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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창작원 형상시학 원문보기 글쓴이: 김건희(에네미타늄)
<모던포커스 19-06>
담백한 시적 형사(形似)와 삶의 진의(眞義)
-박윤배 시인의 사유의 기표와 변형의 시학
엄창섭(김동명학회 회장, 본지 주간)
1. 상상력의 의미망과 변형(變形)의 시학
일단 예외 없이 「모던포커스」논의에 앞서 『예언자』의 칼 지브란이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수사학은 눈송이다. 불길과 눈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처럼 ‘시적 상상력의 아득함과 생명기호의 통신’을 당당한 존재감으로 지켜낸 특정한 정신작업의 종사자가 시 의미와 기본골격을 ‘현대시의 탐색과 시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때, 그 자신의 시적 작위(作爲)는 ‘따뜻한 감성과 개아(個我)의 육성, 체질, 느낌’에 의하여 한순간의 격정도 평정시키는 역동성을 지닌다. 까닭에 진정한 통섭(通涉)의 합리적 해법을 지혜롭게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작은 신의 대행자들에게 뼈를 깎는 성찰이 요청된다. 아울러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서 ‘하늘의 언어’인 감사(感謝)에 감응(感應)하며 ‘세계문학의 구름다리’를 지향한 『모던포엠』통권 189호「모던포커스」대상자는 <청소>를 비롯한 10편의 신작시를 매개물로 하여 ‘작품과 작가는 별개’라는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검증될 것이다.
특히 강원도 평창 태생으로 1989년 『매일신문』신춘문예를 통하여 한국시단에 데뷔하고 첫 시집『쑥의 비밀』(도서출판 전망)을 포함한 『오목눈이집증후군』(북랜드, 2018) 외 여러 권을 간행하고, 현재 <형상시학 창작회> 대표인 박윤배 시인은, 미술학을 전공한 탓으로 시의 틀 짜기와 특이성은 전반적으로 ‘자의식에 언어들이 입체적으로 포개지고, 또 이미지들이 다른 방향으로 전이되거나 변용(變容)되는 비구상회화를 방불케 하여 빛나는 편이다. 일단 「담백한 시적 형사(形似)와 삶의 진의(眞義)-사유의 기표와 변형의 시학」을 전제할 때,『모던포엠』의 지면을 통한 남다른 연(緣)이 소중한 인자(因子)로 수용되기에 그 자신의 신작 시편을 매개로 확정한 시의미의 분할과 통합은 새삼 충동적이다.
그간에 순수서정성의 시격(詩格)으로 응축미를 살려내고, 다수의 독자와 시적 추이(推移)의 간극을 좁혀 심부에서 끌어낸 섬세한 정감의 심적 발현은 일상의 서정성으로 한순간의 격한 분노도 평정심을 회복시켜주는 눈부신 생명감에 해당한다. “함께 빨려든 날벌레가/아주 먼 소용돌이 은하 너머에서/갓 핀 꽃잎에 살 비벼내는 소리/아! 슬슬 배가 고파진다//떠나는 꽃잎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흔들어주던 손으로/허기의 구석구석에도 청소기를 들이민다//아직 피어날 욕망을 위하여 이승에 좀 더/나 머물러야 할까보다(청소)”의 보기나 또는 향 좋은 마릴린 먼로 비누를 시적 질료로 선택한 “너의 냄새는 대야에 남고/비누냄새는 너를 따라 가버리지/또 다른 애인을 만나러가야 하는 너를 위해/참 잘한 거라고 나는/비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지(암울한 비누)”라는 시자법(示姿法)에 의한 구도처리는 이채롭다.
모름지기 성서(聖書)에서 “하나님의 말씀(logos)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히4:12)”로 기록하였듯이, 언어학자인 소쉬르 또한 언어의 생명력을 강조하였음에 비춰 ‘말(言語)은 인류의 역사이며 미래를 열어가는 키워드(窓)’에 해당한다. 이처럼 암울한 현상에 실존하는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며 단절된 인간의 모순과 갈등의 경계를 허물어주는 감성의 소유자인 박윤배 시인은, 여건상 인상비평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없으나 둥근 생명의 씨앗을 밤잠을 설치며 파종하는 정직한 그의 시적 행보(行步)야말로 내면인식의 아름다움을 확증하는 심적 탐색의 접점이기에, 혼돈의 와중에서도 피폐된 영혼치유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진실로 ‘개방적인 중개자, 존재감을 지닌 엄숙한 시인의 초상(肖像)임’은 더없이 자랑스럽다.
