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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내 삼각산 자락에 엄청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 |
이명룡 장로는 1873년에 평안북도 철산군 유정리에서 이창업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직 소년이던 시절, 고향 친구들의 곁을 떠나 정주로 이사하였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머리가 영특하여 7세부터 한학을 배웠다. 불행하게도 그가 11세 되던 해인 1884년, 그의 부친 이창업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게 된 이명룡은 정주에서 이승훈을 만나면서 그의 생에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그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어느 날, 평양선교부에서 사역하는 마포삼열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은 정주에도 다른 지역 못지않게 기독교가 일찍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명룡은 민족의 장래가 염려되어 걱정한 나머지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생각하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며 기도에 정력을 쏟기도 하였다.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 정주 사람들은 1902년 정주군 상업회의소 소장 자리에 그를 앉혔고 이명룡은 이 일로 점차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그가 소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안되어 일본 관리들이 정주를 드나들면서 토지조사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토지조사를 한다는 소문이 돌자, 정주의 토지 소유자 사이에는 이상한 말이 떠돌아다녔다. “아이고, 토지를 신고하면 일본인들이 다 압수해 간다고 합니다. 나는 그래서 토지를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여론은 정주 군내에 있는 많은 농부들의 귀까지 전파되었다. 소문대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고한 토지는 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결국 일본인들에게 다 압수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압수된 땅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관리하기 시작했고 일본에 있던 일본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지자 일본인들은 앞다투어 우리 땅을 매입했다. 이러한 관계로 1905년 을사늑약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평북대리회에서는 길선주 장로가 모든 회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 일본의 강제에 의해 을사늑약조약이 체결된 일에 대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각성합시다!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입니다.” 이날 평북대리회에 출석했던 목사, 장로들은 회개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회개운동은 평북대리회에서 다시 평남대리회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이명룡은 곧 자신의 교회에서도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안된 1910년 부끄러운 역사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명룡 집사가 출석하던 덕흥교회에서는 상회인 평북대리회로부터 장로 선출에 대한 허락을 받았고, 1910년 2월 덕흥교회는 맥쿤(윤산온) 선교사를 당회장으로 하여 장로 선출을 위한 공동의회를 개회하였다. 덕흥교회 교인들은 한결같이 이명룡 집사에게 표를 밀어 주었고 그는 장로로 피택이 되었다. 이명룡 피택장로는 평북대리회에서 실시한 장로고시에 응시하여 당당하게 합격하였으며, 이로써 덕흥교회는 큰 경사가 났다고 온 동리마다 전하였다. 이명룡은 장로 장립을 받고 덕흥교회 부흥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수도 없이 약속하였다. 하지만 그 약속을 다 지키지도 못한 채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1911년 압록강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겠다고 나타난 데라우치(寺內穀) 조선 총독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향하던 중 선천역에서 멕쿤 선교사와 악수를 나누었는데, 이를 두고 데라우치 총독을 살해하려고 하는 암호였다면서 일본 경찰들이 거기에 모여 있던 조선사람 800여 명을 체포해간 것이다. 이명룡 장로도 억울하게 체포됐고 105명만 범죄가 확실하다면서 기소를 하고 나머지 700여 명은 모두 석방을 시켰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05인사건’으로 이명룡 장로는 105인의 한 사람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이러한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6년 동안 평양형무소에서 치욕의 형을 살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눈여겨 보았던 멕쿤 선교사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입증하는 내용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결국 1913년 봄, 105인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후 이명룡 장로는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교회를 설립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명룡 장로는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일로 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로는 후진 양성을 위해서 운동하였고, 때문에 이후에도 수차례 감옥을 마치 자신의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조만식 장로와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소련군이 진주하자 모든 농장을 압수당하고 신앙의 자유마저도 누릴 수 없게 되자 1947년 4월 월남했다. 월남 후 서울에서 모이는 3·1절 행사가 거행될 때면 33인의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특별히 정주에 있던 오산학당을 재건하기 위해서 재건위원장으로 힘쓰기도 했다. 1956년 그가 죽자 유족들은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고 그의 시신은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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