지는데, 그것은 우두효능의 원인, 우두의 장점, 우두를 접종하는 법, 접종 후 나타나는 증상, 우두고름의 채취와 보관, 진두眞痘와 가두假痘의 구별, 우두 실시 후 지켜야 할 금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 내용 말미에 붙어 있는 소아접종처와 우두시술 침, 우두채취와 관련된 상아비녀의 그림이 주목된다.
정약용은 우두법을 자신의 책에 소개만 했을까, 아니면 실제로 시술까지 했던 것일까? 이 부분은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진 부분이다. 특히 이 문제는 정약용의 우두법 소개(1828~1835 사이)가 일본의 소개(1841)보다 앞서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에 대해 실제로 시술했다는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정약용도 이 책을 싣기만 했을 뿐, 실행 여부는 말하지 않았다. 이는 「종두요지」의 경우와 확연히 다른 것이다. 거기서는 최초의 종두가 어떠했는지 밝혔다. 우두법의 경우 정약용의 서양 관련 대목을 모두 삭제했는데, 이는 우두법이 서학과 관련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규경의 「종두변증설」에서는 정약용이 그 책을 “비밀스럽게 여기고 잘 보여주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규경은 자기가 정약용이 소장한 책의 우두법의 개요를 적기는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실행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정약용의 우두법 관심은 그의 의술 행적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이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정약용은 기록상으로 40대 이후부터 줄곧 의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것은 이후 36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70대 전후에도 그 관심을 그치지 않았다. 서학으로 몰릴 위험성을 알면서도, 두창 예방에 가장 효력이 큰 우두법이라는 지식의 수용을 의자醫者로서, 한 시대를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 결코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9) 정약용의 의술(1830~1834)
지금까지 많은 내용을 봐왔지만, 정약용의 의학 관련 내용은 거의 모두가 그가 저술한 의서에 실린 것들이었다. 실제 임상에서 그가 어떻게 의술을 펼쳤는지는 거의 볼 수 없다. 역병 때 처방을 내리는 모습에서 임상의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을 뿐이다. 정약용의 임상 기록은 편년 역사 기록에서 두 차례만 볼 수 있다. 하나는 1830년 순조의 아들 익종의 임종 때이며, 다른 하나는 1834년 순조의 임종 때이다. 왕세자와 임금이 승하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정약용은 어의가 아니면서도 뽑혀 의약議藥에 참여했다. “정약용이 의리醫理에 정통하여 평소에 이름이 있다”는 평가에 입각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의료 활동의 장면에서 그의 존재가 눈에 띄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나라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어의와 함께 왕세자와 왕의 질병에 쓸 의약을 논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정약용은 단지 책상물림의 의학저술가만이 아닌, 당대 최고 수준의 임상가이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강진의 귀양살이 중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만일 하늘의 은혜를 입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모두 경사와 예악, 병농과 의약의 이치를 꿰뚫게 하여 4~5년 안에 문채를 볼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는데, 이로부터 정약용 스스로 자신의 의약 실력에 자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편지에서 과수와 채소밭을 논하면서 자식들에게 “생지황·반하·길경·천궁 따위와 쪽나무·꼭두서니 등에도 모두 유의하도록” 했는데, 이들은 모두 임상에 쓸 약초들이었다.
의술을 익힌 사대부, 즉 유의儒醫 정약용의 임상에 관한 태도는 장기 귀양살이 중인 1810년에 큰 아들 학연學淵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때 큰 아들은 갑자기 의원 노릇하게 되었는데 정약용은 이를 크게 꾸짖었다.
무릇 사람들 중에 높은 벼슬이나 깨끗한 직책이 있는 사람, 덕이 높고 학문이 깊은 사람도 의술에 대하여 터득하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 천하게 의원 노릇을 하지 않고, 병자가 있는 집안에서도 바로 찾아가 묻지 못한다. 세 차례 네 차례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위급하여 어쩔 수 없는 경우에야 겨우 한 가지 처방을 해주어 귀중한 처방으로 여기게 하는 정도라야 옳다.