모름지기 현대인의 정신적 피폐함을 단조로운 삶의 여유로움으로 충직하게 채워가야 할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미적 주권이 확립된 형상화의 작위(作爲)로 최소한 정치(精緻)하고 자잘한 심성을 풀어내야 한다. 그 같은 연유로 ‘공간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기드슨 르페브르의 지적은 ‘생성된 공간’의 개념으로 해석할 타당성이 따른다. 까닭에 따뜻한 감성적 시편들은 생명감이 충만할뿐더러 그 자신이 서정적 미감을 맑은 선율로 변주시켜주고 있어 시적 기법과 즉물적 현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선적(禪的) 존재감과 결속되어 빛난다. 그 r같은 시각에서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현재성에 몸담고 있는 우리는 개아적인 존재이면서도 하찮은 이해관계에 얽혀 어리석게도 자기합리화를 고집하고 있다. 마치 그것은 엘렌 워츠의 “원을 그려놓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원이라고 대답한다. 바깥보다 안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임”은 획일화된 사고의 공간에 갇힌 결과로 해명될 일이다.
또 하나의 명백한 점은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대에서 삶의 연륜을 쌓아갈수록 일체의 생명 앞에서 경건해지려고 마음을 비우는 시적 작위(作爲)는,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을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다.’고 지적하였듯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허락된 생명은 자연의 이법을 역행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진과 선을 바탕으로 미를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장르이기에 ‘영혼이 자유로운 바람’처럼 구속을 거부할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인위적인 제도에 의한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하나의 예술은 예술로 승화되기에 그 자신은 진정한 예술혼의 자존자이다. 비교적 자연에 순응하며 지극선(至極善)을 겸허하게 추구하면서 자잘한 시적 정감이 절제된 그의 시편은 절망적인 아픔이나 상실감 같은 어둠의 그늘이 걷히고 있다. 이처럼 담백한 시격은 미적 정감을 충동적으로 안겨주는 역동성을 지니는 연고로, 맑은 햇살이 금화로 반짝이는 아침 창가에서 그의 시편을 간혹 음미할 수 있음은 감사하게도 하나의 작은 축복이다.
2. 사유(思惟)의 깊이와 삶의 진의(眞義)
일반적으로 “시는 자연미의 표현이며, 상상이라는 훌륭한 기능이 시의 작인(作因)이다.”라는 랜섬(J. C Ransom)의 지적처럼, 그의 시는 이채롭게도 몽환적인 꿈의 시학과 동질성을 지닌다. 그의 내면인식은 비교적 푸른 식물성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으로, 아득한 기억 뒤편의 잊혀진 황홀함에서 비롯된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에 해당한다. 한편 따뜻한 감성에 의한 시적 분위기의 특이성이 새삼 눈부시기에, 다소 힘겨운 삶의 일상에서도 최소한 생명외경의 비장감을 통하여 독자의 시적 의중을 제압하는 신선한 충격은 자연의 이법을 쫓고 순응하는 바람꽃의 영혼을 우리의 삶에 치환(置換)의 작업으로 입증한 까닭이리라.
