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 지음, 꽃자리, 2012
1. 무섭게 내린 장밧비가 다녀간 자리는 지금 눈부시게 푸른 하늘빛이 대신하고 있다. 가시거리가 수km에 이를 만큼 그 맑음이 선명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설 <침묵>의 저자 엔도 슈샤꾸. <침묵>의 배경이 되었던 나가사키현의 작은 바닷가에는 엔도 슈샤꾸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고 그 한 켠엔 침묵의 비(沈默の碑)가 세워져 있다. 그곳엔 엔도 슈샤꾸가 쓴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人間はこのように悲しいが 海があまりにも青いです(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바다는 푸르기만 합니다)” 난 빠져 들어갈 것만 같은 저 푸른 하늘을 보며 엔도 슈샤꾸의 이 말을 되뇌고 있다.
최근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3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딸 아이의 화상으로 인한 치료와 초기 대응에 실패한 병원과의 싸움이고, 또 하나는 성소수자들에게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이동환 목사가 연회 재판에 기소된 사건이다. 감리교 기득권자들에 의해 늘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소위 교회가 좀 크고 힘 있다 하는 자들에게는 솜방망이 잣대로 너그러이 봐주면서도, 힘 없는 작은 교회 목사의 목을 조르는 흉기로 둔갑되는 이 무식한 행태가 개탄스럽다. 세상과의 구별이 종교의 본질이라 하는데 어찌해서 교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가 여전히 판치는 세상의 모습을 빼다 박았을까? 아니 겉으론 아닌 척하지만 어쩔 수없이 드러나는 그 음흉한 속내를 보고 있자니 더 가증스럽고 역겹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소수자들을 교회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들(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지만)이 생겨나 공론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겠다. 본의 아니게 이 문제에 대해 지방 목사와 진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자살이다. 그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성추행 문제가 불어지기 전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많은 이들에게 좋은 세상의 꿈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세상을 향한 그의 꿈은 이렇듯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당혹스럽고 안타깝다. 성추행 문제에 관해서는 그 진실이 밝혀져 누구도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무겁게 감내하면서 사실 힘에 겨웠다. 사람이 좋아 시작한 목회는 지금껏 이러 저러한 일들을 겪으며 그 꿈의 선명함이 많이도 퇴색되었다. 사람인지라 세월이 주는 인력의 무게는 난 점점 더 지쳐가고 있다. 지친 마음으로 바라본 하늘은 형언할 수 없이 푸르긴 하지만, 그만큼 슬펐다.
2. 마음이 가라앉을 때엔 다른 수가 없다. 연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를 있게 한 신(神)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 사실 새벽고요기도 시간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많다. 뭐라 기도해야할지 모르겠다. 그저 우두커니 앉아 스테인글라스에 계씬 십자가의 주님만 바라보다 내려올 때가 많다. 싱숭생숭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정릉교회 한희철 목사님이 보내신 소포를 하나 건네받았다. 책이었다. 이제 막 출간된 책 <고운 눈 내려 고운 땅 되다 : 시에서 길어올린 풍경>을 보내오신 것이다. 전화를 걸어 잠시 목사님과 통화를 나누었다. 책을 출간하게 되어 우선 몇몇 생각나는 사람에게 보내신 거라신다. 잠시지만 통화를 하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책 앞쪽의 속지에는 목사님께서 손수 마음을 담아 몇 자 적어놓으신 글이 있었다.
이 혁 목사님
때론 노래로
때론 말씀으로
때론 시로
많은 순간 삶으로
씨앗 뿌리는 일일랑
2020.7.13
한희철 드림
하나님은 심신이 지쳐있는 나를 한희철 목사님을 통해 위로해주시는 듯 했다. 한희철 목사님과는 그분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보내드리면서 개인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울 창천교회에 있을 때 어르신들을 위한 맑은내소망학교에 목사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듣는 시간도 가졌고, 의성에 내려와서도 지방 웨슬리회심기념집회 강사로 모셔 이야기로 풀어내시는 하늘뜻을 듣기도 했다. 신학생 시절 목사님이 손수 쓰신 동화 <소리새>, 주보의 글을 모아 엮어 만든 <내가 선 이곳은>과 <하나님은 머슴도 안 살아봤나?>을 만나면서 그분의 생각과 삶을 동경하게 되었고, 이후 출판사를 하는 친구로부터 선물로 받은 목사님의 기도시집 <어느 날의 기도>를 통해 그분의 시를 노래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나누면 남습니다>, <네가 치는 거미줄>,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등 책을 통해 교류를 이어오게 되었다.