이 내용으로 미뤄 짐작컨대, 사대부가 의술을 업으로 삼는 것을 극히 꺼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의학이 경세에 필요한 학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학으로서 선비가 업으로 삼을 학문은 아니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해서는 물론 안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처방도 아무 병이나 함부로 내주는 것이 아니라 위급할 때, 서너 차례 사양을 한 후 마지못해 펼쳐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의술에 밝았던 정약용이 처방 요청에 대해 어떻게 임했는지를 잘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나 있듯, 정약용에게서 의학 분야는 ‘업’이 아니라 경사·예약·병농 등의 분야와 함께 유학자가 공부해야 할 종합적인 학문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자찬묘지명」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의약 분야를 포함해서 자신이 유배 18년 동안 저술한 200권의 저술 모두가 “성인의 경經에 근본한 것으로서, 시의時宜에 적합토록 힘쓴 것”이었다고 토로했다. 이를 보면, 정약용에게서 의학과 의술이 “성인의 학문으로서 백성들의 생활에 적합토록”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10) 올바른 의학과 진맥이론
- 「다산시문집」내의 의학론
정약용의 저서 가운데 마과회통이나 의령 등 의서에 들어가 있지 않은 내용 가운데, 의학에 관련된 몇몇 중요한 내용이 시문집 속에 포함되어 있다. 저술 연대를 알 수 없는 저작들이지만, 스스로 의학 책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내용들이 이 두 책의 편찬 이후에 저술된 것이거나 정약용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2개의 기사가 눈에 띄는데 「의설醫說」은 정약용의 의학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맥론脈論1·2·3」은 매우 정치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의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의학은 본초本草를 전문으로 습득하였다. 때문에 모든 초목의 성性·기氣·독毒·변變의 법제를 강구하여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병에 대해 약을 쓸 때 혹 병의 원인이 한 가지뿐이어서 단 1성性 단 1독毒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한 재료를 사용하고, 혹은 병의 원인이 많아서 얽히고설켜서 풀기 어려운 것은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조제해서 치료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기술도 정밀하고 효력도 빨랐는데 후세에는 본초를 익히지 아니하고 오로지 옛 처방만 왼다. 예를 들면 팔미탕八味湯은 온보溫補하는 것인 줄로만 알고, 승기탕承氣湯은 양사凉瀉하는 것인 줄로만 알고서 곧장 전방全方을 뽑아 사용하기를 마치 한 가지 재료 사용하는 것처럼 하니, 어떻게 일일이 병에 적중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다. “소학小學이 폐하여지자 문장文章이 일어나지 않고, 본초가 어두워지자 의술醫術이 정밀하지 못하다.”
여기에는 의약이 본초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정약용의 입장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런 입장은 촌병혹치나 의령에서도 보였던 것인데, 여기서는 더욱 분명하게 생각이 정리되어 있다. 정약용은 복합처방을 마치 한 가지 약재 사용하듯이 하는 의계醫界의 태도를 비판했다. 병의 원인이 여럿으로 파악되었을 때에는 각각의 원인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재료를 써서 복합 처방을 구성하여 쓰는 것이지, 그 이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의원이 복합처방을 단약單藥처럼 온보하는 것 또는 양사凉瀉하는 것 따위로 규정해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기본적인 이치를 따져 처방을 구성해야 효험을 볼 수 있지, “모 증상에 무슨 탕” 하는 식의 의술은 효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정약용의 인식이었다.