또 하나「사유의 깊이와 삶의 진의」를 입증하기 위하여 격랑의 시간대를 만보(漫步)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신앙처럼 떠받들며 아득한 풍경과 여울의 흐름에 주의집중하며 영혼의 진동을 조율하여 깊은 마음의 상처도 다독여주는 그의 소박한 기대처럼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은 자못 경이롭다. 특히 자기성찰의 겸허함은 오웬의 지적처럼 “시인의 소임은 시대적 상황에 경고하는 것이라.”는 시의식의 깨어있음과 정서법에 충직하여 쉼표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꼼꼼하고 적확한 시적 수사는 충직한 이 땅의 독자들에게 시적 감응을 일으켜주는 매개로 작동하는 편이다. 이와 같이 힘겨운 삶의 현재성에 있어 저마다 신 앞에 살아온 날을 감사하는 심사(心事)로 일관성을 지닌 정신작업은 “어여쁜 처녀 만나 새살림 차릴 수 있겠냐?고 물으니/넌, 산전수전 다 겪어 상처 많은/여자 데리고 살 팔자이니, 정신 좀 차리라 하시네//뭐든 이해하고 보듬어 안아줄 팔자라니!/네, 절대로 흠 없는 과일은 먹지 않겠습니다//아. 감동 먹은 저녁이었음(바른생활지침서)”이라는 합리적 해법은 개아(個我)의 자위(自慰)로 입증되고 있다. 다소 불교적 색채가 특이성을 지닌 “뿔은 자신을 찌를 순 없다/공중이 슬퍼지면 맹수의 털들도/곤두서는 뿔이다//순해지기 위해/몸의 독기를 한곳에 모은/짐승의 송곳니/그게 나다(중생)”의 시의미의 이해를 위해 「숫타니파타」에서 ‘서로 사귀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연고로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스키마(schema)로 기억 흔적에 한번쯤 담아둘 점이다.
까닭에 ‘바람 끊긴 그 적요의 새벽달’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꽃말이 ‘은혜, 베품’으로 수국백당(水菊白唐)인 <불두화(佛頭花)>나 또는 불교의 상징적 꽃으로 꽃말이 ‘순결, 신성, 청정’으로 연꽃연못(柳等蓮池)에 서식하는 <미꾸라지>를 페러디(parody)하여 비록 ‘독창적인 시인임’을 자처하지 않아도 시대적 소임은 최소한 감당할 업무이다. 혹여 세상이 우리를 힘겹게 할지라도 세상을 온전히 견디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술뿐이다.’라는 집념으로 아름다운 창조적 자아의 성취를 위해 강인한 생명감을 시적 행위와 일치시켜 영감의 비의(秘義)를 끊임없이 해명하는 치열한 정신작업은 더없이 의미심장하다.
중생의 번뇌를 다 받아주느라/철불(鐵佛)의 무릎에 탁! 달걀 하나 깨어/뻘건 미소도 버무려/목저로 들어 올린다// 뽀글거리다 주르르 흐르는/너무 오래 참은 새벽달은/잘게 부서져버리고/남겨진 흰자위가/비릿한 냄새다//
-<불두화(佛頭花)>에서
탁자를 마주하고/장대비와 함께 먹던 추어탕/혼자 후후 불며 먹었다는 것은/유등연지(油燈蓮池) 속으로 사라진 청도의 왕국을/조금은 먹었다는 거다/풍각(風角)을 돌아, 이서국(伊西國)에 드는/길을, 구불구불 이마로 이으면/팔다리 문드러진 미끄러운 몸//
물씬한 갯내음은 조금은 더/물의 무덤에 가까워졌다는 거다//
-<미꾸라지> 전문
그렇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대는 음울하다. 비열한 이기주의 때문에”라며,『쟝 크리스토퍼』에서 로망롤랑은 “행복하고자 사는 것이 아니니, 나의 섭리를 이루고자 사느니라. 괴로움을 당하여라. 그리고 죽어라. 그러나 네가 되어야 할 것이 되어야 한다.-한 인간이”라고 주창하였듯이, 박윤배 시인이 이순(耳順)을 코앞에 둔 시간대에 체험한 인식의 깊이와 뼈아픈 상처의 아픔은 상관성을 지닐뿐더러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심리적 병폐를 치유의 차원으로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적 형상화의 교시는 칙칙함을 말끔 씻겨내고 동시에 신선함을 안겨주는 삶의 중량감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언어에 관한 인식작용은『푸른 꽃』의 노발리스가 “철학이란 본래 향수요, 어디에서나 고향을 만들려는 하나의 충동이라.”고 언급하였듯 인간은 지속적인 물음(logos)을 통해 고독한 자신의 실존을 명증하기에 불확실한 시간대에서, 천상의 층계를 오르는 수행자로서 소외된 인간관계성의 회복을 위한 각고의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하여야 한다. 