한희철 목사님이 지향하는 바는 꾸밈없는 순수의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한 연민이다. 이는 예수의 정신과 맞닿아있다. 그래서일까? 그분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2015년 가을 맑은내소망학교 강사로 모시고서 강의 전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목사님은 동화와 시와 성서의 이야기를 녹여내 만드신 <네가 치는 거미줄은>이란 책을 슬며시 건네셨다. 이 책은 역시 이야기꾼답게 목사님 특유의 부드러운 필채로 성서와 이야기와 시를 하나로 엮어 잔잔한 울림을 주는 보석 같은 책이었다. 그 책 앞쪽 속지에도 여지없이 나를 생각하며 쓰셨을 목사님의 짤막한 글이 쓰여 있다.
이 혁 목사님
문득
아름다운 세상,
사랑으로!
2015년 가을
한희철 드림
이미 읽었던 책이나 다시금 추억을 더듬으며 책 속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산책하듯 걸어 가본다. 추천의 글을 써주신 고진하 목사님은 한희철 목사님의 이야기(동화)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
‘따스함’
사실 최근 무거운 마음으로 경험한 일련의 일들 속에서 내가 힘겨웠던 이유는 그 어디에서도 따스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처음에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내셨다. 가장 먼저 만드신 것이 ‘빛’이라.. 처음 것은 뭐든지 그 손길 담은 이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고 애착이 있고 가장 아끼는 것인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을 첫 작품으로 만드신 것이다! 첫 창조물이 빛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본디 밝으신 분, 따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분이 만드신 세상은 본디 따스하다. 이 따스함을 느낄 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다.
딸 아이의 화상이 크게 덧나 수술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느끼지 않는 의사의 태도는 삭막한 사막과 같았다. 자신의 자식이었다면, 손주였다면 그는 과연 자신과 병원은 문제없었다고 그렇게 기계적인 답변을 할 수 있었을까?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게 있어 남의 사정을 면밀하게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의 의술은 그저 돈벌이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생명을 다루는 사람일수록 생명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공감의 마음이 필요한 것이리라.
지금의 감리교회의 꼴은 어떤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건사하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는 꼴이라니.. 지금 한국교회는 인터넷에 떠도는 선정적인 영상과 자료들을 돌려보며 마치 성소수자들이 뿔 달린 마귀마냥 선정적인 구호를 내걸며 이들을 퇴치하려 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목회적 연구와 논의 없이 중세기적 성서해석의 문구를 들이대며 정죄하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 당시 율법의 정신은 사리지고 율법조항의 준수 여부로 의로움과 죄를 구분했던 바리새인들을 생각나게 한다. 사랑으로 끌어안는 일은 쉽지 않다. 낯선 이들을 내 삶의 일부로 맞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책임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죄하는 건 쉽다. 나와는 다른 이들이 틀렸다고 하면 그만이다. 우린 어디에 서 있을까?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예수가 우리에게 남긴 건 십자가와 부활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특별히 나와는 많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짊어져야할 십자가이다.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쉽게 정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들이는 것을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차별과 혐오, 정죄와 비판이 난무하는 세상에는 따스함이 없다. 상대를 상처 입히고 급기야 죽이는 무서운 망나니의 칼질만이 있을 뿐이다. 그곳에 과연 하나님이 계시겠는가? 우리의 품은 왜 이토록 왜소해졌을까? 우린 왜 이토록 편협한 존재가 되었을까? 따스함을 잃어버린 종교는 그 존재이유가 없다.
고(故) 박원순 시장이 바랐던 세상은 내가 이해하던 바로는 ‘따스한 세상’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 일에 열중했다. 힘 있는 자들의 특권을 부수고, 힘 없지만 일말의 희망을 품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 그들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일을 위해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갔고, 그 안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희망을 부풀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마지막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허망하게 인생을 마감하였지만 그의 죽음이 그가 살아온 인생 전부를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의 꿈의 여정이 이렇게 끝이 났지만 ‘따스한 세상 만들기’의 꿈은 우리 안에서 여전히 이어져야 한다.