「맥론脈論」은 의령의 의학론은 보충하는 성격을 띤다. 의령에서는 의학의 병리와 생리에서 “술수적” 측면을 배제하려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는데, 「맥론」에서는 기존 진맥을 비판하면서 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맥론1」에서는 맥의 상태를 보아 오장육부의 상태를 진찰한다는 기존 이론을 비판했다. 기존 의학에서는 맥을 양 손의 촌·관·척 세 부위로 나누어, “왼손의 촌맥寸脈은 심장心臟을 진찰하고, 오른손의 촌맥은 폐장肺臟을 진찰하고, 왼손의 관맥關脈은 간담肝膽을 진찰하고, 오른손의 관맥은 비위脾胃를 진찰하고, 왼손의 척맥尺脈은 신장腎臟·방광膀胱·대장大腸을 진찰하고, 오른손의 척맥은 신장·명문命門·삼초三焦·소장小腸을 진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맥이란 기혈의 운용이 잘 드러나는 곳에 불과하며 오장과 육부의 각 장기의 상태가 거기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제시했다. 또한 마침 그 장소가 손목에 있기 때문에 손을 진찰하는 것이지 촌·관·척 부위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했다. 이처럼 정약용은 손의 특정 부위를 오장육부의 특정한 기관에 대한 상응을 거부했는데, 이런 태도는 이미 의령의 병리, 생리 부분 논의에서도 봤던 것이다.
정약용은 맥의 촌·관·척를 짚어 오장육부의 상태를 알아낸다는 설을 비판했다. 그 근거로 맥경脈經을 저술한 사람부터 그것을 믿지 않았고, 후에 무릇 의술의 이치를 약간 통한 사람도 반드시 맥경의 설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다. 정약용은 이러한 설의 유행이 맥경의 저자가 “자신의 책의 권위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생겼는데, “맥경을 모른다는 말을 들을까봐 거짓으로 아는 척 하는 관행”으로 굳어지게 된 것으로 파악했다.
정약용은 맥이 진찰의 부위가 된다는 점 그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맥은 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혈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는 손, 발, 뇌의 대락大絡 등이 다 해당되었다.
진맥이란 각 부위 맥의 “쇠약하고 왕성한 것만을 분변하고, 그 허하고 실한 것만을 살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약용은 의학에서 말하는 기혈과 영위의 개념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즉 “맥이 뛰는 것은 기혈氣血 때문인데, 기만으로는 몸 밖을 도는 위衛가 될 수 없고, 혈만으로는 몸 안을 도는 영營이 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혈은 기에게 제어制御되고, 기는 혈에게 함양”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맥론2」와 「맥론3」은 「맥론1」의 보론이다. 손목의 맥 부위와 오장육부의 상응관계를 비판하는 가운데, 촌·관·척 부위가 환자마다 다르다는 점, 그곳을 진맥하는 의원의 손마디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을 들어 촌·관·척 이론의 정밀치 못함을 논박의 근거로 추가했다. 우선 「맥론3에서는 지리상의 비유를 들어 맥과 오장 사이의 상응 관계를 반박했다. 의학에서 말하는 맥이란 오장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내린 지류에 비유할 수 있는데, 지류의 상태를 가지고 물의 근원지의 상태를 말할 수 없듯이 맥의 상태로 오장의 상태를 알아낼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를테면 “양화도에서 물이 용솟음친다고 해서 그 근원인 속리산에서 산이 무너져 사태가 날 이변이 있다.”고 말할 수 없듯, 맥의 상태로 심장의 잘못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맥론2」에서는 맥의 상태를 구분치 못하면서 함부로 오장육부의 허실을 논하고, 더 나아가 환자의 성정과 신명, 심지어 수명과 운수를 점치는 의원의 행태의 천박함을 비난했다.
