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자유
홍 순 옥
인터넷전용선이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제 1호로 연결한 것은 내 홈페이지를 갖고 싶어서였다.
마침 한 사이트에서 문학전용 홈페이지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아름다운 오후>라는 간판을 건 사이버에서의 첫, 내 집 장만을 하게 되었다. 요즈음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등 sns가 활발하지만 인터넷이 활성화 되지 않았던 그때는 본인의 홈페이지를 갖는 게 유행이며 자랑이었다.
<먼산>이란 사이버이름으로 이런 저런 글들을 올리며 홈페이지 방문객 수를 키워나갔다. 많은 이들과 글로 교감한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한참동안 사이버 집에 푹 빠져 살았다. 새로운 글을 올릴 때마다 댓글을 달아주는 분들이 고마웠고 부족한 글에 자상하게 지적해주는 분들의 성의가 감사해 댓글에 또 감사의 댓글을 달면서 사이버친구들과 교제가 시작되었다.
그중 새 글을 올릴 때마다 꼬박꼬박 읽고 댓글을 달아주는 댄디 님과 특별히 친해지게 되었다.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나이도 한참 위여서 편한 마음에 넋두리도 늘어놓고 고민을 상담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온라인에서의 일이다.
진심 반 농담 반으로 “한국 나오시면 한번 놀러오세요. 제가 가이드 해 드릴게요.” 라고 메일을 보내면 당장이라도 올 거처럼 “그럴까요? 귀여운 먼산 님 보러 갈까요?” 라는 모호한 답장을 보내왔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처음 글을 배울 때는 세상에 존재하는 미사여구는 모두 모아다 놨으니 글의 내용만으론 귀여움 자체였다. 상대방을 미혹에 빠지게 할만도 했겠다싶다. 물론 이것도 온전히 나만의 착각이다.
1년쯤 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각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감정이야 더없이 순수하지만 남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을 수 있으니 사이버로만 좋은 친구가 되자고 약속도 했다. 그렇게 신뢰감은 더해져갔다.
겨우 워드를 하고 마우스클릭만 하다가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스캐너라는 컴퓨터주변기기를 구입하게 되었다. 한참 사진을 스캔하여 홈페이지에 올리는 작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먼산님 사진도 올려보라는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 한 장을 자랑스럽게 올렸다. 지리산 천황봉정상에서 여전사처럼 찍은 사진이었다.
정상의 세찬바람에 머리는 헝클어졌고 여름의 끝자락이라 바지는 종종 걷어붙이고, 얼굴은 벌겋게 익어있었다. 종주를 해냈다는 약간의 오만함까지 사진 속에 적나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홈페이지에 올린 건 내 나름의 자부심 때문이었다.
마흔 살을 사는 동안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친구에게 끌려 치악산을 다녀온 후 산에 매료되었다. 지리산종주를 목표로 산을 오른 지 3년만의 종주였다. 내 자신이 대견스러워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그 대단한 사진을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나보다. 아니, 그동안의 내 이미지를 상상하던 팬들에 대한 배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년여 좋은 감정을 유지하던 <댄디> 님이 사진아래 남긴 건 단 한 줄의 댓글이었다.
“씩씩하군요. 여리고 순한 줄만 알았더니.......”
홈페이지 방문이 끊겼고 메일은 답장이 없었다, 두절.
사이버의 속성이라는 것이 철저한 익명성이었으나 감정마저 익명성은 아니었다. 1년 가까이 메일로 주고받은 감정의 교류는 사이버라고 가볍거나 농도가 옅지도 않았다. 오히려 환상이라는 복병까지 더해져서 감정의 늪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진 한 장으로 하루아침에 등을 돌린 댄디님에 대한 감정의 파장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마음을 추스르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랫동안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없었고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던 습관은 컴퓨터에 앉을 수 없으니 당연히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다.
미친 듯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등산간 모습을 찍은 사진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는 해도 내 마음을 받아 줄 곳은 그곳뿐이었다.
사실 난 씩씩함과는 거리가 멀다.
전형적인 A형 성격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다. 남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이런 성격이 사이버 세상에 집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여리고 철없는 줄 알았더니……. 라고 날 잘못 알았던 거처럼 말했지만 그건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지리산종주를 했다고 용감한 여자가 되는 걸까?
1년여 사이버 세상 속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얼굴이 안 보이는 그 세상 속에서 상대방이 가진 또 다른 착각의 자유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사진 한 장으로 그는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고 바로 착각을 거둔 거뿐이다. 나도 착각에서 빠져나오면 그만인 것을.
자연과 가까이 할수록 마음이 순해지고 마음이 비워지는 걸 느낀다. 사람에게 아니 세상 속에서 받은 상처를 산에 올라와 치유해 가는 정화의 순간들로 난 산에 오른다. 중독처럼 산에 오르는 내게 어느 날 안개 바다 속의 대청봉이 속삭였다. 이제 그만 내려가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라고.
오랜 침체기를 딛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즐겨찾기로 설정된 <아름다운오후>를 클릭 했더니 사라져버리고, 없다. 사이트가 다른 사이트와 합병이 되면서 사라진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 고향을 잃어버린 듯 한 상실감, 허탈감에 잠시 망연히 스크린만 응시하다, 어차피 고향에 돌아가 본들 날 반겨줄 이도 없는 걸, 집이야 다시 지으면 되지. 나는 다시 씩씩한 모습으로 새로운 사이트에 둥지를 틀었다. 사이버에서의 준비되지 않은 첫걸음에 낙마한 후 좀 더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쳐 나가기로 했다. 태풍이 불어와도 절대 안전하고 든든한 기초를 다지고 못생기고 씩씩한 내 사진도 욕심껏 들여놓았다. 그리고 방문은 꼬~옥 잠갔다. 나만의 방, 나만의 집.
누에고치가 자기만의 밀폐된 공간에서 명주실을 자아내듯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아늑한 사이버공간에서 맘껏 나래를 편다. 부족한 내 글들은 사이버고치 속에서 태어나고 숙성되고 성숙되어 바깥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로 성장하리라 믿으면서.
벌써 15 년 전의 일이다.
아직도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에 서투르다.
사이버 속의 내방은 “비밀의 화원”이다. 나는 아직 우화(羽化)하지 못했다.
첫댓글 잘봤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