이렇게 각박하고 쓸쓸한 세상에 힘겹고 외롭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한희철 목사님의 맑은 동화를 우리 함께 들여다보자.
높은 벼랑 위 키 작고 볼품없는 소나무 하나.. 자신이 그곳에 왜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우연찮게 벼랑을 오르는 한 젊은이의 목숨을 살려주면서 생의 이유를 찾게 되는 소나무 이야기 <내가 선 이곳은>
민들레 엄마가 이제 곧 새로운 곳으로 떠날 채비하는 민들레 씨앗들에게 친절히 설명해주는 인생 이야기.. 내려앉는 곳 그 어디든 그곳을 사랑하며 뿌리를 내려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이야 말로 참 잘 사는 것임을 알려주는 이야기 <민들레>
폭풍우가 몰아쳐 저마다 살길을 찾아 떠난 텅빈 터전을 홀로 외로이 지키며 다시금 돌아올 새들을 위해 희망의 노래를 쉬지 않았던 한 소리새의 이야기.. 결국 덩그러니 뼈만 남은 채 앙상하게 말라버린 상태로 죽었으나 다시 돌아온 새들의 노래로 부활한 이야기 <소리새>
누렁이가 물어다 준 할아버지 살아생전 애용하셨던 검정고무신.. 할아버지 세상을 뜨시고 난 후 몇 년이 흘러서야 마주한 할아버지의 흔적을 부둥켜안고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이야기 <검정고무신>
따스한 봄날 나무들의 푸릇한 빛깔은 실은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온 몸으로 견뎌낸 흔적임을 일깨워주는 이야기 <거울나무>
어릴 적 숨바꼭질할 때 몸을 숨기는 놀이터로, 결혼 후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새벽기도를 올리기 위해 몸을 숨겼던 기도처로,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 지치고 외로움에 젖어 힘겨워할 때 안아주던 품으로 함께 했던 항아리에 관한 이야기 <항아리>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삶터를 잃어버린 이들의 이야기.. 마을이 수몰지역으로 지정되고 이제 모든 추억이 사라질 마지막 날 그동안 손때 묻은 학교의 교실을 정성스럽게 청소하는 아이들 이야기 <마지막 교실>
외로운 거미와 허수아비가 만나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가다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든 나비를 살려주면서 나비를 통해 듣게 된 거미 자신도 몰랐던 거미줄을 쳐야만 하는 이유(삶의 이유).. 그 어떠한 인생도 무가치하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이야기 <네가 치는 거미줄은>
오랜만에 찾은 할아버지 집에서 갓 쪄낸 옥수수를 먹다가 할아버지께 들은 옥수수 수염 이야기.. 할아버지의 집을 나서다 옥수수 수염을 닮은 할아버지의 하얀 수염을 보며 가족을 사랑하시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옥수수 수염>
사람이 죽어 심판관 앞에 섰을 때, 다른 사람의 눈물로 축적한 부를 누린 부자에게는 괴로움의 방이, 주어진 부를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며 살았던 부자에게는 위로의 방이, 게을러 가난했던 빈자에게는 한숨의 방이, 사랑으로 마음의 밑바닥까지 긁어 나누던 빈자에게는 기쁨의 방이 있음을 알려주어 인생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짧은 이야기 <빈자와 부자>
그밖에 때론 아련하게, 때론 깊은 생각이 잠기게, 때론 아무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는 짧은 동화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희철 목사님의 동화는 순수 창작물이지만 우리네 삶의 희노애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에 이곳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어떤 이는 판타지 소설을, 어떤 이는 기괴한 심리소설을, 어떤 이는 도덕 교과서를, 어떤 이는 시집을, 어떤 이는 수필을, 어떤 이는 동화를... 나의 이야기는 어디에 속할까? 누구든 자신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있다. 난 내 인생이 시집이나 동화가 되었음 참 좋겠다.
성마른 세상이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을 때 따스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삶이 한층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세상이 따뜻했으면 좋겠다.