정약용은 진맥의 원칙을 세 가지 사항, 14가지 맥의 상태에 지나지 않음을 말했다. 「맥론2」에서 말한 세 가지 원칙이란 맥의 유력有力과 무력無力의 구별, 신神이 있고 없고의 구별, 법도의 있고 없음의 구별 등과 같다. 힘이란 움직이게 하며 손가락을 꿈틀거리게 하는 것이며, 신이란 ‘화和’하며 생활生活케 하는 기틀이며, 법도란 가고 오게 하고 그치게 하는 데 문란함이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원칙 속에 맥이 뜨고 가라앉음[浮沈], 더디고 자주 뜀[遲數], 크고 작음[洪微], 미끄럽고 껄끄러움[滑澁], 팽팽하고 허함[弦芤], 긴장하고 완만함[緊緩], 맺히고 엎드려 있음[結伏] 등 14가지 맥상이 나타난다. 의원은 오직 이 세 가지 원칙을 알아 14가지 맥의 징후만 잘 읽어내면 될 것이라는 게 정약용 진맥론의 핵심이었다. 이런 내용을 볼 때, 정약용이 진맥학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진맥학 중 촌·관·척과 오장육부의 상응관계 설정 부분을 제외한 형태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설」과 「맥론」에 보이는 이와 같은 정약용의 의학관은 성호 이익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스스로 15살 때(1777) 이익의 유고를 읽으면서 흔연히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는데, 그가 읽은 것에 성호사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성호사설의 「본초」 항에는 “본초의 단일한 효력”을 강조했고, 금·원대 이후 복잡해진 처방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옛 처방의 단순함을 칭송했는데, 정약용의 「의설」에는 이러한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맥의 촌·관·척을 남녀의 손을 구별하고, 오장의 상태와 연관 짓는 것에 대해서도 이익은 성호사설의 삼부맥三部脈에서 이런 견해가 “모두 이상한 꾀를 내어 남의 눈을 속이는 말이고, 그 중에 혹 맞는 것도 억지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약용은 이러한 이익의 생각을 받아들인 듯하며, 그 논의를 「맥론」에서 말했던 것 같이 더욱 치밀하게 발전시켰다. 정약용은 의학에 드리운 술수 전반을 부정하는 논의를 펼쳤는데, 이는 이익에게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11) 정약용 이름이 들어간 의서들
정약용 자신이 스스로 지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정약용의 처방을 모아 만든 것임을 주장하는 의서 3종이 현재 전한다. 단방신편單方新編, 교남서사신편묘방嶠南書社新編妙方, 정다산구급방 등이 그것이다.
단방신편 1권은 융희 3년(1909) 유일서관에서 납활자본으로 인간되었다. 책의 속 제목 다음 행에 책의 저자로 다산 정약용과 주촌舟村 신만(申曼, 1703~1765)이 표기되어 있고, 한글번역자로 금석錦石 이의경李義絅이 적혀 있다. 이 책은 이의경이 정약용과 신만의 경험방을 얻어 둘을 합친 후 한글 번역을 덧붙여 출간한 것이라 했다. 책의 내용은 400여 종의 병증을 28문, 18부로 분류한 후 각 병증에 처방과 그것의 한글번역이 딸려 있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연 정약용이 이 책의 저자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책은 정약용이 추구한 단방 중심의 의학이라는 정신에 입각해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들어 있는 “동짓날 자시에 초마草麻를 취한다”(「운기예방」)든지, “동남쪽으로 난 뽕나무 가지를 쓴다든지” (「역려예방법」), “동짓날 팥죽 쑬 때 거른 콩”(「역려부전염방疫癘不傳染方」)을 쓴다든지 하는 방법은 다분히 주술적 의미가 깃든 것으로 정약용의 평소 의학론과 상치되는 내용이다.
교남서사신편묘방嶠南書社新編妙方은 1928년 심상희沈相熙가 펴낸 것이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다산 선생이 뭇 서적에서 단방單方을 가려 뽑아 1편으로 만들어 가정에서 일용해서 썼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이 책은 유도승柳道昇이라는 사람이 1928년 이전에 정약용의 후손인 정상진丁尙鎭으로부터 그 집에서 소장하고 있던 정약용의 처방집을 얻은 후 심상희에게 교정토록 하여 출간한 것이라 하였다. 책 내용은 병증을 784항으로 나눈 후, 각 병증에 단방 위주의 처방이 제시되어 있다. 후반부의 내용은 단방신편의 내용과 거의 똑같다. 따라서 단방신편이 지녔던 특징이 이 책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데, 여러 군데에 침법을 소개한 점에서 이채가 있다. 정약용의 경우 대체로 약만 논했지 침술에 대해 거의 논의한 바가 없었다.
