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희 배우는 영화 <무장해제>, <감방>에 출연하고 우리 곁에서 홀현듯 사라진 배우다.
<무장해제>는 3.1절 특집같은 영화이다. 일본제국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이에 반대하던 군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일본군들의 만행은 이미 다큐멘터리를 통해 익히 봐왔던 사실이다.
<무장해제>는 비록 무장을 강제로 해체당한 군인이지만 결코 정신만은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한 군인의 이야기이다.
그는 영화속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으로 수많은 일본군 정예의 무술가들을 물리치고 라스트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스러져 간 명장면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는 대본만 남아있고 필름이 없다. 단지 영어 더빙된 영어버전의 디비디만이 남아있다. 우리가 수출한 영화를 영어버전으로 만들어 외국 회사에서 판매한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 및 해외에서 영어로 더빙되어 <킬 더 쇼군>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하였다.
그가 미국으로 떠난 것이 이 영화가 명보극장에서 개봉되던 1975년 6월 21일이다. 그동안 미국에 거주하며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였고 이두용 감독을 비롯한 영화계 지인들과는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표현처럼 영화를 잊고 살았기에 우리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배우가 되었다.
1949년생인 그의 첫인상이 놀라운 것이 젊었을 때도 홍콩배우 강대위와 꼭 닮았지만 나이든 지금 모습도 꼭 닮았다. 키 173cm로 지금은 큰 키가 아니겠지만 당시로는 준수한 용모였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니 영화배우이겠지만... 1974년에 수백명의 무술 유단자 중에서도 그는 따로이 카메라 테스트를 받고 이두용 감독의 신작이 <무장해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촬영 후 그의 진가는 충무로에 대어로 소문이 났고 한진영화사에서 제작하는 <사생결단>의 주인공으로 낙점이 되었다.
그러나 합동영화사와 계약된 <감방>의 촬영으로 출연할 수가 없었다. 이두용 감독은 <감방>을 준비해놓고 <사생결단>을 찍으러 한진영화사로 갔고 강대희는 이두용 감독의 조감독이었던 이현진 감독이 연출을 떠맡은 <감방>에 출연하게 된다.
이 영화를 마치고 <무장해제>가 개봉될 때 그는 미국 워너브라더스가 제작하는 로버트 클로우즈 감독의 신작인 <이소룡 일대기>에 출연하고자 미국으로 갔다. 말이 오디션이었지 워너 측이 <무장해제>의 라스트 씬을 미리 본 상황에서 거의 출연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작이 무산되는 바람에 피해는 고스란히 강대희의 몫이 되었다. 이두용 감독의 신작인 <시카고>, <아메리카 방문객>, <보디가드> 등 세 편의 미국 로케 영화의 출연까지 뒤로 하고 건너온 미국이었는데 결국 이 영화에 출연기회 마저도 놓쳤다. 이 영화는 한소룡과 미국에서 살던 정준(케리정)이 주연을 맡았다.
그는 미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태권도장을 운영하다가 홍콩으로 건너가 쇼브라더스사에서의 활동을 모색하였으나 그마저도 잘 안되어 영화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요식업소를 하며 지금은 12개 업체를 직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하였다.
그에게 줄려고 스크랩한 것은 아니었으나 1975년 6월 21일자 일간스포츠에 실린 그의 기사를 건네주었다. 그로서는 그날 미국으로 가며 미처 읽지도 못한 기사였다. 그로서도 처음 읽는 기사이기에 다소 흥분되는 상황이었다.
이 신문기사는 당시에 눈에 띄는 큰 박스기사였고 내가 스크랩해둔 것이었다. 스크랩 뒷장은 <무장해제>의 신문광고였다.
이 스크랩이 소장하여야 할 사람에게 돌아간 것같아 나도 그에게 증정하며 홀가분한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그는 내게 젊은 시절 꿈을 주었던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를 처음 만나며 세월이 흐른 것을 생각치 못하고 중년의 그를 알아보자 못했다. 나도 나이가 든 것을 잊고 영화속 젊은 강대희 생각만 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세월이 흐른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와의 이야기는 영화이야기부터 최근의 사업이야기로 계속 되었다. 그의 미국에서의 자수성가 스토리는 책 한 권 분량으로 부족할 것 같다. 밝힐 수 없는 이야기까지 구면인 사이처럼 긴 시간 장담을 나누었다. 나야 그를 스크린으로 보아 구면이지만 그도 처음 보는 나를 어디선가 본 듯하다니 이래저래 인연이 있는 사이같다. 시종 자신감 넘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그가 미국에서 성공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비록 영화인으로서의 꿈은 접었어도 사업가로 대성한 존경받을만한 기업가가 되었다. 그에게 행복이란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닌 가족들 모두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제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도 가족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안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