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의 의미와 유래
한글날은 1991년 제외 되었다가 23년만에 법정 공류일로 재정되었습니다. 한글날의 유래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세종 28년 음력 9월 상순”이라 적혀있어 이를 바탕으로 10월 9일을 한글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한글의 원형인 훈민정음을 만든 원리는 두 가지로 설정이되어 있는데 이는 한글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글자의 모양을 발음 기관과 하늘, 땅, 사람(천, 지, 인) 삼재에서 본떴습니다. 두 번째로 기본글자를 바탕으로 나머지 글자들은 조직성을 높혔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한글을 만들게 된 배경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우리말은 조재해 왔으나 문자가 없어 한자나 한문으로 표기하였으며, 모든 말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가 공기의 중요성을 평소에는 잊고 살 듯이, 언어나 문자 역시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자기나라 말을 표기할 수 있는 적당한 문자를 가지고 있지 못한 민족이 겪게 되는 고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숭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러한 고통을 많이 겪어야 했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사용해서 문자 생황을 영위하였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민족을 초월한 공통 문어 구실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한자와 한문은 공통의 문어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조상들이 한자와 한문을 사용하여 문자 생황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훈민정음 언해본
그러나 한자와 한문은 우리말과는 매우 딴판인 중국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문자 및 문어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한자-한문으로 표기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이 벌어졌다. 원래 글(문자언어)은 말(음성언어)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자가 오래 사용되다 보면 말과는 다른 독자적인 기능을 갖게 되어, 문어가 구어와 다른 특성을 갖게 되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어와 구어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문과 우리말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기 때문에, 우리의 조상들은 말과는 별도로 한자와 한문을 배우느라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러나 한자와 한문은 우리말과는 매우 딴판인 중국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문자 및 문어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한자-한문으로 표기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이 벌어졌다. 원래 글(문자언어)은 말(음성언어)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자가 오래 사용되다 보면 말과는 다른 독자적인 기능을 갖게 되어, 문어가 구어와 다른 특성을 갖게 되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어와 구어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문과 우리말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말과는 별도로 한자와 한문을 배우느라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차자 표기법 : 고유 명사 표기시 한자를 빌려서 표기
* 이두 : 우리말 어순으로 바꾸고, 조사나 어미를 보충해서 표기한 변형된 한문
* 구결 : 불교나 유교 경전에서 조사나 어미를 붙여 표기.
* 향찰(향가에 사용된 방법) : 대표적으로 향가에서 사용한 표기 방법으로 뜻이 있는 부분은 한자의 뜻을 빌려 쓰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한자의 음을 빌려 쓰는 방식이다.
한자를 가지고서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시도, 이른바 차자 표기법(借字表記法)이 등장하기는 했다. 우선 한문 속에서 우리 고유의 고유명사를 한자를 표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부터 차자 표기법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런 차자 표기법은은 고유명사 표기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먼저, 국가 상층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전 등의 중인층은 한문 구사 능력이 지배층만큼 능숙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하급 관리들의 공문서에서는 어순을 한문의 어순이 아닌 우리말의 어순으로 바꾸고 조사나 어미 드을 보충해서 표시한 변형된 한문이 사용되었다.
이두(吏讀)
이것을 이두(吏讀)라고 한다. 또한 불교나 유교의 경전을 읽을 때 적당한 곳에서 끊어 읽기를 하게 되고 그 앞뒤 표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국어의 조사나 어미를 붙여서 명시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이것을 구결(口訣)이라고 한다. 한편, 자기감정을 진솔하게 노래로 읊을 때에는 아무래도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노래를 글로 옮겨서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경우도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읊은 노래를 한자를 빌려서 표기하게 되었는데, 이런 노래를 향가(鄕歌)라고 하고 이때 사용한 표기 방식을 향찰(鄕札)이라고 한다.
이렇게 차자 표기법이 발번하여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한자는 우리말을 표기하기에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문자였다. 우선 우리말에는 한자의 음(音)이나 훈(訓)을 빌려서도 나타내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었고(예를 들어 의성어와 의태어), 하나의 한자에 훈이 여럿 있는 것이 보통이어서, 차자 표기법에 사용된 한자를 어떤 訓으로 읽어야 하는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차자 표기법에 이러한 한계 때문에 지배층이 한문에 익숙해질수록 차자 표기법의 사용은 축소되어 갔으며, 표기 방식도 단순화, 투식화(套式化)되어 갔다.
한문은 배우기가 어려워 지배층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글이 노는 상황에서 당시의 지배층은 불편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기반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지배층만이 한문을 배워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시험은 양반 관료로 편입되어 정치적 권력과 각종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반이었던 것이다. 재배층의 입장에서는, 자기들만이 어려운 한문을 배워서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의 각종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일반 백성들까지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의 출현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워 별로 반갑지도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세종이 일반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한글이라는 쉬운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세종은 기득권 계층이 한글 같은 문자를 마드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고 반발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글 창제를 매우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세종대왕께서는 일반 백성들으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직접 한글을 만드셨다.
세종은 한글 창제 사업을 매우 은밀하게 추진해야 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힘을 빌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세종이 집현전의 힘을 합쳐서 한글을 만들었다거나, 혹은 세종이 학자를 시켜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별로 근거가 없는 생각이다.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 등 당시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세종이 친히 한글을 만들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혹자는 당시에는 신하들이 한 일이라도 왕의 업적으로 돌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역사에 이러한 기록이 남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근거 없는 편견이다. <세종실록>을 다 뒤져 보아도 세종대에 이루어진 많은 일들 가운데 ‘친제(親制)’라는 표현을 쓴 것은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세종이 신하를 시켜서 한 일은 분명히 신하를 시켜서 했다고 하지 세종이 직접 했다고 한 경우가 없다. 실록이나 기타 리곡에서 세종이 훈민정음을 친제했다고 몇 번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극거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세종을 도운 사람을 굳이 찾자면 신하들이 아니라 세자(뒤의 문종)와 수양대군(뒤의 세조)을 들 수 있다. <보한재집(保閒霽集)>에 실려 있는 신숙주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서문, <성근보선생집(成謹甫先生集)>에 실려 있는 성삼문의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서문에 세종이 한글을 만드는 데 문종이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한글을 만든 뒤 세종이 한글과 관련하여 공개적을 추진한 첫 번째 일인 <운회(韻會)>의 번역 사업에 집현전의 하급 관리들을 동원하였는데, 이때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에게 이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일을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집현전의 하급 관리들이 한글과 관련된 일에 동원되자 곧바로 2월 20일에 집현전의 사실상 책임자(副提學)라고 할 수 있는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문을 올려서 세종의 한글 관련 사업에 제동을 걸려고 하였다. 만약 한글 창제 사업이 1443년 2월에 와서야 한글 창체 반대 상소문을 올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집현전의 학자들이 한글 관련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한글ㅇ 이미 만들어진 뒤인 1444년 2월이라고 할 수 있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임금께서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한글 관련 사업에 그토록 신경을 쓰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진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韻書)을 아느냐?” 4성(四聲)과 7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대단한 학문적 자부심을 내비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세종은 중국의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우리말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우리말을 표기하기에 적합한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뛰어난 학자였다는 것과, 그리고 요양을 가서까지 한글에 대한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한글을 만들 만한 학문적 능력을 지닌 사람을 한 한 사람 꼽으라면 단연 세종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에 그토록 애착을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