정다산구급(단)방은 1권의 필사본으로 저자와 편찬 연대를 알 수 없다. 단 표지 ‘신묘 12월’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고 내지에 “향촉 대금으로 1백 원圓으로 보낸다”는 말로 미루어 보아 원圓이라는 화폐 단위가 쓰이던 1910~1953년 시절의 신묘년에 씌어진 것이라 추정해본다. 이 책에는 또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면 성산리라 적혀 있는데, 전라남도는 1896년 이후의 행정 명칭이다. 이 두 점을 고려한다면 거기에 적힌 연대는 1951년이 된다. 이 책은 3책 중 가장 단순하며 단방위주의 처방이 한글로 씌어져 있다. 하지만 안에 주술적 내용이 많이 눈에 띈다.
정약용 이름이 들어간 의서는 아마도 이름을 가탁한 위서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정약용은 자신의 저작을 모두 드러냈기 때문이다. 저작이 남아 있지 않은 촌병혹치의 경우, 이런 책들의 원형으로 의심해볼 여지가 있는데, 가탁서들은 어느 하나도 촌병혹치에서 언급한 ‘주병酒病’과 ‘색병色病’을 끝에 두었다는 그 독특한 편제를 따르고 있지 않다. 실제 정약용이 지었는지 아닌지 여부는 이후 꼼꼼한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과제라 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약용이 ‘단방’을 대표하는 인물로 각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정약용의 의술이 곧 ‘단방파單方派’라 부를만한 의술 부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음을 시사한다.
3.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에 대한 평가
이상의 내용을 보건대, 정약용의 의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나이 36세 때(1797)부터 보이기 시작하며, 그가 임종할 무렵인 70대 중반 때(1830년대 중반)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는 36세 때 첫 대작인 마과회통을 편찬했다. 의학에 관한 첫 저작을 내놓은 지 몇 해 안되어 그는 18년이라는 장기 유배의 생활로 접어들었고, 그런 그의 삶에서 의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의약이 넘쳐나는 서울의 중앙관직 생활 때보다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귀양생활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의약 공부에 신경을 썼으며, 자신의 의학론을 가다듬고 약초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또 자신의 의약 지식을 지방의 백성들에게 나누기에 적극적이었다. 기나긴 유배 생활을 마친 후 서울로 돌아와서도 자신의 의학과 의술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왕의 진료에 참여할 정도로 명의의 반열에 올라 있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마과회통을 어루만지면서 수정 증보했다. 만년의 우두법 소개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정약용의 일생과 의학은 일정의 경향이 있고, 역사적 맥락이 있는 듯 보인다. 이런 관점에 서서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을 ‘서양의학의 영향을 중시하는 입장’, ‘최초와 최고라는 관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1) 서양의학의 영향
후대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정약용의 의학이 서양의학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으며, 현대의 많은 연구자도 이 부분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정약용의 의학 가운데 서양의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우두법 하나가 유일하다. 그것도 이에 대한 소개에 그쳤을 뿐, 실제 시술 여부도 불투명하며, 자기의 의학적 식견을 덧보탠 것도 없다. 이밖에 몇몇 기록을 남겼지만 그 관심은 성호 이익이나 동시대 다른 학자보다 더 컸다고 볼 수 없다.
단, 그가 한의학 이론을 비판하면서 들고 나온 고대 그리스의 사체액설의 경우, 그 영향의 강도를 어느 정도로 평가해야 할 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한의학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학문 분야의 ‘술수론’을 비판했는데, 그리스 사체액설을 비롯한 한역서에 담긴 서양의 물질관이 여러 형태의 술수론을 비판하게 된 중요한 사상적 근거 중 하나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2) ‘최고’와 ‘최초’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을 관련 사료 전체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는다면, 일단 쉽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최초’와 ‘최고’ 부분이다. 의학과 의술의 측면에서 그의 업적은 화려하다. 그는 조선 후기 의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는 종두법 도입(1800)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종두법 중 하나인 인두접종법 도입에 최초의 관심을 나타냈던 두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인두접종법보다 더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우두접종법의 경우 국내 최초로(1828~1835년 사이) 그것을 도입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전통적인 한의학의 술수적 측면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비판한 인물이며, 서양의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소개한 인물이다. 마진(홍역)에 대한 전문서적인 마과회통(1797)의 경우에는 또 어떠한가? 그는 조선 의가의 경험과 중국의가의 이론과 처방을 종합하여 동아시아 최고수준의 마진 전문 의서를 편찬해냈다. 콜레라 대유행 때(1821)에는 중국에서 급히 처방을 입수하여 기민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인 국내 유일의 존재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정조의 아들인 익종의 중병 때(1830), 순조의 위독 때(1834) 의약동참으로 발탁되어 궁중의 진료에 참가한 국내 최고 수준의 의가로 평가 받았다. 이처럼 경력이 화려한 의인醫人은 조선에서 거의 찾기 힘들다.