아울러 타자의 자존감을 지켜내되 긍정적 사고를 작동시켜 창조질서를 확립할 일이기에 현대시의 탐색을 의도적으로 도식화하지 않지만 시의 근원적인 힘을 순수상상력의 확장으로 감지하고 접하는 대상의 물활론(物活論)을 넓고 깊게 수용함으로 가슴 조이는 전율로 알맞은 정신기후의 조성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어디까지나 생생한 일탈의 시세계를 추구하려는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의 대비(對比)는 모처럼 존재감을 탐색하기 위한 시작품의 분할·통합이기에 영혼이 잠들지 않는 솔숲의 자유로운 바람의 표징으로 의식해도 지나치지 아니할 그만의 ‘온유한 심성과 낮은 자의 섬김, 그리고 빛나는 순수서정성’이 푸른 식물성 언어에 잇닿은 ‘인향천리(人香千里)’는 지극히 유의미하다. 같은 맥락에서 에밀 슈타이거(E. Steiger)가 “시인은 자연을 회감(回感)하고 자연은 시인을 회감한다.”라는 주장에 충실한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따뜻한 서정성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물에 대한 주체의 동일자적 욕망의 산물에 견주어지기에 타자를 응시함으로써 타자를 왜곡시킬 수 있는 점과 타자 중심의 사유를 관통해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가능성의 이행통로의 연계성은 주지할 점이다.
3. 시적 감응(感應)과 현대시의 탐색
모름지기 「시적 감응과 현대시의 탐색」에 있어 스카치 폴은 ‘예리한 메스로 상처 낸 부위를 잘라내고 토막 내며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라.’며 즉물적 현상을 탐색하는 예리한 눈과 사고력을 지닐 것을 경계하였듯이, 생명의 존엄성에 응축된 시편의 지혜로운 삶의 교시에 관심과 주의력은 끊임없이 확장되어져야 한다. 이 점에 있어 20세기 유대계 종교철학자로 ‘관계철학」의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너와 나’의 대화법을 천착시켜 ‘생각과 마음을 비우면 ‘영원한 그대’인 신과의 합일을 이루어짐을 체계적으로 이론화 시킨 점은 소통을 교감하는 대화는 타자와의 연계층위로 해명될 것이다. 때문에 공존하는 지난한 삶의 공간과 시간대에서 생명의 촛불이 연소되기 전에 ‘인간과 진리, 그리고 자신에 관한 성찰 뒤 순수한 감동’을 회복시키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불멸의 투명한 시혼과 진정성을 지녀야 한다.
어디까지나 강인한 생명력의 통로로 작용하고 있음을, 그 자신이 시편에 수용하여 ‘비판적, 즉물적, 전체적, 정의와 지성의 종합, 유물적, 구성적, 객관적 특성을 지니는 효용성’은 눈물겹다. 이 같은 관점에서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지식·정보화시대에 몸담으면서도 불확실한 삶의 현장에서 확인되어지는 시적 질료의 관심사는 단순한 밀봉(密封)에 고정되지 않고 “희뿌연 비닐봉지 속에/무화과 세 자매 누워있다//부끄러움 때문에/너른 잎에 숨어 살며/봉창 밖 얼굴 내밀지 못했는데/그래도 누운 방향은 제각각이다(밀봉)”의 보기처럼 세심한 식별력이나 창조적 영혼에 의해 이처럼 재현(再現)되기에, 그 자신의 시적 작위는 즉물적 현상에 응시와 깊은 사유에 의한 ‘체취와 색깔, 육성’에 남성다운 정직성을 매혹의 역동성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서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성정(性情)은 지극히 선해야 하고, 일상의 서정성에 충직한 행위자로서 밝은 미래사회를 추구하고 시 쓰기에 일관성을 지니는 까닭은, 그 자신의 삶에 있어 <가창길 둑길>의 시편을 통해 확인되듯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끝물인 배롱나무 아래 잘게 찢어버린 경마장 마권/과욕이 저지른 절망에는 어떤 말도 필요가 없다/잔뜩 걸었던 기대가 한꺼번에 허물어진 자리/배롱꽃 흘러가는 물가, 하필 그 자리//택시기사 한 분, 다시 무거운 바퀴를 굴리러간다/얼굴은 흙빛, 오늘의 사납금이 걱정인 듯//
-<가창천 둑길> 전문
여기서 프랑스의 신비주의자인 기욤 드 생티에리가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바로 자기 안에 그 모습을 비추는 자의 찬란함에 정복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듯, “하필 그 자리”에서 보다 명백한 것은 인간은 점진적으로 영적 상승을 통해서 동물적 상태에서 이성적 상태로, 다시 이성적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이동할 수 있는 존재이다. 간혹 삶의 현존성에 비춰 즉물적 현상과의 합일이나 동질성에 여백의 틈새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삶의 역동성은「불과 물, 공기」를 통해 세상을 해석한 가스통 바슐라르가 "욕망은 형상을 만들고, 피조 된 형상은 다시 욕망과 조응한다."는 진술처럼 하나의 욕망, 그 열정은 비상의 나래 짓인 꿈을 지향해 현상학적으로 변형되는 점이다.