3) 정약용 의학의 특징
- 술수적 측면을 배제한 의학, 단방 중심의 의학
하지만 위에서 살필 것처럼, 매우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약용이 남긴 의학 관련 저작과 관련 기록 전반의 맥락을 검토했을 때 현대의 우리가 ‘최초’와 ‘최고’만의 평가만이 아닌 정약용 의학의 전반적인 내용과 특징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정약용이 생각한 의학은 한의학 중 병리·생리·진단·약리 등의 제 측면에 짙게 깔려 있는 “술수적” 측면을 배제한 것이었다. 맥을 보아 병을 헤아리고, 눈으로 증상을 파악한 후 운기運氣 등 그 원인을 따지고, 각 병증에 대해 처방을 구성하여 약을 쓴다는 측면은 일반 의학과 다른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정보를 수집해 그것을 비교, 검토하는 방식으로 자기 의학의 신뢰성을 높이고자 했다. 처방과 약을 쓰는 부분에서는 본초를 중심으로 하고, 그것의 본성을 탐구하여 방제를 구성토록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단방單方 또는 단순한 처방을 선호했는데, 벽지의 귀양지라는 특수한 상황이 반영되어 이런 입장은 더욱 강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침술의 경우도 간편 의술이라 할 수 있는데, 정약용은 이 의술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특별히 부정적인 생각을 표출하지도 않았다.
4) 정약용 의학의 방법
- 고증과 경험
정약용의 의학은 그의 전반적인 사상 체계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의학은 그가 다른 학문 분야에서 취했던 공부하는 방법이 그대로 적용되는 동시에, 효험의 절실함을 요구하는 의학의 필연적인 성격 때문에 그렇게 얻은 지식의 유용함을 통해 자신이 세운 학문의 전체의 신뢰성과 정당함을 입증해주는 위치에 있었다. 어떻게 보면, 많은 분야에 걸친 그의 학문 추구는 이런 효험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정약용의 의학 책 두 권, 즉 마과회통과 의령은 대체로 의학에 대한 정약용의 상이한 두 가지 태도, 즉 고증학적 방법, 경험귀납적 방법을 대표한다.
마과회통은 철저한 문헌 고증 방식을 통해 지식을 얻어내는 모습을 띠고 있다. 정약용은 마진에 관한 최대 정보량을 모으는 한편, 그 병의 원인과 주요 증상, 부수 증상, 처방과 약재 등의 제 측면을 세밀한 수준에서 잘게 범주화 했다. 이어 수집한 의서의 모든 내용을 그 범주 안에 분류하여 그 내용을 꼼꼼하게 비교, 분석을 시행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잘게 쪼갠 항목의 수준에서 이전 의가醫家들의 이론과 처방의 같고 다름과 그것이 생기게 된 이치를 따져나갔다. 이런 공부의 끝자락에서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르며, 좋고 나쁘다는 자신의 견해를 세웠으며, 다시 그 견해에 입각해 전대 마진학을 종합했다. 이런 태도를 문헌고증학 방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헌고증학 방법의 출발은 그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문견한 이헌길의 효험부터 시작하여 체제를 잡아나가는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경험적 요인이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의령의 「잡설雜說」, 「집고集古」, 「속집續集」은 내용은 방대하지 않지만, 거의 전체 내용이 효험 있는 것을 찾아 수집하여 알려주는 내용들이다. 집고와 속집은 중국과 조선의 여러 문집에 흩어져 있는 효험 처방을 모았고, 잡설에서는 자신이 주변에서 또는 직접 효험을 본 것을 말했다. 넓게 본다면 인두접종법과 우두접종법의 수집도 이러한 태도의 연장에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언각비는 철저한 고증학 방법이 의학 현실에 직접 힘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약용은 이 책에서 세간에서 잘못 쓰고 있는 약초의 지식을 바로잡았다. 약초의 성능은 정확함에서 나오는 데, 이름을 잘못 알고 약재를 쓴다면 효과를 기약하기 힘들 것이다. 온역에 대해 포부자를 쓰면 안 되고, 생부자를 써야 한다고 밝힌 것처럼, 정약용은 흔히 쓰는 본초 가운데 잘못된 것을 일일이 밝혔고, 조선에서 이런 작업은 이처럼 체계적으로 한 사람은 보기 힘들다.
문헌의 고증과 징험의 수집 사이에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고 “병에 대한 최선의 처방을 찾아내려는” 그의 생각에 동시에 작용했다. 그런데, 이런 학문 자세는 정약용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의가醫家들이 취했던 방법이었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정약용이 그들보다 더 철저하고 엄밀하게 이를 적용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문헌고증의 경우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매우 넓게 모았고, 매우 세밀한 수준에서 그것을 분석했으며,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데 모호하지 않고 단호했다.
정약용은 이러한 태도에 입각해 마진학을 정리했지만, 그것을 널리 확충한 자신의 처방집, 더 나아가 자신의 의학을 창시하지는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만으로 볼 때 그의 험방驗方 수집의 수준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이익의 성호사설 수준을 넘는다고 말하기 힘들다. 물론 의학의 상응주의 비판과 본초위주의 의학 추구라는 점에서 정약용이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나간 측면을 인정한다고 해도 자신의 견해에 따른 독자적인 의학체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의 의학적 방법은 이전의 의가들이 했던 것보다 한결 올바른 지식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인 만큼 동시대 조선에서 가장 이채를 띤 것이라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이나 또는 후학에 의해 이런 방법에 입각한 의학 전체의 재설계는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5) 후대에 끼친 영향
하지만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이 당대나 후대 의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부분이 있다. 그의 마과회통은 편찬 과정 중에도 여러 사람의 관심을 끌었으며, 편찬이 끝난 후 홍석주(洪奭周, 1774~1842)가 이 책을 추린 마방통휘를 냈으며, 황도연의 의종손익 등을 비롯한 국내의 여러 의서가 마진 항목에서 마과회통을 주요 문헌으로 인용했다. 또한 그가 남긴 단방 또는 그의 단방 지향 의술은 여러 가탁서가 나올 정도로 세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4. 에필로그 : 유의儒醫의 길
평생 정약용을 의학의 길로 이끌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가 의학뿐만 아니라 경·사·자·시문 등의 분야에 넓은 관심에 비추어 볼 때, 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러한 넓은 관심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 의학은 결코 ‘소홀한’ 분야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죽을 고비를 넘겼던, 또 몸이 쇠약했던 자신의 건강 문제 때문에 그가 의학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을 수 있다. 의약이 절대 부족한 지역의 오랜 귀양살이에서 자기 건강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의학에 더 관심을 쏟았을 수도 있다. 그가 자손들에게도 의학이 사대부가 공부해야 할 중요한 과목으로 가르친 것을 보면, 그의 의학이 그에게 닥친 유배라는 현실 때문에 학습한 것만이 아님은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장기간 유배 생활은 그의 의술의 성격을 결정짓는 데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관직에 있었을 때에는 온갖 자료를 섭렵하면서 마과회통 같은 대작을 내놓았지만, 귀양살이 중에는 촌병혹치 같은 구급 의서를 편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은 정보의 제한 때문이기도 했고, 현실의 절박함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 가운데 형성된 자신의 의학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벼슬의 영욕이 그의 의학과 의술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이 있다. ‘애민愛民’의 의술이라는 측면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세 가지 중요한 역병인 홍역, 두창, 콜레라의 방역과 의학적 대응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역병이 이겨낼 수 없는 재앙이라는 관점에서 피난이 최고라는 생각이 지배하던 시대상황에서 그는 의약으로 이에 도전했다. 