특히 그의 시정신은 지극히 생명적이고 푸른 꿈이 내재되어 있는 식물성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이지만, <말년의 혼밥>에서 인생의 황혼기에 체득할 시적 분위기는 자못 처연(悽然)하고 허망하다. “맑다가 문드러져 하늘까지 지워질 듯/머지않아 밀려올 검은 외로움을 못 이겨/초록이 지나간 공중에 수저를/힘 빼고 슬그머니 내려놓는다//살아오며 하나의 세계를 셋으로 나누는 경지는 알았으니/그럭저럭 한 끼 밥은 해결했으니/불안의 담뱃재는/찢어진 방충망 틈에 턴다(말년의 혼밥)”에서 그 일상의 느꺼움은 삶의 여적(餘滴) 뒤편의 적요(寂寥)로 못내 아련하다.
한편 ‘고운 정서와 함께’ 진리와 정의의 상징인 빛은 어둠을 밝히며 무지를 무너뜨리는 역동성을 지녔기에, 때로는 견고한 고독과 홀로 바람 앞에 서 있는 인간적 고뇌와 생명적인 정신작업을 통한 이 같은 심리현상은, 삶의 황혼기에 삶을 반추(反芻)하며 삶의 외경에 관한 일깨움이다. 까닭에 영혼의 빈 잔을 채우려는 욕망의 어리석음보다 저토록 비워내려는 내적 성숙을 구도자의 자세로 일깨우는데 보다 긍정적인 박윤배 시인에게 미래지향적인 최소한의 기대감은, 소외계층인 타자를 향한 언어의 배려와 소중한 식별력으로 통섭(通涉)을 실천궁행하는 존귀한 시인으로서 따뜻한 정신기후를 조성하여 눈부신 존재의 꽃을 피우되 한국시단에서 시적 위상을 견고한 성채(城砦)로 쌓아놓고 버텨내는 확고한 집념이다.
논고의 말미에서 위대한 창조적 영혼으로 따뜻하고 밝은 미래사회를 열어가기 위해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의 “무관심은 죄악이다.”라는 역설을 다시금 시대적 교시(敎示)로 일깨우되, “듣고 말하되 집착하지 말라.”는 방하착(放下著)의 실천궁행을 통해 역사적 과제인 극렬한 이분법에 의한 갈등‧대립은 풀어가야 한다. 모쪼록 ‘시퍼런 도끼날(刃)에 찍히면서도 향을 뿜어내는 향나무처럼’ 존귀한 품격을 지닌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하찮은 대상과 작은 움직임도 예리한 투시력과 분별력으로 그 유무(有無)의 대립적 관계를 순수서정성으로 극복하고 ‘과연 나의 이 시편은 절창(絶唱)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치열한 불멸의 시혼으로 자존감을 다독이며, 소외된 인간관계성의 회복이 전제된 시대적 소임의 엄격한 역할담당이다.
첫댓글 좋은 평가를 받으니 읽는 사람도 기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