소아 전염병인 홍역의 경우, 어릴 때 자신을 죽음의 구덩이 문턱까지 내몰았던 이 끔직한 질병에 대해 그는 수집할 수 있는 중국과 조선의 모든 문헌을 모아 해답을 찾아 나섰다. 또한 자신이 찾아낸 것을 마과회통이라는 책으로 엮어 세상이 함께 대응토록 했다. 누구나 앓는다고 해서 백세창이란 이름이 붙은 두창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대응책이었던 인두법을 도입해 그것을 세상에 실천하고자 했다. ‘서학쟁이’라는 비판까지도 감수하면서 그는 서양의 우두법을 탐구했다. 1821년 미증유의 콜레라 유행에 대해서는 급히 북경에서 처방을 구해 대처토록 했다. 약방에서 세금을 받아 그 재원으로 유명무실해진 국가 대민의료기구인 전의감과 혜민서의 운영을 회복하자고 하는 제안도 이런 연장선에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그는 귀양지 강진에서 유행한 온역에 대해서도 처방을 내어 촌민을 구했다. 그의 애민은 또한 본초중심의 단방의학의 추구라는 측면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로 벽지의 촌민들이 쉽게 효험을 볼 수 있는 의학책인 촌병혹치를 내놓았다.
“세상에 나가서는 정치로서 백성을 살리고, 물러나서는 의술로서 백성을 구한다.”는 유의儒醫의 이념이 정약용의 경우처럼 치열하게 실천되었던 사례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은 애민愛民해야 하는 치자治者로서의 인술仁術이었지, 전문직 의료인으로서의 실천은 아니었다. 의술을 업으로 삼은 큰 아들을 크게 꾸짖는 것에서 드러나듯 그는 선비가 “스스로 의술을 업을 삼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는 그의 의학과 의술 추구가 조선 후기 유교사회의 신분질서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의학 사상가로서 정약용은 조선 의학사에서 어떤 특징과 위상을 차지하는가? 거칠지만 이런 비교, 논의를 통해 정약용 의학의 특징과 가치를 매겨볼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의학관을 제시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의학의 오행, 운기이론 중 관념적인 것을 배척했고, 옛 문헌의 철저한 고증에 당대 경험의 실증을 더하는 방식으로 질병에 접근했다. 이런 방식은 정약용보다 약간 늦게 활동한 최한기의 의학사상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최한기도 한의학의 오행설을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중국과 조선의 본초학을 강점으로 꼽았다. 하지만 정약용은 서양의학 중 우두법 도입과 뇌주설 수용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을 뿐, 최한기처럼 서양 근대의학의 해부학, 생리학을 의학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른 의학사상가 2인, 즉 허준과 이제마는 정약용이나 최한기와는 다른 모습의 의학을 선보였다. 수많은 특징이 있겠지만, 허준은 동아시아 한의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양생 전통과 의학 전통을 종합하여 병보다 몸을 앞세운 의학을 창시한 인물로 수양과 절욕을 중시했다. 이제마는 신체의 유형을 네 체질로 나누어 파악하고 각 체질마다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윤리학적 결함을 수양을 통해 극복하고, 각 체질이 잘 걸리는 질병이 있다는 체질론적 질병 이론에 따라 임상에 접근할 것을 주장했다. 매우 거칠지만, 허준과 이제마는 몸의 수양을 강조하는 의학사상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견주어 정약용과 최한기는 자연세계의 객관적 실체를 더욱 강조하는 의학사상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유의儒醫 정약용의 의학이 이전의 유의의 그것과 다른 점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치자로서 유의이기는 했지만, 세계관과 학문 방법에서는 기존의 유의와 다른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